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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25, 신생활이라는 것
나는 지금도 양말을 신을 때는 꼭 왼쪽부터 신는다. 신발을 신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이상하고 나사가 잘못 끼워지는 느낌이 든다. 현관이나 방문을 출입 할 때도 문지방을 밟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오래된 습관이다. 이유를 가만히 상기해 보면 세칭 동방교 시절의 신생활이라는 것에서부터 유래하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느날 갑자기 지시가 내렸다는 것이다. 여러차례 언급했듯이 이 ‘지시’라는것은 세칭 동방교에서는 ‘절대명령’이다. 이 ‘절대명령’ 즉, 지시에 대한 몇가지 사례가 있지만 별로 좋은 내용들이 아니라 언급을 자제한다. 여기서 ‘지시가 내렸다’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무슨 명령이 내렸다는 뜻이다.
더 자세히 풀이하면 아브넬 할아버지(2대 교주 노영구)가 이래 할아버지(몇년전에 세상을 하직한 1대 교주 노광공)로 부터 무슨 하명을 받았다는 뜻이다. 2대 교주 노영구가 신도들에게 내리는 하명도 이 ‘지시’에 속한다. ‘시달’이란 말도 사용하는데 ‘지시’보다는 강도가 좀 약한, 상부기관에서 하부조직에 내리는 지침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노영구의 기도자세는 좀 특이하다. 세칭 동방교에서 신도들의 기도하는 자세는 성화속에 그려진 어린 사무엘의 기도 자세를 연상하면 된다. 양쪽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을 합장하여 가슴에 모으고 다소곳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기도를 하는 그런 자세다.
그런데 2대 교주 노영구는 좀 특이했다. 그는 무릎을 엉거주춤 세운 자세로 두손을 합장하여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지 않고 머리를 반쯤 하늘로 향하여 눈은 감은듯 만듯, 속눈썹을 달싹달싹하면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입술을 움직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는 모습이다. 위를 쳐다보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듯 하기도 하고 위에서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모습으로 옆에서 보면 꼭 무슨 신들린 모습이다.
그것이 성신이든 잡신이든 신이 들리지 않고서야, 그리고 그것이 이단이든 삼단이든 어찌 한 종교를 이끌어 갈 수 있으랴 싶기도 하다. 그가 보통 3-5분정도의 기도를 마치고 나면 꼭 무슨 지시를 받은듯한 언행을 하곤 했었다.
신생활의 항목들을 기억나는대로 더듬어보면 일종의 미신같은 희한한 것들도 있다. 처음에는 10여개의 간단한 항목들이었는데 차츰 항목과 세목이 추가 되더니 나중에는 항목이 20여가지로 불어났고 그 후에 얼마나 더 불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A4용지의 1/4만한 조그마한 수첩에 번호를 매겨 항목을 나열하고 세로줄을 그어 날짜를 표기하고 그날 실천한 것은 ○표, 실천하지 못한 것은 X표를 기록하여 상급자에게 점검을 받고 X표가 많고 적음에 따라 초달(훼초리)을 맞던 제도이다.
1대 교주 노광공이 세상을 뜬후 그 아들 2대 교주 노영구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선대 교주에 대하여 입에 거품을 물다시피 선전하는 '팔작밥 오작죽'의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하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적인 생활을 한다는 취지라고 주지 되어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천국들어가는 신분증이라고 하는 바람에 그말을 굳게 믿고 있었고 신도들에게도 그렇게 끈질기게 설파하던 때가 있었다.
지시란 동방교내에서 거역할 수 없는 절대 명령인 것이다. ‘지시가 내렸다’고 말하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교주의 지시다. 동방교내에서 아무도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숨까지라도 걸고 복종해야만 하는 절대 명령이 ‘지시’인 것이다.
신생활에는 여러 가지 사항이 있다. 지금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기억나는 것 몇가지는 이런 것이다. 정화수 기도, 성경읽기, 폐병수집, 양말-신발 왼쪽부터 신기, 문지방 밟지않기, 하루7번 기도시간 지키기, 신발방향 앞쪽으로 정리하기 등등이다. 조그만 공책에 실천여부를 ○,X로 표시하여 그 수첩을 항상 몸에 소지하고 다니도록 되어있다. 하늘나라 들어 갈때도 보여주어야 통과할 수 있는 성민(동방교의 신도를 말하는 호칭)의 신분증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별 희한한 신분증도 다 소지하고 다녀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정화수기도란 조그만 차상같은 나즈막한 탁자위에 종바리 같은것을 놓아두고 거기에 매일 자정에 주전자에 받아놓은 물을 한잔 가득히 부어 놓고 그 앞에서 두 손을 펴서 가슴께에 모으고(성화에 그려진 사무엘의 기도자세, 동방교에서의 기도자세는 전부 이렇게 통일되어 있다) 무릎을 꿇어앉은 자세로 기도를 하는데 맨 처음 동쪽을 향해서, 그 다음은 돌아 앉아 서쪽을 향해서, 그 다음 남쪽을 향해서, 마지막은 북쪽을 향해서 기도를 하는것이다.
무슨 기도를 그리도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간절하게 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은 두손을 비벼가면서 열심히 중얼대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길이 없지만 꼭 무당 집 잡신에게 무엇을 비는 형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화수 기도를 마치고 나면 그 종바리 물을 서로 나누어 마시기도 하였다.
지방에서는 믿음이 솟아난(특출하다는 세칭 동방교식 표현) 신도들이 새벽 일찍 산속 깊은곳 까지 일부러 가서 정화수 기도할 물을 옹달 샘에서 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시에서는 자정에 수돗물을 받아 놓았다가 사용하였다. 정화수 기도는 가족 모두가 동방교의 신도인 경우에는 가정집에서도 할 수는 있으나 여건이 허락하는 집이 많지 않았고 세칭 동방교의 성전에서는 반드시 시행하던 제도였다.
성경읽기는 매일 성경의 신약이나 구약을 3장 읽도록 되어 있었는데 사실 동방교는 성경이 경전이 아니다. 그저 참고용일뿐이다. 성경은 단지 필요한 단어나 구절 몇가지를 찾아내어 인용해서 자기 교리에 맞도록 억지로 끼워 맞춰서 도용하는 정도이고 유불선을 망라한 온갖 잡설이 난무하는 난장판 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화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무슨 체계적으로 기록되거나 활자화 된 경전도 아니다. 그냥 대학노트에 노광공의 설교나 잡설들을 사주(四柱)목사인 정재덕 요난단목사와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메모 형태의 필기로 적어놓은 것이다. 주로 요나단 정재덕 목사가 초창기부터 기록하고 있었는데 대학노트로 여러권에 달한다. 이것이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무슨 경전인양 전해지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읽으라고 하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하다. 대기처의 공동생활에서 성경 3장을 차분하게 앉아서 읽을만한 시간을 내기가 만만찮으므로 성경중에서 시편의 제일 짧은 장들을 찾아서 후다닥 읽고 ○를 표시하곤 했다. 그야말로 눈감고 아웅하는 것이었다. 성경을 읽고 상고하여 영의 양식으로 삼고 영감을 얻는것 하고는 애초 부터 거리가 삼천리였다.
폐병수집이라는 것도 있다. 길거리에 다니다가 빈병이 있으면 주워서 동방교의 구석에 설치해두었던 수집통에 하루 한 개이상 갖다 넣어야 ○를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아 팔아서 지성금으로 바치는 것이다. 지독한 헌금강요의 수단이로되 이것을 근검절약정신의 극치라고 입에 거품을 물듯이 입을 모아 할아버지(노광공)를 칭송하고 있었다. 교주의 근검절약이라...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들이다.
대기처 안에 있는 신도들에게 아침에 팔작밥, 저녁에 오작죽을 먹인것을 그들은 근검절약의 대명사로 치켜세우고 있다. 빈병을 주워모아 팔아서 그 돈을 바치게 하는 것도 근검절약의 실천이라고 떠든다. 집안의 금붙이를 훔쳐서라도 바치라고 종용하는 것이 근검절약이던가, 오로지 돈과 재물에 대한 집착의 화신이었을 뿐이다.
양말이나 신발은 꼭 왼쪽부터 신어야만 한단다. 그 이유는 모른다. 아무도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지시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 현관이나 방문을 드나들 때는 절대 문지방을 밟으면 안된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훗날 성경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에 경악과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방종교의 풍습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 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구약 사무엘상 5장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것 때문에 문지방을 밟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고소를 금치 못했다.
하루 7번 기도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오전 7시53분, 10시, 12시, 오후 2시, 3시35분. 5시, 7시 하루에 7번이다. 두시간 마다 한번씩 할아버지(노광공)를 찾고 기도를 올려야 했으니 정신적으로 쉴 틈이 없는 것이다. 거의 매 2시간 마다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으니 어찌 잡다한 생각을 할 수 있으며 세칭 동방교 집단에서 이탈 할 엄두를 낼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일컬어 신생활이라 해서 매일 그 기록을 점검받아야 하는 것이다. 무슬림의 기도시간도 하루 5번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보다 2번이나 더 많다.
특이한 것은 아침 7시53분이다. 이시간은 54세에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타계한 노광공의 운명시간이다. 사직 당국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고 수사기관의 지명수배로 일반 병원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노광공은 당뇨병 치료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두고 ‘이래 조부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으니 고통속에 운명한 ‘이래 할아버지’(교주 노광공)의 은혜를 상기하고 감사의 기도와 간구를 드리며 이 시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칭 동방교의 교주 노광공의 사망 시간은 7시53분이 아니다. 이승을 하직하는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동방교의 간부 신도들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평소에도 입혼(세상을 떠나기전에 흔히 있는 혼수상태를 말하는 듯)이 가끔 있었고 그때마다 또 깨어났으므로 또 입혼(혼수상태)인줄 알고 기다렸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운명시간을 정확히 모른다는 이야기다.
사망을 확인하고 바로 근처에 거주하고 있던 둘째 아들 노영구를 불렀는데 그때 흰옷입은 세사람이 나타나 노영구와 문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밖에서는 영등포에 사는 노영구의 삼촌 노관평(노광공의 친동생)이 재산문제 때문에 세칭 동방교의 간부들과 서로 다투다가 문을 ‘쾅’ 소리내어 닫고 나가는 바람에 성령(?)이 놀랬는지 그때 성령이 떠났었다고 한다.
수 년후에 그의 처와 미국으로 도피하여 한국의 세칭 동방교를 원격조종하고 있던 2대 교주 노영구가 그의 신병 치료차 1990년대의 초반 어느 시기 인도의 심령술사들을 찾아 갔을때 거기서 그 성령(?)을 다시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참 소설같은 이야기...
신발을 벗어놓을때 정리해 놓는 방향은 반드시 나갈 때 신기 좋도록 앞쪽으로 정리해 놓아야 한다는 항목도 있다. 나포리(세칭 동방교에서 경찰관을 지칭하는 은어-隱語)의 불시 방문이 있을때 빨리 도망가기 위한 것이었나 의심이 들 만한 항목이기도 하다. 그만큼 나포리를 경계하고 조심하고 불안해 했었다. 전도를 해도 꼭 가족이나 친척중에 나포리(경찰관)가 있는가 없는가 확인하고 만일 나포리가 있으면 전도를 중단시켰다.
나는 집에서 신발을 벗어놓을때 신생활의 이 항목 때문에 집에서 부모님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내가 꼭 신발을 바깥쪽을 향하도록 정리해 놓으면 부모님은 집안의 복이 나간다고 꾸중을 하면서 도로 안쪽으로 신발을 돌려놓았던 것이다. 나는 신생활 노트에 ○를 표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발을 다시 바깥 방향으로 향하도록 돌려 놓아야만 했다.
여러번 꾸중을 들어도 그 버릇을 고치지 않으니 부모님은 상당한 역정을 내시면서 나를 야단치곤 했는데 그래도 내가 고치지 않으니 이 무슨 연유일까, 부모님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했을 터이다. 어른들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는다고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때는 집안의 어른들 말씀이 중요하던가, 동방교의 신생활 실천이 중요하던가, 아... 되돌릴 수 없는 어리석은 시절들. 참 철없던 시절의 이바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