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 맘대로 쓰는 역사, 히틀러의 유태인 600만 학살설의 진실
정의가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의를 승자가 쓰기 때문이다.
몇 명 죽이면 살인마지만 수백만, 수천만명 죽었어도 승자는 영웅이다.
아니라고? 히틀러는 수백만 명 죽였는데 왜 영웅이 안되었냐고?
왜냐하면 그는 패자니까. 그리 죽이지 않았으니까.
이 사건은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명을 죽였다' 라는 설이 너무도 유명하게 사실처럼 알려저 있어서 다들 진짜인 줄 아는데, 대부분 소설이다.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의 추모석에는 이렇게 적허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시사지 National Hebdo 는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125만(Raul Hilberg 교수)-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Source: National Journal, 2003)-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과 관럽된 수만 건의 문서들을 노획했으나 이 중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해 일부 유태인들은 관련 문서들을 소각했을 거라고 말하지만, 유태인 인종말살 계획을 입증할 문건이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학살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 시설이었음을 보여주며,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다.[도스토에프스키)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휠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1942년 12월 28일 수용소 관리행정국이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시설들에 보낸 공문은 '전염병 사망을 줄이기 위해 수감자의 건강, 영양상태, 작업환경 개선에 총력을 기울일 것'과 '구체적 방안을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A red series,)
*33년간 듀퐁社에서 화공학자로 근무했년 William B. Lindsey 박사는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현지 조사한 후 1985년 캐나다의 법정에서 독가스로 그 만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얘기" 라고 증언했다.(The Globe and Mail - Toronto, February 12, 1985)
*캐나다 캘거리에서 대형화장터를 운영하는 Ivan Lagace는 1988년 4월 독일계 홀로코스트 연구가 Ernst Zundel 소송 심리에서 1일당 1만~ 2만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은 "한 마디
로 비상식"이라고 증언했다. (Canadian Jewish News - Toronto, April 14, 1988)
● 국제적십자협회(International Red Cross) 보고서
*1984년 소련이 최초로 공개한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토대로작성된 국제적십자협회의 12월 31일자 감사보고서에는 독일이 전쟁기간(1980-1945) 동안 운영했던 모든 수용소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
수(모든 국적 포함)가 282,077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는 53,633 명이다.
●2차대전 前後 세계 유태인 인구
World Almanac, 1929 - 15,630,000
World Almanac, 1936 - 15, 753.633
World Almanac, 1941 - 15,748,091
World Almanac, 1947 - 15,690,000
INS(미국 이민귀화국) 1950 - 15,713,638
*2000년, 유태계 미국인 노먼 핑클슈타인( 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대학살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홀로코스트 연구는 뺀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안네프랑크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Anne Frank) 부녀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안네 프랑크는 일기를 쓰지 않았고, 다락방에 숨지도 않았고, 전염병으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부친 오토 프랑크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유태인대학살' 사건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에게 "대학살의 증거가 있느냐?" 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자기들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의 공통점은 소수의 증언만 가지고 거대한 사건을 조작 한다는 사실이다. 증언이 꼭 진실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고의적인 왜곡조작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련이 죽여 놓고 히틀러에게 뒤집어 씌운 후, 수십년 뒤에야 진실이 드러난 사건도 있는데, 소련이 폴란드인 4만 5천 명을 학살 해놓고 히틀러에게 뒤집어 씌웠던 '카틴숲 학살사건'이다.
일제에 의한 한국인 학살중 진짜 진실도 있는데, 29명 죽인 최대의 학살이었던 제암리 학살이지만, 이 사건 하나에서만 그 1500배를 죽였다.
1차대전 때 일부 유태인이 적의 편에 섰다는 이유, 고리대금업 횡포 등으로 인해 독일에 반유태인 감정이 많았고, 히틀러가 반 유태인 선동을 한것도 맞지만, 유태인에 대한 독일 정부의 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이었을 뿐 인종 말
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악당일수밖에 없다.
그는 ' 전쟁에 진 놈'이기 때문이다.
패자에게 다 뒤집어 씌우는, 승자가 쓰는 역사를 모르면 역사를 이해할 수 없고, 이 문제는 시대 상황을 알아야 이해 할 수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태인들과 기존 주민들과의 종교적 대립 등 마찰이 심할 때였고, 세계 곳곳의 유태인들은 경제력이 막강했는데, 그곳에 이스라엘 공화국을 세우려는 유태 지도자들이 국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자가 필요했다.
즉 "나라가 없어서 우리가 엄청나게 죽임 당했어 그러니 우리의 건국을 지지해 줘"라고 하고 싶었고, 연합국 측에서도 패자 악당화가 정치적으로 유리하므로 피해를 과하게 부풀렸던 것이다.
■ 진짜 학살과 진짜 살인마들
전세계의 공산 정권들은 이념을 구실로 대학살을 자행해 왔다.
1997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공산주의 흑서'에서 밝히는.
공산주의 좌파의 학살 규모는,
구소련의 2천만명,
마오쩌둥 치하에서 6500만명,
베트남의 2백만명,
북한에서 1백만명(3백만명의 아사자 및 6.25 희생자 300만명 제외),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하에 2백만명,
동구 공산정권 하에서 1백만 명,
아프리카에서 150만명 등
총 1억~1억 2천만 명이며, 진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와 서민의 편이라는 이름으로 학살을 자행해 왔다.
공산주의는 '진보'를 자칭하지만 실제는 무자비한 폭력과 살육으로 나타났고, 공산주의 정권들은 하나같이 계급대학살(class genocide)을 자행했다. 혁명의 이름으로 평등의 이름으로 무고한 시민, 지식인, 종교인, 군인, 경찰, 관료계급, 문화예술인, 언론인 등 거의 모든 사회 계층을 심지어 공산당원과 친공분자 노
동자들까지 학살했던 것이다.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교육과 반복적 선전선동의 결과 인민들은 자유의지와 정치적인 행위 능력을 상실하였고, 공산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신격화됨으로써 인민들은 이들의 범죄에 대해 찬양하도록 강제되었다.
공산주의 진보좌파의 잔혹의 역사는 자유가 없는 곳에 어떠한 비극이 일어날지를 실증적으로 가르쳐 준다.
자유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 원칙을 권력장악 수단으로 이용할 뿐, 공산좌파가 전권을 장악하는 순간부터 자유는 말살되고 참혹한 비극이 시작된다.
그리고 공산화 되었을 시 맨 먼저 처형되는 세력은 같은 이념 그룹의 좌파라는사실을 한국의 좌파는 알아야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조작 이념사기극(2) / 제2장 피해자 행세하는 침략자, 이제는 한국이 사죄할 차례다. 208~21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