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觀想)
<종교> 신(神)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
영신 (靈神 )
<가톨릭>=영혼(靈魂).
영성 (靈性)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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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회 안에 확산돼가는 관상 기도의 문제점
글쓴이: 이재룡 http://blog.daum.net/young5480/7844262
요즘 교회 안에 영적 문제의 혼란이 가중되어 가고 기독교 영성에 회의를 느끼면서 천주교의 영성에 눈을 돌리는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의 영적 바른 길을 인도해야 할 교계의 영적 지도자들 조차도 가톨릭 영성을 개신교회 안에 보급하고자 열을 올리는 것을 볼 때 종교개혁의 전통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얼마전 어느 신학 잡지를 보았더니 거기에 교계에서 높이 평가하는 어느 목사님이 관상 기도를 보급하는 세미나를 연다는 광고를 보고 또 다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관상 기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지면 관계상 많은 말씀은 드리지 못합니다.
단지 몇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먼저 이 기도법의 출발이 지극히 인본주의적이고 심리적이며, 뉴에이지적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의 영신 수련으로 손을 꼽는 인물을 든다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예수회(반 개신교 단체로서 일명 안티 프로테스탄트-antiprotestant-라고 하는데 이들이 교회사 안에서 개신교에 끼친 해악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이다)'를 창시한 인물로서 영성 수련에 대해서는 천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개발해낸 가톨릭 영성 훈련 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극히 인본주의적이고 신비적이며, 심리적인 최면 요법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특히 그의 영성 수련의 출발이 중생에서 출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첫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그의 영신 수련 방법, 특히 '관상 기도'가 불교의 참선과 그 모습이 너무나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그 다음의 이유가 됩니다.
예를 들어 토마스 키딩이라는 관상 기도의 권위자의 표현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관상 기도는 어떤 바람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생각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벗어나서 텅 빈 채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그 너머에 있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는 불교의 명상법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명상법은 자신을 비우는 것에 집중하는데 그들의 교리를 보면 "분별, 망상, 사유 작용이 그치면 이 작용을 방해하던 것들이 곧 없어져, 마음은 고요로 가득차고, 무(없을 무 無)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표현만 다르지 불교의 명상법과 다름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가지 더 예를 든다면 관상 기도법 가운데 "예수의 기도"가 있는데, 이 기도법은 호흡을 맞춰서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기도는 숨을 들여 마시면서 "그리스도시여"라고 생각을 하고, 숨을 내쉬면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끊임없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시점에 가서 길거리에 있는 걸인들이 주님으로 보이고 그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 긍휼한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명상법은 불교의 수직 명상법(아나파나사티 명상법)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직 명상법을 원어로 '아나파나사티'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나'는 들숨을, '아파나'는 날숨을, 그리고 '사티'는 집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명상자는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서 '분심(산만한 마음)'을 제어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 의식으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관찰하여 거짓과 집착에서 벗어나 생사고뇌가 없는 영원한 '본래의 참 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교와 일치하는 기도법입니까?
그리고 이런 기도법은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 최면술에 해당하는 기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최면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호흡법인데, 이 호흡법을 통해서 자기 최면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관상 기도를 통해서 걸인들이 예수님으로 보였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 역사라기보다는 자기 최면술에 의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디 이런 기도법이나 수련법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인간이 고안해낸 인본주의적 기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요즘 교계에서 점점 번지는 관상 기도는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으며, 성경적이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는 정면으로 대립을 이루는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수행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바른 기도의 시작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누구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두서없이 글을 썼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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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출처: 가톨릭 교리 오픈사전
염경 [念經]
[명사]<가톨릭> 미사 때에, 기도문을 읽거나 외는 행위. 또는 그 기도문.
관상기도 [觀想祈禱]
<가톨릭> 묵상 기도가 발전한 상태의 기도. 본질의 직관에서 오는 직관 기도이다.
관상수도원 [觀想修道院]
<가톨릭>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에게 자신을 바치는 수도회. ≒관상 수도회.
기도의 형태
1. 소리기도 → 염경 기도 → 입을 사용
2. 묵상기도 → 생각 → 머리
3. 마음의 기도 → 직관할 수 있는 마음(감성) → 마음
4. 관상 기도 → 입, 생각, 마음을 극복한 단계 → 눈(영적인 눈)
소리 기도는 말 즉 입과 몸으로 하는 기도로 염경 기도라고도 부른다. 이 염경 기도는 정신을 집중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만나는 첫 번째 기도로 일종의 준비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는 소리 기도가 육적인 그리스도와 접촉하는 최초의 기도이므로 중요하다고 하였다.
묵상 기도는 머리로 많은 생각을 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는 기도로 사고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기도는 묵상 기도의 다음 단계로 머리로 깨달은 다음에 마음이라는 감성을 일구어 관상으로 가기 위한 기도이다. 지적으로만 생각하면 마음이라는 상대적 가치를 무시할 수 있으므로 지성으로 깨달은 다음에 감성인 마음을 일구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는 말 그대로 하느님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소리, 묵상, 마음 기도가 사람이 자신의 지성과 감성 모두를 하느님께 집중되도록 노력하는 단계라면 관상 기도는 하느님께서 오셔서 이를 바라보며 황홀경, 무아지경에 빠지는 단계이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