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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공의롭고 겸손하신 구원자
장코뱅 추천 3 조회 355 25.01.04 08:31 댓글 3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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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5.01.04 09:08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위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한편, 더 깊고 다양한 이해를 위하여 댓글과 주석 등을 첨부합니다.

  • 25.01.04 11:18

    네, 댓글들도 잘 참고하겠습니다.

  • 작성자 25.01.04 09:13

    <호크마 주석>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것 곧 나귀새끼니라 - 여기 와서는 선지자가 신약 시대를 성립시키는 메시야의 내림을 예언한다.
    여기 이른바 "시온의 딸"은 딸 같은 시온 곧, 약소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말도 역시 같은 것이다. "네 왕"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공의로우며". 이것은 메시야께서 그 백성을 원수들의 무리한 침략 하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필경 공의를 발동해서 구원하여 주심을 의미 한다. 이 공의는 실제에 있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우는 데까지 낮추사 그 백성의 죄 값을 담당하시므로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라는 말씀이 따른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겸손한데 떨어지므로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겸손의 왕이시다. "나귀 새끼" 를 타신 것은 그의 겸비의 극치를 의미하는 참된 왕의 덕을 상징한다. 마 12:17-21 참조.

  • 25.01.04 11:22

    공감이 잘 되는 설명입니다.

  • 25.01.04 15:54

    진짜 좋은 설명입니다.

  • 작성자 25.01.04 09:13

    <호크마 주석>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 이 말씀은, 메시야께서 초림하신 때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그것이 완성되기는 대종말 때 곧, 그리스도 재림 시에 이르러서야 될 일이다. 사 2:4, 9:4-6; 시 115:9 참조.
    그 뿐 아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왕국은 폭력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고 다만 고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갈 것을 보여주며, 또한 그 나라는 어떤 한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이고, 또 무궁할 것을 보여준다.

  • 25.01.04 11:29

    호크마 주석은 개혁주의에 가까으며 일반적인 해석으로 무난한 것 같습니다.

  • 25.01.04 16:01

    @노베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01.04 09:15

    스가랴(Zecharah)

    [1] 유다왕 요아스를 보필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그는 선지자로서 여 호와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백성들의 죄를 경책할 때 요아스 왕은 그의 부친 여호야다 의 은공을 생각지 않고 스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다(대하24:20-21).

    [2]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아들로서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6개월 동 안 통치하다가 살룸에게 맞아 죽었다(왕하 15:8-10).

    [3] 12소선지 중의 일 인으로 베뢰갸의 아들이다. 다리오 왕 2년에 여호와의 계시를 받아 얘언하는 중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실 것을 예언 하였다(슥 9:9).

    [4]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다가 돌아와서 에스라가 모세 율 법을 낭독할 때 강단 저편에 섰던 선지자중의 한 사람(느 8:1).

    [5] 바벨론에서 유다에 돌아온 자중 이방 여자를 취한 사람(스10:26).

    [6] 웃시아 왕을 보필하던 자(대하26:5).

    [7] 이 외에 2인이 있다(대상26:2,11).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 25.01.04 11:35

    뜻이 좋아서 그런가 여러 명이 선택해서 사용한 이름 같군요.

  • 작성자 25.01.04 09:19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스가랴서”

    소 선지서의 열한 번째 책.

    I . 저자와 연대
    본서는 베레갸의 아들이요 잇도의 손자인 선지자 스가랴의 이상과 예언을 보존하고 있다. 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으로 추측되는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기 후의 학개(B.C. 520-518)와 동시대인이었다. 스가랴의 사역은 주로 최근에,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한 백성들의 상태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필요성에 그 초점이 모아져 있다.

    II. 문학적 측면
    문체와 내용에 근거해볼 때, 본서는 분명히 두 부분, 곧 1-8장과 9-14장으로 구별된다. 첫 번째 부분은 스가랴가 밤에 본 여덟 개의 이상(1: 8-6: 8)과 예루살렘과 유다의 회복에 관한 예언들(6 : 9-8 : 23)을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여호와의 날과 현세의 종말에 관한 경고인데, 그 성격이 매우 묵시 문학적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평주의 학자들은 두번째 부분은 후대에. 곧 B.C .5-B.C. 4세기, 심지어는 그 이후인 B.C.3세기에 첨부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예루살렘 회복 후의 공동체의 지도력에 불만족했던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 작성자 25.01.04 09:20

    만약 그렇게 가정할 수 있다면, 이 부분은 또한 보수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숙한 스가랴의 시기적절한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아가 두 경고(참조. 9:1, 12 : 1의 표제, 히. '맛사' )는 종종 말라기서와 연관지워지고 있다(참조. 말 1:1).

    III. 내용
    회개를 촉구한 서두의 예언은 그 연대가 B.C.520년 마르헤스완(10-11) 월로 거슬러 올라간다(슥 1 : 1-6).
    여덟개의 이상들 가운데 첫 번째 이상(B.C.519년 스밧[1-2]월)은 말을 타고 땅을 순찰하는 여호와의 사자들, 곧 회복의 약속을 묘사하고 있다(1:8-17).
    두 번째 이상(1:18-21)에 의하면, 네 뿔(유다와 이스라엘을 흩어지게 하는 강대국들)은 '네 공장', 곧 여호와의 사자들에 의해 '두렵게' 될 것이다. 슥2: 1-5은 여호와의 영광에 의해 보호될 예루살렘의 회복(척량)에 관한 이상이다. 따라서 2 : 6-13에서 선지자는 망명자들에게 바벨론을 떠나 시온으로 피신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네 번째 이상(3장)에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회복된 공동체의 종교적•국가적 상황에 대해 책임을 맡게 된다.

  • 작성자 25.01.04 09:20

    다섯 번째 이상(4장)에서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14절 '기름발리운 자들')이 새롭게 결합된 공동체 (순금 등대)에 대해 책임을 분담하고 있다. 5 :1-4에 나오는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도적질하거나 거짓으로 맹세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나타내고 있다. 5 :5-11은 그들의 죄( '에바 가운데 있는 한 여인'으로 의인화됨)를 바벨론으로 보냄으로써 완결될 유다의 정결케됨을 선포하고 있다. 마지막 이상(6:1-8)은 첫 번째 이상을 기억나게 한다. 네 병거와 그들의 말들은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준비하면서 땅을 순찰하고 있다. 슥 6 : 9-8 : 23은 메시야 시대에 관한 일련의 예언들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예언(6 : 9-15)은 메시야적 왕의 대관을 예고하고 있다. B.C. 518년 기슬래(11-12)월에 임한 7장은 종래의 종교 의식에 대한 관심(참조. 8 : 19)보다는 회복된 공동체를 위해 더 필요한 윤리적 이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7:9-10).

  • 25.01.04 11:41

    선지자 스가랴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은 알아야겠다 싶었는데 잘 됐네요/

  • 작성자 25.01.04 09:24

    나귀(Ass, donkey)

    말과의 포유류 동물로 한글 표준이름은 '당나귀'이다. 당나귀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키 140~15cm이며 몸무게 350~400kg정도이다. 당나귀는 가축화된 것과 야생 당나귀가 있는데 야생 당나귀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분포되어 있다.

    가축화된 당나귀는 물자 운반을 위해서 BC 4000년경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지방에서도 이것을 가축화했고, 아시아 야생당나귀는 소아시아를 경유하여 그리스, 이집트로 옮겨 지중해 연안까지 분포되었다. 영어의 나귀(Ass)는 작은 것이라는 뜻이며 라틴어 아시누스(asinus)에서 켈트어(Celtic)를 통해 파생된 듯 하며 매우 오래된 말이다.

    현재는 성경의 비유 동물학 용어로 남아있을 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당나귀(donkey)로 완전히 가축화된 어형으로 변형된 것이다. 창세기32:15의 영어 Colt는 말에 속하는 어린 짐승을 말한 것인데 약대와 그 새끼라고 한 것 외에는 모두 어린 나귀에 대해서만 사용했다. 히브리인들은 이 나귀를 연자맷돌(grindstone)을 사용하여

  • 작성자 25.01.04 09:24

    곡식을 찧는 것(마24:41)에도 사용했다. 이사야21:7의 나귀 떼를 KJV는 나귀들의 병거(chariot of asses)로, ASV는 나귀떼 부대로, RSV는 나귀를 탄 자들로 번역했다. 왕하6:25의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을 때 나귀머리 하나가 은 80세겔에 팔린 것은 백성의 절망을 보여준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는 히브리인들의 재산으로 138번 발견되는 데 이중에 약 12번은 문자 적인 것과 다른 것이다. 성경은 나귀의 취급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교훈하고 있다(출21:33). 또한 나귀의 안전에 대해서도 네 가지로 지시하고 있다(출23:4, 5, 12, 신22:4).

    나귀들은 주로 가난한 자들과 가까운 동물로 묘사되었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서도 변함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어린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때 예수님은 신적 예지로서 나귀가 메여있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끌어오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마21:2, 5, 7, 막11:2, 4, 5, 7, 눅19:30, 33, 35, 요12:14, 15).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나귀를 가져오고 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다.

  • 작성자 25.01.04 09:25

    이사야는 사1:3에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한탄했다. 욥기에서는 나귀의 울음소리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욥30:7에 욥은 자기를 조롱하는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을 나귀에 빗대어 말하기를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라고 했다. 복음서 외에 신약에서는 단 한차례 나오는데 베드로가 구약을 발람 선지자의 사건을 말할 때 사용한 것이다.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벧후2:16)는 민수기22:21-33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짐승의 입을 여시게 했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민22:28)라고 했다.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 25.01.04 11:52

    당나귀가 나귀이군요.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나타내고 하나님이 말하게 시킨 내용에서 은근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동물 같습니다.

  • 25.01.04 17:33

    @노베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01.04 09:27

    “시온” <-- 시온의 딸

    나사렛 동쪽 다볼산 남동쪽 약 25km 지점, 또는 아윤 에쉬 샤인(Ayun esh-Shain), 혹은 시린(Sirin)으로 추정한다. 예루살렘 남서쪽 해발 765m 의 언덕을 가리킨다. 시온은 처음에 기드론-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은 절벽으로 된 남쪽 봉우리 였다. 후에는 예루살렘 동쪽 능선 전부를 시온이라 부르다 그 후에는 예루살렘 전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 본래 예루살렘의 기드론과 두로뵈온 두 골짜기 사이에 솟은 절벽으로 된 남쪽 봉우리이다. 그 후에는 동쪽 등성이를 시온이라 불렀고 예루살렘을 찬칭하여 시온 성이라 불렀다(시 126:1, 사 1:26, 10:24).(2) 옛날 다윗이 이곳을 쳐서 수도로 삼고 정치적 중심지를 만들었다(삼하5: 6-9, 왕상 8:1, 대상11:5), 대하 5:2).(3) 그리고 법궤를 이곳으로 옮겨 종교적 중심지를 삼았다(삼하6:12-18).(4) 다윗은 산등성이에 있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사서 제단 을 쌓았고 후일에 솔로몬이 그곳에 성전을 세웠다(삼하 24:18, 왕상8:1).(5) 시온은 거룩한 산 여호와의 산으로 불렀고

  • 작성자 25.01.04 09:28

    시적인 표현으로 흔히 사용하였다(시2:6, 9:11, 24:3, 132:13, 48:2, 69:35, 76:2, 87:2, 133:3, 사2:3, 3:16, 4:3, 52:1, 60:14).(6) 시온의 딸이란 말은 예루살렘 주민의 시적인 표현이다(시9:14, 사1:8, 37:32, 아3:11, 슥2:10).(7) 신약 성서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의 상징작인 용어로도 사용되었다(히12:22, 계14:1).

    시온산은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잘 보이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히브리어 'Zion'의 어원에 관하여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유사 파생어로 '바위'(rock), '산성' (stronghold, Zaion), 혹은 '건조한 곳'(dry place)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처음 사용되는 곳은 예루살렘의 가나안 원주민이었던 여브스족이 머물던 시온산성을 다윗이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라 (City of David, 삼하 5:7, 왕상 8:1) 일컬어졌다. 지형적인 의미에서 '시온'과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의 산이 각각 구별되기도 하였다 (미 3:12).

  • 작성자 25.01.04 09:28

    그러나 시온은 넓은 의미에서 예루살렘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였으며 (사 2:3, 33:14, 요엘 3:5), '시온의 딸' (사 1:8, 30:16, 아 1:5),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 (사 10:24, 51:11), '유대백성' (사 51:16, 59:20), '성전산','시온에 거하는 하나님' (요 4:17, 시 20:3) 등 많은 파생어를 낳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온산'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이룩된 대전환점은 다윗왕 때로써 왕권의 형성과 성전의 건축으로 인한 종교제도의 확립을 통해서 이룩한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이때 계약의 내용으로 허락한 것이 땅과 집이다. 이 계약이 행해진 곳이 곧 예루살렘, 시온성이었다. 다윗의 무덤과 역대 왕들의 무덤이 바로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왕상 2:10, 느 3:16, 행 2:29)

    제1차 성전이 멸망한 이후 바벨론 포로기 때에 'Zion' 은 넓은 의미로 그들이 잃어 버린 조국의 땅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그 거룩한 땅 (The Holy Land) 에로의 귀향을 의미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은

  • 작성자 25.01.04 09:29

    바로 이곳에 묻혀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왕상 2:10, 느 3:16, 행 2:29)

    제1차 성전이 멸망한 이후 바벨론 포로기 때에 'Zion' 은 넓은 의미로 그들이 잃어 버린 조국의 땅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그 거룩한 땅 (The Holy Land) 에로의 귀향을 의미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은 바로 '시온'이라는 말이 된 것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 25.01.04 12:00

    너무나 흔하게 들어서 의외로 그냥 넘어간 시온의 의미를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25.01.04 12:32

    @노베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01.04 09:31

    겸손(謙遜, humility)

    자랑, 교만, 거만, 오만, 자고(自高)의 반대개념을 말한다. 겸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사람이 홀로 있을 때의 자기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반드시 외부 사람들을 향한 행동에서 나타나는 그 사람의 태도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겸손을 인내나 온유와 구별하기는 어렵다. 성경에 있어서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각하여 자긍하는 마음을 버리고 낮은 데 처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대하 33:12, 34:27). 자신을 낮추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비결이다(대상 7:14). 헬라인에게 있어 겸손은 나약하고 비굴한 것이었으나, 예수께서는 겸손을 인격의 초석으로 삼으셨다(마 5:3, 18:4). 예수께서는 그의 겸손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셨다(마 11:28-30). 바울은 예수의 겸손을 강조했으며(빌 2:1-11), 피차 겸손하라고 권고했다(빌 2:3, 4). 베드로는 형제들과 하나님에 대하여 겸손할 것을 권면하였다(벧전 5:5, 6).

    예수께서 칭찬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 또는 '애통하는 자'(마 5:3, 4)란, 겸손한 마음의 사람을 말함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어린아이를 칭찬하셨다.

  • 작성자 25.01.04 09:31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서 겸손을 가르치셨다(요 13:4-).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 25.01.04 12:03

    포스팅 본문에도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상호 연동되는 것 같습니다.

  • 25.01.04 12:04

    포스팅 본문의 내용이 나름 간결하고 명료한 것 같습니다. 내용에 매우 공감합니다.

  • 25.01.04 12:19

    예수께서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자들을 섬기고 고난당하는 인간을 체휼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도 연결이 되고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고, 비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고 고귀한 가치일 것입니다.
    세상의 군왕들과 고관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까지 동일하게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하고 겸손함으로 섬기되 권력을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동서고금의 가르침이기도 하죠.
    지금 우리나라는 이런 점에서 염려스럽습니다.
    교회에서만이라도 목회자와 리더들, 그리고 교인들 상호간에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섬기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 25.01.04 12:36

    풍성한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교회에서만이라도'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에서조차도'가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 작성자 25.01.04 12:5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분이기에 세상 윤리가 말하는 겸손과 외관상은 비슷하지만 구별되는 신앙으로서, 성화로서의 겸손하다는 측면도 유념하면 좋겠습니다. 겸손의 시작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 구별점을 먼저 포인트로 포착하면 좋겠습니다.

  • 25.01.04 16:05

    공감합니다.

  • 25.01.04 12:31

    예수께서 인간을 먼저 구원하신 후에 재림 때에는 공의를 실현하심과 아울러 모든 불의한 것들과 불순종과 불신앙을 심판하실 거라는, 구원과 심판,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의 양면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셔서 경각심을 갖게 되네요.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참 성도가 되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25.01.04 12:43

    하나님이 형상과 원의를 잃어버린 사람들 중에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구별되고 더욱 겸손해지는 특성이 있고 의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25.01.04 12:53

    @노베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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