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4.3의 ‘불씨’를 제공한 미군정
해방 직후부터 남한정부 수립까지 3년은 미군정이 존재했던 시기다. 비록 짧은 기간(1945. 9. 8~1948. 8. 15)이었지만 이때는 한국사회구조가 재편되고, 새로운 국가권력이 형성되었으며, 분단국가가 형성된 중대한 시점이었다. 1945년 9월 미국은 38선 이남을 군사력으로 점령하고 직접 통치했다. 군정의 영향력은 구체적이며 절대적이었다.
미군정은 자국의 정책노선에 따라 식민지 경찰 및 미군의 물리력을 기반으로 일제 식민지 국가기구를 재구축했다. 제도화된 행정조직과 물리적 폭력을 독점했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 38선 이남에 존재한 실제적인 통치기구였다.
그들은 식민지 권력의 계승자로서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남한 내부의 진보세력을 견제하면서 소련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는 점령정책을 폈다. 식민지 통치구조로서의 국가기구는 그대로 유지하고 이를 지배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들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거대하고 복잡한 관료기구를 동원했다. 또 군정 통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억압폭력기구인 군과 경찰, 사법부를 재조직했다. 군사조직으로 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했고, 식민지 총독부 경찰체제를 재편하여 친미 군정경찰의 육성에 활용했다. 그들은 또한 친일관료 집단과 우익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군정 수행을 위한 노리개로 끌어들였다.
제주도 군정은 1945년 11월 9일 제59군정중대가 섬에 상륙하면서 실시됐다. 이듬해 8월 1일 미군정은 군정청 법령 제94호로 ‘제주도제’를 실시했다. 행정구역상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된 것이다. 이 시기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휴회로 들어간 뒤 미군정이 좌파세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던 시점이었다. 미군정이 승격시킨 제주도제는 단순히 행정기구의 격상만을 뜻하지 않았다. 행정기구의 확대 말고도 제주감찰청 신설과 경찰기구의 확대나 조선국방경비대 제9연대 창설 등 군경 조직의 강화로 나타났다.
군정이 실시된 지 2년 5개월 뒤 제주4.3이 발발했다. 미군정은 4.3의 불씨를 제공했고,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4.3의 도화선이 됐던 1947년 3.1절 발포사건은 군정경찰이 저지른 범죄였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제주민중이 들고 일어난 3.10 총파업을 강경진압한 것도 군정경찰이었다. 그들은 관공서와 민간기업 95%가 참여한 3.10 총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파업 주모자에 대한 강도 높은 검거작전으로 검속 한달 만에 무려 500여 명이 체포됐다.
이때부터 미군정은 제주도내 좌파분자들을 척결하고 민족·민중운동의 싹을 제거한다는 목표로 우익진영을 강화했다. 진보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해 그들은 제주도를 ‘사상이 불순한 섬’으로 몰아가며 탄압의 수위를 높였다. 1948년, 해가 바뀌면서 미군정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군정경찰의 검거선풍 결과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이 과정에서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고, 1948년 3월에는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일선 경찰지서에서 발생했다.
1947년 9월부터 우파청년단체의 조직이 있따라 결성됐다. 이 시기에 4.3 대학살의 선봉에 섰던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 등 반공청년단체가 발족됐다. 미군정은 이들을 진보세력과 민중 탄압의 앞잡이로 삼았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 직후 제주도에 상주한 미군 CIC(방첩대)의 개입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사건분석 보고 임무만 띈 기관이 아니었다. 정세분석을 하면서 상황에 따라 제주군정에 개입하면서 제주사회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군정과 민족반역집단의 억압통치에 저항한 제주민중들은 투항 대신 투쟁의 횃불을 들었다. 그게 제주4.3이다. 미군정이 책임을 방기하고, 권한을 남용하고, 그릇된 통치를 되풀이 한 결과 일어난 민중항쟁이었다.
‘4.28 평화협상’ 파기, ‘오라리 방화사건’ 조작
1948년 4.3 무장봉기가 개시된 이후에도 미군정의 개입은 여러 곳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미군정은 봉기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보고 경찰력을 강화했다. 본토와의 해상교통을 일체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다. 그러나 경찰력만으로 진압작전에 한계를 느낀 미군정 수뇌부는 4월 17일 제주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을 통해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진압작전에 참여하도록 명령했다. 이어 4월 20일부로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를 제주에 파견하도록 하고 부산 제3여단의 미 고문관 드루스(Clarence Dog De Reus) 대위에게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유혈사태를 초기에 막을 수 있었던 김익렬-김달삼의 ‘4.28 평화협상’ 결과를 파기한 것도 미군정이었다. 평화협상은 제주4.3에서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그들은 4.28 평화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벌어진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을 무장대 쪽이 저지른 것처럼 조작하고 편집했다. 미군촬영반이 만든 기록영상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은 곧바로 강경진압의 구실이 됐다.
평화협상 당사자인 김익렬 연대장도 방화사건 소식을 듣고 직접 현장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경찰의 조종 아래 서청·대청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자행한 방화임을 알고 미군정을 찾아가 그 진위를 보고했으나 묵살됐다. 미군 수뇌부에서는 이미 무력진압의 방침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5월 3일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 등 미군 수뇌부는 ‘무장대를 총공격해 제주사건을 단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 명령했다. 무장대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귀순공작’은 파기됐고 대신 무력을 동원하는 강경진압작전이 채택된 것이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 선거가 무산되자 5월 20일경 미 제6사단 예하 광주 주둔 제20연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현지의 모든 진압작전을 지휘하도록 했다. 미군정이 근본적인 원인 해결은 외면한 채 강경진압 일변도로 치달았음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 본관의 계획대로만 간다면 약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다”라는 브라운 대령의 발언에 함축되어 있다. 그는 또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현대일보, 1948년 6월 3일)고 밝혔다.
1948년 5월 6일, 미군정은 제9 연대장을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전격 교체했다. 항쟁 발발 초기부터 미군정 당국이 김익렬 연대장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며 국제적으로 범죄시되어 있는 초토화작전을 촉구했으나 이를 거부한데 따른 조치였다.
그후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의 진두지휘 아래 “조선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또한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무모한 강공작전을 수행해 온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진급시켰다.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이 그의 작전을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해 제주에 온 지 채 한 달이 되기 전에 대령으로 특진시킨 것이다. 그러나 박진경 연대장은 6월 18일 그의 작전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피살됐다.
초토화작전을 지휘한 임시군사고문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26일부터는 주한미군의 핵심기구인 ‘임시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과 미군 주둔에 필요한 기지와 시설의 지배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쥐고 있었다. 이승만과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John R. Hodge) 장군 사이에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1949년 6월 30일까지 활동했다. 7월 1일에는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이 임시군사고문단의 후신으로 공식 창설됐다. 그래서 대량학살이 이루어지던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의 책임은 임시군사고문단에 있다.
한국군에 대한 임시군사고문단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의 사항을 충실히 지킨 것이다. 그 당시의 한국군은 조직‧훈련‧무장은 물론 작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서 미군 고문관에 의해 통제받았다. 임시군사고문단 요원 가운데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을 지낸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는 회고록에서 정부 수립 후부터 자신을 포함해 이승만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총참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고문단장 등 6명이 상시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를 매주 열었다고 증언했다.
미군의 요청으로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했다. 그리고 6일 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문은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을 예고한 것이었다.
미군보고서(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1015)는 1948년 11월부터 초토화작전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하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9연대의 강경진압작전을 ‘성공적인 작전(successful actions)’으로 평가했다. 고문단장 로버츠 준장도 송요찬 연대장에 대해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며 그 활동상을 신문과 방송 그리고 대통령의 성명을 통해 널리 알리도록 한국정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이 수행한 업무만으로도 제주4.3에 그들의 직접 개입 여부를 알 수 있다. 그는 제주도 작전에 관한 모든 상황을 제주도에 파견한 고문관으로부터 보고 받고, 이를 다시 매주 정기적으로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이범석 총리나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군 작전에도 일일이 관여했다. 그는 또 CIA, 송요찬 9연대장, 서북청년회를 강경진압작전의 핵심으로 적극 활용했다. 미군 스스로 ‘과격한 반공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는 서북청년회를 군에 대거 투입함으로써 천인공노할 작전을 벌였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법’이 없는데도 계엄령을 선포하자 한국군 지휘관들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12월 1일 국방부에 계엄령에 관한 문서를 보내 해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초토화작전 직전까지 ‘괴잠수함 출현설’ 등을 흘리며 살육작전의 명분을 만드는데 급급했고,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정찰기를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다. 또한 미군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의 국가폭력기구를 동원하여 좌익을 ‘청소’하는 작업을 직접 지휘했다. 대학살의 광풍이 휩쓸었던 초토화작전의 중심에도 그들이 있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최소한 임시군사고문단, 미군 방첩대, CIA, 그리고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주둔했다.
미국은 제주4.3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주민중을 대량 학살한 원죄에서 미국이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군정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쥐고 있었다. 한국군을 지휘 통제한 주한미군 핵심기구는 ‘임시군사고문단’이었다. 1949년 7월 1일부터는 ‘한미군사고문단’으로 이름을 바꾼 것일 뿐 한국군을 지배하는 역할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주섬을 피로 물들인 유혈사태를 끝내 막지 못했다. 오히려 강경진압작전으로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제주민중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분명히 방기한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 3년, 그리고 정부수립 뒤 한국군을 장악한 미군은 한반도에 반공의 방벽을 튼튼히 쌓기 위한 냉전정책의 일환으로 제주섬을 짓밟았다. 제주4.3을 좌·우익의 이분법으로 접근하여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이끌었다. 미국이 제주 양민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그리고 최종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이유이다.
고립무원의 섬, 제주도는 피의 섬이 됐다. 미국과 이승만 친미정권의 의도대로 섬, 제주민중은 뿌리 채 뽑혔다. 3만 명이 넘는 섬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됐다. 중산간 마을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고, 지독한 슬픔만이 남은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세상은 침묵했다.
2003년 10월 마지막 날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4.3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여태 말이 없다. 이대로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이제는 미국이 4.3의 진실을 말해야 할 차례이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