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야
陶冶
나만의 임무
요즘 '인생이 하루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래서 그런지 전보다 일찍,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난다. 오늘도 변함없이 창밖의 나무를 응시하며 방석 위에 좌정한다.
오늘 하루,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는 '또 다른 나'와 마주한다. 부산한 일과 생각을 정지시키고 나만의 제단에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묵상이란 좌정과 몰입을 방해하기 위해 계속 짖어대는 사납고 무시무시한 한 마리 검은 개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는 기개다.
나의 순수한 열망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 온전히 나에게 몰입하는 집중과 만나면, 새로운 경지가 등장한다. 그것이 묵상이다. 열망이란 자신의 육체와 세상의 쾌락보다 더 숭고한 빛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그 열망으로 이기심을 절제하고 오늘에 어울리는 더 숭고한 삶을 찾기 위한 집중이 묵상이다. 강렬한 열망과 집중은 묵상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게으름과 무관심은 묵상을 좌절시키는 치명적인 방해꾼이다.
몰입은 세속적인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다. 인간은 몰입을 통해 과학, 예술, 상업과 같은 분야에 필요한 기술을 획득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통해 명성과 권력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자신의 소명에 몰입해야 한다.
그러나 묵상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성공을 위한 필연의 조건이다. 묵상의 목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완벽한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데 있다. 자기를 넘어선 자신, 초월적인 자신이자 신적인 자신을 찾기 위해 필요한 예술이 묵상이다.
인간은 몰입을 통해 천재적인 예술가나 위대한 카이사르가 될 수 있지만, 초인(超人)은 될 수 없다. 인간의 상태로는 깨달을 수 없는 신적인 지혜와 평정심을 몰입을 통해 얻을 수는 없다. 몰입의 연마가 권력이고, 묵상의 완성은 지혜다. 정심(正心), 정언(正言) 그리고 정행(正行)은 묵상의 결과다.
묵상을 수련하는 사람은, 세상이 운행되는 참된 이치이자 인간 행동의 원칙인 진리를 끊임없이 알려 하고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실천한다. 진리란 오늘 내 삶과 유리된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다.
진리란 지금 나의 최선을 드러내어 내가 해야만 하는 고유한 임무를 알아내는 모험이며, 그 임무를 과감히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다. 진리는 내가 열망하는 저 높은 생각을 나의 언행으로 실행하는 용기이며 습관이다. 언행일치란 생각이 자신의 몸가짐과 행동가짐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일상의 사소한 일을 숭고하게 처리하는 배려다.
묵상을 수련하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을 그냥 보지 않는다. 만물은 인과응보의 결과이며, 인과응보를 넘어선 것을 신의 섭리로 이해한다. 진리 안에 거주하는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의 경중을 따져 한 번에 하나씩 고요하게 해결한다.
묵상은 집중보다 엄격한 자기절제를 요구한다. 집중의 성과는 가시적이지만, 묵상의 성과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매일 정결하게 닦는 과정이 없다면 묵상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몸에 훈습으로 배인 열망과 절제는 하루라는 경기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지속적인 묵상 수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소명을 목숨처럼 여기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더 숭고하고 완벽하게 완수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생각의 가감 없는 거울이다. 솔로몬은 <잠언> 23장 7절에서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생각'을 히브리어 동사 '샤아르(shaar)'라는 단어를 통해 정의했다.
샤아르는 혼돈의 장소인 버려진 땅에서 질서의 장소인 도시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성문'이다. 샤아르는 또한 '성문을 통해 다른 단계로 진입하려는 구도자를 성문 위에서 관찰하는 행위'다.
8세기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 시인 라비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이라크의 남쪽 항구 바스라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생을 홀로 살면서 사막에서 명상을 수련했다. 그녀의 시에 '묵상'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의 평안은 고독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흠모하는 그분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을 대치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사이에 살면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시험입니다.
묵상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는 자신을 스스로 제3자가 되어 가만히 지켜보는 행위다. 나의 생각들을 복기해보면, 그것들은 내가 습관적으로 해오던 생각들이다. 그러므로 나를 절제함으로써 다음 단계에 어울리는 행위를 생각해낸다. 그런 생각을 연습하고 자신의 몸에 익히는 것이 나의 개성이며 나의 운명이다.
출처. 《승화》 배철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