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지금까지 계속해서 로마서 강해를 이어오고 있었습니다만,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특별히 “조건과 결과” 条件と結果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코로나가 다시 확산국면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조금 주춤하나 싶었는데 또다시 확산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한국은 하루 신규확진자가 200명을 넘었다고 하고, 일본은
하루 신규확진자가 1,700명이 넘었다고 하지요.
이 숫자만 보더라도 심각한 일입니다만,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더 충격적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미국에서는 하루 10만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하루에 1,000명 정도가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1,000명의 확진자가
아니에요 하루에 1,000명씩 죽어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30초에 한 명씩 입원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이 무슨 중세도 아니고
첨단과학기술이나 의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되었다고 하는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내로라하는 선진국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사망자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암담한 것은 이와 같은 사태가, 적어도 한 두 달 사이에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어떤 전문가는 일러도 내년
후반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참으로 인간의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감사>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봄으로 인해서, 우리가 감사로 인한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많은 분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제발 이 코로나인지 뭔지를 종식시켜주셔서, 하루 빨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코로나로 인해서 고통 받은 모든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회복되도록 해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도 많은 분들이 이와 같이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지기는커녕 벌써 몇 개월 동안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고 계셔서일까요?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좀 더 큰 소리로, 목이 쉬어라 기도를 해야 저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도에 응답해주실까요?
이에 대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시편 94편 8절~9절
“8.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9.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気づけ。民のうちのまぬけな者どもよ 愚かな者どもよ いつになったら悟るのか。
耳を植えつけた方が 聞かないだろうか。 目を造った方が 見ないだろうか。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목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
코로나를 종식시켜주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기도도 듣지 않고 우리가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보지 않고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7.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18.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이 기록된 책은 하박국이라고 하는데, 이는 무슨 국 이름이 아니고 하박국이라고 하는 선지자 이름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좀 알기 쉽게 바꾸어보겠습니다. 내가 1년 동안 일을 했는데, 성과가 없었어요. 아니면 월급을 못 받았어요. 쌀은
오래 전에 떨어졌고요, 냉장고를 열어봐도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요. 통장에 잔고는 한 푼도 안 남았어요. 이제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해요.
이와 같이 참으로 딱한 상황에 처해있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할렐루야! 제가 1년 동안 일을 했는데 월급을 한 푼도 못 받았습니다. 쌀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요. 가진 돈은 이제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즐겁습니다! 너무너무 기쁩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런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분, 정말로 한 무슨 선지자급 되는 믿음의 소유자나, 아니면 무슨 의학적인 전문가의 돌봄이 필요한 분일 수도 있겠다……그런 생각이
안 드시겠습니까.
제 말이 이상한가요? 자기가 가진 나무에 열매가 열려야 이를 팔아서 소득을 올릴 수가 있을 텐데, 전혀 열매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에
양이나 소가 있어야 양의 털을 깎든지 소 젖을 짜서 팔거나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모든 것이 다 막혔어요. 무엇 하나
방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하박국 선지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러면
성경은 도저히 무리한 것을 우리에게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한
하박국이라고 하는 사람은 대단한 선지자다 라고 하는 것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건가요?
우리가 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로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감사>라고 하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잠시 우리는 이사야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6장 9절~10절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すると主は言われた。「行って、この民に告げよ。『聞き続けよ。だが悟るな。見続けよ。だが知るな』と。
この民の心を肥え鈍らせ、その耳を遠くし、その目を固く閉ざせ。彼らがその目で見ることも、耳で聞くことも、心で悟ることも、立
ち返って癒やされることもないように。」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좀 어렵게 들리기도 하는 말씀입니다만, 구약에 있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도 인용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데, 제자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좀 단도직입적으로 알기 쉽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로 비유로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제자들이 좀 궁금하게 생각했나 보죠?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10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すると、弟子たちが近寄って来て、イエスに「なぜ、彼らにたとえでお話しになるのですか」と言った。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바로 이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15절
“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こうしてイザヤの告げた預言が、彼らにおいて実現したのです。『あなたがたは聞くには聞くが、決して悟ることはない。見るには見るが、決して知ることはない。
この民の心は鈍くなり、耳は遠くなり、目は閉じているからである。彼らがその目で見ることも、耳で聞くことも、心で悟ることも、立
ち返ることもないように。そして、わたしが癒やすこともないように。』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이 구절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다 깨닫고 구원을 받으면 좋은 것 아닌가요?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럴까 봐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에요.
이는 참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이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렇게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보면 각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현금을 지원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그것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지요. 그래서 지원금을 더 달라고 합니다만, 나라에서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좀처럼 추가지원이 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누구는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라에 돈이 없어? 그러면 돈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에서 찍어내는 게
아냐? 그럼 나라에서 좀 넉넉하게 찍어서 국민들에게 나눠주면 되잖아. 혹시 이렇게 생각해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당장 돈을 마구마구 찍어서 한 사람당, 글쎄요. 얼마면 좋을까요. 1억 정도를 찍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 사람씩
나눠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참 좋겠지요? 4인 가족이면 4억이 생깁니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렇게 되면 그 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분들이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당장 사람들 주머니에 1억씩 생겼다 하면 소비는 늘어나겠지요. 순간적으로 보면 경제도 살아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이제 인건비가 오롭니다. 그래서 인건비를 올리면 그 다음에는 물가가 오릅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 나라 경제가 만가지고 맙니다. 이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런 나라가 실제로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짐바브웨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이처럼 인건비와 물가가 서로 오르다 보니까 화폐 숫자가
엄청납니다. 한때 1000억 짐바브웨 달러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계란 3개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짐바브웨 달러는 사용이 중단되고 미국 달러를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이 축복이 주워진다는 것은 이는 재앙이 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질서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3장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また手に箕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별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갈
만한 사람들을 선별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비밀이 바로 오늘 말씀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7.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18.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7절에는 분명히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18절에서 선지자는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조건입니까. 아니면 결과입니까.
좀 어려운가요? 그러면 좀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하는 것이 조건이라면, 우리가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인해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거나 하는 것이 결과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에 그 결과로서 기뻐하거나 즐거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조건입니까. 아니면 결과입니까. 예,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결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어야지만 우리는 그 결과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17절에 나와 있는 조건들은 전혀 좋은 일들이 아니에요. 좋기는커녕 이주 안 좋은 조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절에서 결과로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되어 있으니까 이것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7절을 조건이 아닌 현실로, 그리고 18절을 조건이라고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17절 같은 안 좋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다 망했습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18절은 조건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조건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넘치는 축복을 받는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2장 7절~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2장 7절~10절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で打った。
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すると、妻が彼に言った。「あなたは、これでもなお、自分の誠実さを堅く保とうとしているのですか。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しかし、彼は妻に言った。「あなたは、どこかの愚かな女が言う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私たちは幸いを神から受けるのだから、わざわいも受けるべきではないか。」ヨブはこの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唇によって罪に陥ることはなかった。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대단히 의롭고 부유했던 사람입니다. 재산도 많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순간에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건강마저도 잃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좌절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좌절과 절망을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좌절과 절망을 축복을 받을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의 믿음을 지킨 결과 그는 그 이전보다도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우리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해서 히죽히죽 웃고
다니시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의학적인 전문가의 돌봄이 필요한 분이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さて、信仰は、望んでいることを保証し、目に見えないものを確信させるものです。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습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지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의 눈으로는 안 좋은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간에
모든 일들이 하나가 되어서 마침내 크나큰 축복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아무런 소망도 없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을 아무나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아무나 못합니다. 그러나 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축복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다고요?
아니, 무슨 좋은 일이 있어야 기뻐하든 즐거워하든 할 것 아니야. 지금 다 망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냔 말이야.
이렇게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을 결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못합니다.
하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아무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を愛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何の報いがあるでしょうか。取税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야 감사를 한다면, 그런 건 믿지 않는 사람도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도 할 줄 알아요. 이처럼 감사를 결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받을 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들 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일을 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좌절할 때 나도 좌절하고,
남들이 절망할 때 나도 절망하고, 남들이 믿음을 버릴 때 나도 믿음을 버리고, 남들이 불평불만을 말할 때 나도 불평불만을 말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서 <침노>라고 하는 것은, 빼앗기 위해서 있는 힘껏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여러분 천국은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있는 힘껏 공격해야 빼앗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도 내 뒤에 있는 지금까지 내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배해주신 상을 받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내 앞에 놓여 있는 저 푯대, 결승점을 향해서
있는 힘껏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뻐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결과가 아닙니다. 주님의 축복을 앞당기는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렵거나 힘든 일이 눈앞에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게 되는, 이와 같은 환란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때가 바로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 해야 할 때요, 그 때가 바로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때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어려움 가운데에 있을 때나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일수록, 선별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랍고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