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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노트(1)
--79년 늦겨울--
강원도 황지, 지금은 태백시라 불리는 곳,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땐 계곡의 된바람이 살을 에는 2월 하순의 강추위였다. 회색빛 하늘에 눈발은 가볍게 흩날리고 탐스러운 하얀 송이는 냇가 돌멩이 위에 소복이 얹어져 묘하게 자극되는 겨울 끝자락의 서정이었다. 숱한 나날이 나를 시달리게 하고 정리되지 않은 생활은 못마땅한 미련만 가득했다. 삶이 어설퍼 아무 가치도, 의미도 못 느끼는 막무가내 시절, 현실 도피의 피난처라 할까.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타락한 시대의 암울함,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고집불통 내 성격, 그런 그 시대를 미워하다 산중의 갱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무렇게나 두드리고 때리고 찢고 까부는 그런 방황으로 휩쓸려 그들(광부)과 함께 그곳의 일상을 흥미롭게 눈여겨보며 나를 견디어 다독여 주는 위안이 될 수 있는 한편을 기대해서다. 삶에 이끌려 어디론가로 흘러가는 내 인생, 머릿속 멘 끝에 매달려 어쭙잖게 남아있는 감성으로 뭔가에 몰두하는 일이 나를 더 살찌우는 일이 아닐까 해서다. 그곳에서의 일어나는 내 일상이 우연히 나에게 다가와 자연스레 그것에 어울리어 새로운(창작 등) 세계로 이끌어 간다. 무질서한 시대에 지쳐 있던 나에게 위안이 되고 언제까지 일지 모르지만 하루하루가 그림과 글로 조금은 값어치 있는 보람이 되고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고 싶어서다. 들여다볼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나를 깨워 나를 통찰하고 짜임 있는 구성으로 이루어 내 작업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사색(思索)으로 오는 뜨거운 작업의 불꽃이 새롭게 일어 뭔가를 바라고 기대한 것인가?
이곳 개천의 맑은 물은 보이지 아니하고 검은 흑회색의 물만 흐르고 있다. 여기 국민학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물은 검은색으로 만 그린다는 게 이해가 간다. 거품을 띈 검은 물결에 토해내 듯 흐르는 물은 독이라도 탄 듯해 왠지 모르게 음흉했다. 개울 둑 위 도로가에 곧 쓰러질 듯한 허름한 판잣집(광부 사택)이 위험스레 쭉 이어 나란히 걸쳐 저 있고 황량한 거리는 마치 미국 서부 영화를 보고 있는 듯 쓸쓸하기만 하다. 오후의 눈 내리는 날이라 거리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고 문곡역 뒤 탄 선착장 선로엔 쭉 나열된 탄을 싫은 광차가 전차에(배터리 카) 이끌려 지옥으로 끌려가듯 줄을 지어 털털 거리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은 내가 거처로 정한 역 앞 2 층 목조 건물 창문을 두려움으로 사정없이 때린다. 거슬리지 않게 나를 센티하게 한다. 앞으로 전개될 그곳에서의 생활이 종잡을 수 없는 합의된 타협인 양 억제되어 내 마음에 깔려 있는 듯하다. 외로움에 저항해야 하고 해야 할 일에 두려움이 가득하기도 하다. 꿈꾸어 왔던 미래를 잠시 잊고 지금 내 뇌리를 때리는 현재에 집중하며 그들과 함께 휩쓸리는 소용돌이에 머물러야 한다. 새롭게 내 일상을 만들어 가야 만 한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내가 살아남으려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강한 마음(때론 독종 같은)은 물론 한 번 더 참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 그로 먼 훗날의 내 삶을 추억으로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1979. 2. 22.
- --광부의 삶--
이곳 광부들은 갑, 을, 병 3교대로 일하며 그곳 컴컴한 갱 속에서 케프 불에 의존해 석탄가루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이 막히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막장에서 죽을 둥 살 둥 탄을 캔다. 어떤 곳은 지열 때문에 곧 숨이 막힐 듯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가족을 위해 자신들을 내던지고 있다. 그곳에서의 생사를 가르며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그 어두움에 내맡기듯 그들 일상을, 그 흐름을 즐기고 있다. 한 잔 술에 시름을 달래며, 두 잔 술에 사랑을 포기하고, 석 잔 술에 이기적이고 비겁하게 현실적(될 대로 돼라 하는 식의 삶을 내팽개치는)이 된다. 때론 흐름에 맡기 듯 아무 저항 없이 어두운 잃어버린 세계로 자신을 내 몬다. 그곳에서의 시작(일)은 기본적으로 삶이 어떻게 이어 저 가야 하고 존재의 방법, 그 이유를 알게 한다. 태초에 인간들이 살아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어떤 희망을 맛보는 듯한 절체절명의 절박한 삶의 부재(不在)에서 우연찮게 다가오는 한줄기 빛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케프 불만 꺼버리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암흑이고 공허한 적막과 함께 지옥에 떨어져 있는 듯한 마지막 절규 같기도 하다. 섬뜩한 두려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무도 모르 듯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그들은 그곳에서 그 맛을 느끼 듯 자기들 한(限)을 태우고 있다.
☆케프; 작업모 화이바에 장착하는 배터리로 켜지는 등☆
1979. 3. 18.
-- 가족 --
그는 현실의 고통을 모른다. 그러나 권태는 느낄 것이다. 병 반일 땐 구덩이 속에서 해방되면 수면도 잊은 채 한 잔의 탁배기를 구걸하기 위해 날카롭고 째진 눈을 번뜩이며 지루함을 달랜다. 염치라는 걸 모르는 이 친구는 그래도 그의 손목에 상당한 값의 신품 '라도' 손목시계가 자랑거리다. 작달막한 키와 애써 준엄한 듯(?), 얼굴에는 자식에 대한 일방적(개념이 없는) 사랑은 있다. 곰이 새끼를 보살피듯 무조건적 사랑이다. 그가 한 가족 가장임을 설정해 주는 장면이다.
그의 아내, 그 여자는 얄밉게도 살짝 얽은 얼굴에 왕방울만 한 눈을 가졌다. 그 눈만이 이 여자의 전부일뿐, 그녀의 의무자를 구덩이 속에 출근시켜 놓고 기회만 있으면 술과 화투에 빠져 있다. 1남 3녀의 엄마인 그녀는 통통해 보이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여자.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자식에 대한 사랑은 눈곱만치도 없다. 늘 술과 함께하고 안하무인 겉과 속이 같아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야무지게 잘 어울리는 비정한 여자.
국민학교 5학년의 장녀, 이 꼬마 숙녀만이 이 집안의 유일한 지성인, 그 아이는 늘 부지런하다. 아마 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닦달과 게으름 때문에 단련됐을 거다. 그 아이는 항상 부모에게 순종하며 동생들에겐 뭐든 양보한다. 누구든 사랑하려고 애쓰며 아쉬운 듯 항상 허탈한 느낌이 남는 조용하고 우호적인 아이다. 그 아이는 엄마의 학대 속에서도 의식과 정신 구조는 열두어 살 아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때론 어려움이 내 복이라 생각하는 듯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답지 않게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주저 없이 한다.
4학년의 차녀, 멍청한 이브보다 더 교활하다 할까? 눈치로 살아간다 할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어미를 닮아 쌀쌀맞은 인상의 이 고집쟁이는 항상 누구에게나 뭔가를 원하며 아쉬워한다.
2학년의 외동아들, 말 수가 적은 이 친구 코에서는 항상 노란 콧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래도 왕방울만 한눈에 생긋 웃는 표정이 귀여움이 가득하고 동그란 얼굴에 서러움과 항상 정을 아쉬워하는 맑고 예쁜 대 여섯 살의 막내딸.
1979. 4. 2.
-- 얼굴 (세월이 보이는 얼굴) --
삶의 고통과 시름의 권태에 찌든 듯한, 이마와 볼에 주름이 깊은 기다란 얼굴, 입사 직 번 16번. 그는 20년 넘게 이 탄광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 왔다. 54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근육질의 체격, 목뒤의 굳은살은 (오랫동안 동발을 목 주위 어깨에 올려 맨 듯 혹이나 다름이 없는) 그의 고달픈 삶을 의미한다. 천성인가? 굳어버린 그의 입은 항상 닫혀 있고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행동은, 차라리 자신보다 남을 의식한 듯하다. 혹 그게 그의 연륜인가? 사연 많은 세월이 함께하는 말 못 할 고통도 느껴지는 것 같다. 직 번 1번인 '조'씨와 사돈 간이라니 너무나 잘 맞는 아이러니한 어울림의 합리(合理).
☆동발; 탄광 막장에서 굴을 파 들어가면서 세우는 참나무 기둥. 벽이나 천장에 받히는 버팀목. ☆
(보통 길이 6 자나 9 자짜리를 많이 씀)
1979. 4. 30.
--새로운 과부--
다이너마이트 발파의 충격으로 물통이 터져 죽 탄에 말려 죽은 남편을 잃은 또 하나의 새로운 과부. 그녀는 그의 죽음을 안 순간부터 무얼 생각했을까? 처참하게도 불쌍하게도, 그 과부의 새로운 삶을 위해 마지막까지 의무를 다한 그다. 이제 겨우 40 초반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그,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노스탤지어. 그녀는 그의 죽음 값을 뜯어내어 여길 뜨겠지. 순정 티란 하나도 없고 슬픔일랑 멀리 어디론가로 날려 보낸 그런…… 인 양, 표독스럽고 음란한 얼굴. 이곳 여자들의 병폐 남자, 돈, 화투, 술, 울부짖는 거짓 속에서 많은 상상이 교차할 것이다. 그것도 그 여자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물통; 탄광 안에 우리가 모르는 상당한 양의 물이 공동(텅 빈 공간)에 고여 있다. 석탄과 함께 이것이 터져 쏟아져 무너져 내리면 상당히 위험함☆
1979. 7. 10.
-- 언밸런스 --
오직 한 치 앞만 보이는 케프 불에 의존한 탄 차의 이동에 두 탄부는 힘을 다해 서로 반대편에서 리바꾸를 밀어내려고 애쓰는 잘못된 상황. 10도 정도의 경사, 레일의 밀어붙임의 대결은 경사 아래의 탄부의 패배. 그 잘못된 언밸런스가 확인되는 순간, 어두움 속에서 내 케프 불에 환하게 웃고 있는 반대편의 얼굴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흰 이가 보이는 밝게 함빡 웃는 업(UP) 된 얼굴에 검정이 덕지덕지한 진한 주황색 얼굴이 인상적이다.
☆리바꾸(일본 말) 우리말로 탄을 싫은 광차. 일제(日帝)의 잔재에 남겨진 말. 그때까지만 해도 탄광에서 도구, 물건 등을 거의 일본 말을 많이 썼음☆
1979. 8. 9.
--어떤 죽음--
그는 객체로써 그저 이방인처럼 죽어 갔다. 그는 우리의 뇌리에서 쉽게 잊힐 것이다. 이곳의 특징은 죽은 자에 대한 냉정 함이다. 두 달 전 5 크로스 막장에서 나와 함께 고비를 넘긴 김 씨, 위험하다는 외침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고 그의 꾀죄죄함이 새로운 기억으로 남는다. 그는 가족에게 부(富)를 남겼다. 10여 년 동안에 그는 위험과 고통, 막장의 후끈한 열기 속에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해 돈을 모은 사람이다. 더불어 이자 놀이로 몇 억대 이상을 모았다는 소문, 한 마디로 뭔가에 구속된 억척이다. 그가 마지막에 가져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산 자를 위한 의무의 만족, 아니면 천국으로 가는 여비? 어둠의 공간 속의 흰 테두리 안에 누워 있는 그가 꿈에 보이듯 그려져 있다. 주여, 그를 하늘에 들게 하소서.
1979. 9. 25.
--난해한 오해--
그녀가 수줍음이 많은 수놈 뻐꾸기(미친놈)를 알려는 가시적 기대는 언제부터였을까? 난 이곳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항상 소극적이며 단순했다. 다가오는 그녀가 많은 부담이다. 사랑은 당사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조건 반사가 아니면 쓰디쓴 허영일뿐이다. 난 그저 아무 부담 없이 외로울 때 친구 같은 바람으로 순하게 상대했을 뿐이다. 내가 알게 모르게 그녀와 함께 거기에 있었을 때는 단순하게 말동무가 필요했을 뿐이다. 진실한 사랑은 모방할 수 없다. 그걸 억지로 해내려면 사랑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걸 모독할 뿐이다. 난 그저 그림, 혹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라든가, 먹기 위한 발버둥이라든가, 지금 이 시점, 나 자신만을 위한 일 만 할 뿐이다.
1979. 10. 13.
-- 아버지와 아들 --
탄부 입사 직 번 1번. 그는 60대 초반으로 자그마치 25년을 이 구덩이 속에서 그의 인생을 보냈다. 깡마른 중키에 이마가 시원해 보이는 인상 좋은 그의 눈자위가 조금은 슬픔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속의 눈동자는 끈기와 의지의 표징인 양 선하게 빛나고 있다. 그를 생각하면 모든 게 불공평하다. 그의 아들은 이곳의 이름 있는 건달, 신은 그에게 얼마만큼의 시련을 맛보게 하실 것인가. 일을 끝내고 한 잔 술에 신세한탄을 하는 그의 삶에 무엇을 기대할까? 그늘진 빛과 환한 어둠에서 대조를 이루는 방탕한 젊은이와 생에 지쳐 버린 막 노년으로 접어든 두 남자.
1979. 11. 7.
--위험한 객기--
그는 누구한테 사주(使嗾)를 받았나 싶다. 이곳 사람들이 날 훈련시키는 일인지 난 안다. 갱 안에서 몇 날 며칠을 두고 나에게 자꾸 시비를 건다. 그들과 늘 함께하려는 날 이유 없이 싸우자고 한다. 목례도 건네지 않는 사이인데 나를 마냥 불편하게 한다. 결국 내가 여기 와서 지켰던 인내가 폭발하고 만다. 어느 폐 막장에서 싸움을 해 한마디로 그를 늘씬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참으면 한계가 있다는 걸 내 어설픈 객기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그는 파출소에 고발을 했다. 막장에서 싸우면 살인 행위인 걸 나도 알지만 내가 살아남으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지 내 상황을 들어준 파출소 순경이 그보다 날 믿은듯했다. 경찰은 여기 사정의 어려움을 얘기해 주고 난 아무 일 없다는 듯 그곳에서 나왔다.
한 번은 '을 반' 때였나 내 또래의 우리 항 전차 기사와 새벽 한 시에 퇴근해 뒷산에서 아침 7 시까지 싸운 적이 있다. 그도 틈만 나면 나에게 시비를 건 사람이었다. 난 뭐든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안 하면 그들은 날 편안하게 놔두지 않는다는 걸 난 이곳에 처음 올 때 누구한테 들어 알고 있다. 어떤 아집을 포기하고 물러나면 나는 여기에서 있을 수 없다. 내가 의도하려는 일 등에서 벗어난다면 어디 가든 난 살 수가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화면을 거의 추상적인 센세이셔널하게……
1979. 12. 9.
--망상만 쫓는 군중--
광부들의 기(삶)를 앗아가고 작은 소망을 무참하게도 짓눌러 버린 그럴듯한 아량(?)은 또 한 번 그들(社)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나흘간의 파업은 내가 서울에서 돌아오는 날 끝나 버렸다. 마음 깊숙이 타오르는 정의감도 우리 편(광부)의 무지에 의한 분열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슬픔과 분노, 비정과 비애, 단순함, 이 모든 것은 일부 누군가와 흥정으로 이뤄지고 작위적인 콘셉트에 무질서하기만 하다. 내가 좋아하는 청색 계통의 우울함이 스며든 고통의 색조가 주제를 이루리라 생각된다.
1980. 3. 7.
--동발을 짊어진 후 산부--
무거운 동발의 무게에 짓눌리는 몸이 어딘가 서글퍼 보인다. 빛에 의존해 비틀거리며 걷는 그의 걸음이 왠지 동발이 무거워 위험해 보인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뭔지 모를 고통을 동반하는 듯한 모습이 천추의 한을 품은 듯하다. 항상 우울해 보이고 말이 없는 그의 응어리짐은 알게 모르게 입소문이 퍼져 동료들은 다 알고 있다. 고향 집에 있는 그의 부인이 자식들을 놔두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불공평한 세상, 그가 짊어진 삶에 여러 사실들이 경험으로 남아 절규하지 아니하고 냉정하게 지나칠 수 있을까? 지금, 현실의 소용돌이가 그의 마음을 후딱 떠나 이후의 그의 삶이 그만큼 보장받는 한때의 미련으로 남길 바랄 뿐이다.
1980. 4. 10.
--그날--
그날은 4 월 중순인데도 밖엔 매우 추운 날이었다. 인기척에 2 층 계단 난간 위 여닫이문을 열었을 때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 뒤 쓸쓸한 거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가 맨 처음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잿빛 하늘엔 정적과 함께 눈발이 가늘게 흩날리고 있었다. 내 앞에 맞닥뜨린 그녀 얼굴은 환한 웃음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예쁘고 청순함이 가득했다. 거리에 흐르는 정적에 어떤 기대를 품게 하고 지금까지의 무료한 나날을 날려 보내는 듯했다. 밤의 어둠 속에 있듯 막연한 나날이었던 그때, 서울에서 온다는 기별도 없이 홀연히 내 앞에 선 그녀는 잘못된 현실에 얽매였던 나를 구원했다. 불행하고 나약한 나의 삶의 희원이었고 뭔가를 기대한 사랑이었다.
드러난다 드러난다 가냘픈 우듬지가 드러난다
삭풍의 된바람에 고독이 흩날리고 애초부터 움텄던 새싹이 돋아난다
지금은 앙상한 뼈대지만 사랑은 인내의 원초적 아량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오는 깊은 생각의 아름다움의 표현이다
내용 없는 뼈대의 형태形態는 사라져 버리고
속박되지 않는 자유(새싹, 사랑)가 아름다움으로 돋아난다
무심히 지나쳐버린 것들이 애달음의 환상으로 차츰 드러나고 있다
편지만 주고받다 지금까지 짓눌리던 그녀와의 연민은 예쁜 지난날의 추억이 된 듯하다. 이젠 뭔가 창조하려는 처음의 의도, 의미는 스스로 얽매어져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부담도 된다. 지금 이 현실은 숙명일 수 있다. 내게 사실을 지배하고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현명함이 있을까? 우리가 함께 동화되면서 서로의 희생으로 새로운 것을 얻어 낼 수 있을까에 걱정, 두려움이 앞선다. 책임도 느껴야 하지만 솔직히 필요 없이 낭비되는 나날이 될 수도 있다. 그래 차분히, 때론 단순한 잣대로 거리낌 없이 공간(空間)에 순응하며 솔직한 판단으로 살아가자. 내 앞에 있을 현실에 나답게 소박한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그녀와 함께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자.
1980. 4. 16.
--회식--
이제는 어느 정도 날 인정한 동료 다섯 분과 황지 연못 위 개울에 앉아 돌판 구이 잔치를 열었다. 여기 와서 처음 맛본 색다른 삼겹살 구이다. 납작하고 평평한 돌 아래 불을 때고 그 위에 고기를 구워 먹는 소위 이곳 만의 돌판 구이다. 처음 먹어보는 돌판구이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의 맛이고 환상의 별미였다. 술은 삼겹살과 함께 어설픈 내 주제에도 견딜 만하게 하는 아주 색다른 맛의 일품요리다. 거나하게 술이 오른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난 세상의 한 편의 서사시를 읽는 것 같다. 내가 추구하는 건 나 자신만의 언어인 색채와 형태만으로 국환 되지 않는다. 그것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슬픔과 고통, 때론 환희, 또는 비정, 비애의 유형에 있다. 그들의 깊은 상처를 보듬는 뭔가를 해야 한다. 그걸 그림과 글로 표현함이다. 공감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액세스 access가 필요하다.
1980. 5. 8.
--어느 얻어먹기의 죽음--
내가 일하는 곳이 아닌 함백항에서 일하는 내 나이 또래의 친구가 막장에서 가스를 마셔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육법전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로 공부와 일을 동시에 해내는 억척이었다. 그와 난 서로의 호기심으로 가끔 만나 그동안 살아온 경험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난 그늘 속에 살 듯 매사에 자신이 없는 공허함에 있었지만 그는 뜻과 의지가 분명했다. 앞으로 2 년만 열심히 돈을 벌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꼭 해낼 것으로 자신만만했었다. 그런 그가 가버렸다. 하느님은 불공평하시다. 왜 뜻과 의지가 분명한 사람을 돌봐주시지 아니하고 허망하고 가련한 죽음을 그에게 남겼는지……
해맑은 그의 웃음이 그려진다. 그가 가버리고 남겨진 가치는 진정 무엇이었던가? 돈, 명예 절대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앞날을 기약하고픈 소박한 호소였을 뿐이다. 그가 천국에로의 입문으로 자연스레 그곳에 어울리어 부디 행복하시길 바랄 뿐이다. 주님, 그가 바라고 이루고자 했고 호소하면 다 이루어지는 맑은 정신세계인 하늘로 그를 인도하소서. 그에게 참 평화를 주소서.
1980. 6. 12.
☆얻어먹기: 일본 말 아다무끼의 비속어로 우리말로 후 산부, 우린 그때 사끼야마인 선산부에 빌붙어 일을 했다 해서 우리(후 산부)를 스스로 낮추어하는 말☆
--방황--
오! 예수님, 인간으로서 마지막 고통, 그 깊은 상처는 당신의 참 의미, 참 평화, 참 사랑이십니다. 저는 당신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찢고 까불고 때론 당신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이 당신을 더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기와 자기중심적 사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나약한 못남에 있습니다. 주님 부디 제가 제 죄를 스스로 알게 하시어 당신의 참 의미 참 평화, 참 사랑을 알게 하소서. 이기와 무질서로 뭉쳐진 제가 거듭나 당신 안에서 올바름을 행하게 하소서. 아멘.
혼자서 아무렇게나 살던 버릇으로 지내다가 누군가 옆에 있을 때 함께 하는 건 부담이었나, 자꾸 마땅치 않은 짜증과 독선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아끼고 사랑하고픈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희미해지고 그냥 혼자이고 싶은 망나니 같은 마음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 내 지성은 여기까지인가? 내 인내의 본능이 멋모르고 하늘 높이 널을 뛰고 있다. 숨었던 위선이 튀어나와 나 자신에 저항하고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도 그녀와의 만남이 어쩔 도리 없는 못남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녀와 하루하루를 같이 할 때마다 나는 왜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까? 호수 위의 조각난 달이 나를 못난 부끄러움을 알 듯 무렴히 지나는 듯하다.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인데 더는 이러면 안 된다. 인생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그 이상 나를 처참하게 하면 안 된다. 더 깊게, 더 넓게 허투루 하지 말고 최대한의 인내로 나를 지키고 그녀를 사랑하자. 만신창이가 된 나를 발견할 땐, 후회가 가득할 때는 기차는 떠나고 만다. 혼자 살 때의 자유로움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지독히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닌가.
1980.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