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하지 마라 (I)
우리는 진실된 신앙을 가로막는 4가지 장애물인 보물, 돈, 염려, 비판중 염려에 대한 말씀까지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장애물인 “비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런데 원문을 보면 제일 먼저 “Meh”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Meh”는 영어로 “Never”의 의미로 “절데로 하지마라”는 것입니다.
비판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비판과 분별은 구분해야 합니다.
“분별”이란 논리적, 객관적 기준으로 “진리냐, 비진리냐,” “맞냐, 틀리냐,”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별은 우리 삶에서 중요하고 특히 요즈음처럼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판은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나의 기준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별은 하되 비판은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한 인간은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 같아서 뱃속 깊은 대로 내려가느니라” (잠 18:8)고 말씀합니다.
즉 비판은 별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나면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비판하는 일을 쉽게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숙한 크리스챤들이 범하기 쉽고 걸리기 쉽고 빠지기 쉬운 함정이 비판입니다.
말 때문에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고 싸우고 편이 갈리면서 교회가 께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상대방의 눈 속의 티가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비판하지 말아야 하느냐?
I. 비판은 악한 속성의 표현입니다
염려에 대한 말씀을 통해 “염려는 믿음을 드러낸다”는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은 우리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밖으로 안 드러납니다.
그러나 염려나 시험이 올 때 겉으로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악한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잘 안드러 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나 시험이 오면 겉으로 드러납니다.
어떠한 형태로 드러나느냐?
비판하고 정죄하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비판은 잘못된 선입견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들이 우리 안에 차곡 차곡 쌓여 입력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초로 지식이 되고 삶의 기준이 되면서 선입견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면 선입견이 비판의 기준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입견을 형성하는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이 반드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만납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요 9:2) 하고 물어 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소경이 된 것이다” (3절)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주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지금도 “자신의 죄냐? 부모의 죄냐?”로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거나 아니면 다수결로 결정하는 헤프닝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죄 때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이런 생각은 어디서 왔느냐?
그것은 “신체적 장애는 죄의 열매다”라는 선입견에서 왔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쓰리고 아픈 삶을 삽니다.
우리가 사람을 처음 만나면 먼저 통성명을 합니다.
통성명을 통해 어떤 가문인지 족보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양반이냐? 쌍놈이냐?
어떤 가문이냐?
다음으로 물어 보는 것이 고향입니다.
고향이 어디냐?하고 지방색을 따져 고향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 다음으로 학벌이 무엇이냐? 국졸, 중졸, 고졸, 대졸, 석사, 박사냐? 학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 다음 직업이 무엇이냐?
화이트 칼라냐? 불루 칼라냐? 직업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교회안에도 이런 세상적인 물이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끼리 끼리 만나서 먹고 마시고 교제하고 놀고 끼리 끼리 교회까지 세웁니다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이 갈릴리 나사렛 깡 촌이었고 학벌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고 직업은 목수로 노동자였으며 외모는 비리 비리 외소하였으며 나이는 30대인데 50대로 보여 겉 늙은 얼굴이있습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어 모든 사람이 멸시하고 외면하고 피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우리는 지금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며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공동체안에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가문을 들먹이며 지방색을 가지고 학벌을 가지고 직업을 가지고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정말 잘못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도의 한 청년이 영국에서 변호사가 되어 배를 타고 고국 인도로 돌아가는 길에 영국 식민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항구에 도착하여 며칠간을 지내게 되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호기심이 많은 이 청년은 주일을 맞아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기독교에 대한 얘기를 듣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 청년은 교회가 어떤 곳인가 궁금함을 가지고 약간의 설레임과 함께 한 대형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교회 입구 홀에 들어서자 자기 앞에 펼처진 웅장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중압감으로 조심스럽게 홀을 지나 그 청년이 예배당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갑자기 자기보다 덩치가 두배나 큰 백인이 앞을 딱 가로 막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는 당신같은 사람들이 들어 오는 곳이 아닙니다. 나가세요”
졸지에 교회에서 쫓겨나온 그 청년은 충격과 수치와 모욕감으로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하여 주먹을 휘두리며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죽어도 예수는 믿지 않겠다.”
이 청년이 바로 후에 인도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지금 중국을 초월하여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가 14억 인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인도는 기독교 박해 지수가 82-3 %로 가장 높은 기독교 박해국중 하나입니다.
만일 간디가 교회를 방문했을 때 안내하던 백인 집사가 “형제여! 어서 오세요. 잘 오셨습니다.”하고 허그하며 따뜻하게 맞아 주고 간디가 예배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아마도 오늘 날 인도의 역사가 바뀌었을 지도 모릅니다.
잘못된 선입견과 비판적 시각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는지를 보여준 정말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히 새겨 어떤 경우에도 선입견을 가지고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 우리 DFIKorea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