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十想
십상十想이란
첫째 무상상無常想,
둘째 고상苦想,
셋째 무아상無我想,
넷째 식부정상食不淨想,
다섯째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
여섯째 사상死想,
일곱째 부정상不淨想,
여덟째 단상斷想,
아홉째 이상離想,
열째 진상盡想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법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견도見道,
둘째는 수도修道,
셋째는 무학도無學道이다.
괴법壞法을 닦는 사람은 간혜지乾慧地에서 구상九想을 갖춰
모든 번뇌를 굴복시키고 나서는
무상·고·무아 등의 세 가지를 생각하는 관을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육십이견六十二見의 전도된 법을 타파하고 견도에
들어가초과初果(수다원과)를 얻는다. 수다원須阤洹이나 사다함斯陁含은
식부정상食不淨想·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
사상死想·
부정상不淨想
등의 네 가지 생각을 닦음으로써 사유에 의한
미혹을 끊고 수도에 들어가서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한다.
아나함阿那含은 단상·이상·진상 등의 세 가지 생각을 닦아
색계와
무색계의
애착을 끊고 벗어나 무학도에 들어가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다.
첫째는 무상상無常想이다.
일체의 유위법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새롭게 생겨나고 소멸하는데
이것은 모두 인연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또한
증가하거나 누적되지도 않는다. 생겨날 때에는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는 가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라 한다.
모든 중생은 가라라歌羅邏 때부터 몸과 마음이 생멸하고 변화해 늙어
죽을 때까지 잠시도 정지하는 순간이 없다. 무엇 때문인가?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생겨나 머물다가 변하여
소멸하는 네 가지 모습을 따라 변천하기 때문이다.
생겨났다 싶으면 이내 그 생겨난 모양이 달라지고,
머물러 있다 싶으면 이내 그 머물러 있는 모양이 달라지며,
소멸하는가 싶으면 이내 그 소멸의 상태가 달라진다.
이와 같이 변하고 바뀌며 잠시도 머물러 쉼이 없으니,
이것이 곧 중생의 무상함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대지와 초목 모두 닳아 없어지고수미산 무너지고 큰 바다 또한 말라 버리며
모든 천신 머무는 곳 모두 불타 사라지는이럴 때 세계의 어느 곳이 영원한가.
이것이 바로 세계의 무상함이다.
수행자는 생겨날 때 머묾과 소멸이 없고
또한 생겨남을 떠나서도 머묾과 소멸이 없다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만일 생겨날 때 이미 머묾과 소멸이 있다고 한다면 생겨남이라는
모습이 허물어진다. 또 만일 생겨남을 떠나서 머묾과 소멸이 있다고
한다면 세 가지 모습이 모두 허물어진다.
따라서 생겨남을 떠나면 소멸될 것도 없어서
네 가지 모습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네 가지 모습이 없다면 무상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만일 무상을 얻을 수 없다면 곧 성스러운 도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상상을 닦는 것이다.
둘째는 고상苦想이다.
무상하게 변천하는 일체법을 관찰해 보면 바로
고통의 모습이다. 왜 그런가?
안의 육정六情(六根)과
밖의 육진六塵이 화합하여 육식六識이 생기며,
육식에서 세 가지 느낌이 생긴다.
첫째는 괴로운 느낌(苦受)이고,
둘째는 즐거운 느낌(樂受)이며,
셋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捨受)이다.
이 세 가지 느낌 가운데서 생·노·병·사·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구해도 얻지 못함·싫어하는 사람과의 만남·오음의 치성함 등
여덟 가지 괴로움에 핍박당하므로 괴로운 느낌이라 한다.
감정에 거슬리는 모든 일을 괴로움이라 하고,
감정에 순응하는 모든 일을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러나 탐욕과 집착을 일으키면 그 대상이 무상하게
무너질 때 현세에서 많은 괴로움을 받고,
후세에서는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
이로써 즐거움 역시 괴로움임을 알 수 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란 비록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아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지만
이치에 있어서 무상하게 변천하며 핍박하니,
이것 또한 괴로움이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삼계 가운데에서 즐거워
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어 탐욕과 집착을 내지 않고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것을 고상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무아상無我想이다.
유위법을 관찰해 보면 모두 괴로운 모습이니,
오음이 모두 괴로움인 것과 같다. 괴롭다면 자재하지 못한 것이며,
자재하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음·십이입·십팔계의
모든 법은 모두 인연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으므로
그 법 가운데서는 나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또한 그 법들을 여의고 나를 찾아본다고 해도 더더욱 찾을 수 없다.
그 법에서도 그 법을 떠나서도 찾을 수 없으므로 일체의 모든 소견과
집착을 버린다. 그리하여 마음에 아무것도 취하지 않으면 곧 해탈을
얻는다. 이것을 무아상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세 가지 상想은 아래에서 설명되는 고제苦諦를 참고하라.
대개 무상이면 곧 괴로움이며, 괴로움이면 곧 자아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무상함을 알면 삼계의 괴로움에 집착하지 않으며,
삼계의 괴로움과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면 세간을 버리는 것이다.
또한 무상상을 닦으면 혐오하는 마음이 생기고,
고상을 닦으면 두려움이 생기며, 무아상을 닦으면 해탈을 얻게 된다.
넷째는 식부정상食不淨想이다.
수행자가 비록 무상·고·공·무아를 알았더라도 음식에 대해
여전히 탐욕과 집착을 금할 수 없다면 이 식부정상을 닦아
대치해야 한다. 이 음식을 잘 생각해 보면 모두 더러운
인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예를 들어 고기는 고름과 벌레가 우글대는 곳이고,
젖은 피가 변해서 된 것이다. 그것들의 시작은 더러운 것에서 생기는
것이고, 그 결말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다.
밥은 흰 벌레와 마찬가지고 국은 똥물과도 같다.
또한 음식이 만들어질 때는 요리사가 만져 때와 땀이 묻었고,
입으로 들어가면 뇌에서 수액이 흘러내려 화합하여 맛을 내는데
그 모양은 토해 놓은 것과 같다. 배 속에 들어가서 창자를 채우면
지대로 인해 유지되고,
수대로 인해 적셔지며,
풍대로 인해 움직이고,
화대로 인해 지져지니,
마치 가마솥에서 음식물을 익히는 것과 같다.
그러고 나면 맑은 것은 오줌이 되고 탁한 것은 똥이 된다.
허리에 세 개의 구멍이 있는데
바람이 불어 고름과 즙을 백 개의 맥으로 흩어지게 하면
피와 화합하여 엉겨서는 살로 변하고, 새살에서는 기름이 나온다.
이러한 인연으로 신근身根이 생기고,
신근으로부터 오정근五情根이 생기며,
오근으로부터 오식이 생기고,
차례로 의식이 생겨 모양을 분별해 취하고는 아름답고 추함 등을
마음대로 헤아린다. 그런 뒤에는 ‘나’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의 온갖 번뇌를 일으키며 이 번뇌로 말미암아 모든 악업을 짓는다.
음식의 본말 인연이 이처럼 갖가지로 더러운 것임을 관찰하면,
안의 사대와 밖의 사대가 다르지 않은데 단지 아견의 힘 때문에
나의 것이라고 헤아렸던 것임을 알게 된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이 음식이 바른 직업으로 벌어서
공양한 것인지 삿된 직업으로 벌어서 공양한 것인지도 생각해야 하며,
이 음식을 만든 사람의 수고와 온 곳의 옳고 그름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음식이 된 생명체가 사로잡힐 때 두려움과 죽음을 당할 때의
원통함과 고통도 생각해야 하며, 이 음식이 배 속에 들어가면
이로울까 해로울까도 생각해야 한다.
또한 “내가 이것을 탐내고 집착하면 지옥이나 아귀, 축생 가운데
떨어져 뜨거운 쇠구슬을 삼키거나 더러운 똥을 먹어야 하리라.”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관찰하면 싫어하는 생각이 자연히 생겨서 음식을 혐오하게 되므로
오욕도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식부정상을 닦는 것이다.
다섯째는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이다.
수행자가 만약 세간의 색욕, 기름진 음식, 권속, 친구와 무리,
집과 토지, 사업 등을 떠올리며 좋은 것이라 생각하게 되면
나쁜 생각(惡覺)17)이 그치지 않아 도를 닦는 데 방해가 된다.
따라서 “중생치고 여덟 가지 괴로움의 걱정을 면하는 자가 없다.
어찌 탐내고 집착할 수 있겠는가.”라고 관찰한다.
또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중생들은 탐욕이 많기 때문에 삿되고 바른 것을 가리지 못하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알지 못한다. 성냄이 심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악도에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리석음이 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는 방법으로 구한다.
혹은 높고 낮음도 알지 못하고, 혹은 은혜와 의리도 알지 못하며,
혹은 인색하고 욕심 많고 교만하며 질투하고 사납다.
아첨하고 속이고 헐뜯고 해치며 사견을 가지고 바른 길을 믿지 않는다.
죄업이 많기 때문에 오역죄를 짓고 삼보를 공경하지 않으며 착한 사람을 경멸한다.
대부분 세간 중생들은 착한 사람은 적고 나쁜 사람이 많으며, 세간의
국토 또한 괴로운 곳은 많고 즐거운 곳은 적다. 죄를 짓는 사람은 많고
복을 닦는 사람은 적으며, 허물을 늘리는 곳은 많고 복을 더하는 곳은 드물다.
또한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오고 질병과 고통이 이어지며,
나쁜 경우가 날로 닥치고 나쁜 것이 항상 틈을 엿보는 등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빠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욕계를 깊이 살펴보면 나쁜 일이 이와 같아 즐거워할 곳이 없다.
나아가 색계와 무색계도 비록 이보다 낫기는 하지만 과보가 다해
사대가 제각기 흩어질 때면 근심과 고통이 역시 심하니,
이것 역시 생사의 윤회일 뿐 해탈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는‘삼계는 불타는 집과 같아 편안함이 없으며 온갖 괴로움들로 가득하니
매우 무섭고 두렵다’고 하였다.”만약 항상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싫어해 벗어나려는
마음이 깊이 일어나 애착하는 것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이것이 세간불가락상을 닦는 것이다.
여섯째는 사상死想이다.
수행자는 도를 닦다가 게으른 마음이 생겨 번뇌를 끊을 수 없을 땐
이 몸은 죽어 없어진다는 생각을 닦아야 하니, 사람의 목숨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되느냐?”
그러자 어떤 이는 “한 해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한 달입니다.” “하루입니다.”라고 대답하며,
나아가 어떤 이는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모두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어떤 비구가
“저는 숨을 내쉴 때 들이쉴 것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라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매우 훌륭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참으로 사상을 닦는 것이며, 참으로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사상을 닦을 줄 안다면, 마땅히 알라, 이런 사람은
게으름의 적을 무찌르고 일체의 선법이 항상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것을사상을 닦는 것이라 한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것을 진실로 안다면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저절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구차한 생각도 없어지며 오직
이치에 따를 뿐이다. 또한 무상함은 너무나 빨라서 이와 같이
보존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 공부를 잠시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또한 한번 죽으면 순식간에 세간을 버린다는 것을 알면 탐욕과 성냄,
나와 너를 따지는 시비를 저절로 마음에 두지 않게 되기 때문에 쉽게
해탈할 수 있다.
일곱째는 부정상不淨想이다.
통명관에서처럼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과
다섯 가지 더러움 등의 법을 보는 것이다.
여덟째는 단상斷想,
아홉째는 이상離想,
열째는 진상盡想이다.
열반을 인연하여 (중생의 몸과 마음을) 결박하고 부리는
번뇌를 끊기 때문에 끊는 생각(斷想)이라고 하고,
결박하고 부리는 번뇌를 벗어나
무루를 얻기 때문에 벗어나는 생각(離想)이라고 하며,
결박하고 부리는 모든 번뇌를 없애
오음이 다시는 상속되지 않기 때문에 다하는 생각(盡想)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