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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林巨正 또는 林巪正, 1504?~음1562.1.3)은 조선시대 실존했던 인물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 3대 도적 중 한 명으로, 조선 전 지역을 누비며 활약한 도적은 임꺽정이 유일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꺽정은 무리를 모아 황해도 구월산을 본거지로 황해도, 경기도 지역을 돌며 노략질을 시작했다. 세력이 거대해진 1559년부터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돌며 관아를 습격하여 관리들을 죽이고 그 재물을 지역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활동을 계속했다. 덕분에 임꺽정의 무리들은 백성들의 환대를 받았고, 위기에 빠졌을 때 여러차례 백성들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같은 해 3월에는 도적 수십 명을 잡은 공을 세운 개성부 판관 이억근(李億根)이 임꺽정을 토벌하고자 청석골로 쳐들어갔으나 야습에 실패하여 화살 일곱 대를 맞고 전사했다.
1560년에는 한양에 까지 출몰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포졸들이 움직였으나 임꺽정의 아내와 몇몇 졸개들만 사로잡았다. 임꺽정의 아내는 형조 소속의 종이 되었고 군대를 동원하여 한양 일대를 철통같이 방비하였다. 이후 평안도 성천, 양덕, 맹산, 강원도 이천 등을 노략질하여 황해도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이에 조선 조정은 총동원령을 내려 임꺽정을 잡으려 했으나, 관리 사칭 등으로 관가를 드나들며 대담하게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 해 12월, 임꺽정의 참모였던 서림(徐林)이 엄가이(嚴加伊)란 이름으로 숭례문에 살다가 붙잡혔다. 이후 임꺽정의 활동은 점점 위축되었고 다음 해 1월에는 임꺽정의 부하인 가도치(加都致)가 잡혔다. 임꺽정의 무리들을 체포한 포도대장 김순고(金舜臯)의 보고로 조정에서는 선전관 정수익(鄭受益)을 파견하여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와 금교 찰방(金郊察訪) 강려(姜侶) 등과 함께 500명의 관군을 데리고 구월산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관군은 부장(部將) 연천령(延千齡)이 죽고 또 역마를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전국의 관리들은 임꺽정과 관련없는 사람을 고문하여 임꺽정이라 속이고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런 행위가 적발된 관리는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당하는 등 나라가 크게 혼란해졌다.
1562년 1월 3일, 황해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과 곽순수(郭舜壽), 홍언성(洪彦誠) 등이 이끄는 관군이 출격하였고 결국 임꺽정 일당은 토벌되었다. 8일, 조정에서는 토벌대에게 포상을 내렸다. 『기재잡기』에는 관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임꺽정은 1월 15일 이후 처형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