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영의 주사기
19기 최선영
요즘 진로 관련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질문'의 힘에 대해 새삼 실감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을 잠시 멈춰 서 생각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 이 '질문'이 바로 그렇다. 글을 끄적거리는 걸 일상처럼 여겼는데 정작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정리해 본 적은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저 글쓰는 게 마냥 좋아서, 재미 있어서,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두고 두고 곱씹으며 되새김질 하고 싶어서, 소중한 경험이나 추억을 고이 간직하며 그 느낌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어서, 얹친 감정을 토해내고 싶어서..기타등등.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처음으로 글을 써본 게 언제였더라? 내 삶을 더듬어 여고 2 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창 꿈 많고 꽃처럼 예쁘게 피어나던
시절, 난 뜻밖의 투병으로 생사를 넘나들었다. 날마다 고열과 두통에 시달렸다. 먹는 것마다 토하고, 주기적으로 뇌압이 올라갈 때면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 떼굴떼굴 구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시력에도 이상이 생겨 복시가 나타나 사물이 둘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밥상 위에 음식이 안 보였다. 엄마가 떠 먹여 주셨다. 후유증도 심각했다. 목(사경)과 입이 돌아갔고. 반신 감각마비에, 대꼬챙이처럼 마르더니 생리도 끊어졌다. 게다가 결핵약을 아침 저녁으로 한 웅큼씩 먹었다. 매일 엉덩이 주사도 맞았다. 무서운 악몽에도 시달렸다. 팔과 다리는 더 이상 링거 주사를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코끼리 다리처럼 뚱뚱 부어올랐다.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1년 간의 투병생활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5월 수학여행을 전후로 맹장수술,
폐결핵, 결핵균이 뇌로 전이된 '결핵성 뇌수막염' 을 동시에 앓는 힘겨운 씨름을 하느라 결국, 휴학을 했다. 내 진로가 스튜어디스에서 간호사로 바뀌었다. 난 누구보다 환자의 몸과 마음의 고통을 잘 헤아릴 수 있는 간호사가 되었다. 그 시간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내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다 죽다 살아나서 만나는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길가에 잡초도, 논 밭에 곡식도,
사람도, 자연도 마치 다시 태어난 나를 환영해주는 듯 손짓하며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때부터 이해인 수녀님의 책이 눈에 들어왔고 내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수녀님의 수필과 시는 얼마나
맑고 깨끗하고 예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지. 내가 하고싶은 고백을 대신 해주시는 것 같았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친구들과 네 명의 동생들이 다 학교에 가고 나면 홀로 방에 누워 라디오를 길동무 삼아 혼자 놀았다. 그때 즐겨 듣던 기독교 방송 '내일은 푸른 하늘' 이라는 코너에 투병수기를 편지글로 써서 보냈다. 방송에서 나오자 팬레터도 몇 통 왔다. 참 놀랍고 신기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나, 그리고 이웃, 또 다른 우주와 소통한 첫 번째 계기였다.
정현종 시인은 그의 시 '방문객'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 나의 고단했던 삶을 고스란히 알아봐 주고 공감해주고 있었다. 어쩜 이리도 절절하게 공감하고 안아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노희경 작가는 그의 에세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책에서 그녀의 따뜻한 감성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자신의 아픈 과거 상처에서 오는 것임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알려준다. 작가에게 아픈 상처는 더 이상 상처일 수 없고 오히려 상처받은 사람들을 더욱 따뜻하게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치료제가 됨을 역설한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그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름을 '최선영의 주사기' 라고 지어 이름부터 먼저 불러주고 싶다, 때론 부담스럽고 따끔한 아픔도 있지만 결국 치료제가 된다는 뜻에서다.
'최선영의 주사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님을 사랑한 기록"이다.
첫째, 최선영의 주사기는 '삶의 노래'이다. 그 노래에는 동요. 가곡, 요들송, 칸타타, 찬양, 클래식, 오페라, 트로트, 발라드 락 등 내 삶의 모든 소재가 다 노래가 되어 찬양이나 음악치료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최선영의 주사기는 '영양식'이다. 질환에 따라 다르게 맞춤식단으로 요리해 다양한 치료식이를 맛보는 즐거움과 영양가를 동시에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셋째, 최선영의 주사기는 '글똥누기'다.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싸는 거다. 때로 체한 감정을 잘 토해내고 소화를 잘 시켜서 설사나 변비가 안 생기게 제 때 배설시켜준다. 관장이나 설사를 하지 않고 뼈와 살을 튼튼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넷째, 최선영의 주사기는 '놀이'이다. 나는 글 쓰는 게 재미있다. 그래서 내 블로그 이름도 "눈맑은 연어의 친구-놀e터" 라고 지었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등 SNS 놀e터에서 난 늘 신나게 논다.
끝으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팬들의 피드백에 힘 입어서다.
'선영씨는 나중에 수필을 한 번 써 봐! 베스트셀러 작가 소양이 충분해..'
'선영집사님 개그 프로그램 작가 하셔도 될 듯 해요.. 넘 웃겨여..'
'형님! 꼭 책 쓰세요. 형님 같은 분이 글을 쓰셔야 해요. 프로필은 울 형님도 못지 않고, 쓰고자 하는 열정도 있으시니 실천만 하시면 된다고 봐요.'
이만하면 내가 글 쓰는 이유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첫댓글 우와~~정말 멋져요!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신 그 마음, 존경합니다^^
윤정아님, 격려와 지지 고맙습니다. 우리 함께 손 잡고 가요^^
최선영의 주사기..글똥누기..ㅍㅎㅎㅎㅎ....대박 재밋고 우껴요. 아팠던 사람 맞나요? 스튜어디스라....음....엄청 아름다울 거란 상상을 하게 만드는군요^^
이현미님, ㅋㅋ ㅋ 반갑고 고마워요. 재밌고 웃긴다고 확인(개그작가?ㅎㅎ) 시켜주셔서.. 세월따라 나이도 흘러서
엄청 아르답진 않아요..그렇다고 아니라고도...ㅋ
연어가 정말 생동감있게 글로 뛰어나온 느낌입니다. 수필, 베스트셀러 작가 저도 한표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이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가 알라스카, 베링해를 거슬러 올라가며 힘차게 헤엄쳐 모천까지 회귀하는 여정을 닮은 것도 같아요... 감사해요^~
글쓰기 학교가 또 다른 터닝포인트가 되실 듯....보라꽃향기 가득한 글들이 쏟아져 나올 게 기대되네요 ^^
이선님, 터닝포인트... 그리고..보라꽃향기..넘 멋지고 재 맘에 쏘옥 드는 표현입니다, 감사해요.^^
글쓰는 이유 충분하십니다!^^ 코멘트 하실 때, 다른 사람들의 글을 꼼꼼히 읽으셔서 해석해주실 때 내공을 느꼈습니다!^^ 삶의 구석구석을 빛나게 하실 그 일을 기대합니다!^^
유상열님, 내공.. 그리고 구석구석을 빛나게 하실 그 일.. 사실 여부를 떠나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는 저를 알아봐 주신 것 같아 기쁘고 감사해요.^^
글똥누기? 주사기? 언어를 갖고 노시네요. ㅋㅋ 저는 그저 인풋 아웃풋 그러는데...ㅋ 제가 주의 깊게 읽고 배워야 할 글 중 하나입니다.
감사해요. 저야말로 혜영님의 풍성한 일기쓰기로 다져진 기본기.. 닮고싶고 배우고 싶은 걸요. 우리 욜씨미 품앗이 할까요??ㅎㅎ ^^
이런이런, 현장에서 직접 듣지 못했던 작품이 또 하나 나왔군요. 이 카페가 없었으면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이해인 수녀님 수필 저도 참 좋아했었는데.. 선영님께서 수필집 내시면 꼭 사서 두고두고 곁에 두고 읽겠습니다. ^^
벌써 열성팬까지 생기다니?!!..ㅎㅎ 회원가입만 해 놓고 카페에 통 안 들어와 공지사항 못 보고 첫 시간 교재도, 글도 준비 못해 얼마나 당혹스럽고 민망했던지요..예약 고객 확보?!.. 이런 김칫국?은 벌써부터 기분을 좋게하는군요. 고맙습니다.^^
정말 충분하네요. 삶 자체가 아름다운 글이네요. 그 삶을 응원합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힘이 불끈! 인정, 지지, 격려, 응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