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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장 7-10절. 내가 약할 때 주의 은혜로 강함. 요약설교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1. 지난 시간에는, 바울 사도가 삼층천에 올라간 일을 제 3자의 일같이 간증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자랑할 것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약한 것만을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그때가 바로 주님이 강하게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 오늘은, 바울 사도가 교만하지 않도록, 육체에 마귀가 부리는 가시를 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병든 자들도 낫게 했고(행 28:8-9), 귀신들도 쫓아냈고(행 19:11-12),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린(행 20:9-12) 놀라운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의 고질병을 치료받지 못한 것은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처럼 자신이 사단의 사자를 몸에 지니고 있지만, 이로 인해서 바울은 겸손해지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방편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에게 감추고 싶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까지 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1. 바울은 환상과 계시받은 것이 지극히 컸기 때문에, 교만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은혜 때문에 바울이 교만하게 되어 실족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가시라는 제동 장치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은혜와 고난이 뒤섞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깊이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큰 신령한 은혜 체험과 혹심한 육체의 가시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배려 속에서 주어졌음을 알면서 살아갔습니다.
<육체에 가시>(thorn in the flesh)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말뚝(stake)을 가리키는데, 이 단어는 ‘십자가’(cross)와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여기서는 ‘가시’(splinter)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육체나 마음에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 가시를 바울을 대적하는 이방인 대적자나 유대인 대적자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heathen enemies or Judaising rivals)
어떤 이는 이 가시를 육체적인 정욕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the conflict with sensual passion). 당시 헬라인 작가들은 ‘가시’란 말을 육체의 정욕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사용했습니다). 로마서 7장 23절(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에베소서 6장 16절 (악한 자의 불화살을 소멸할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에서 ‘불타는’이라는 동사가 분사형이지만 같은 단어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격으로 볼 때 이 견해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가시’는 육체의 만성적인 질병을 가리킵니다. (chronic infirmity of body). 여기서 ‘가시’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가시로서 눈병을 가리킵니다. 눈병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큰 글자로 글씨를 썼습니다(갈 6:11). 갈라디아 교인들은 자기들의 눈을 빼서 바울에게 주고 싶어했습니다( 갈 4:15) 이것은 안질로 인한 신경통을 가리킵니다. (neuralgia of the head and face, or inflammation of the eyes)
누가복음 8장 16절에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이 사탄에게 눌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는데, 바울도 그의 육체의 가시가 사탄이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우리 주님이 사탄에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행 10:38.
벤슨(Ben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란 육체의 연약함을 가리키는데, 바울이 전도할 때, 그 효과를 방해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청중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비난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육체의 가시란 바울이 환상을 볼 때 얻은 육체적 연약함을 가리키고, 이것은 바울의 외모와 자세와 언어에 영향을 미쳐서 그의 복음 전도가 잘 수용되지 못하게 했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게까지 했습니다. 다니엘은 계시를 받았을 때 외모가 변하고(단 7:28) 병든 자 같이 되었습니다.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하늘의 영광을 봄으로써 그의 신경에 타격을 받아서 간질을 얻게 되었고, 말을 더듬게 되었고, 외모조차 우스꽝스럽게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이 견해는 휫트비가 주장했고, 벤슨과 맥나잇과 슬래이드와 블룸필드도 동조한 주장입니다( Whitby, and has been adopted also by Benson, Macknight, Slade, and Bloomfield.)
라틴 교부들은 통제 불가능한 정욕이라고 말했고, 크리소스톰과 제롬은 두통이라고 했고, 터틀리안은 귓병이라고 했고, 로젠뮬러는 머리에 생긴 통풍이라고 했습니다.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의 가시가 담낭통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통풍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귓병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두통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3절에는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에게 눈이나 옆구리의 가시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강한 성욕이나 본성을 잃는 것이나 사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it was usual with the Jews to call concupiscence, or the vitiosity of nature, Satan).
바울과 함께 여행했던 ‘테클라’라는 여성이 바울의 불결한 욕정을 일으킨 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who pitch upon the lust of uncleanness, and spare not to mention the person by name, one Tecla, who, they say, travelled with him, and was a snare to him). 그러나 이 견해는 거룩한 바울 사도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것이고, 자신을 거짓 사도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육체의 가시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들과 비난들과 박해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바울에게 쑤시는 가시였고 찌르는 가시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탄의 사자를 바울을 심히 대항했던 거짓 사도들이나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친 ‘구리장색 알렉산더’나, 바울을 모독하고 악하게 말한 ‘후메네오와 빌레도’와 같은 사람을 가리키고, 바울은 심하게 박해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나는 사탄의 사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사탄은 욥의 경우처럼 바울의 몸에 질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사탄은 마음을 부패하게 만들기도 해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시험을 당하게 하고, 폭력적인 박해를 일으키기도 하고, 바울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선동하기도 합니다.
<육체에 가시>
1. '가시'에 해당하는 헬라어(σκόλοψ: 스콜롭스)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것, 가시, 파편, 말뚝 등을 의미합니다.
(1) 바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적대자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2) 완전히 변화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 때문에 생기는 육적인 유혹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으로서 간질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간질은 사단이 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마태복음 17:14-18을 보면, 간질 환자는 귀신이 역사하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습니다.
갈라디아서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며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4) 아마도 고질적인 안질, 이 안질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날 때 받은 강렬한 빛 때문에 생긴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기는 했지만, 완쾌되지 않고 남아 있는 눈의 통증이었습니다 (행 9:9의 다메섹 사건).
또한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타우르스 산맥(Taurus Mountains)을 지날 때, 얻은 안질을 가리킵니다. (행 13:14 주석)
(5) 어쩌면 지속적인 두통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6) 언어 장애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로는 유창하지만, 언어 장애가 있어서 언변이 보잘것없었습니다( 고후 10:1, 9-11; 11:6).
(7) 바울의 외모가 보잘것없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교회 역사에 전하여 온 것을 보면, 바울은 키가 아주 작고, 대머리에다, 코도 길죽한 매부리코에 삐뚤어졌다고 하고, 눈에서는 눈물과 눈곱이 항상 달려있고, 다리는 난쟁이처럼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과 질병을 종합적으로 표현해서 한 마디로 <육체의 가시>라고 했습니다.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1. 이렇게 바울이 당한 고통과 질병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사단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표현한 것은 그 고통과 질병이 바울의 삶을 위협적으로 방해하는 대단한 장애물이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단이 주는 고통과 가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도록 붙들어주시기 위해서 주신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2. 이처럼, 궁극적으로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서 성도의 보존을 위해 사용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의 체험이 이것을 잘 예증해주고 있습니다.
욥을 몹시 괴롭히던 사탄 마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허락과 지배 아래서 욥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욥 1:12)
3. 바울 사도는 계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성경을 열두 권이나 썼는데, 이 성경은 계시로 된 것들입니다.
이 계시 받은 것이 너무나 크고 또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울을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제동 장치로 가시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일반 성도들도 은혜를 너무 많이 받으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려고, 제동 장치를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에 붙어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서 신앙의 파산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가운데는 세상적으로 직장도 좋고 경제적 형편도 좋아서 아무 걱정이 없을 가정이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않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가시를 주셔서, 하나님과 천국에 소망을 가지게 하시는 경우들을 자주 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가시를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4.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가시는 사단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사단의 사자니까 확 뽑아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사자를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중요하게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의 병을 많이 고쳤습니다.
심지어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바울에게서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사람이 낫기도 했습니다. (행 19:11-12)
그런데도 막상 바울 자신은 큰 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 고통은 마치 가시가 콕~콕~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분(김*봉)은 평생을 두통으로 고생하시는데, 항상 진통제를 가지고 다니시면서 사시드라고요.
5. 이런 고통을 당할 때, 바울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아, 나는 약하고 형편없는 존재구나. 이런 상태에서 얼마나 살 수 있을 것인지...”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바울을 통해서 신기한 능력을 체험하니까, 바울은 신처럼 떠받들지만, 막상 바울 자신은 속에 가시가 있으니까, “여러분들, 모르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약하고 천한 사람입니다. 나는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처지입니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신 속에 가시가 있음으로 인해서, 아무리 사람들이 바울을 높이고 칭찬해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만 나타냈던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조용기 목사님(1936-2020년)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을 모아놓고 부흥회를 인도하지만, 막상 자신은 기저귀를 차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용기 목사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병이 낫는데, 막상 조용기 목사는 기저귀 차는 것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가, 목회 후반기에 기저귀 차는 병을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용기 목사님은 교만하지 않고, 주님께 기도로 매달려서 위대한 사역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위대한 바울 사도에게 교만하지 않고록 하나님께서 육체에 가시인 사탄의 사자를 주신 것과도 같습니다.
5. 바울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치 첩보원 노릇을 하는 사람에게 본부에서 몸속에 전자칩을 수술로 넣어두어서, 다른 짓을 하면 몸에 전기 고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제동 장치와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심한 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능력이 저렇게 많은 사람이 어찌 자기 병은 고치지 못하고 저 모양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지방 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업신여기지 않고, 바울을 버리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천사같이, 예수님과 같이 대접했다”고 했습니다. (갈 4:14)
그 성도들은 바울을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바울의 육체적 결점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을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자기 눈이라도 빼서 바울에게 주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6. 계시의 말씀을 풍성히 받은 바울 사도는 “나는 육체에 질병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치지 못할 병입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생긴 병도 아니고, 솔직히 귀신이 주는 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서도 육체에 고질병이 있으십니까?
가정적으로 남모르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인격적으로 갖출 것은 다 갖추었는데, 한 가지 고질적인 장애가 있습니까?
이것은 다 여러분을 겸손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시기 위한 방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로 인해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다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솔직하게 자신이 약하다고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크신 은총을 간증하시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1. 바울은 가지고 있는 가시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세 번이나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가시만 없다면, 더욱 주님을 위해서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이것을 없이 하여 주십시오!”라고 세 번에 걸쳐서 간절히 작정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기도했다고 다 허락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들으십니다.
그러나, 기도를 들으셨다고 우리의 소원대로 다 허락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3.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자기가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뭐든 다 허락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별미 헌금을 하면, 그 액수 보아서 기도해준다고 유혹합니다.
또, 별미 헌금의 액수에 따라서, 기도해주기도 하고, 퇴짜를 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백지 수표를 쓰기도 하고, 집을 잃기도 합니다.
이것은 순진한 성도를 속이는 거짓이고, 사기입니다.
그래서, 돈 잃고, 가정도 깨진 어리석은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순진한 성도들은 기도 은사 받은 종이라고 하면서, 따라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를 보십시오.
목숨 바쳐 헌신한 능력의 종 바울 사도가 고통스러워 죽겠으니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도 하나님께서 그만하면 네게 준 내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허락을 거절하셨습니다.
4. 그러므로, 속지 마십시오.
불경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치 자기의 심부름꾼이나 되는 양, 자기가 기도해주면 모든 것이 성취된다고 유혹하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육신의 부모님도 자녀들이 달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다 주지는 않습니다.
자녀에게 유익한 것은 주지만, 해로운 것은 성인이 된 다음에 준다고 합니다.
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우리의 참된 유익을 위해서는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의 응답은 yes만이 아니라 no로도 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잔을 할 수만 있으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1. <세 번>이라는 숫자는 세 번에 걸쳐서 진지하고 간절하게 기도한 것을 가리킵니다 (막 14:32-42).
이처럼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지만, 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기도한다고 해서 다 응답 되는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만 응답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대로 다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응답 받지 못한 기도>
(1)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입니다.
야고보서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사례- 발람의 기도.
민수기 22:17. 모압 왕 발락은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 ① 크게 존귀하게 하고(권력), ②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고(물질), ③ 요청하면 무슨 향락이든지(정욕) 주겠다고 했습니다.
민수기 22:12. 그러나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16.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민수기 22:23. (발람이 모압으로 가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길을 막았습니다.
결국 발람을 죽이셨습니다.
민수기 31:8.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이처럼 발람은 선지자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모압왕 발락에게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하다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2) 사람의 멸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응답받지 못한 기도입니다.
<요나의 잘못된 기도>
요나서 4:3. 요나가 니느웨 백성이 멸망 받기를 위해서 기도했으나
요나서 4:11.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이라서 니느웨 백성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요나는 자신을 죽여달라고 두 번이나 기도했으나 응답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의 잘못된 기도>
즉 열왕기상 19장 4절에서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가주소서’라고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음식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잘못된 기도>
누가복음 9장 54절에서 요한과 야고보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과 야고보를 나무라시며 다른 동네로 가서 복음을 전하자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기 위한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3)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높아지고 권력을 얻으려는 기도는 응답하지 않고, 헌신봉사 충성하려는 기도는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다 보면, 그 다음에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됩니다.
마태복음 20장 21절에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아들 하나는 주의 우편에 다른 아들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가 마실 잔을 마시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즉 나는 세상 죄인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데 너희가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선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바울이 <주께> 기도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라는 헬라어는 '톤 퀴리온'(τὸν Κύριον)으로서 정관사가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리킬 때는 정관사 없이 그냥 '퀴리오스'(κύριος)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사야 53장 4절에서 말씀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질고와 질병을 담당하신 것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질고와 질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바울처럼 그대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 앞에서는, 바울 사도가 받은 계시가 너무나 지극히 커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교만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가 육체의 약함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약할 때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강하다는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바울이 세 번 간구하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현재의 형편이면 바울에게 만족하다고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의 가시로 인해 선교 사역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하시는데, 몸이 굉장히 약합니다.
그러나, 몸이 약하다고 반드시 일찍 죽는 것은 아닙디다.
전남 담양에 김권수 장로님은 열네 살부터 죽는다고 내놓았으나, 94세까지 사셨습니다.
이 장로님은 얼마나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시는지, 교회에 유익을 많이 끼치셨습니다.
일본 강점기 때 신앙 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손톱에 대나무 꼬챙이를 박히고, 해방되어 출옥되었을 때 교역자들이 없는 네 군데 교회를 맡아서 설교하고 심방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교역자가 공석일 때는, 교역자 일을 맡아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새벽예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강단에서 설교하실 때에도 힘이 없어서, 큰 소리를 못하시고, 약하디 약한 소리로 설교하셨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진실하시고 은혜가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분의 자재분들도 믿음 생활을 잘하셔서, 모두 목사님과 장로님, 권사님들이 되셨습니다.
4. 광주에 남궁경 권사님도 처녀 때부터 약하디 약해서 시집도 못 간다고 했고, 평생을 베지밀로 연명을 해가셨는데, 89세까지 사시고, 모범적인 권사님이셨고, 아들도 장로님으로 기르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약한 육체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약하다고 주의 일을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몸이 약하다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의 일을 맡아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시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더욱 행복한 삶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5. 이처럼, 인간이 약한 데서, 신기한 능력이 나타나니, 그 능력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래 목소리도 굵고, 음량도 크고, 신체적인 힘도 강하고, 인물도 좋다면, “저분은 인물도 좋고, 목소리도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더라”고 사람을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그러나. 인물도 못 생겼고, 몸매도 매력이 없고, 목소리도 시원치 않는데, 들어보니 잔잔히 흐르는 깊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느낄 것입니다.
6. 원래 예전에 한국교회에서 지도적인 목사님들인 박형룡 박사님이나 이상근 박사님은, 모두 별로 매력이 없고 목소리도 신통치 않는 분들이었습니다.
강의 때도 거의 강의 노트를 읽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은혜가 깊은지 한국 전체 교회를 수십 년 동안이나 지도하시고, 자유주의 신학 사조로부터 지키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저서는 지금도 중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7. 어느 장로님은 말도 조리 있게 잘못하지만, 말씀을 전하면 굉장한 깊이와 은혜가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것을 보면, 확실히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약한 부분이 있다고, 주의 일을 못 한다고 핑계하지 맙시다!
우리는 단지 순종하면, 하나님이 붙들고 일하시는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교회 일도 되고, 우리 자신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몸이 약해도 봉사할 수 있고, 말재주가 부족해도 구역에서나 주일학교에서 하나님 말씀 전할 수 있고, 가난해도 주의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8.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의 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큰일을 감당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직분자로 임명되신 분들은 염려 말고 기도하면서 순종하기 바랍니다!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1. <이르시기를>이란 말(εἴρηκέν: 에이레겐)은 재판정에서 최종 판결문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은, 바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2. 주님의 응답은 바울이 원했던 것과는 상반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매우 친절한 거절>의 말씀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뼈아픈 <가시>를 그대로 지닌 채 만족해야 했습니다.
3.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은, 바울이 사도직을 맡고, 사도로서의 활동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은혜>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 안에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직 육신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는 모든 고난이 반드시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라도 하나님의 끊임없는 돌보심을 받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가까운 예로 가수 손경민은 백혈병 환자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고, 심지어 아기까지 낳아서 기르면서도 기도하여 아기가 장님이 되지 않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은혜>라는 찬송을 작사 작곡하고 직접 불렀습니다.
이처럼 손경민 복음성가 가수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그 노래에 남다른 감동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런데, 사람이 고난이 없을 때보다, 고난이 많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이 강함을 알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자신이 약할 때 강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1. 이 말씀은 당연하면서도 역설적입니다.
인간이 강하면,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공간이 적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이 약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공간이 그만큼 많습니다.
실제로 바울 사도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대자들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였지만,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2. 그래서, 성경 야고보서 4장 6절에는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진리를 터득한 바울 사도는 끊임없이 이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 여기서 <머물게>에 해당하는 헬라어(ἐπισκηνώσῃ: 에피스케노세)는 <장막에 확고히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인간의 약한 부분을 그리스도의 능력의 덮개로 완전히 확 감싸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약함을 알고 주님을 의지할 때, 주께서 능력으로 완전히 감싸 안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많이 인식할수록,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의지할수록 더욱 그리스도의 능력이 확고하고 변함없이 머무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2. 그래서, 바울은 즐거이 약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고,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약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지혜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감사할 수 있는 자세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나름대로 부족한 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부족한 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불행감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언제나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도 그 부족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항상 잔치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기들의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의 강함을 과시했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부족과 약점과 고통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행복한 사람이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4.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주의 일을 할 때, 주님께서 약간 도와주시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나는 너무 부족하니, 주님께서 확 감싸 주셔야지, 조금 붙잡아 주셔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시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께서 천막 치듯이 주의 능력으로 완전히 감싸 안으시는 은혜가 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1. 바울 사도는 자신의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했습니다.
(1) 세상에 이런 부정적인 요소들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당하게 되면, 불행감을 느끼게 되고, 신앙이 흔들리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런 부정적인 삶의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2)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 부정적인 삶의 요소들을 이용해서 주님을 더욱 의자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자기에게 더욱 풍성히 임하게 하는 신앙적 자세를 갖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파악한 것입니다.
자기가 약하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바울 자신에게 관심과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을!
(3) 이것은 부모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부모님들도 자식이 아프고 힘들 때 더욱 관심과 사랑과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하고, 욕을 먹고, 궁핍하고, 핍박받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바로 그때 우리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하시고, 더욱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고, 더욱 능력으로 붙들어주심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면, 자기 문제를 혼자서 먼저 해결하려고 주의 일을 뒤로 미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처럼 어려울 때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가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은혜 주시면 주의 은혜를 의지하여 주의 일을 하러 갔던 것입니다.
자기의 가시가 가만있다가 찌를 때, 사단이 가만있다가 괴롭힐 때면, 뒤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주의 일을 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일 하는 가운데, 괴로움도 가시고 사단도 물러가고, 주님이 힘있게 바울을 붙들고 역사하심을 늘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 번 경험을 통해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힘들 때,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혜를 강력히 받고, 더욱 능력있게 주의 일을 하라고...
바울 자신은 주의 일을 해야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약할 그때에 곧 주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남을 여러 번 경험을 통해서 확신했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지나 갈수록 의지 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2. 바울 사도가 좋아하는 복이란 현재 일반 사람이 좋아하는 복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1) 보통 사람들은 돈이 잘 벌리고, 자녀가 잘되고, 건강한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약하고, 능욕을 받고, 궁핍하고, 핍박받고, 곤란한 일들을 만날 때,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복이라고 했습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2) 그러나, 바울은 이 역설적인 진리를 체험을 통해서 확신하고 살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불행한 요소들을 만날 때,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기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 그런데, 가만있어서는 불행 속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더욱 주님 의지해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주님 모시고, 주님이 주신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꼭 교회 일만이 아니라, 직장 일이나 사업이나, 가정에서 가족을 돌보는 일이나, 공부하는 것이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그 가운데서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면, 주님께서 은혜와 능력 베푸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은 어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오히려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성령으로 임하셔서,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함이라”는 역설적인 말씀을 깨닫고, 약할수록 더욱 주님 의지하고, 주의 은혜로, 주님이 맡기신 일을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