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급(?)에 맞지 않게 일제시대에도 전국구였습니다.
쌍두마차라고 해도 좋을 논개와 촉석루 때문이죠.
그만큼 진주에 관한 자료는 많이 찾을 수 있는데요.
오늘은 78년 발행된 관광기념사진첩에 등장하는 진주와 촉석루 그리고 진양호 이야기입니다.
지나간 모든 것은 애틋해지고 그리워지는 법인데, 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70년대 제작된 관광첩들은 대체로 유명한 산(山)과 사찰이 중심입니다.
이른바 명승(산)과 고적(사찰)로 지금은 명승고적이라 하지만, 예전에는 고적명승이라고 했죠.
진주처럼 '시 city'의 타이틀을 단 경우는 극히 이례적입니다.
촉석루. 논개. 그리고 근대문명인 진양호가 있기 때문이고, 상당히 많은 판본들이 발행되었습니다.
참고로 '시City'라는 타이틀로 발행된 곳은 부산, 춘천, 부여, 여수 정도에 그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 짐작이 가능할 겁니다.
춘천은 소양호, 여수는 여수밤바다가 아니라 오동도 덕분입니다.
1978년 4월 발행되었군요.
대구에 적을 두고 있던 매일관광여행사에서 발행했습니다.
우진관광사와 함께 7,80년대 우리의 내밀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진주 관광 기념첩 리스트를 보시려면 ----> 여기를
당시 진주 시가지입니다. 저멀리 진양호까지 담겨 있군요.
지금보자면 참 작은 세계같지만, 저 작은 세계도 그 모든 것을 담기엔 너무 큰 공간이었습니다.
부산의 영도다리 근처 추억을 담은 영화 '친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뒤벼리.
벼리라는 말은 벼랑이라는 뜻이죠.
남강변의 절경 가운데서도 금강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뛰어났다.
도동벌로 나가는 통로 구실밖에 못하던 이곳이 이제 새 명소로 개발되었다.
차가 저렇게 이따금씩 지나간다면,
남강변을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와 함께 절벽은 정말로 걸어보고 싶은 곳 같습니다.
진주성 안쪽에는 한때 민가가 많았다더니 정말 그렇군요.
차길이 놓여져 있고....
모든게 관광화되어 있는 지금 보자면, 성안에 민가가 있다는 게 의아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성안에는 원래^^ 사람들이 사는 게 정상이죠. 참 살가운 풍경입니다.
영남포정사라는 곳도 있나 보군요.
굳이 이 사진을 올린 까닭은 오른쪽 팻말입니다.
클릭해 보시면 알겠지만, '이 성안에 개는 데리고 오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군요.
남강변 모래밭에서 잡아 먹힐까 그런걸까요?^^(농담입니다.)
개 출입금지라는 푯말...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됩니다.
루각의 기둥아래 자가용이 햇볕을 피하고 있군요.
지금의 문화의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연출이겠죠...~~~~
서울 와서 북한산 동장대와 남한산성 수어장대를 알기 전까지는
서장대는 진주에만 있는 고유명사인줄 알았습니다.
서장대는 말 그대로 서쪽에 있는 장군의 지휘대를 뜻하는 보통명사라는 걸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멘 여고생들 모습입니다.
관광객일 수도 있겠고 진주에 있는 여고의 학생일 수도 있겠죠.
40년을 보태면 지금 50대 말이 되겠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왔겠죠.
참고로 지붕 위에 뾰족한 장식탑이 있습니다.
1960년대 의상대 에서도 발견됩니다.
저런 건축 양식도 변하는 거겠죠. 지금은 좀 유치하게 보일 듯 싶은데요...~
촉석루의 야경.
지금처럼 진주 유등축제가 전국 최고의 축제가 될 줄 알았을까요?~~~
이렇게 야경을 화보로 심는 고적지는 별로 없습니다.
촉석루는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가능한 이야기이겠죠.
개천예술제에서 했던 불꽃놀이.
화려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꽃놀이는 항상 묘한 상념을 불러 일으킵니다.
좌측에 있는 의자....
이런 의자를 기억하시나요?
시멘트로 골조를 만든 다음 그 위에 나무를 박아 고정시켰던....흔히 보이든 스타일인데....
중학교 시절 군(郡) 명승지에 있던 이런 형태가 조금은 살풍경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인데, 이렇게 공식스러운 사진은 올리는 걸 저어합니다만.
그래도 1978년 촉석루는 비교할만한 가치가 있겠죠.
강물에 비친 풍경을 잡아내기 위해 한참 시간을 소요했겠습니다.
촉석문. 저시절 싸우면서 건설한다고 바쁜 우리를 위로해주었던 문.
성문 위쪽 좌우측에 돌출된 것은 물을 바깥으로 빼어 내는 거라고 하죠.
이 역시 북한산의 성문에서 알게 된 이야기.
저때는 몰랐던.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고,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시절에야 촉석문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던 극장에 더 관심많았던 시절이라.
이 각도가 촉석루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일제 때부터 이 각도는 유명했죠.
'옛날에는 암반과 바위 사이를 배가 지나 다녔다고 한다'라는 돌고래 담배피는 이야기도 있군요.~
당시 전국 곳곳의 가이드들은 해당 명승지에 일찌기 없는 전설도 만들어 내곤 했습니다.
촉석루에서 강건너 대숲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당시 사진화보집에는 잘 담겨지 않습니다.
대신에 다리 건너 저 흰 건물이 무얼까요?
남강회관이라는 나이트가 있기에 딱 좋은 자리인데....~~~
같은 앵글인데요.
다리 건너 저 건물이 도대체 어디에 쓰던 건물인고.
강건너 저 건물 도대체 어데 쓰는 물건인고...
비봉루...
한두번 가 보았지만, 비봉루라는 한자를 읽어보는데에 그쳤던 것 같습니다.
신록속에 고려정자.. 참 잘 어울립니다.
의곡사 일주문이라는 글씨체가 날렵하고 경쾌합니다.
해인사 승려들의 예불 음성을 닮은 것 같습니다.
계단 좌우측에 바나나 나무가 있군요.
'우리들의 산'은 그때의 바나나 나무에 대한 유일한 '기록'처입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옥봉동에 연화사라는 사찰이 있었군요.
1924년에 창건되었다니, 그러지 않아도 탑의 모양새가 조선스럽지 않습니다.
성벽은 말끔히 보수정비했는데, 바닥은 아직 다음년도 예산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잠간, 같은 시기 진양호의 낭만을 보시려면....-> 여기를
호국사 대웅전을 검색해 보았더니 지금은 좌우의 탑이 없어졌습니다.
슬림한게 참 보기 드물게 특이한 몸매를 가졌군요...~~~
지금이라면 좋은 몸매라고 찬사를 받았고, 수많은 여성들이 탑돌이를 했을텐데..아깝습니다.
이상 진주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는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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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사진첩 뒤쪽에 있는 관광안내도입니다.
지금보다 명승고적지가 한참 작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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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촉석루는 인기가 많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논개를 언급하면 곧 민족주의자연한 포지션을 취할 수도 있어서라는 것도 한 이유가 아닐까요....
진주시 중앙 로타리...
놀랍게도 한국 최초의 칼라 분수대라고 합니다...거듭 놀라워라.
중소기업은행과 중앙약국 사이로 저멀리 비봉산까지,.....그때는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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