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산 생활
한창 바빠 정신없는 중에 모교 학과동문회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동문회보에 싣도록 ‘나의 마산 생활’이란 제목으로 글을 써달라는 것이다. 동문회 일이 그런 것이라서 차마 거절은 못하고 되는대로 몇 자 적어 보냈다. 쓰다 보니 내 삶을 한번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일독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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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 경남대학교에 임용되었으니 나의 마산 생활도 올해로 어언 23년째로 접어들었다. 먼저 오신 75학번 김성열 선배님이 자리가 났다는 것을 알려주셨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끌어주어 올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경남대를 국립대학교로 잘못 알고 있을 정도로 정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 태어나 그때까지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어 저 멀리 경상남도, 그것도 남해 바닷가에 있는 학교의 사정을 전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인근에 피붙이 하나 없음은 물론 임용 과정에서 첫 걸음을 해보니 이 지역의 말투까지 귀에 설어 타향도 아니고 꼭 타국에 온 듯만 하여 처음에는 속으로 ‘도저히 오래는 못 있겠다. 5년 내로 떠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랬었건만 오늘도 여전히 무학산 자락의 연구실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이 또한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회한에만 젖어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 들면 고향이라 했던가, 어느 새 이곳에 흠뻑 정이 들어 이제는 정년 후 서울로 되돌아가는 것이 걱정이 될 지경이다. 내가 이렇게 달라진 데에는 다른 무엇보다 이곳에서 함께 지낸 모교 교육학과 동문들의 덕이 컸다. 내 임용 당시 경남대 교육학과에는 56학번 대선배 이석주 교수님부터 75학번 김성열, 76학번 윤경희 교수님까지 세 분이 계셨다. 나는 78학번으로 김 선배, 윤 선배와는 학부 때부터 함께 캠퍼스 생활을 했으므로 친근한 사이였다. 특히 김 선배는 복학 후 대학 3학년부터 수업을 같이 들었을 뿐 아니라 한 날 졸업한 졸업 동기이기도 하다.
내가 마산에 내려와 처음 한 일은 동문 및 학과의 또래 교수들과 ‘놀자 클럽’을 만들어 시시때때로 야유회를 다니는 것이었다. 이름 하여 ‘썩도 (썩는 도끼자루) 모임’을 결성한 후, 한 달에 몇 차례 인근 산천으로 놀러 다녔다. 모두 수업이 없는 날을 잡아 차 한 대에 몰아타고는 아침에 학교를 출발하여 저녁 늦게까지 주로 지리산, 섬진강 쪽으로 쏘다녔다. 진주, 산청, 함양, 남원, 구례, 하동 등지의 물 좋고 산 좋은 명승지와 맛집을 섭렵한 것이다. 한 동안은 별 문제없이 잘 놀고 다녔는데 김성열 선배가 점점 더 바빠지면서 모임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몇 번은 아침에 신나게 출발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선배가 휴대폰을 받더니 갑자기 얼굴이 하얘지면서 급한 일이 생겨 학교로 돌아가야겠다고 하여 바로 차를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김이 새고,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게 신선처럼 놀아보자며 시작한 모임도 애초 취지를 유지하기가 힘들어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애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에는 김 선배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깟 일로 김 선배를 탓하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적 도리는 아닌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그 분께 받은 은덕이 얼마나 큰가! 무엇보다도 선배가 아니었으면 나의 직장 생활은 오늘까지 오지 못하고 진즉 끝났을 것이다. 승진 시점과 요건 같은 것에 당최 무지한 나를 위해 선배는 늘 ‘자네는 언제까지 논문 몇 편을 써야 하는데, 현재까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안다.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식으로 관리해 주셨다. 후배의 커리어 매니저를 자임하신 것이다. 그 뿐인가, 또 내가 학교의 내밀한 풍토를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일을 저질렀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중간에서 바람막이가 되어 주셨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분위기 파악 못하는 후배는 일이 다 지나간 후에야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 덕에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마치 남의 일처럼 전해 들었을 뿐이다. (김 선배는 지난 주 갑자기 고열과 오한으로 입원을 하셨는데, 검사 결과 간에 농이 찼다 한다. 아무래도 과로가 원인일 듯싶다. 하루 빨리 쾌차하시고, 앞으로는 일 좀 줄이시기를. 그래야 부족한 후배 계속 챙겨주시지.)
윤경희 선배님과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같은 전공을 운영하면서 이제껏 서로 섭섭한 일 한 번 없이 늘 웃는 낯으로 잘 지내오고 있다. 그 모든 것 역시 선배님의 넓은 아량과 깊은 이해심 덕분이었음을 요즘 들어서야 철없는 후배는 뒤늦게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윤 선배님께는 최근에 축하드릴 일이 있는데, 시도하신 다이어트가 완전히 성공하여 대학 때의 몸매를 다시 회복하신 것이다. 내가 처음 임용되어 윤 선배님을 오랜만에 뵀을 때는 첫눈에 못 알아 볼 정도로 몸이 불어있었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 무슨 비법을 쓰셨는지 몸이 반쪽이 되어 대학생 때의 청순가련한 자태를 되찾으신 거다. 혹시 그 방법이 궁금한 분은 윤 선배님께 문의하셔도 좋겠다. (나도 윤 교수님께 들어 그 비방을 알긴 아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어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 동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부조는 우리 학교 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근 창원대에는 75학번 김기민 선배, 그리고 조금 떨어진 김해 인제대에는 76학번 이한규 선배가 계시는데, 우리 모두는 강의와 논문 심사 등에서 지속적으로 상부상조하고 있다. 며칠 전에도 우리 학교 박사논문 심사에 그 두 분이 외부 심사위원으로 도와주셨다. 심사 후에는 심사위원들의 만찬이 있는데 늘 오범호 교수도 함께 하므로 총 6명(김성열, 김기민, 윤경희, 이한규, 김원중, 오범호)의 교육학과 경남지역 소동창회가 열리는 셈이다. 왜 우리끼리 모이면 그리 마음이 편하고 모든 얘기가 재미있는지..... 서로 돌아가면서 실없는 소리를 하고 또 낄낄 깔깔 대는데, 나도 배꼽 잡고 웃다가 또 버릇없이 한 마디 했다. “선후배님들, 우리 노는 꼴을 옆에서 보면 꼭 ‘dumb and dumber’ 같다고 하겠어요. 무슨 대학 동문들이기에 저 지경인가 하면서 말이지요.”
각설하고, 썩도 모임 해체 이후 나의 ‘노는 게 제일 좋아’ 기질은 어떻게 달랬을까? 이 문제 역시 교육학과 후배 덕에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2009년에 93학번 오범호 동문이 우리 학교에 부임해 왔는데, 이 친구가 처음에는 몰랐는데 갈수록 한량 기질을 보이더란 것이다. 술 잘 마시고, 담배도 잘 피우며, 노래와 춤도 좋아한다. 음주가무가 다 되는 것이다. 오 교수가 온 후로 매주 3회 이상 자정 너머까지 함께 행복한 음주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 교수는 제 할 일은 똑 부러지게 잘 해서 김성열 선배의 뒤를 이어 우리 학교의 기둥으로 커가고 있는 중이다. 혹자는 훌륭한 학자 그릇을 김원중이 다 망치는 거 아니냐고 오해하는데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뛰어난 팔방미인적 자질은 누가 만들거나 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타고 나는 것이다. 천성이 원래 흥이 많게 태어난 친구인 거다.
함께 음주가무를 즐기던 어느 날, 내 단골 스크린 골프장으로 오 교수를 인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기대와 예상대로 아주 푹 빠지는 것이다. 이제는 나만 보면 먼저 골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물론 짬만 나면 골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오늘도 오전에 나 빼고 동료 교수들과 고성 CC에 다녀왔으며, 저녁 시간인 지금은 또 동네 스크린 골프장에서 놀고 있다고 한다. 우리 학과에는 오범호 교수 이후로 남자 교수 3명이 더 왔는데 그들 역시 늦게 배운 골프 질에 날 새는 줄 모르며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다. 술과 골프로 맺어진 나 포함 총 5명의 우리 학과 교수들은 주변으로부터 ‘김원중과 혼수상태’라고 불리면서 학생 MT 등 각종 학과 일에도 떼 지어 함께 몰려다닌다. 그러다 보니 혼자 다닐 때보다 한결 재미있을 뿐 아니라 덤으로 학생 지도에 열과 성을 다 한다는 칭송까지 받게 되었다. 문제라면 우리의 목적이 과연 학생 지도인지, 아니면 MT를 빙자하여 또 우리끼리 하룻밤 잘 놀아보자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거야 아무려면 어떠랴, 둘러치든 메치든 학생들과 늘 가까이 하는 교수들은 오직 ‘김원중과 혼수상태’ 뿐인 것을.
돌이켜 보면 내가 이날 이때까지 굶지 않고 살아온 것은 전적으로 모교 덕이다. 각종 회의에 참석하여, 아무 것도 몰라 입 다물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S대 출신이 신중하고 겸손하기까지 하다’고 칭찬해 주고, 가끔 입을 열었다가 턱도 없는 엉뚱한 소리를 하면 ‘S대 출신이 유머 감각까지 있네’라고 오해해 주며, 어쩌다가 누구나 다 알만한 당연한 말을 해도 ‘역시 S대 출신은 달라’ 하며 억지로라도 감탄해 주니 말이다. 아, 고맙고도 고맙고, 그립고도 그립도다, S대 교육학과여!
(2017. 5.23.)
(경남대 김원중)
첫댓글 국수 면발이 후루룩 올라 오듯
단숨에 빨려 올라오는 글이 참
재미있습니다~!
진즉 이런 글을 만났다면
독서에 취미가 좀 생겼을지요^^
김원중과 혼수상태에서
사레걸릴뻔 했네요.
장기하와 얼굴들은 귀여운 이름이었어요..
교수님들께서 혼수상태 이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 대박입니다.. ㅜㅜ
'국수 면말이 후루룩 올라 오듯 단숨에 빨려 올라오는 글'이라!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며, 제 글에 대한 극찬이군요.
정말 감사하고요, 글은 선생님이 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학적 향기가 나는 놀라운 비유법!!!
설 가는 기차 안에서
무료함을 달래주는 즐거운 글이었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