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언제나 설레지만, 갑진년 청룡의 해를 멎이한 첫 여의도포럼은 유독 특별했다. 1월의 서늘한 공기가 감돌던 오후 3시 반, 안국역 2번 출구 앞에는 12명의 동기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새해 덕담을 나누는 얼굴마다 반가운 온기가 가득했다. 오늘의 도보 여행지는 역사와 현대, 그리고 법의 정기가 함께 호흡하는 '헌법재판소'와 '북촌한옥마을'이다. 우리의 첫 발걸음은 안국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헌법재판소로 향했다. 이곳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한 축을 담당하며 헌법 제111조에 따라 법률의 위헌 여부, 탄핵, 정당 해산, 헌법소원 등을 다루는 엄숙한 기관이다.
그러나 그 엄숙함 뒤에는 수많은 역사의 겹이 쌓여있다. 조선 말 우의정 박규수 선생의 저택이자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있던 자리, 훗날 경기여고가 들어섰던 유서 깊은 터다. 도서관 증축 과정에서는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와 부마 구민화의 집터가 발견되기도 했다. 본래 신분증을 제출하고 출입증을 받아 들어서는 곳이지만, 이날은 이광희 동기의 사위(공보관/판사) 덕분에 전문 견학관의 세심한 안내를 받으며 백송하늘공원과 대심판정을 둘러보는 특별한 호사를 누렸다. 헌법재판소 로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헌법 제10조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과 땅, 사람(天. 地. 人)을 형상화한 돔 형태의 천장과 바닥은 사회적 통합을 염원하는 철학을 담고 있었다. 옥상에 위치한 백송하늘공원에 오르자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 보현봉, 경복궁, 청와대,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 저택까지 서울의 장관이 시원한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회원들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발 아래로는 V자 모양으로 자란 백송 한 그루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어 발걸음을 옮긴 대심판정. 뉴스 화면으로나 접하던 9인 재판관석에 직접 서보고 앉아보는 영광을 누렸다. 마치 헌법의 수호자가 된 듯 가슴 한구석이 웅장해지는 순간이었다.
견학을 마치며 공보관실로부터 헌법책 두권과 연필을 선물 받고, 전인구 회장에게는 '이탈리아 빌라와 정원'이라는 고풍스러운 서적이 기증되었다. 분에 넘치는 대접에 마음까지 풍성해졌다. 헌법재판소를 나와 북촌한옥마을로 들어섰다.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자리잡은 북촌은 예부터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 하며 붙은 이름이다.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에 펼쳐진 한옥 밀집 지역은 그야말로 도심 속의 생생한 박물관이다. 가회동 주민센터를 지나 백인제 가옥으로 향했다. 영화 <암살>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진 이곳은 1913년 한상용이 지은 근대 한옥으로,
압록강 흑송을 사용해 전통 한옥에 일본식 양식을 접목한 유연한 구조를 지녔다. 이후 개성 부호 최선익을 거쳐, 백병원 설립자이자 당데 최고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박사의 소유가 되었다. 백박사는 6.25 전쟁 당시 납북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후손들이 반세기 넘게 지켜온 이 집은 2009년 서울시로 넘어와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사랑채의 고즈넉함과 오솔길 끝에 위치한 별당채 누각의 수려함에 마음을 빼았겼다. 안채와 사랑채가 복도로 연결되고 2층 공간이 존재하는 근대적 시도, 우물마루와 일본식 장마루가 공존하는 구조는 시대의 격동을 온몸으로 견뎌낸 가옥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이어 찾아간 가회동 11번지 골목은 활기로 가득했다. 홍콩, 태국 등지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옥의 유려한 처마 곡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속에서 이효진 회원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만심환희(滿心歡喜)', 즉 기쁨이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며 북촌 골목을 황홀한 노을빛으로 물들였다. 북촌로 5가길 쉼터에서 김석희 회원이 준비해 온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온기를 채운 뒤, '독립운동가의길'을 지나 열린송현녹지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터이자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 해방 후 미대사관 부지라는 굴곡진 역사를 품은 송현동 터는 축구장 5배 크기의 탁 트인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때마침 열린 '솔빛축제'의 포토존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겼다. 답사의 대미는 역시 맛있는 식사와 정겨운 담소였다. 헌법재판소 건너편 골목에 자리한 '제동순두부'에 모여 양태호 회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따끈한 순두부전골과 바삭한 녹두전을 차려놓았다. 전인구 회장은 건강과 행복을 비는 건배사와 함께 막걸리 잔이 오갔다. 실타래 풀리 듯 이어지는 수다 속에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나이를 잊은 채 정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게 흘러갔다. 식사 비용을 흔쾌히 부담해 준 이광희 회원의 사위에 마음 깊이 감사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안국역에서 각자의 길로 발길을 돌렸다. 이번 답사는 헌법의 존엄함을 가슴깊이 새기고, 세월의 멋을 품은 한옥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시간이었다. 방송인 마크 테토가 찬탄했듯,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 기와의 곡선이 어우러진 한옥은 이제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우리의 자산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은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삶을 건강하게 채워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