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애리 도공
서종 명달리를 떠나 양평읍 신애리에 둥지를 튼 도공네 집에 가는데 골목 끝 작업실이 보이지 않는다. 차도 돌릴 수 없을만큼 좁은 골목, 30미터쯤 후진하여 공간을 확보하고 보니 바로 오른쪽 골목 안에 도공네 하얀 작업실이 보인다. 왜 지나쳤는가 바로 깨달았다. 봄날 노란 꽃동산을 이루었던 신애리 골목의 산수유 나무 윗둥이 싹뚝 싹뚝 잘려나가 동네 골목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더듬이에 잡히지 않은 까닭이다.
잎이 떨어지고 나면 신애리를 활활 타오르게 했던 산수유 그 붉던 열매가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 버렸다. 한그루에 15만원인가(30만원인가)에 팔려나가 곧 캐어나갈 거란다. 몇 번의 봄을 맞고 가을을 보내야 저토록 굵은 줄기의 산수유 나무로 자라는가 그 세월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중국산에 밀려 산수유 열매를 수확해도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는 그네들의 사정을, 산수유 한그루면 자식들 대학 공부를 마칠수 있어 대학나무라고도 불리웠던 나무를 캐어내야 하는 그네들의 현실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붉디 붉은 산수유 나무를 동네를 위해 그 자리에 두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도시민의 지나친 이기심이겠지만, 그래도... 안타깝다. 서리 내린 만추 더욱 붉어진 신애리 산수유 열매는 이제 과거형이 돼 버렸다.
2. 사나사 가을
신애리 근처에 사나사가 있다. 도공이 친구가 아니면 잘 몰라 안 갔을 한적한 계곡 끝. 유명한 양평 옥천냉면 집 앞을 지나면 도시도 농촌도 아닌 어설픈 풍경이 사라지고, 좁은 골목길을 꾸불꾸불하게 도는 사나사 가는 길이 나온다. 노사나불을 모셔 사나사인데, 노사나불이 어떤 의미를 가진 부처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부처 중의 하나겠지...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걷고 싶어 하는 도공을 무시하고 그 아름다운 계곡을 쌩하니 차로 올라가니, 왜 이곳에 왔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단다. 그럼에도 사나사 계곡은 아름답다. 사나사를 잘 알고 있는 도공은 겨울철 어느 계곡이 동양화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가를 설명한다. 오늘은 답사니 걷는 것은 다음으로...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애처로운 사나사 일주문을 지나니 온통 가을 천지다. 신애리 산수유의 아쉬움을 사나사에서 다 풀고 왔다. 달려가면 반가이 맞는 벗이 있고, 이토록 아름다운 가을이 있으니 이만하면 됐다.
3. 노인과의 동거법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 하더만, 오십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오후만 존재하는 휴일'을 보내고 있다. 해가 중천에 뜬 오후에 기지개를 켜며 눈꼽을 떼어내는 부끄러움을 말해 무엇하랴. 하여 결심했다. 푸른빛이 채 가시지 않은 놀토('놀토'말고 출근하는 토요일은 '갈토') 신새벽 집을 떠났다가, 아직도 한밤중인 식구들 틈에 살짝 이불을 들치고 들어가 <당신이 잠든 사이> 내가 뭔일을 하고 다니는지 아무도 모르는 놀토 토막 여행.
어젯밤 자정부터 시작된 빗줄기가 계속되면 두물머리 강변만 걷고 돌아올 생각이었건만, 빗줄기는 오락가락 안개비로 가늘어졌다. 클라라씨의 떡과 커피로 요기를 한 뒤 '안개지역'을 찾아 중미산 정상으로 향한다. 문호리, 수능리, 정배리... 논과 밭, 개울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달린다. 맞은편에 차가 보이면 속도를 줄이고 잠시 멈추어야 하는 좁은 길이 이어진다.
안개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거라고 예상했던 중미산은 구름이 오갈 뿐, 안개등에 비상등에 상향등까지 켜야하는 위험하지만 멋진 풍경은 연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전진. 이 길이 처음인 선배를 위해 기어이 사나사 골짜기까지 달려간다.
이곳에서 내 마음을 가장 끄는 풍경은 돌담 밖에서 보는 사나사, 오래된 돌담과 담쟁이, 탑과 부도가 한데 어우러져 그림같다.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한다. 도공의 작업실에 들를까 하다 시간을 보니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
선배에게 도공의 작업을 모여주고 싶지만 이 시간 얼마나 놀랄까 싶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남한강가를 달려 양수리 클라라의 떡과 커피에 다시 간다. 우렁이 각시처럼 아들의 머리맡에 놓아둘 '아이스카라멜마끼야또'란 요상한 이름의 커피 한잔을 포장한다.
달강달강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어디갔다 오냐'는 구순 시모의 질문에 시치미를 떼고 '아, 네..저기, 아닌데요'란 해독 불능의 대답을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어차피 5분전의 질문을 잊고 얼굴을 본 순간 또 물으실거다. 놀토 오전 집안에서 깨어있는 것은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노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