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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의 영적상태. / 伝道者の霊的状態。 (2024년 2월 25일 주일예배)
본문; 요한복음 21:15-19
요 21: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16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 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19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15. 食事が終わると、イエスはシモン․ペトロに、「ヨハネの子シモン、この人たち以上に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と言われた。ペトロが、「はい、主よ、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と言うと、イエスは、「わたしの小羊を飼いなさい」と言われた。16. 二度目にイエスは言われた。「ヨハネの子シモン、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ペトロが、「はい、主よ、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と言うと、イエスは、「わたしの羊の世話をしなさい」と言われた。17. 三度目にイエスは言われた。「ヨハネの子シモン、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ペトロは、イエスが三度目も、「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と言われたので、悲しくなった。そして言った。「主よ、あなたは何もかもご存じです。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を、あなたはよく知っておられます。」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の羊を飼いなさい。18. はっきり言っておく。あなたは、若いときは、自分で帯を締めて、行きたいところへ行っていた。しかし、年をとると、両手を伸ばして、他の人に帯を締められ、行きたくないところへ連れて行かれる。」19. ペトロがどのような死に方で、神の栄光を現すようになるか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はこう言われたのである。このように話してから、ペトロに、「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た。。
지난 주일에는 전도에 대한 성경적이고 올바른 의미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전도란 설득이나 마케팅이 아닌 증언이고 고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포교가 아니라고도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니 전도는 복음의 지식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언변이나, 재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도하려는 전도자에게는 영적인 태도와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전도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서 주님께 구해야 할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세 번째 모습 가운데 베드로와 대화하시는 장면인데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종교재판을 받으시는 장소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모두 버리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계하여 주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 모두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결코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마 26:35)
하지만, 그는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지요.
놀랍게도 베드로는 자신이 부인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확실히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증거를 직접 확인하러 무덤에 다녀 왔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 24:12)
뿐만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모여서 숨어 있던 곳에 처음으로 나타나셨을 때에도 그는 함께 있었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이 날 제자들 가운데 도마만 유일하게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후 두 번째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는 도마도 함께 하였다는 증언이 있는데요. 이로 보아 베드로는 비어 있는 무덤도 보고, 부활하신 주님도 두 번이나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나고도 이전처럼 고기나 잡으러 가야하겠다 하고 고기잡이를 하러 갔다가 주님을 만나게 된 세 번째의 만남 가운데 있던 일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밤새 고생하며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던 이들에게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해 주시고, 아침 식사까지 마련해 주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세 번을 연속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이 질문은 뜬금없이 들립니다. 너는 왜 자신의 다짐도 지키지 못하느냐... 너는 어째 내가 부활한 후에 두 번씩이나 만나 주었는데 아직도 모르느냐... 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상식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시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보살피라)... 내 양을 먹이라...
이 세 가지 표현은 모두 양을 돌보고 먹을 것을 공급하라는 뜻인데요. 보통 양치기의 일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18-19)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시고 나서, 아침식사를 차려 주시고 양을 돌보고 꼴을 공급하라는 말씀을 하시지요.
이 장면은 전도자의 사명에 대해서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을 고백하고 있는데요. 지난 주에 전도란 특출난 재능이나, 설득력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증언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도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또한 동시에 전도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의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교회사에서 전도가 활발했던 시기에는 구령열에 불타는 전도자들의 헌신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구령의 열정은 곧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자신의 설득력과 혹은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 혹은 언변과 같은 재능으로 열정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짝사랑하시는 이들에게 찾아가 주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설득력을 가지고 전달할 수도 있고, 언변에 재능이 있는 자들은 자기의 재능을 십분 활용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는 자라고 하여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적인 태도와 자세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전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전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열심히 해서 어떻게든 사람들만 많이 모아 보겠다는 생각, 혹은 우리 교세를 좀 강하게 갖춰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기 전에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구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필요와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누군가를 설득하고, 교회로 인도하려 한다면 반드시 실패하고 실족합니다. 전도는 설득이 아니라 증언이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에 순종하는 과정인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고 헤아리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주님을 사랑해야 전도할 수 있고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전도자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전도는 우리가 어떤 영적 상태로 살고 있는 지를 헤아릴 수 있게 해 줍니다. 만일 전도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그저 교회생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영적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아직 전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축복이 있는 지를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것보다 거절당함으로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나는 것이나, 혹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더 앞서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님과의 사랑을 점검하면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해야 하는 것을 알고, 또한 전도함으로 주님이 채우시는 유익함을 알면서도 전도에 대한 마음이 식어지는 것은 영적인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님을 사랑하면 전도하게 되고, 전도하고 있다는 것은 곧 주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믿음생활의 기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유익을 얻어가는 일반적인 종교와 다른 결을 갖춘 믿음이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7-8)
대신에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그분의 뜻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0-31)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온전한 고백을 하고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전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세워집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는 곧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의 사명을 위한 베이스 캠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다는 대속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가 정결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약속을 믿는 것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사람답게 회복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나아가고, 행복하게 이끌며, 서로 사랑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는 증언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읽을 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되며, 또한 그 사랑을 다시 베풀게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고백하고, 전파하는 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전도는 우리가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 지를 확인해 주는 기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전도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하게 합니다. 누누이 말씀을 드리지만, 전도는 우리의 세력이나 조직을 견고하게 만들려는 하나의 수단이 아닙니다. 마치 다단계 회사가 자신들의 회원수를 늘려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노하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도를 통해 세상에 주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는 수단이 됩니다. 다시 말해 전도자인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활용하시는 수단으로 내어 드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방법이 바로 전도라는 말씀이지요. 전도는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은혜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꼭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전도하는 말과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은혜를 채우시는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은혜의 통로가 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의 은혜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내려 주시는 축복이 곧 우리에게 은혜이기도 한 것인데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2-3)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그의 삶에 축복을 부으시고, 그에게 약속하십니다.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서 그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요.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에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도 이 땅을 축복하고, 이 백성을 축복하고, 이 세상에 은혜를 채우시길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게서 원하고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베푸는 활동이 곧 전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전도하는 이들을 얼마나 주목하시고,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지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3)
우리는 전도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게 됩니다. 세상을 채우고도 남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와서 교인으로 만드는 것 이상의 놀라운 사명인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전도를 통해 주님을 사랑하고, 영적으로 깨어나며,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는 내게 사람다운 삶과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이 넘치는 삶을 위해 대신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또한 죽음과 멸망의 저주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소식인 복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전도합니다. 그 사랑을 체감한 사람은 전도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전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분명히 믿는 사람은 전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영생의 구원을 믿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모습으로든 반드시 전도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돌보고 보살피는 목양의 사명으로 함께 전도하는 전도자의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행복하게 동행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기뻐하고 전도하는 축복과 은혜와 사랑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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