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우리나라에서 광부가 가기 전에
유고슬라비아, 터키, 아프리카 등지에서
많은 광부들을 데리고 왔었다.
이들은 아주 나태하여
결국 광산을 폐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광부들이 투입되면서
생산량이 엄청나게 높아지자
독일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였고,
이렇게 근면한 민족을 처음 봤다면서
한 달 급여 120달러에 보너스를
줘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한편 왜, 간호사가 필요하였느냐?
국민소득이 올라가니 3D 업종이나
힘든 일은 기피하는 현상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특히 야간에는 일할 간호사가 없었다.
특근수당을 많이 준다 하여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한국 간호사들에 대하여서는
아주 후진국에서 왔는데
일을 맡길 수 없다 하여
일부는 죽은 사람 시체를 알코올로 닦고,
수의를 입히는 일도 하였으며,
일부는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을 돌보도록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근무하였는데,
한국 간호사들은 환자가 사망하면
그 시신을 붙들고 울면서
염을 하는 것을 보고 독일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담당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든지 아니면 갑자기
간호사가 없을 경우면 주사도 놓고
환자 다루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한국 간호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의료 분야를 맡기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위급한 사고 환자가
피를 흘리면서 병원에 오면
한국 간호사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그 피를 온몸에 흠뻑 적시면서도
응급환자를 치료하는가 하면,
만약 피가 모자라 환자가
위급한 지경에 빠지면
한국 간호사들은 직접 수혈을 하여
환자를 살리는 등
이런 헌신적 봉사를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은 간호사가 아니라 천사다”
하면서 그때부터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이런 사실이 서독의 신문과 텔레비전에
연일 보도되면서
서독은 물론 유럽 전체가
"동양에서 천사들이 왔다"
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우리 간호사들의 헌신적 노력이
뉴스화 되자,
서독 국민들은 이런 나라가
아직 지구상에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라며,
이런 국민들이 사는 나라의 대통령을
한번 초청하여 감사를 표하자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도시에 진출한 간호사들의 실력이
독일 간호사들 못지않다는
인정이 일고 있던 시기,
한독협회 '바그너 의장'은
병원에 오면 꼭 한국 간호사만 찾는데
왜 그러느냐고 기자가 물으니
'주사를 아프지 않게 놓는 특별한 기술자'
라 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서독 정부도 '그냥 있을 수 없다'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하였다.
이것이 단군 이래 처음으로
우리나라 국가 원수가 국빈으로
외국에 초청되는 첫 번째 사례였다.
우리로서는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가야 할 다급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모든 준비를 하였으나
제일 큰 난제는
일행이 타고 갈 항공기였다.
한국이 가진 항공기는
일본만을 왕복하는 소형 여객기로
이것을 갖고 독일까지 갈 수 없어,
아메리칸 에어라인을 전세 내기로 하였는데,
미국 정부가 군사 쿠데타를 한 나라의
대통령을 태워갈 수 없다 하여
압력을 가해 무산됨으로 곤경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연구한 것이,
어차피 창피는 당하게 되었는데
한 번 부딪쳐 보자,
이래서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최두선 선생이 특사로 서독을 방문하여,
<뤼브케>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각하!' 우리나라에서는
서독까지 올 비행기가 없습니다.
독일에서 비행기 한 대를
보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당시를 회고하는 백 박사에 의하면
그들이 깜짝 놀라 말을 못하더란 것이다.
결국 합의가 된 것이 홍콩까지 오는 여객기가
서울에 먼저 와서 우리 대통령 일행을
1등석과 2등석에 태우고 홍콩으로 가서
이코노미 석에 일반 승객들을 탑승케 한 후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로마를 거쳐
프랑크푸르트로 간 것이다.
1964년 12월 6일, 루프트한자 649호기를
타고 간 대통령 일행은 쾰른 공항에서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의
영접을 받고 회담을 한 후,
다음 날,
대통령과 함께 우리 광부들이 일하는
탄광지대 '루르' 지방으로 갔다.
▲박정희 대통령.
루르 탄광 지대에서
서독 광부들 앞에서 연설하다
애국가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육영수 여사와 함께 광부들과 서로
부등켜 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 진실은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에
영원히 맺힐 것이다.
그곳에는 서독 각지에서 모인 간호사들과
대통령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탄가루에 범벅이 된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까만 얼굴을 본 박정희 대통령은
목이 메기 시작하더니
애국가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였고,
연설 중 울어버렸다.
광부들과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부둥켜안고
통곡의 바다를 이루었으니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독일 대통령도 울었고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마저 울었다.
떠나려는 대통령을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았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만세"
로 이별을 고하였다.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계속 우는
우리 대통령에게 뤼브케 대통령이
자신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기도 하였는데
대통령을 붙들고 우는 나라가 있다는
이 사실에 유럽의 여론이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선 것이다.
박 대통령 방문 후
서독은 제3 국의 보증이 없이도
한국에 차관을 공여하겠다는
내부 결정을 하였지만
국제관례를 도외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한국 광부와 간호사들이 받는 월급을
일 개 월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당초 한국이 요구하였던 차관 액보다
더 많은 3억 마르크를 공여하였다.
서독에 취업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총액은 연간 5000만 달러,
이 금액은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의
2%를 차지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으며,
이 달러가 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다.
이후 한국과 서독 간에는
금융 문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진정한 우방이 되었다.
서독에서 피땀 흘린 광부와
간호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조국 근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국가유공자'들임에도
우리들은 그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국가는 당연히 그들에게
'국가유공자'로 대우하여야 한다.
아우토반, 1920년대 말,
히틀러가 만든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다.
히틀러는 이 도로를
전쟁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만
이 도로가 있었기에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부흥의 초석이 된 것이다.
이 도로를 달리던 우리 대통령은
세 번이나 차를 세우고서
도로 상태를 면밀히 조사하면서
울었다는 것이다. (“경상매일신문 논설고문 박영근
최근세사의 재조명"에서 발췌 인용)
① 1963년 12월 21일, 정부가 서독으로 파견하는 광부 1진이 서울을 출발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7968명의 광부가 서독으로 떠났다. 광부들은 한국 정부와 서독 정부가 맺은 협정에 따라 파견됐다. 한국은 외화가 필요했고, 서독은 자국 노동자보다 임금은 적게 받으면서 일은 잘하는 사람들을 원했다. 대졸자도 많이 지원하는 등 서독으로 가는 광부 모집은 경쟁이 치열했다. 한국에는 대우가 좋은 일자리가 많지 않았고, 서독에서 받는 임금이 한국 기준으로 보면 많은 액수였기 때문이다. 서독으로 간 광부들은 깊은 지하 갱도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광부들은 임금의 상당액을 한국으로 보냈다. 이 돈은 외화가 부족하던 한국 경제에 적잖은 도움이 됐다. 한편 광부에 이어 1966년부터 1977년까지 1만여 명의 간호사도 서독으로 갔다.
② 남해 독일 마을, 한국 경제가 어려웠던 1960~1970년대에 남자들은 광부로, 여자들은 간호사로 파견되어 독일 땅을 밟았다. 한국은 이들을 독일로 보내는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받았고 이는 한국 경제를 성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남해 독일 마을은 경제 발전에 헌신한 독일 교포들이 고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터전을 제공하고, 이국적인 독일 문화를 체험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2001년부터 조성한 곳이다. 남해의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에 지어진 수십 채의 예쁜 독일식 주택은 그 자체로 훌륭한 볼거리가 되고 있다. 앞으로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물건항이 보이고 주변에는 원예 에술촌과 해오름 예술촌이 있어 한국의 보물섬이라 불리는 남해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한예슬이 출연한 MBC 드라마 〈환상의 커플〉 촬영지로도 유명한 남해 독일 마을은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며 둘러볼 수 있어 더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