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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의 언어
The Language of New Media
[ 목차 ]
1장 뉴미디어란 무엇인가?
어떻게 미디어는 뉴미디어가 되었나
뉴미디어의 원리
이런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
2장 인터페이스
문화 인터페이스의 언어
문화인터페이스
인쇄물
영화
HCI: 재현 대 통제
스크린과 사용자
3장 오퍼레이션
메뉴,필터,플러그인
합성
원격행위
4장 환영
합성 사실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
합성 이미지와 그 소재
환영, 서사 그리고 상호작용성
5장 형식
데이터베이스
네비게이션 공간
6장 영화란 무엇인가?
디지털 영화와 동영상의 역사
영화의 새로운 언어
저자 서문
혼합성의 세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우리가 1810년대의 증기기관 도입으로 산업사회의 시초를 잡는다면 문화적 상위구조가 그것을 따라잡는데는
거의 100년이 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업적 근대주의의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과거와 극단적으로 거리를 두어 일종의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데올로기의 해이 현상으로 그리고 서구에서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감각의 출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뉴미디어의 언어’는 이러한 혼합성의 미학이 추진시키고 있는 현대문화의 한 단면 즉
네트워크로 연결된 디지털 컴퓨터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문화형식이 교차되는 단면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우리가 뉴미디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문화적 단면에 대하여 생각하기 위해 또 다른 은유를
끌어들이려 합니다. 이 은유는 재혼합(remix)입니다. ..
첫 번째 혼합은 우리가 지난 수십년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러왔던 것으로 주어진 미디어 안이나 문화형식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음악, 건축, 패선)안에 과거 문화의 내용과 형식을 재혼합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재혼합은 한 나라의 문화 전통, 특성, 그리고 감수성을 그 안에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화
된 국제성의 스타일과 상호적용하도록 섞어내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는 세계화라는 재혼합입니다. 그러므로 뉴미디어는 앞의 두가지 재혼합과 함께 세 번째 유형
으로 생각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문화 형식의 인터페이스와 새로운 소프트웨어 기술의 재혼합이며
짧게 말해 문화와 컴퓨터의 재혼합입니다.
서론
.. 이시대의 분석적 텍스트들은 문화가 컴퓨터로 인해 지배되고 있는 의미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현재의 이론
이나 기록보다는 미래에 대한 추정을 주로 하고 있다.
미래의 이론가들은 과거의 많은 문화 양식을 분석한 경험이 있는 이론가들이 왜 컴퓨터의 기호학적 코드 말걸
기 방식의 모델, 그리고 관객의 수용 양상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뉴미디어 지도 그리기 : 방법
..뉴미디어가 과거의 문화적 형식이나 언어들에 어떻게 의존하고 과거의 전통과 어떻게 단절되는가?
뉴미디어 오브제들은 어떻게 현실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가?
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방식 및 공간과 시간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특징적인 것은 무엇인가?
사각틀이나 유동적인 시점, 몽타주 같은 이전의 미디어 장치나 기술들이 뉴미디어에서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만일 우리가 과거의 재현 기술 및 시뮬레이션 기술과 새로운 컴퓨터 기반의 미디어 장착 기술을 연결짓는다면
본질적으로 역사적 단절이 이루어지는 지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문화의 컴퓨터화는 컴퓨터게임과 가상 세계와 같은 새로운 문화적 형식의 출현을 선도할 뿐 아니라 사진이나
영화 같은 기존의 문화적 형식들도 재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 혁명이 시각문화에 끼친 영향도 개괄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로의 전환이 어떻게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와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본성을 재
규정하는가? 컴퓨터화가 우리 문화에서 사용되는 시각언어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우리에게 유용한 미학적 가능성은 무엇인가? ..
① 영화사와 뉴미디어사의 유사점
② 디지털 영화의 정체성
③ 멀티미디어의 언어와 19세기 영화 이전 단계의 문화 형식사이의 관계
④ 영화와 비교했을때 뉴미디어에서 나타나는 스크린, 이동 카메라, 몽타주의 기능
⑤ 뉴미디어와 아방가르드 영화를 잇는 역사적 연결점
영화이론과 함께, 이 책은 예술사, 문학이론, 미디어 연구, 사회이론 등과 같은 인문학과 함께 컴퓨터공학
으로부터 이론적 도구들을 끌어오고 있다.
이 같은 종합적인 방법을 ‘디지털 유물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뉴미디어 지도 그리기 : 조직
내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상향식 방식과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구조 사이에서 대응관계를 끌어낼 수 도 있을
것이다.
프로그래머가 쓴 컴퓨터 프로그램은 일련의 변환을 겪는다.
고난도의 컴퓨터 언어는 실행 코드로 모아지고 어셈블러에 의해서 바이너리 코드로 전환된다.
나는 이 순서를 반대로 따라 간다.
바이너리 코드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나아가고 다음에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에 의해서 추동되는 뉴미디어
객체의 논리와 관계되는 것으로 옮겨간다.
제 1장 뉴미디어란 무엇인가 - 디지털 미디어 자체, 그것의 대상과 논리적 조직
제 2장 인터페이스 - 인간 - 컴퓨터 간 인터페이스, 운영체제
제 3장 오퍼레이션 - 운영체제의 맨 위에 있는 응용소프트웨어, 그것의 인터페이스와 전형적인 오퍼레이션 원리
제 4장 환영 - 겉모습, 그리고 응용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디지털 이미지의 새로운 논리
제 5장 형식 - 뉴미디어 객체를 하나의 전체로서 조작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장치
용어들: 언어, 객체, 재현
뉴미디어와 사이버 문화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측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나는 뉴미디어의 다른 영역들 예를 들면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장치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디자인 패턴, 뉴미디어의 핵심적 형식들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언어’라는 용어를 선택
했다.
‘정보문화’의 개념은 이미 익숙한 시각문화라는 또 다른 개념에 대응하는 것이다. ..
정보문화는 정보 객체와 디스플레이의 사용자 상호작용의 패턴은 물론(도상학에 대한 유비라고 할 수 있는)
정보를 조직하고 복구하기 위한 역사적인 방법들도 포함된다.
‘뉴미디어 객체’는 디지털 사진일 수도 있고, 디지털로 합성된 영화, 가상 3D 환경, 컴퓨터 게임, 독립적
하이퍼미디어 DVD, 하이퍼미디어 웹사이트, 혹은 웹전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용어는 모든 미디어 유형들과 조직, 모든 범위를 넘나드는 뉴미디어의 일반적인 원리들을 설명하려
는 나의 목적에 딱 맞아 떨어진다.
‘객체’라는 단어는 뉴미디어에 의한 예술만을 따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전반적으로 고려하려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문학에서 발전해온 문화적 객체의 작용을 복합적
이고 세밀하게 이해하고자 했다.
뉴미디어 객체들은 문화적 객체이다. 그러므로 웹사이트든 컴퓨터게임이든 디지털 이미지든 어떤 뉴미디어
객체라도 외부의 어떤 지시체가 구성되도록 도울 뿐 아니라 재현한다고 말 할 수 있다.
① 재현 - 시뮬레이션(simulation)(‘스크린’절)
평면은 어떤 가상의 세계를 담지만 관람자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으며 관람자의 물리적 세계 안에 존재
한다.
② 재현 - 통재(‘문화인터페이스’절)
환영적으로 창작된 세계의 재현 이미지와 서로 다른 아이콘들과 메뉴를 가지는 GUI같은 컨트롤 패널의 시뮬레
이션 이미지를 대립시키려 한다.
③ 재현 - 행위(‘원격행위’절)
이것은 환영을 창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술(유행,사실주의 회화, 디오라마, 군사적 교란용 물체, 영화 몽타주, 디지털 합성 등)와 행외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즉, 관람자가 재현을 통해서 현실을 잘 다룰 수
있게 하기 위한 재현(지도,건축도면,엑스레이,원격현전)
④ 재현 - 커뮤니케이션(‘원격행위’절)
재현적 기술은 전통적인 시간 또는 공간에 고정되어 있는 미적 대상을 창조하고 자신의 외부에 있는 대상물을
지시한다. 쌍방향 원격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과 어떠한 객체를 만들어내지 않는 ‘원격문화적’형식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뉴미디어는 전통적으로 문화와 객체를 동일화하는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⑤ 시각적 환영주의 - 시뮬레이션(‘환영’장의 서론)
‘환영주의’는 ‘스크린’장에서 사용된 용어인 재현과 시뮬레이션 모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환영주의는
원근법적 회화, 영화, 파노라마와 같이 현실과의 시각적 유사성을 창조하는 전통적인 기법과 기술을 모두 말
한다.
⑥ 재현 - 정보(‘형식’장의 서론)
재현-정보의 대립항은 뉴미디어 디자인의 상반되는 두 가지 목표를 말한다. 하나는 사용자를 전통적인 소설과
유사한 상상적 허구의 세계 안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용자가 효율적으로 정보체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장 뉴미디어란 무엇인가? What is New Media?
뉴미디어는 계산 기술과 미디어 기술 발달의 두 궤도가 합쳐진 것으로 이 두 궤도 모두 1830년대에 시작되었
으며, 그 시초는 배비지(Charles Babbage)의 자료의 입출력, 기억, 계산 등을 자동적으로 처리하는 계산기의
원형인 해석기관과 다게르의다게레오타입이라는 독자적인 사진 현상 방법이었다.
그리고 결국20세기 중반에 이르러 현대적 의미의 디지털 컴퓨터가 개발되어 숫자로 된 자료에 대한 계산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이 컴퓨터들은 19세기 말을 전후해서 기업과 정부에서 널리 사용되던 여러 종류의 기계화된 제표기와 계산기
들을 대체하게 된다. ..
뉴미디어의 원리는 수적 재현, 모듈성, 자동화, 가변성 그리고 부호변환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어떻게 미디어는 뉴미디어가 되었나
현대적 미디어의 발전과 컴퓨터의 발전이라는 두 개의 궤도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
오랫동안 이 두 궤도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평행선을 달렸다.
19세기 전반과 20세기 초까지 여러 가지 기계적, 전기적 제표기와 계산기들이 개발 되었다.
계산기의 처리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더 널리 사용되었다. 현대적 미디어 또한 비슷하게 부상했다.
이 미디어를 이용해 단일의 혹은 연속된 이미지, 사운드 그리고 텍스트를 여러 가지 물질 형태, 즉 사진판,
필름, 레코드판 등의 형태로 저장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의 영화(시네마토 그라프)라는 단어를 생각한다면 영화의 핵심은 시각적 자료를
물질적인 형태로 기록하고 저장하는 것이다. 카메라는 자료를 필름 위에 기록하고 영사기는 그것을 읽어낸다.
이 영화적 도구는 핵심적인 면에서 컴퓨터와 유사하다.
컴퓨터의 프로그램과 데이터 역시 어떤 미디어 안에 저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튜링기계가 영사기와 비슷해 보이는 이유이다. 튜링기계는 카메라와 영사기가 하나로 합쳐진 것
이다.
끝없이 긴 테이프에 씌어진 지시사항과 데이터를 읽고 그 결과를 같은 테이프의 다른 위치에 기록한다.
사실 적절한 저장매체와 데이터 부호화 방법의 발전은 영화와 컴퓨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을
말해준다.
미디어는 정보전달 체계라는 애초의 조건으로 환원되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기술적 재생산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한다.
영화의 아이콘적 부호는 보다 효용 있는 이진 부호를 우해 폐기된다. 영화가 컴퓨터의 노예가 된 것이다.
미디어와 컴퓨터, 다게르의 다게레오타입과 배비지의 해석기관,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와 휠러리스의
계수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기존의 모든 미디어는 컴퓨터에서 사용될 수 있는 숫자 데이터로 치환되었다.
그 결과 모든 그래픽, 동영상, 사운드, 형태, 공간 그리고 텍스트가 계측 가능한 컴퓨터 데이터의 단순 집합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미디어는 뉴미디어가 된 것이다.
뉴미디어의 원리
모든 뉴미디어 객체들, 처음부터 컴퓨터로 만들어진 것이든 아날로그 미디어가 전환되었든, 그 객체들은 수적
으로 재현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두가지 핵심적인 결론이 나온다.
첫째, 뉴미디어 객체는 형식적(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
예를들어 이미지나 형태는 수학적 함수를 사용해서 기술될 수 있다.
둘째, 뉴미디어 객체는 연산에 의해 조작할 수 있다. 예를들어 적절한 연산을 적용함으로써 사진의 잡티를
제거하거나 색의 대비를 높이거나 형태의 테두리를 잡아내거나 배율을 바꿀 수 있다.
말하자면 미디어는 프로그램화 될 수 있는 것이다. ..
연속적인 데이터를 수적 재현으로 전환하는 것을 디지털화라고 하는데, 디지털화는 샘플링과 수량화, 두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우선 데이터는 디지털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쓰이는 화소 단위와 같은 일정한 샘플로 추출된다.
샘플링의 빈도는 해상도라고 한다. 샘플링은 연속된 데이터를 분절된 데이터, 즉 사람, 책장, 화소 등과 같은
분리된 단위를 나타내는 데이터로 바꾼다.
둘째로 각각의 샘플은 수량화되어 정해진 범위의 수치가 매겨진다(예를 들어 8비트 회색조 이미지의 경우
0 ~ 255사이의 수치) 사진이나 조각과 같은 옛 미디어가 확실히 연속적인데 반해, 뉴미디어 대부분은 연속적인
부호화와 분절적인 부호화의 복합을 포함한다. 일례로 영화 필름을 들 수 있다.
각 프레임은 연속되는 사진이지만 시간은 여러개의 샘플(프레임)으로 나뉜다.
비디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수직 차원(스캔라인)에서 프레임을 추려낸다. 유사하게 망점 과정을 사용해 인화된
사진은 분절된 재현과 연속된 재현을 함께 갖고 있다.
이러한 사진은 여러개의 정렬된 점들(샘플)로 구성되어 있는데 점의 반경과 크기는 연속적으로 변한다.
마지막 예에서와 같이 현대의 미디어가 분절된 재현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샘플들이 수량화되지
는 않았다. 디지털화가 수립한 획기적인 단계가 바로 이러한 샘플의 수량화였다.
그런데 현대의 미디어 기술은 왜 부분적으로 분절적일까.
현대 기호학의 주된 전제는 의사소통에서 분절된 단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분절된 단위가 없이는 언어도 있을 수 없다.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이 “언어는 그 자체로 실재를 분절한다(예를 들어 색의 연속된 스펙트럼이 언어적으로
환원될 때 비연속적이 된다)” ..인간 언어는 대부분의 차원에서 분절적이다. ..
이 전제를 따른다면, 문화적 의사소통에 쓰이는 미디어 역시 분절된 차원을 지닐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
더 중요한 것은 현대 미디어의 분절된 단위들이 형태소와 같은 방식의 의미 단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필름의 프레임이나 망점은 필름이나 사진이 보는 이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현대의 미디어가 분절된 단위를 갖고 있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현대 미디어가 산업혁명 시기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있다. 19세기에 공장 시스템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생산체계가 장인 생산방식을 점진적으로 대체했다.
모듈성
이 원리는 뉴미디어의 프랙탈 구조로 불릴 수 있다. 프랙탈이 크기는 다르지만 같은 구조를 지니는 것처럼
뉴미디어 객체도 같은 모듈 구조를 지닌다.
이미지, 음향, 형태 또는 움직임이라는 미디어 요소들은 화소, 폴리곤(3차원 부피가 있는 것을 표현하는
다각형), 복셀(volume element에서 조합된 단어로 독립적인 특성을 갖는 3차원의 최소단위), 문자,
스크립트(다른프로그램에 의해 번역되거나 수행되는 프로그램이나 명령어들의 나열)등과 같은 불연속적인
샘플들의 집합으로써 재현된다. ..뉴미디어의 모듈구조는 부분의 삭제와 대체를 아주 쉽게 만든다.
자동화
20세기 말에 이르면 이미지와 같은 뉴미디어 객체를 어떻게 제작하는냐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이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객체를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떤 특별한 이미지를 원할 경우 그 이미지가 이미 존재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때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보다 그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현대사회는 19세기부터 미디어 제작을 자동화하는 기술로서 사진 카메라, 영화 카메라, 테이프 레코더,
비디오 레코더 등을 개발해 왔다. 이러한 기술들에 의해 150년을 지나는 동안 전례 없는 양의 미디어 자료
들이 사진 자료실, 영화 라이브러리, 오디오 자료실에 축적되었다.
이에 따라 미디어 혁명의 다음 단계, 즉 이러한 자료를 저장하고 정리하고 효과적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기술이 요구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가변성
뉴미디어 객체는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는 서로 다른 무한한 판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미디어의 숫자에 의한 코딩과 미디어 객체의 모듈구조에 따른 또 다른 결과이다.
가변성의 원리는 거의 자동화와 관련되며 모듈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뉴미디어의 논리는 ‘요구에 따른 생산’이라는 후기산업사회의 논리와, 제작과 분배의 모든 단계에서 컴퓨터
와 네트워크의 사용에 의해 가능해진 ‘제시간에’라는 배달 논리와 일치된다.
여기에서 ‘문화산업(1930년대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만든 용어)’은 사실 대부분의 여타 산업에 앞서 있다. ..
미디어가 물리적 객체가 아니라 빛의 속도로 케이블을 통해 전달되는 데이터로 존재하기 때문에 제작된 판본
은 사용자의 입력이 전달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제작된다.
비슷한 예를 계속 들자면 우리가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서버는 즉시 맞춤제작된 웹페이지를 엮어 낼 수 있다.
① 컴퓨터 시대에 데이터베이스는 하나의 문화적 형식으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세계와 인간의 경험에 대한
특별하고 구체적인 모델을 제공한다. 또한 그것이 포함하는 데이터를 사용하는 자가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
을 미친다.
② 콘텐츠(데이터)와 인터페이스의 단계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수 많은 다른 인터페이스들이 같은
데이터로부터 제작될 수 있다. 뉴미디어 객체는 멀티미디어 데이터베이스로 나아가는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인터페이스로 정의 될 수 있다.
③ 사용자에 대한 정보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적으로 요소를 제작하는 데 뿐만 아니라 미디어 구성을
맞춤식으로 만드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④ 가지형 상호작용이란 용어는 사용자가 방문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프로그램 안의 객체들이 가지가 무성한
나무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이 프로그램이 사용하는 정보는 네트워크 주소나 위치가
아니라 사용자 인식과정의 결과이다.
⑤ 하이퍼미디어는 대중적인 뉴미디어의 또 다른 구조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가지형 상호작용과 가깝다. ..
하이퍼 텍스트는 특별한 경우의 하이퍼미디어로, 단 하나의 미디어 유형, 즉 텍스트를 사용한다.
가변성의 원리는 이런 경우 어떻게 작용하는가? 우리는 하이퍼미디어의 문서의 모든 가능한 경로가 그것의
다른 판본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용자는 링크를 따라 문서의 특정한 판본을 만들어낸다.
⑥ 컴퓨터문화에서 동일한 미디어 객체들의 다른 판본이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방식은 정기적인 업데이트이다.
⑦ 가변성의 원리의 가장 기본적인 경우 가운데 하나는 증축성이다. 같은 미디어 객체의 다른 판본이 다양한
크기와 세밀성의 정도에 따라 만들어 질 수 있다.
..시간은 마치 에디슨의 초기 키네토스코프 실린더에서처럼 공간화 된다.
영화를 공간화하면 관찰하기 힘든 영화의 또 다른 시간적 구조를 탐구할 수 있게 된다.
왁스 웹에서처럼, 사용자는 모든 지점에서 재현된 것의 크기를 영화 전체에서 하나의 쇼트에 이르기까지 바꿀
수 있다.
이렇듯 가변성의 원리는 언뜻 보기에는 관련성이 없는 듯 보일지 모르는 뉴미디어의 많은 주요한 특성들을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뉴미디어에서는 개별 미디어 요소(이미지, 텍스트 페이지 등)들이 항상 각자의 정체성(모듈성의 원리)을 보유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 이상의 객체가 함께 ‘연결될’ 수 있다. 하이퍼링크는 이러한 연결을 만드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옛 미디어의 요소가 특정 구조에 ‘고정연결’되어 있어 더 이상 독립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반면,
하이퍼미디어에서는 요소와 구조가 서로 독립되어 있다.
하이퍼링크의 가지라는 특유의 구조는 문서의 내용과는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가변성의 원리는 미디어 기술의 변화가 역사적으로 사회 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옛 미디어의 논리가 산업사회의 논리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뉴미디어의 논리는 순응보다는 개성을 존중하는
후기산업사회의 논리에 부합한다.
부호변환
뉴미디어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다른 층의, 즉 문화적 층위와 컴퓨터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층위에 속하는 범주로는 백과사전과 소설, 이야기와 줄거리, 구성과 관점, 모방과 카타르시스, 희극과
비극 등이 있다.
컴퓨터 층위에 속하는 범주로는 프로세스와,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되는 데이터 패킷(packet), 분류와 짝짓기,
함수와 변수, 컴퓨터 언어와 데이터 구조를 들 수 있다.
뉴미디어는 컴퓨터에서 생산되어 컴퓨터를 통해 유포되고 컴퓨터상에 저장되고 보관 되므로 컴퓨터의 논리가
미디어의 전통적인 문화적 논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컴퓨터 층위가 문화적 층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세상을 만들어내고 데이터를 재현하며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방식,즉 컴퓨터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화용론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뉴미디어와 그 구성, 새로운 장르, 내용등의 문화적 층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것은 뉴미디어가 아니다
1. 뉴미디어는 아날로그 미디어가 디지털로 전환된 것이다. 연속적인 아날로그 미디어와는 대조적으로 디지털
방식으로 기호화된 미디어는 분절적이다.
2. 모든 디지털 미디어(텍스트, 스틸 이미지, 시간성을 갖는 시청각 자료, 모형 3차원 객체)는 동일한 디지털
코드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른 미디어 유형이 멀티미디어 디스플레이 도구인 컴퓨터라는 하나의
기계에서 디스플레이 될 수 있다.
3. 뉴미디어는 무작위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저장하는 필름이나 비디오테이프와는
대조적으로 컴퓨터의 저장장치는 어떤 데이터 요소도 동시적으로 접속할 수 있게 한다.
4. 디지털화는 불가피하게 정보 손실을 가져온다.
아날로그 구현과는 대조적으로 디지털식으로 코드화된 구현은 유한한 양의 정보만을 담는다.
5. 계속된 복사로 질이 손상되는 아날로그 미디어와는 대조적으로 디지털식으로 코드화된 미디어는 훼손 없이
무한하게 복사될 수 있다.
6. 뉴미디어는 상호작용적이다.
보이는 순서가 고정되어 있는 과거의 미디어와는 대조적으로 사용자는 미디어 객체와 상호 작용할 수 있다.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사용자는 어떤 요소를 디스플레이할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따라가야 할지를 선택할 수
있으며 그래서 고유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사용자는 작품의 공동작가가 된다.
뉴미디어로서의 영화
1. 뉴미디어는 아날로그 미디어가 디지털로 전환된 것이다.
연속적인 아날로그 미디어와는 대조적으로 디지털 방식으로 기호화된 미디어는 분절적이다. :
실제로 어떤 디지털 재현은 한정된 숫자의 샘플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디지털은 여전히 픽셀들의 매트릭스, 다시말해 공간의 2차원적 샘플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작 단계부터 샘플 추출, 즉 시간을 샘플로 추출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영화는 시간을 1초당 24프레임으로 샘플을 추출한다. 그래서 영화가 우리를 뉴미디어에 맞게 준비시켜 놓았
다고 말 할 수 있다.
남은것은 이러한 이미 단절적인 재현을 계량화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단계였을 뿐이었고 영화가 이룩한 것은 연속적인 것에서 단절적인 것으로의
훨씬 더 어려운 개념적 전환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단절적인 재현을 채택한 미디어 기술이 영화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시간을 샘플로 추출한 반면, 1907년부터 시작된 이미지의 팩스 송신은 2차원 공간을 샘플로 추출했다.
이보다 먼저 최초의 텔레비전 실험(1875년 캐리와 1884년 니프코의 실험)에는 이미 시간과 공간의 샘플 추출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기술보다 훨씬 앞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영화가 처음으로 시각적인 것의
불연속적인 재현이라는 원리를 일반화된 지식으로 만들어 주었다.
2. 모든 디지털 미디어(텍스트, 스틸 이미지, 시간성을 지니는 시청각자료, 모형, 3차원 객체)는 동일한 디지
털 코드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른 미디어 유형이 멀티미디어 디스플레이 도구인 컴퓨터라는 하나의
기계에서 디스플레이 될 수 있다.
3. 뉴미디어는 무작위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저장하는 필름이나 비디오테이프와는 대조적으로 컴퓨터의 저장장치는 어떤 데이터
요소도 동시적으로 접속할 수 있게 한다.
4. 디지털화는 불가피하게 정보 손실을 가져온다.
아날로그 구현과는 대조적으로 디지털식으로 코드화된 구현은 유한한 양의 정보만을 담는다.
5. 계속된 복사로 질이 손상되는 아날로그 미디어와는 대조적으로 디지털식으로 코드화된 미디어는 훼손 없이
무한 복사될 수 있다.
6. 뉴미디어는 상호작용적이다. 보이는 순서가 고정되어 있는 과거의 미디어와는 대조적으로 사용자는 미디어
객체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사용자는 어떤 요소를 디스플레이할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따라가야할지를 선택할 수
있으며 그래서 고유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사용자는 작품의 공동작가가 된다.
상호작용성의 신화
..마침내 1960년대에는 미래주의와 다다이즘이 떠난 자리를 이어 해프닝과 퍼포먼스, 설치와 같은 새로운
예술형식들이 예술을 명백하게 참여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다.
..뉴미디어 기술이 추리과정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객체화시킬 뿐 아니라 보완하거나 제어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리라는 반복적인 주장의 근거는 정신적 재현과 작동들이 해체, 합성 이미지, 편집된 시퀀스 같은 외적인
시각 효과들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가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것은 공적인 것으로 전환되고 관리되었다.
이전에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것이었던 정신과정이 이제는 공적 영역의 일부가 되었다.
관찰될 수 없었던 내적 과정들과 재현들이 개인의 머리에서 빠져나와 드로잉, 사진 그리고 다른 시각 형식들
처럼 외부 세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그것들은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있고, 교육이나 선전의 목적에 사용되거나 표준화되고 대량 유포될 수
있게 되었다. 사적이었던 것이 공적인 것이 되었다.
과거에는 하나밖에 없던 것들이 이제 대량생산된다. 개인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던것은 공유된다.
2장 인터페이스
..각각 2년 간격으로 출시된 <블레이드 러너1982>와 매킨토시 컴퓨터(1984)는 그가 “영원한 현재”라고 불렀
던 그곳으로 우리를 몰아넣으면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문화를 지배하는 두 가지 미학을 정의해 주었다.
그 하나는 미래주의와 파괴, 컴퓨터 기술과 물신주의, 복고주의와 도시주의, 로스앤젤레스와 도쿄가 섞인
미래의 디스토피아였다.
문화인터페이스의 언어
인쇄물
책장이 현대적 형태로 태어난 것은 기독교 초기의 수세기 동안이다.
글이 쓰인 책장들을 한쪽 편으로 꿰매어 모은 책, 즉 코텍스(codex)가 점토판이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대체
하였다.
문화인터페이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페이지 인터페이스’에 의존하면서 컴퓨터로 가능해진 새로운 개념을
포함해서 그 정의영역을 넓혀간다.
..VRML 전도사들은 월드 와이드 웹이 거대한 3차원 공간으로 만들어지고 텍스트를 포함하는 다른 모든 미디어
유형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그러한 미래를 상상하면서 텍스트가 주가 되는 현존 위계질서를 전복시키고자
했다.
1990년대 웹 브라우져나 기타 상업문화 인터페이스가 현대적 의미의 페이지 형식을 유지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책의 전통 안에서는 전례가 거의 없는 텍스트 구성과 접속의 새로운 방식, 즉 하이퍼링크 방식에 의존하게
된다.
..논의의 타당성을 더 강조하는 것보다 논의가 계속해서 관심을 끌도록 하이퍼링크를 사용하는 하이퍼미디어
의 새로운 수사학을 개발하는 것도 물론 가능할 것이다.
하이퍼링크의 존재 자체와 인기는 오늘날 수사학의 연속적인 쇠락을 대변해준다.
고대와 중세의 학자들은 사이한 수사학의 유형을 수백 가지로 분류했다.
20세기 중반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그가 가르치고 있던 MIT에서 접하게 된 컴퓨터의 바이너리 논리,
정보이론, 사이버네틱스의 영향아래 수사학을 은유와 환유라는 단 두가지 유형으로 대폭 축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대에는 월드 와이드 웹 하이퍼링크가 모든 다른 환유방식을 제치고 단 하나의 환유 방식
으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 디자인 그룹의 이름 이면에 있는 개념인 RAM(Random Access Memory)이 위계질서의 부재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RAM은 어떤 위치에서나 똑같은 속도로 접속되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연속적이고 선형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서사적이거나 수사학적인 궤도를 필요로 하는 책, 영화,
마그네틱테이프 같은 오래된 저장매체와는 대조적으로 RAM은 데이터를 ‘평면화’한다.
조심스럽게 정리된 논의와 예들로 사용자를 유혹하기 보다는 논점과 반증, 재현 리듬의 변화, 모의된 가짜
경로, 그리고 극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적 혁신등 RAM 그자체와 비슷한 문화 인터페이스가 사용자에게 모든
데이터를 한꺼번에 쏟아 붓는다.
1980년대에 많은 비평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효과중의 하나를 공간화의 효과로 규정한 바 있다.
시간보다 공간을 특권화하고 역사적 시간을 평면화하고 거대서사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시간은 평면 이미지나 풍경같이 바라볼 수 있고 항해가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가능한 새로운 수사학이나 미학은 작가나 웅변가에 의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공간에서의 움직임과
더 연관될 것이다.
하이퍼텍스트의 독자는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항해일지와 썩은 과일, 어디에 쓸지도 모르는 도구들을 집어
올리고 있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다.
그 역시 발견된 하나의 물체 다음에 또 다른 물체를 따라가며 컴퓨터 하이퍼링크와 같은 흔적을 남긴다.
스크린과 사용자
우리사회가 스펙터클의 사회인지, 시뮬레이션의 사회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스크린의 사회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크린과 신체
스크린과 관객의 신체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
롤랑 바르트가 1973년에 쓴 <디드로, 브레히트, 에이젠슈테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재현은 모방에 의해 직접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실제’, ‘그럴듯함’, ‘복제’의 개념이 제거될지라도,
주체(저자, 독자, 관객, 관음증 환자)가 그의 눈(또는 그의 마음)이 정점을 형성하고, 지평선을 향해 던져진
그의 시선이 삼각형의 밑변을 잘라내는 한 재현은 여전히 존재한다.
‘재현의 원칙’은 절단행위의 주권성과 행위 주체의 통합이라는 두 가지 기반을 지닌다..
장면, 그림,쇼트, 잘려진 직사각형, 이런것에서 우리는 연극, 회화, 영화, 문학, 이러한 모든 예술과 음악을
제외한 굴절광학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예술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중요한 조건을 볼 수 있다.
초기의 사진은 재현의 주체와 대상을 감금하는 추세를 계속 유지한다.
초기사진의 10년동안 노출 시간은 매우 길었다.
예를 들어 다게레오타입은 햇빛에서는 4~7분정도의 노출을, 산광에서는 12~60분 정도의 노출이 필요했다.
드로잉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도움으로 현실을 정적이고 고정된 것으로 묘사했던 것처럼, 초기 사진도 세계를
정적이고 영원하고 확고부동한 것으로 재현했다.
사진이 살아 있는 대상을 재현하려면 그 대상은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따라서 사진관에서는 긴 노출시간
내내 사진 찍히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 다양한 고정창치를 사용하였다.
고문기구를 연상시키는 철로 만들어진 고정도구는 자신의 이미지를 보기위해 자발적으로 기계의 죄수가 된
사람들을 확실히 고정시켰다.
재현 대 시뮬레이션
스스로 이동할 수 없는 프레스코나 모자이크와의 상호작용이 관객의 이동성을 요구하는 반면, 이동 가능한
르네상스 회화는 관객의 비이동성을 전제로 한다.
이미지의 새로운 이동 가능성에 대한 대가로 관객의 감금이 요구된 것 처럼 말이다.
이러한 반전은 재현과 시뮬레이션 전통의 다른 논리를 구성한다. 프레스코와 모자이크가 그것의 건축환경에
‘고정되어’있다는 사실은 예술가가 가상 공간과 물리적 공간 사이의 연속성을 창조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회화는 임의의 장소에 놓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연속성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회화는 그림과 관객이 위치해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부터 확실히 떨어져 있는
가상공간을 표현한다.
동시에 그림은 원근법적 모델 또는 다른 기술로써 관객을 감금해서 관객과 그림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시뮬레이션 전통에서는 관객이 일관된 단일 공간, 즉 그것을 구성하는 물리적 공간과 가상
공간 안에 존재한다면 재현 전통에서는 관객이 이중적 정체성을 갖는다.
즉 관객은 물리적 공간과 재현된 공간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주관의 이러한 분열은 이미지가 위치하는 물리적 공간을 모방하지 않고 어느 임의의 공간이라도 재현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새로이 획득한 이동 가능성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재현 전통이 후기 르네상스 문화를 지배했지만 시뮬레이션 전통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실 자연주의에 집착했던 19세기에는 밀랍 박물관이나 자연사 디오라마 박물관을 통해 시뮬레이션의 극한
까지 다가간 셈이다.
나중에는 VR장치가 망막에 삽입되는 칩으로 축소되어 무선으로 넷과 연결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감옥을 우리 몸에 달고 다니게 될 것인데, 이는 결코 즐겁게 재현과 지각 대상을 혼동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연락되고 항상 ‘연결되어’있으며 항상 ‘접속되어’있기 위해서일 것이다.
망막과 스크린은 하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미래적인 시나리오가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직 우리는 분명 스크린의 사회안에서 살고 있다.
..역동적이고 실시간으로 작동되고 상호작용적인 스크린도 여전히 스크린이다.
상호작용성, 시뮬레이션 그리고 원격현전을 위해서 우리는 몇 세기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평평하고 네모난,
그리고 우리 신체가 있는 공간에 존재하면서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는 창으로서 기능하는 그러한 표면을 쳐다
보고 있다. 우리는 아직 스크린의 시대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3장 오퍼레이션
편견없는 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듯, 있는 그대로의 컴퓨터라는 것도 없다.
전통적인 예술가는 기존의 문화적 기호, 언어 그리고 재현의 체계라는 필터를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마찬가지로 뉴미디어의 디자이너나 사용자는 이미 앞의 장에서 그 중 일부를 논의한 바 있는 여러 가지 문화적
필터를 통해 컴퓨터에 접근한다.
..이런 식으로 뉴미디어가 옛 미디어를 모방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작위적 접근과 같은 새로운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미디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은 컴퓨터 데이터로서의 미디어가 갖는
위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컴퓨터 미디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오퍼레이션’이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뉴미디어는 전문가와 아마추어간의 관계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두 집단의 간격은 훨씬 작아졌으나
그래도 여전히 존재한다. 앞으로도 그 간격은 여전할 것인데, 이는 전문적인 생산자들이 생존을 위해 구조적
으로 그 간격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사진, 영화, 그리고 비디오 같은 옛 미디어의 경우에 이 간격은 세 개의 핵심 영역, 즉 기술, 실력 그리고
미학에서 나타났다.
그런데 뉴미디어에서는 새로운 영역이 나타났다.
아마추어도 소위 전문가적 기술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뉴미디어 전문가들은 그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기준, 형식 그리고 디자인의 기대치를 만들어 낸다.
3장 오퍼레이션
메뉴, 필터, 플러그인
에른스트 곰브리치와 롤랑 바르트,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이 예술가는 상상력에서 직접 이미지를 끌어오거나
자기 혼자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냄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이 창조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낭만적 이상에 대해
비관을 가해 왔다.
곰브리치에 의하면 사실주의 예술가들은 이미 확립된 ‘재현 도식’에 의지해서만 자연을 재현할 수 있다.
예술에서 환영의 역사는 여러세대를 걸쳐 진행된 이러한 도식의 느리고 눈에 띄지 않는 변화를 담고 있다.
롤랑바르트는 그의 유명한 글 ‘저자의 죽음’에서 작품의 내용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한 사람의 발명가
로서의 저자라는 관념에 대해 훨씬 더 과격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뽑힌 인용으로 이루어진 조직체다”
비록 현대 예술가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텍스트, 관용어, 도식 등을 재생산하거나 기껏해야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고 있을지라도 실질적 예술 제작과정은 그와 상관없이 낭만적 이상을 차지한다. ..
몇몇 예술가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화의 ‘여러 부분’을 가지고 콜라주와 몽타주를 만들기 시작한 1920
년대는 이 새로운 방식의 가장 ‘순수한’형태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모든 전자 미디어 기술은 다양한 필터를 거치면서 신호를 변환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이것은 전화, 라디오와 텔레비전 같은 미디어 생산물의 대량보급을 위해 사용된 방송기술, 그리고 1920년
테레민이 디자인한 장치에서 비롯된 비디오와 오디오 신시사이저처럼 미디어를 합성하는 기술을 포함한다. ..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전자 미디어 합성, 녹음, 전송 그리고 송신을 위한 모든 기계들이 신호 변형을 위한
제어장치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자신호는 단일한 정체성 즉 다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정한 상태가 되지 못한다.
신석기 시대 이래 모든 예술은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대상물을 어떤 고정된 틀에 넣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낭만주의는 사물을 고정시키는 것을 지연시켰지만 결국은 ‘제어(statis)'라는 특화된 이상에 신념을 두었다.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조립라인’은 처음에는 풍부한 상상력에 대한 대답인 것 같았다. 텔레비전 조립라인이 이제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온 반면, 텔레비전은 그 유연성 때문에 스스로 논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표현의 매개변수에 익숙해져 있다. 색상, 채도, 밝기, 명암 등 대담해지려면 ‘수직의 신’과 ‘평형의 신’이라는 쌍둥이 신이 있다... 그리고 정상을 꿈꾼다면 ‘정교한 조종의 신(Fine Tuning)'이 있다.
합성
몽타주에 대한 저항
인터페이스는 같은 메시지를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해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화면에 나타나는 경고는 사운드와 함께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감각의 병치는 전통적인 영화언어에서 여러 미디어를 자연주의적으로 사용한 것에 비견될 수
있다.
이는 에이젠슈테인과 기타 몽타주 영화 작가들이 공격한 방식이었다.
GUI에서 반 몽타주 경향의 또 다른 예는 컴퓨터 화면에서 많은 정보 객체가 우연하게 공존하는 것으로 이는
동시에 열려 있는 여러 개의 창에서 볼 수 있다.
웹에서 미디어 요소를 첨가하는 것처럼, 사용자는 어떤 개념적 혼란도 없이 창을 계속해서 열 수 없다.
합성과 새로운 유형의 몽타주
디지털 합성을 영화 몽타주 이론과 실천에 연계함으로써 우리는 동영상을 조합하는 이 새로운 핵심 기술이
어떻게 동영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재규정하고 있는 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영화 몽타주가 쇼트 내에서의 몽타주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더 쉬운 시간적 몽타주를 선호하는 데
반해 합성은 이 두 가지를 동등하게 취급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합성은 이 두 가지에 대한 개념적이고 기술적인 구분을 없앤다.
..요약하자면 영화기술, 영화제작 그리고 영화이론은 동영상의 시간적 발전을 선호한 반면, 컴퓨터 기술은
공간적 차원을 선호한다. 새로운 공간적 차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합성물에서 레이어의 공간적인 순서(2와 1/2차원)
*합성으로 만들어진 가상 공간(3차원)
*이미지 프레임과 관계된 레이어의 2차원적 움직임(2차원)
*조정된 창 안에서의 동영상과 링크된 정보 사이의 관계(2차원)
이러한 차원들은 에이젠슈테인이나 다른 영화작가에 의해 구체화되었던 동영상의 시청각적 차원 목록에 추가
되어야 한다.
이것의 사용은 영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뿐 아니라 영화이론에 새로운 도전을 불러일으킨다.
디지털 이미지는 더 이상 시청각적인 문화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시각-청각-공간적인 문화의 부분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차원을 단순하게 사용한다고 저절로 몽타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 문화에서 대부분의 이미지와 공간은 여러 요소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병치를 모두 몽타주로 부르는 것은 이 단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미디어 평론가이자 역사가인 에르키
후타모는 확실한 경우에 한해서 몽타주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나 역시 여기에서 그의
제안을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몽타주의 예가 되기 위해 뉴미디어 객체는 다음의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요소들의 병치는 특정한 체계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병치는 작품이 그 의미와 감성적 미적 효과를
구성하는 방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조건은 디지털 동영상의 새로운 공간적 차원의 구체적인 경우에도 역시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값이 변화하고 상호 연관되는 것을 제어하는 논리를 확립함으로써 디지털 영화 작가는
내가 공간적 몽타주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한다.
원격행위
재현대 커뮤니케이션
사용자가 하이퍼링크를 따라 다른 웹사이트로 갈 때 원격현전을 써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관찰하거나 조종
할 때 인터넷 채팅으로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 혹은 단순히 전통적인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어떤 뉴미디어 객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격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동사나 명사를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재현이라는 전통적 문화
영역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 미디어 기술은 19세기에 시작된 이래 별개의 두 궤도를 따라 발전해 왔다.
첫 번째 궤도는 필름, 오디오, 비디오 마그네틱테이프, 여러 가지 디지털 저장장치와 같은 재현 기술의 발전
궤도이다.
두 번째 궤도는 실시간 통신 기술로서 원격으로 시작되는 모든 것, 즉 전보, 전화, 텔렉스, 텔레비전, 원격
현전 등이다. 라디오, 그 이후에는 텔레비전과 같은 20세기의 새로운 문화 형식은 이 두 궤도의 교차점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만남에서 실시간 통신 기술은 재현의 기술에 종속된다.
1960년대 이래 일부 예술가들이 전통적으로 정의된 미적 객체를 ‘과정’, ‘실천’, ‘개념’과 같은 다른
개념들로 대체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이 전통적 개념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음을
확인하는데 그쳤다.
오브젝트라는 미적 객체의 개념, 즉 공간이나 시간안에 갇힌 독립적인 구조라는 개념은 현대의 미학 사상에서
근본이 된다. ..텍스트가(바르트의 명제를 뉴미디어의 용어로 옮기자면)상호작용적이고 하이퍼텍스트적이며
배포되어진 역동적인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유한한 객체라는 것이다.
원격현전: 환영 대 행위
대중미디어는 가상현실 개념을 선호하고 원격현전 개념을 깍아내린다. ..원격현전은 주체가 시뮬레이션을
제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한다.
원격현전은 이미지를 통해 원거리에서도 물리적인 현실을 실시간으로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원격행위자의 몸은 실시간으로 다른 장소로 전송되어 그를 대신해서 그곳에서 우주 정거장을 수리한다든가
수중 굴착 작업 혹은 이라크나 유고슬라비아의 군사기지를 폭격하는 것 같은 실제 작업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원격현전의 본질은 반존재인 것이다. 내가 현실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반드시 물리적으로 그 장소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아마도 원격행위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것인데, 거리를 뛰어넘어 행동하는 것이고 실시간적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도구
이미지를 이렇게 사용하는것은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그것은 원격현전과 함께 나타난 것일까? 서구에서는
시각적 재현의 역사를 환영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조종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새로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브루노 라투르는 이미지는 언제나 제어의 도구이자 힘, 즉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면서 대상들을 동원하고 조작하는 능력으로 규정된 힘의 도구로 기능해 왔다고 설명한다. ..
결국 원근법은 현실을 반영하는 단순한 기호 시스템 이상이다.
원근법은 그것의 기호를 조작함으로써 현실을 조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원근법은 이미지 도구의 일례에 불과하다. 시스템적으로 현실의 어떤 특징들을 포착해내는 재현은 하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사실 디오라마나 챠트, 지도나 엑스레이와 적외선 이미지, 레이더 이미지와 같이 환영의 역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부분의 재현 유형들은 두 번째의 역사, 즉 조종을 위한 도구로서의 재현의 역사에 속한다.
거리와 아우라
벤야민은 아우라, 즉 역사적 또는 자연적 객체인 예술작품이 지닌 독특한 현전감이라는 저 유명한 개념으로
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아우라를 체험하려면 객체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벤야민은 아우라를 “거리감이 만들어낸 독특한 현상”으로 정의한다. .. 따라서 시각과
촉각의 일반적 의미는 역전되었다.
벤야민과 비릴리오에 의하면 시각에 의해 보장받는 거리는 대상의 아우라, 즉 세계에서의 위치를 보존하는
반면 “더 가까이 물체를 가져오려”는 욕망은 대상 간의 상호 관계를 파괴하여 궁극적으로 물질적 질서를
없애버릴 뿐만 아니라 거리와 공간 개념을 의미 없게 만든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그들의 논의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이 자연적 질서와 거리를 동일화
하는데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을지라도 촉각과 시각의 대비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고찰은 받아들여야 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과거의 재현 기술과는 대조적으로 실시간 이미지 도구들은 우리가 멀리 있는 물체를
만질 수 있게 해주고 그에 따라 쉽게 파괴할 수도 있게 해준다. 시각의 잠재적 공격성은 전자적으로 가능해진
촉각이 지닌 현실적 공격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별되었다.
4장 환영
영화의 기술과 스타일
바쟁은 주요 논문인 ‘영화언어의 진화’에서 영화 스타일의 역사를 유사한 목적론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1930년대 말 심도의 도입과 그 뒤를 이은 194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주의자들의 혁신은 관객이 현실에서
가능한 것보다도 더 친밀하게 이미지와 연관을 맺도록 해주었다.
이 두 논문은 ‘완전 영화의 신화’가 영화기술을 해석하는데 반하여, ‘영화언어의 진화’는 영화 스타일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다르고 사실주의의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르다.
첫 번째 논문에서 사실주의는 현실의 현상학적인 속성에 근접하는 것 즉, “음향,컬러,입체감의 측면에서 외부
세계의 완전한 환영을 재구성하는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논문에서 바쟁은 사실주의적 재현이 자연적 시각의 지각적이고 인식적인 역동성에도 근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쟁에게 이러한 역동성은 시각적 현실에 대한 적극적 탐색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심도의 도입이 관객
으로 하여금 영화 이미지의 공간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사실주의를 향한 진일보였다고 해석
한다.
바쟁의 ‘관념적’이고 진화론적인 설명에 반해서 장루이 코롤리는 영화 기술과 스타일의 역사에 대한 ‘유물
론적’이고 근본적으로 비선형적인 해석을 제안한다.
영화는 코몰리에 의하면 “처음부터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적 이윤 창출에
대한 기대와 확신으로부터 ... 사회적인 도구로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영화 기술의 역사를 기술적, 미적, 사회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결정론의 교차점으로 읽어야 한다고
코몰리는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확실히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우선시하고 있다.
코몰리에게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사변적 반성으로서 인식된 현실 그 자체의 ‘객관적 복제’였다.
여타의 재현적인 문화 행위와 함께 영화는 시각적인 것을 끊임없이 재복제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생산 관계가 아니라 현상적 형식이라는 환영이다.
이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영화는 영화의 ‘사실주의’를 유지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해야 한다.
코몰리는 이러한 과정의 추가와 대체라는 두 가지 서로 대안적인 형식으로서 이 과정을 요약하고 있다.
기술적 발전이라는 면에서 영화적 사실주의의 역사는 더하기의 역사이다.
우선 코몰 리가 보기에 더하기는 영화 관전주의의 본성을 정의해 주는 거부의 과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
인 요인이었다.
음향, 총천연색 필름 색깔과 같은 새로운 기술적 발전은 관객에게 그 이전의 이미지가 얼마나 ‘비사실적’
이었는지를 지적해주는 동시에 현재의 이미지가 비록 더 사실적이기는 하지만 미래에 비해서는 역시 처지는
것으로 끊임없이 거부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주의가 바쟁에게는 관념(헤겔주의적 의미에서)으로 기능하고, 코몰리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역할(마르크스
주의적 의미에서)을 하는 반면, 데이비드 보드웰과 자네트 스타이거에게는 영화의 산업적 구조와 우선적이고도
대표적으로 연관된다. 달리 말하자면 바쟁은 사실주의의 관념을 신화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사고에서 끌어오고
있다.
그에게 사실주의는 현실과 초월적 관객 사이의 공간에서 발견된다.
코몰리는 사실주의가 이미지와 역사적 관객 사이의 공간에서 발견된다. 코몰리는 사실주의가 이미지와 역사적
관객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결과이면서 동시에 영화 기술과 기법의 추가와 대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결정되는
가운데서도 연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보드웰과 스타이거는 영화산업 제도권의 담론안에 사실주의를 놓음으로써 사실주의가 산업적인 경쟁을 위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도구임을 말해준다.
이들은 영화가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산업임을 강조하면서 영화 기술의 변화를 모든 현대산업이 공유
하고 있는 요소인 효율성, 생산품의 차별성, 품질 기준의 유지와 같은 요소의 결과로 설명한다.
영화를 산업 모델의 구조로 바라보는 입장의 장점 중 하나는 연구자가 제조업체, 공급업체 그리고 전문가 집단
과 같은 구체적인 행위자를 살펴 볼 수 있다는데 있다. 이 중 후자는 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전문가 집단
사이의 대화에 의해서 스타일과 기술의 혁신에 대한 기준과 목표가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합성이미지와 그 소재
..같은 논리에 의하여 우리는 3차원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의 모습이 피부 느낌이 없고 너무 유연하며 너무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 우리의 몸이라는 진짜를 비사실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게 모사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기하학으로 환원된 세계, 기하학적 모델에 의한 효과적 재현이 현실의 기반이 되는 세계에 나타날
사이보그의 몸에 대한 완벽한 재현이다.
합성 이미지는 미래를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전통적 사진이 항상 과거의 사건을 가리키는
반면, 합성 사진은 미래의 사건을 가리킨다.
.. 기본 이념은 노동자로 하여금 불완전한 현실에 눈을 감고 완벽한 미래에 대해 꿈을 꾸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서 미래의 징후를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베르토프의 ‘세계에 대한 공산주의적 해독’이라는 개념이다.
세계를 그런식으로 해독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서 미래를 찾아내는 것이다.
환영, 서사 그리고 상호작용성
뉴미디어는 많은 경우 사용자를 주체로 만든다. 주체는 재현된 내용과 상호작용을 하도록, 즉 메뉴와 이미지
자체에 클릭을 하거나 추려내서 결정을 한다.
..뉴미디어의 미학은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여러 좌파 예술가들에 의해 수없이 차용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환영 생산 조건 드러내기’라는
전략은 이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자체 안에 끼워 넣어져 있다.
유사하게 발터 벤야민의 ‘한눈파는 상태에서의 지각’이라는 개념도 완벽하게 실현된 것이다.
기계가 주기적으로 재등장하고 메시지에 커뮤니케이션의 통로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면서 주체는 환영이라는
꿈의 세계에 너무 오랫동안 빠져들 수는 없고 집중과 분리를 번갈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아날로그 시대의 구식 사실주의를 벗어난 그 무엇인 것은 분명하다.
이 새로운 사실주의를 ‘메타 사실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체 비판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메타 사실주의의 발현은 더 광범위한 문화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과거의 사실주의는 근대성에서의 이데올로기의 기능, 즉 기호학적 분야의 통합, 허위의식, 완전한 환영이라는
기능에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다르다.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해체하면서 주체에게 수없이
많은 스캔들과 수사를 제공하고 있다.
20세기 중반의 지도자들은 무적의 존재로 비추어졌다. 그들은 항상 옳으며 스탈린과 히틀러의 경우에는 어떠한
인간적 죄악도 저지를 수 없는 진정한 성자로 여겨졌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에 대한 스캔들을 듣기 마련이지만, 이러한 스캔들은 그 지도자들의 신뢰도를
실제로는 감소시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최근의 텔레비전 광고는 종종 자기 자신 혹은 광고 일반을 우스갯
거리로 만든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들 광고가 팔아야 하는 것을 파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자동-비평(Auto-Critique), 스캔들, 기계 장치의 노출은 현대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구조적 요소가 되었다.
1998년 MTV가 자체 웹사이트에 마치 누군가에 의해 해킹을 당한 듯한 환영을 조작한 적이 있다.
20세기 초반처럼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믿도록 요구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주체는 자신이 속고 있음
을 잘 알면서도 너그럽게 허용하는 주인의 자리에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량생산된 상업적 스타일로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밀리터리’, ‘보헤미안’,‘플라워 차일드’, ‘도시풍’, ‘클럽식’등의 비싼
스타일의 옷을 산다.
여기에서 설명된 상호작용적인 미디어에서의 환영과 그것의 정지 사이의 주기적인 전환도 이와 동일한 일반
현상의 다른 예로 볼 수 있다.
고전적인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사실주의는 환영이 지속되는 한 주체가 그를 최대한 오래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 새로운 메타 사실주의는 환영과 그것의 파괴 사이, 또 관람자를 환영으로 몰입하게 하는
것과 관람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 사이의 연속 전환에 기초한다.
실상 사용자는 과거에 광고, 신문에 난 스캔들, 그리고 다른 전통적인 비상호작용적 미디어를 해체할 때 훨씬
더 강한 장악력을 갖는다. 사용자는 환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환영에 매달린다.
이러한 분석이 맞다면, 가능한 반론, 즉 상호작용성과 환영 사이의 연속 전환은 최근 기술의 인위적인 산물일
뿐이며 하드웨어가 발달하면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반론은 성공하지 못한다.
여기서 분석된 연속 전환은 컴퓨터 기술의 인위적 산물이 아니며 근대사회의 구조적 모습으로서 상호작용적인
미디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회 영역에서 또 다수의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상호작용적 미디어에서 이처럼 특정한 시간적 역동성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만 또 다른
문제, 즉 미학적 성공 여부의 문제는 다루고 있지 않다. 브레히트와 할리우드는 결합될 수 있는가? 지각과
행위 사이의 순환적 전환에 기초한 새로운 시간적 미학, 더 나아가 언어까지 창조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한 미학이 가장 성공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로 상호작용적 서사로는 유일하게 성숙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군사 시뮬레이터를 거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뉴미디어에서의 시간적인 반복 전환을 뉴미디어 외부의 사회적 영역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컴퓨터 문화 자체에 특정한 유사효과에 연결시키는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려 한다.
환영적인 부분과 상호작용적인 부분 사이의 반복 전환은 사용자로 하여금 상이한 정신상태, 즉 상이한 유형의
인지적 행위 사이를 왕복하게 만든다. ..이러한 멀티태스킹은 사용자에게 ‘인지적인 멀티태스킹’ 즉, 집중
문제해결, 그리고 여타 인지 능력의 활용이라는 상이한 인지 유형으로 빠르게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전반적으로 현대에서의 컴퓨터 사용은 사용자에게 지적인 문제 해결, 체계적인 실험, 그리고 새로운 임무에
대한 신속한 학습 등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특정한 응용소프트웨어가 더 광범위한 OS안에 은유적으로 또 문자
그대로 끼워 있는 것처럼, 뉴미디어는 영화 스타일의 환영을 상호작용적인 제어판이라는 더 넓은 틀 안에 끼워
넣고 있다.
환영은 행위에 깊이는 평면에, 상상적인 우주로의 창은 제어판에 종속된다.
어두운 영화관을 지배해온 20세기 최고의 환영이며 치료기재였던 영화 이미지는 컴퓨터 화면 안의 작은 창의
형태가 되어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여러 스트림 중의 하나로 하드드라이브 안의 수많은 파일
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5장 형식
웹사이트와 하이퍼미디어 프로그램은 대부분 사용자가 효율적으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 게임과 가상 세계는 사용자가 상상의 세계안에 심리적으로 몰입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두 번째 요구를 충족하는 반면 데이터베이스가 첫 번째 목적의 완벽한 도구로 보이는
것은 적절하다. 이는 이전에 문학적 서사나 영화적 서사가 창조한 것과 동일한 효과를 성취하고 있다.
가끔 정보 접근 혹은 상상의 세계와의 심리적 만남이라는 이 두가지 목적 중의 하나가 뉴미디어 객체 디자인을
결정하기도 한다.
전자의 목적만이 고려된 경우가 검색엔진 사이트이고 후자의 경우가 <리븐>이나, <언리얼>같은 게임일 것이다.
종종 정보 접근과 심리적 참여라는 두 가지 목표는 하나의 뉴미디어 객체 안에서 경쟁하기도 한다.
표면과 깊이의 대비와 함께, 정보와 몰입의 대조는 뉴미디어에 특징적인 일반적 대비, 즉 행위와 재현 사이의
대비의 구체적 경우로 생각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쟁의 결과는 표면과 깊이의 대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주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 개의 하이퍼링크를 담고 있는 이미지는 진정한 의미의 심리적 몰입도, 손쉬운 내비게이션도
제공하지 못한다. 이는 사용자가 많은 하이퍼링크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상호작용 영화가 되기를 바랬던 <코드명 1995>같은 게임이 하이퍼링크와 메뉴를 모두 포기하기로 하고
대신 유일한 상호작용적 제어의 원천으로서 키보드에 의존한 것은 적절하다고 하겠다.
서사이론에 몰두하는 근대 문학이론의 분야로서의 서사학은 서술과 묘사를 구분한다.
서술은 플롯을 진행시키는 서사의 부분이지만 묘사는 그렇지 않다.
묘사는 풍경, 도시, 등장인물의 아파트를 묘사하는 구문들이다. 간단히 말해, 정보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자면
묘사 구문은 독자에게 묘사적 정보를 보여준다. 이름(서사학: narratology, 서술:narration)에서 제시된것
처럼 서사학은 서술에 대부분의 관심을 기울였고 묘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보시대에 서술과 묘사는 서로 역할을 바꾸고 있다.
전통문화가 사람들에게 잘 정의된 신화와 종교 같은 서사와 소수의 ‘별개’정보만을 제공한 반면 오늘날
우리도 과도한 정보와 그를 묶기에는 너무 적은 서사를 가지고 있다.
좋건 싫건 정보에의 접근은 정보시대의 핵심적인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보미학(Info-aesthetics)’
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 무엇, 즉 정보 접근 미학의 이론적 분석과 정보 처리 과정을 ‘미적으로 만드는’뉴미
디어 객체의 창조가 필요하다.
모든 디자인이 정보디자인이 된 시대에는 건축사학자 지그프리트 기드온의 유명한 저서의 제목을 빌려 말하
자면“검색엔진이 지배한다”. 정보에 대한 접근은 더 이상 작업의 핵심적 형식만이 아닌, 문화의 새로운
핵심적 범주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보 접근을 이론적으로 미학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다루어야만 한다.
데이터베이스
처음에는 소설이, 그 다음에는 영화가 현대적 문화 표현의 핵심적 형식으로 서사를 선호했다.
컴퓨터 시대에는 그 서사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데이터베이스를 소개하였다.
대부분의 뉴미디어 객체들은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시작이나 끝이 없다.
사실 그것들은 주제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아니면 다른 어떤 면에서나 구성요소들을 일련의 이야기로 꾸며
내는 어떤 전개형식도 갖고 있지 않다. 그보다 뉴미디어 객체들은 개별 항목들의 집합으로서 각각의 항목은
동등한 중요성을 지닌다.
어째서 뉴미디어는 데이터베이스 형식을 더 선호하는가?
데이터베이스의 인기를 디지털 매체와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특수성을 분석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을까? ..
컴퓨터과학에서 데이터베이스는 데이터의 구조화된 집합으로 정의된다.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데이터는 컴퓨터를 통한 빠른 검색과 복구에 맞도록 조직화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항목들의 단순한 집합이 결코 아니다. 데이터베이스의 여러 유형들, 즉 위계적, 네트워크적, 관계적
그리고 객체지향적 데이터베이스는 데이터를 조직하는데 서로 다른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위계적인 데이터베이스의 기록은 나뭇가지와 같은 구조로 조직된다. 객체지향적 데이터베이스들은
‘객체’라고 불리는 복합적인 데이터 구조물을 저장하는데, 이것은 연쇄 구조에서 더 상위의 집합의 속성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위계적 집합으로 조직되어 있다.
뉴미디어 객체들은 이처럼 고도로 구조화된 데이터베이스 모델을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용자의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뉴미디어 객체들의 더 많은 부분은 기본적 의미에서의 데이터베
이스이다.
그것들은 사용자가 여러 가지 오퍼레이션, 즉 보기, 내비게이션, 검색등을 수행할 수 있는 항목들의 집합이라
는 외양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컴퓨터화된 집합을 사용하는 경험은 서사를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혹은 건축 공간에서의 내
비게이션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마찬가지로 문학적 서사나 영화적 서사, 건축계획, 그리고 데이터베이스들은 각각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모델들을 제시한다. 고유한 문화적 형식으로서의 데이터베이스의 의미가 바로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
이다.
선원근법을 근대의 상징적 형식으로 분석한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를 따라서 우리도 데이터베이스를
컴퓨터 시대(혹은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그의 유명한 저서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말한 컴퓨터
화된 사회)의 새로운 상징적 형식, 즉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경험을 구조화하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신의 죽음(니체)과 계몽이라는 거대사사의 종말(리오타르) 그리고 웹의 도래(팀 버너스 리)이래로 세계
가 이미지, 텍스트 그리고 다른 데이터 기록의 무한하고 구조화되지 않은 집합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라면
세계를 데이터베이스로 모델화하려는 것은 적절하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데이터베이스의 시학, 미학, 윤리학을 발전시키려 하는 것 역시 적절하다.
데이터와 알고리즘
데이터구조의 예는 배열, 링크 목록, 그래프 등을 들 수 있다.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조들은 공생적 관계를 가진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데이터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알고리즘
은 더욱 단순해져야 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에 따르면 데이터 구조와 알고리즘은 세계의 존재론에서 각각 절반을 차지한다.
일단 디지털화되고 나면 데이터는 정리되어야 하고 조직화되어야 하며 색인을 붙여야 한다.
컴퓨터 시대는 실재→미디어→데이터→데이터베이스라는 새로운 문화적 알고리즘을 가져왔다.
거대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이터의 총체인 웹이 부상함으로써 수백만의 사람들이 새로운 취미와 직업
(데이터의 색인작업)을 갖게 되었다.
데이터베이스와 서사
컴퓨터프로그래밍에서 데이터 구조와 알고리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똑같이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데 중요하다.
문화영역에서는 어떠한가? 데이터베이스와 서사는 컴퓨터문화에서 같은 지위를 가지는가?
어떤 미디어 객체는 구조상 정확히 데이터베이스 논리를 따르는 반면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표면을 벗어나면 실제적으로는 모든 것이 데이터베이스이다.
일반적으로 뉴미디어에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든다는 것은 데이터베이스의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컴퓨터시대에 데이터베이스는 창조적 과정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예술가가 특정한 미디어에 국한해서 고유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인터페이스와 작품은 하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인터페이스의 차원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뉴미디어와 함께 작품의 콘텐츠와 인터페이스는 분리된다. 그러므로 같은 자료를 위한 상이한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
뉴미디어 객체는 멀티미디어 자료의 데이터베이스를 위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인터페이스로 만들어질 수
있다. 만약 오직 하나의 인터페이스만이 구축되어 있다면 그 결과는 전통적 예술작품과 같겠지만 이러한
경우는 일반적이기 보다는 예외적이다.
요약하자면 데이터베이스와 서사는 컴퓨터 문화 안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데이터베이스/서사라는 용어의 쌍에서 데이터베이스는 특정화되지 않은 용어이다.
뉴미디어 객체가 그 자신을 선형 서사, 상호작용적 서사, 데이터베이스 혹은 어떤 다른 것으로 제시하든,
기반이 되는 물질적 구성의 차원에서는 모두 데이터베이스다.
뉴미디어에서 데이터베이스는(데이터베이스가 데이터베이스로 존재하는)직접 번역으로부터 그 논리가 물질적
형태의 논리와 상반되는 서사라는 형식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문화 형식을 뒷받침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데이터베이스는 서사를 뒷받침할 수 있지만 미디어 자체의 논리에는 서사의 발생을 촉진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데이터베이스가 뉴미디어의 지형에서 가장 크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어째서 스펙트럼의 서로 다른 극단인 서사가 뉴미디어에서 여전히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패러다임과 신태그마
1980년대와 1990년동안에 모든 이미지 제작 기술이 컴퓨터화 되었고 그리하여 모든 이미지를 합성물로 바꾸
었다.
영상문화, 인쇄, 방송디자인, 뉴미디어에서 동시적으로 유사하게 몽타주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바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몽타주는 합성적 구성이 요구하는 영상언어이기 때문
이다.
설명이 필요한 것은 사실주의적 이미지들이 왜 우리의 컴퓨터 기반 영상문화에서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가 이다. 물론 사실주의적 이미지들이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다.
문화의 역사에서는 그처럼 갑작스러운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뉴미디어가 서사를 데이터베이
스로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뉴미디어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를 지탱하고 있는 범주들에 비중을 다르게
두어, 뒤쪽에 있던 것을 앞으로 내세우거나 아니면 앞의 것을 뒤로 보내는 일을 한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동이라는 또 다른 변화를 분석하면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했던 것처럼 “시대 간의 단절은 일반적으로 완전한 변화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여러 요소의 재구성을 수반한다.
이전 시대의 체계에서 종속적이었던 특징들이 지배적이 되고 지배적이던 특징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서사와 데이터베이스의 대립은 이를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다.
컴퓨터문화가 대립되는 두 용어들 간에 비중을 어떻게 재분배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기호학의 통합체
(syntagm)와 개열체(paradign)에 관한 이론을 도입하려 한다.
영어와 같은 자연언어를 기술하기 위해 페르디난드 드 소쉬르에 의해 최초로 형식화되었고 이후 롤랑 바르트와
다른 이들에 의해 다른 기호 체계(서사, 패션,음식등)에 적용되는 식으로 확장된 이 모델에 의하면 체계의
요소들이 연관되는 차원은 통합체와 계열체라는 두 개의 차원이다.
바르트가 정의한 바와 같이 “통합체는 기호들의 조합으로 공간이 그것을 뒷받침 한다.”
자연언어의 예를 들자면 화자는 발화할 때 그 요소들을 선형적인 차례로 하나씩 엮어 놓는다.
이는 통합체의 차원이다. 이제 계열체를 보자. 언어 사용자의 예를 계속 사용하면, 각각의 새로운 요소는 그와
연관된 다른 요소들의 집합에서 골라진다.
예를 들면 모든 명사들은 하나의 집합을 형성한다. 그리고 특정 단어의 모든 동의어들은 다른 집합을 형성한다. 소쉬르의 최초 형식화에 따르면 “공통성을 지닌 단위는 이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것은 다양한 관계가
발견되는 집합을 형성한다” 이것이 계열체적 차원이다.
통합체적 차원의 요소들은 현존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 계열체적 차원의 요소들은 부재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씌어진 한 문장의 경우 그것은 한 장의 종이 위에 물질적으로는 현존하는 단어들로 되어 있지만
이러한 단어들이 따르는 계열체적 집합은 오직 작가와 독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이와 유사하게 옷을 차려입은 경우 스커트나 블라우스, 재킷, 등의 요소들은 실재로서 존재하지만 그 대신에
존재할 수도 있었던 다른 스커트나 다른 블라우스, 다른 재킷 등의 옷은 오직 보는 이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
한다. 그러므로 통합체는 명시적이고 계열체는 함축적이며 하나는 실재, 다른 하나는 상상의 것이다.
문학이나 영화 서사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서사를 구성하는 특정 단어, 문장, 쇼트, 장면들은 물질적
존재이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세계나 특정한 문학적, 영화적 스타일을 형성하고 또 실재의 요소들 대신에 나타났을 수도
있었던 다른 요소들은 오직 가상적으로만 존재한다. 달리 말하자면 서사가 구성되어 나온 선택사양의 데이터
베이스(계열체)는 함축적인 반면 실제 서사(통합체)는 명시적이다.
뉴미디어는 이 관계를 역전시킨다. 데이터베이스(계열체)는 실질적 존재로 주어지는 반면, 서사(통합체)는
탈물질화 된다.
계열체가 우선시되는 반면 통합체는 무시된다. 계열체는 실재이고 통합체는 가상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뉴미디어의 디자인 과정을 고려해 보자.
모든 뉴미디어 객체의 디자인은 사용이 가능한 요소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조립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디자
인의 전 과정에서 이 데이터베이스를 특정 순서에 따라 연결함으로써, 즉 한 요소로부터 다른 요소로 이끄는
궤적을 디자인함으로써 서사가 구성된다.
질료적 차원에서 서사는 그저 링크들의 집합일 뿐이며 요소들 자체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채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데이터베이스가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반면, 서사는 가상적이다.
뉴미디어는 ‘상호작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자와 화면 간의 전적으로 육체적 상호작용을 동일시
하고 대신 심리적 상호작용을 무시한다.
우리가 어떤 문화적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인지적 과정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상호작용적 링크와
동일시되는 것은 잘못이다. .. 어째서 뉴미디어는 이처럼 언어와 유사한 방식으로 순서짓기를 고집하는가?
나의 가설은 뉴미디어가 20세기의 지배적인 기호학적 질서 즉 영화의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데이터베이스 콤플렉스
어째서 사진 저장매체의 경우에는 기술이 데이터베이스를 유지하는 반면, 영화의 경우에는 기술이 현대적
서사 형식을 압도적으로 부상시키는 것일까? 이것은 매체 접근의 방법과 관계되는 것이 아닐까?
혹 무작위적 접근(random-access)매체, 즉 컴퓨터 저장 포맷은 데이터베이스를 선호하는 반면, 영화와 같은
순서적 접근(sequential access)매체는 서사를 선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이것도 맞지 않는다. 예를 들면 책은 완전한 무작위적 접근 매체지만 사진 앨범 같은 데이터베이스 형식뿐
아니라 소설과 같은 서사 형식도 뒷받침한다.
현대매체는 데이터베이스와 서사가 경쟁하는 새로운 전장이다. 이러한 경쟁의 역사를 극적인 용어를 사용해
가며 읽고 싶을 정도이다.
첫째, 사진과 같은 이미지 기록의 매체는 색인, 분류, 목록을 우선시한다. 근대 소설이 꽃을 피우고 전통주의
자들은 19세기 내내 역사적 서사를 다룬 회화를 계속 만들어냈던 반면 사진이라는 새로운 테크노 이미지의
영역에서는 데이터베이스가 지배했다.
그 다음의 이미지 기록매체인 영화는 서사를 우선시 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극영화들이 서사
적이다. 비디오에 사용되는 마그네틱테이프는 어떤 본질적인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다음으로 저장매체, 컴퓨터로 제어되는 디지털 저장장치들도 데이터베이스를 우선시한다.
멀티미디어, 백과사전, 가상 박물관, 포르노그래피, 예술가의 CD-ROM, 도서관 데이터베이스, 웹 리스트,
그리고 물론 웹 그 자체에서도 데이터베이스는 유례없는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내비게이션 공간
컴퓨터공간
..이렇게 공간을 적극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뉴미디어에서는 일반적이기보다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비록 뉴미디어 객체는 모든 종류의 재현을 위해 공간의 사용을 선호하지만 가상공간은 대부분 진정한 공간이
아니라 개별 객체의 집합에 불과하다.
또 이를 표어식으로 말하자면 사이버공간에는 공간이 없다.
이 논제를 더 탐구하기 위해서 20세기 초반 예술사가에 의해 개발된 범주를 빌려 올 수 있다. 알로이스 리글,
하인리히 뵐플린, 에르빈 파노프스키 같은 현대 예술사의 창시자들은 자신의 영역을 공간 재현의 역사로 정의
했다. 순환적 문화 발전의 패러다임 속에서 작업하면서 그들은 예술에서의 공간 재현을 시대, 문명, 인종
전체의 정신과 연관시켰다.
1901년 저작 「후기 로마시대의 공예」에서 리글은 인류의 문화 발전을 공간 이해의 두 가지 방식, 즉 촉각
적인 이해 방식과 시각적 이해 방식 사이의 교차 반복으로 규정했다.
촉각적인 지각은 어떤 영역안의 객체를 별개의 존재로 분리해내는 반면, 시각적 지각은 공간적 연속성 안에
객체를 통합시킨다.
리글과 동시대 사람인 하인리히 뵐플린 역시 한 시대나 민족의 기질은 시각성이나 공간 재현의 특정 양식으로
나타난다고 유사하게 제안하고 있다.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 (1913)」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스타일의 차이를 다음 다섯 개의 축, 즉 선형적
/회화적, 평면성/퇴거성, 폐쇄 형식/개방형식, 다양성/단일성, 명확성/불명확성이라는 축을 따라 구성해 놓고
있다. 현대 예술사의 또 다른 창시자인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그의 유명한 에세이 「상징 형식으로서의 원근법
(1924~5)」에서 그리스시대의 ‘집합적인’공간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체계적인’ 공간과 대비시키고
있다.
파노프스키는 공간 재현의 역사를 추상적 사고의 발전과 대비시키고 있다. 전자는 고대의 개별적 객체의 공간
에서 근대의 연속되고 체계적인 공간으로 나아갔다.
이에 대응해서 추상적 사고의 발전은 물리적 우주를 비연속적이고 ‘집합적’인 것으로 보는 고대의 철학적
견해에서 시작해서 공간을 무한하고 균질적이며 등방향적이고 객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즉 간단히 말
하자면 체계적인 것으로 이해한 후기 르네상스적 이해 방식으로 나아갔다. ..
하지만 컴퓨터로 만들어진 세계는 사실은 시각적이고 체계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고 집합적이다.
3차원세계를 만드는데 가장 흔히 쓰이는 컴퓨터그래픽 기술은 다면체 모델링이다.
이 기술로 만들어진 가상 세계는 엄격한 경계선으로 규정된 별개의 객체들로 채워진 진공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컴퓨터 공간에는 객체가 들어가 있는 환경이라는 의미에서 미디어적 공간도 그리고 러시아의 작가와 예술가
들이 ‘프로스트란스트베냐 스레다’라고 불렀던 객체 서로 간의 영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러시아의 전설적인 철학자이자 예술사가인 파벨 플로렌스키는 1920년대 초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간 미디어는 공간 위에 표시된 객체이다... 우리는 물체와 공간이 분리될 수 없음을 목격했다.
그러므로 물체와 공간을 따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조르주 쇠라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빌렘 드 쿠닝으로 이어지는 근대 회화의
특정한 전통을 규정해 준다. 이들 화가들은 하나로 구분되어지는 오브제나 빈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
려고 노력했다.
대신에 그들은 때때로 우리가 오브제로 읽어낼 수 있는 단단한 물체가 되는 밀도가 높은 영역을 묘사했다.
철학에 유사한 새로운 개념을 구체화하는 행위로서 영화를 분석한 질 들뢰즈의 예를 따라서 앞에서 말한 전통
에 속하는 현대화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어떤 철학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이야 말로 주류 컴퓨터그래픽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키노 아이와 시뮬레이터
지가 베르토프는 1920년대에 벌써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보들레르의 배회자에서
<아스펜 무비 맵>, <둠> 그리고 VRML세계로 이르는 궤도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데 이는 단순히 그의
영화가 카메라가 도시 공간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또 카메라의
움직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베르토프는 인간 시각과 공간에서 인간의 움직임의 한계를 극복하고 데이터에 접근하는데 더 효율적인 수단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가 다루었던 데이터는 시각적 실제였지 디지털화돼서 컴퓨터 메모리 안에 숫자로 저장된 것이 아니
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인터페이스는 영화 카메라, 즉 인간 시각에 대한 인간적인 시뮬레이션이었지 컴퓨터의 알고
리즘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베르토프는 보들레르의 배회자와 오늘의 컴퓨터 사용자 사이의 중간에 서 있다.
더 이상 거리를 따라 걷는 보행자가 아니긴 하지만, 데이터 발굴의 알고리즘으로 무장하고 순수한 데이터 속
으로 달려가는 깁슨의 데이터 카우보이는 아직 아닌 것이다.
‘키노아이 인터페이스(Kino-eye interface)'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연구에서 베르토프는 그가 인간
시각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을 체계적으로 시도했다.
그는 카메라를 빌딩의 꼭대기, 움직이는 자동차 등에 매달았으며 필름 속도를 느리게 하기도 했고 빠르게
하기도 했다.
(시간 몽타주와 공간 몽타주를 하나의 쇼트 안에 넣어)시간적 공간적으로 여러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했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단지 1920년대의 도시 생활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영화 기술의 데이터베이스, 시각적
인식론의 새로운 오퍼레이션에 대한 데이터베이스일 뿐만이 아니라, 물리적 공간을 따라다니는 단순한 인간
내비게이션을 넘어서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새로운 인터페이스 오퍼레이션의 데이터베이스이기도 하다.
19세기 도시의 내비게이션 공간에서 가상의 내비게이션 컴퓨터 공간에 이르는 궤도에서 <카메라를 든 사나이>
말고도 또 하나의 핵심적 지점은 비행 시뮬레이션이다.
베르토프가 그의 영화를 만들고 있을 당시, 링크 주니어라는 미국의 젊은 엔지니어는 최초의 비행 시뮬레이터
를 개발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링크의 시뮬레이터에 대한 특허는 ‘비행 훈련생을 위한 훈련 기구와 오락 기구의 혼합’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래서 1990년대에 비행 시뮬레이션 기술이 소비자의 오락에 적용된 것은 이후 사람들의 생각
이 아니라 이미 그 개발자가 예견한 것이다.
링크의 디자인은 제어판이 달린 조종사의 조종석을 모의했지만 현대적 시뮬레이션과는 대조적으로 시각자료가
주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영화가 없는 모션 라이드였던 셈이다. ..
오늘날 컴퓨터 문화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공간화된 데이터를 날아다니는 내비게이션 형식은 1970년대의
군사 시뮬레이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실제의 거리를 산책하던 보들레르의 배회자에서 움직이는 차에 매달린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지나 군인 조종사
의 관점을 재현하는 시뮬레이터의 가상 카메라로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
냉전의 붕괴는 비록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군사적 지각 양식이 일반 문화로 확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릴리오는 더 나아가 19세기에는 공간이 주요한 범주였지만 20세기에는 시간이 주요한 범주가 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비릴리오는 원격통신 기술이 공간 범주를 전적으로 해소시킨다고 보는데, 이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지구상의 어느 장소도 모두 동일하게 접근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또한 빛의 속도로 전송된 사건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간섭없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컴퓨터에 의해서만 효과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실시간 차원의 정치를 야기했다.
탈냉전의 관점에서 볼 때 비릴리오의 이론은 군사 부분에서 민간 부분으로 상상력이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생각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지구상 어느 지점이나 언제든 공격 가능한 두 초대강대국 사이의
핵무기 균형을 위한 냉전시대의 기술 기반 정치는 실시간이 공간보다 우위를 점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화의
한 단계로 보인다.
..이러한 답변이 모두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내비게이션 공간을 역사적 궤도의 말단으로만 보는 것은 불만족
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논의된 몇 개의 컴퓨터 공간은 이 형식의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현대의 화가, 설치예술가, 그리고 건축가들의 작품에는 더 많은 가능성이 담겨 있다.
이론적으로도 역시 내비게이션 공간은 새로운 도전을 대변해주고 있다. 정지공간의 우상학, 기하학, 논리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문화 안에서 공간이 기능하고 있는 새로운 방식, 주체가 움직여 다니는 그 무엇
으로서의 그리고 영역이 아닌 궤도로서의 공간에 대한 설명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비게이션 공간이라는 범주를 사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컴퓨터 문화라는 영역에서만은 아니다.
뉴미디어의 두 가지 핵심 형태인 데이터베이스와 내비게이션 공간을 검토해 보자면 각각은 더 큰 문화적 변화의 상징으로서 컴퓨터문화에서 그들의 특권적인 역할을 시도하고 싶어한다.
만약 우리가 현대성과 초현대성을 구분한 오주의 도식을 사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1. 현대성 = “초현대성”
2. 내러티브(=위계질서) - 데이터베이스, 하이퍼미디어, 네트워크(=위계질서의 평준화)
3. 객체 공간 - 내비게이션 공간(공간을 통한 궤도)
4. 정적인 건축 - 유체적인 건축(liquid architecture)
5. 문화적이고 사회적 분석을 위한 이론적 모델인 기하학과 위상기하학 - 이론적 범주로서 궤도, 벡터, 흐름
이러한 구조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데이터베이스와 내비게이션 공간이라는 ‘초현대적’형식 두 가지는
현대성의 형식에 미친 영향에서 상호 보완적이다. 한편으로 서사는 데이터베이스안으로 압축되어 들어가 있다.
사건과 시간을 가로지르는 궤도는 ‘평면적인’ 공간이 되었다.
반면에 건축 구조물과 지형학의 평면 공간은 서사적으로 되어서 사용자의 개인적 궤도를 지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가능한 구조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현대성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그것을 묘사하는 이름을 아직 찾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낸 이름들 ‘초현대성’, ‘중도현대성(transmodernity)’, ‘차현대성(second modernity)’은 과거의 단계와 지금의 새로운 단계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느낌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만약 19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개념이 현대성과의 분리를 내포했다면 지금은 문화사를 하나의 개념적이고 미적인 공간 안
에서의 연속된 궤도로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20세기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과거를 끊어내는’, ‘처음
부터 짓는’, ‘새로 만드는’ 그리고 다른 비슷한 주장(그것이 미적, 도덕적, 사회적 체계 어떤 것에 대한
것이든)을 위해 인간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너무 잘 알게 되었다.
뉴미디어가 온전히 새로워야 한다는 주장 역시도 그러한 무수히 많은 주장 가운데 하나였다.
연속적인 궤도에 대한 개념은 인간의 인류학이나 현상학에 보다 더 잘 부합된다. 인간의 몸이 물리적인 공간
을 연속적인 궤도를 그리며 움직이는 것처럼, 연속된 궤도로서의 역사 개념이 하나의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의
인식적 분리나 패러다임의 전환을 상정하는 역사 개념보다 내가 보기에는 더 바람직하다.
1960년대에 미셀 푸코와 토마스 쿤이 이론화했던 후자의 개념은 합성, 모핑 그리고 내비게이션 공간에 의해
보여지는 연속성의 미학보다는 에이젠슈타인이나 고다르의 근대적 몽타주의 미학에 더 잘 들어맞는다.
이러한 사상가들은 역사의 통시적 지평 위로 그들 시대의 고통스러운 분리, 곧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공산
주의 사이의 공시적 분리를 투사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러한 분리의 공식적인 붕괴로 우리는 역사가 강력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역사의 연속성을
다시 주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민족주의, 종교의 부활, 공산 정권과 연관되는 모든 것을 지우고 과거, 즉 1917년 이전의 러시아나 1945년
이전의 유럽으로 회귀하려는 욕구 등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징후 중에서 좀더 극적인 몇몇의 예일
뿐이다.
과거와의 극단적인 분리는 대가를 요구한다.
일시적 분리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궤도는 잠재적 에너지를 계속 축적해서 급기야는 새로운 힘을 가지고 다시
돌아가게 되고 그 사이에서 새로이 만들어졌던 새로운 것을 파괴하고 터뜨려버린다. 이책에서 나는 뉴미디어와
이전의 미디어 사이의 연속성, 역사적 반복과 혁신 사이의 상호작용을 강조하고자 했다.
나는 뉴미디어가 다른 미디어, 구체적으로는 영화의 오래된 형식과 규범을 차용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문화사는 강물처럼 그 경로를 갑자기 바꾸지 못한다. 그 움직임은 여러 지점 사이를 잇는 직선들의 움직임이
기보다는 얇은 판의 움직임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뉴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문화사 공간 안의 궤도를
만들고자 그 이전에 온 것에서 뉴미디어의 기초를 찾았다.
6장 영화란 무엇인가?
공간적 몽타주와 매크로시네마
공간적인 몽타주는 전통적인 영화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 몽타주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전통적인 영화가
가지고 있는 시퀀스적인 양상을 공간적인 것으로 대치시킨다.
..공간적 서사의 주변부화의 서사의 시퀀스적 모드의 특권화가 인문학에서의 역사적인 패러다임의 부흥과
함께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화지리학자인 에드워드 소자는 19세기 후반에 역사의 출현은 공간적 상상력의 쇠퇴, 사회적 분석의 공간적
모드의 쇠퇴와 함께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소자에 따르면, ‘정치지리학’과 ‘세계화’와 같은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안에서
공간 분석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 이것은 불과 20세기가 끝날 무렵의 마지막 몇 십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실제로 프로이트, 파노프스키, 푸코를 포함한 20세기의 최고의 사상가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이론안에서 역사
적 분석과 공간적 분석의 양상들을 결합시켰다.
그들이 규준을 보여주었다기 보다는 예외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영화이론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1920년대의 에이젠슈타인에서부터 1980년대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영화이론은 영화의 공간적인 구조보다는 시간적인 구조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세기 영화 활동은 다른 이미지들을 시간상에서 서로 대체시키는 몽타주의 복잡한 기술에 신경썼으나 공존
하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공간적 몽타주’라고 부르는 것의 가능성은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그래서
영화는 공간적 상상력을 대가로 역사적 상상력을 구현하였다).
서사가 스크린상의 다른 부분들을 활성화시키면, 시간적인 몽타주는 공간적인 몽타주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몽타주가 새로운 공간적인 차원을 획득했다고 말 할 수 있다.(이미지의 내용, 구성과
움직임에서의 차이들과 같은)몽타주의 차원이 영화에 의해서 이미 탐구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공간 안에서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미지들의 위치라는 새로운 차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에서처럼 이미지들이 서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여주는 내내 스크린상에 남아 있기
때문에 각각의 새로운 이미지가 바로 앞에 보인 이미지에만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스크린상에서
보이는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병치된다.
영화의 특성인 교체의 논리는 추가와 공존의 논리에 자리를 내주었다.
시간은 공간화되고 스크린 표면 위에 분산된다. 공간적 몽타주에서는 어떤 것도 잊혀질 필요가 없다.
어떤 것도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무한한 텍스트, 메시지, 주석과 데이터들을 모으기 위해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점점 더 많은 기억들을 축적해가면서 과거가 조금씩 미래보다
더 많은 비중을 얻어가는 것처럼 공간적 몽타주는 서사가 진전됨에 따라 사건들과 이미지들을 모아갈 수
있다.
영화 스크린이 지각의 기록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 컴퓨터의 스크린은 기억의 기록과 같은
기능을 한다.
사용자에게 동시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활성화된(왜냐하면 모든 아이콘들을 언제라도 클릭할 수 있으므로)
여러 개의 아이콘을 제공하는 데스크톱의 구성은 ‘동시성’ 및 ‘병치성’의 논리를 따른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수준에서는 이러한 논리가 객체 지향적인 프로그램과 상응한다.
정보공간으로서의 영화
리알리나는 영화에 전형적인 카메라의 이동성과 객체의 움직임을 모든 것을 ‘초점이 맞추어진’것으로 보는
네덜란드 회화 전통의 ‘하이퍼-리얼리즘’에 연결시키고 있다.
아날로그 영화에서 불가피한 ‘심도’는 이미지의 정보 밀집성에 대한 한계로 작용한다.
부스타니가 이룬 업적은 세부 요소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전체가 쉽게 파악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
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합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시각적 현실을 숫자로 환원함으로써 컴퓨터는 문자 그대로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벤야민의 지적대로 20세기초기의 영화는 클로즈업을 사용해서 “사물을 공간적으로 인간에게 ‘가깝게’가져
오거나, “대상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잡아 두었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의 아우라를 파괴했다.
반면 부스타니의 디지털 합성은 사물을 그것들이 세상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로부터 “끌어내지”않고 감상자가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장, 극장 그리고 쇼핑 아케이드와 같은 현대성에서 원형적인 지각공간들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발터 벤야민은
작업장 안의 지각 경험과 작업장 밖의 지각 경험 사이의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각노동의 근대적 체계에서는 눈이 자극을 지속적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벤야민은 그러한 체계가 노동과 여가에 똑같이 나타난다고 본다.
눈은 공장에서 산업공정의 리듬을 따라잡도록, 그리고 공장 출입구를 벗어나서는 복잡한 시각 기호의 세계에서
내비게이션을 하도록 길들여진다. 컴퓨터시대도 이와 동일한 논리를 따라간다.
그 결과 사용자는 직장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또 컴퓨터상에서나 밖에서나 유사한 구조를 갖는 지각 경험을
제공 받을 것을 기대하게 된다.
구식 비닐 디스크에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를 기록한 게파트 젠뮐러의 비닐/비디오 프로젝트 처럼 코직의
ASCII시도는 이미 쓸모없게 된 하나의 포맷에서 다른 쓸모없게 된 포맷으로 미디어 콘텐츠를 옮기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젝트는 최소한 1960년대 이래로 미디어 변환의 오퍼레이션이 우리 문화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영화는 비디오로 옮겨졌고, 비디오는 하나의 비디오 포맷에서 다른 포맷으로
옮겨졌으며 비디오는 디지털 데이터로 옮겨졌고 디지털 데이터는 하나의 포맷에서 다른 포맷으로 플로피
디스크에서 재즈드라이브로, CD-ROM에서 DVD로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옮겨졌다.
예술가들은 이와 같은 문화의 새로운 논리를 일찌감치 깨달았다.
1960년대에 이르면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워홀은 이미 미디어 변환을 그들 예술의 기반으로 삼았다.
젠뮐러와 코직은 현대사회에서 불가피한 미디어의 퇴화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은 뜻밖에도 이미 죽어간 미디어
를 다시 살려내는 데 있다고 이해했다.
젠뮐러는 오래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비닐 디스크에 옮겼고 코직은 오래된 영화를 ASCII이미지로 옮겼다.
ASCII코드의 역사는 그러므로 현대 디지털 컴퓨터로 이어지는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발전, 즉 암호 작성법,
실시간 통신, 통신 네트워크 기술, 코딩 체계 등을 압축하고 있다.
ASCII코드를 영화의 역사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코직은 ‘예술적 압축’이라 불릴 만한 것을 성취해내고 있다.
즉 동영상의 새로운 지위를 컴퓨터 코드로서 연출하면서 그는 컴퓨터 문화와 뉴미디어 아트의 여러 핵심 주제
들을 이런 이미지들 속에 또한 ‘코드화’해놓고 있다.
이책에서 논의한 대로 컴퓨터시대에 영화는 문화적으로 확립된 다른 형식들과 더불어서 정말이지 정확한 의미
의 코드가 되었다.
영화는 모든 데이터와 경험을 전달하는데 쓰이고 영화언어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와 기본 사양
안에 그리고 하드웨어 자체 안에 코드화되었다.
하지만 뉴미디어는 영화를 포함하는 기존의 문화 형식과 언어를 강화하는 반면 동시에 그것들을 재 정의하도록
열어놓는다.
그 인터페이스 요소는 전통적으로 연결되어온 데이터 유형에서 분리된다.
더 나아가 이전에는 배경이나 변두리에 속했던 문화적 가능성들이 중심으로 온다.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에 공간적 몽타주는 시간적 몽타주에 데이터베이스가 서사에 검색엔진이 백과
사전에 도전한다.
역시 온라인상의 문화는 전통적인 포맷의 아성에 도전하면서 배포된다.
컴퓨터 문화에서의 은유를 써서 말하자면 뉴미디어는 모든 문화이론을 ‘개방된 자료’로 만들었다.
이러한 문화적 기술, 규범, 형식 그리고 개념의 개방은 궁극적으로는 컴퓨터화의 가장 유망한 문화적 효과로서,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세계와 인간 존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