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1월 일제는 220명을 줄줄이 검거했고, 조직은 파괴되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인하여 박헌영이 주목받는 인물로 급부상했다. 재빨리 재건을 시도했다.
강달영(姜達永)이 책임비서가 되어 국내의 지방조직을 확대 개편하는 한편 만주, 상해, 일본 등지에 연락부를 결성했다. 이들은 먼저 사회주의 계열과 협동을 이루고 다음으로 민족주의계열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려했다.
하지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일대 시위운동을 벌이려고 격문과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려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권오설은 상해의 김단야에게서 안동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안동에서 김단야를 만나 순종의 국장을 틈타 시위를 주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자금 1천원을 받았다. 그는 조선노동총연맹의 집행위원인 박내원을 시켜 격문과 선언문등을 인쇄했다. 하지만 천도교에 있던 끄나풀이 이를 알아내고는 종로경찰서에 제보했다.
3.1운동 때와는 달리 일제는 순종의 국장에 철저한 감시를 펴고 있었다. 뱍내원이 체포된 뒤 모든 인쇄물이 압수되고 권오설과 강달영도 체포되었다. 김단야가 중국에서 보낸 인쇄물 5천여장도 압수되었다.
더욱이 강달영이 지니고 있던 암호로 쓴 비밀문서가 적발되었다. 강달영은 자살을 시도하면서까지 완강하게 버텨 암호를 풀어주지않았다. 하지만 종로경찰서 경부 요시노가 한자와 영자를 파자한 암호를 풀어내 비밀당원과 지방조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간부와 당원 71명이 체포되었고 이로써 조직은 와해되었다. 체포되지않은 당원은 상해나 만주로 달아났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 한다...92 - 93쪽
한국사이야기 제21권, 이이화, 2003년, (주)도서출판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