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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방의 지도 / 신용목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말이었으나 무리를 잃은 흰 날개의 메아리였다가 어느새 죽은 별들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안개처럼
골목은 간밤의 신열로부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식탁에 흩어놓은 약봉지 같다
내 안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는 대답을 막기 위해 밥을 먹어야 했다
내 귀의 구멍으로 밤을 구겨 넣고 간
네 목소리의 아침
누군가 느낌을 담아가기 위해 사람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마트에서 부엌까지 비닐봉지에 비린내를 담아가듯 꿈과 꿈 사이로 이어진 생활을 지나가려고
누군가 내 뺨을 후려치고 그 손을 내 손목에 달아놓았는지도 모른다
이 기분이 새지 않는다
골목에 별들의 지문이 잠기는 방향으로 휘감겨 있다 손목에서 빙빙 돌아가는 비닐봉지
이제 너는 안개 속으로 손을 넣지 않는다 축축하게 식어가는 밤을 만지려 하지 않는다
왜 꿈에는 귀가 없을까? 아무리 소리쳐도 꿈속까지 들리진 않는데 왜 꿈에서 속삭이면 꿈밖까지 들릴까? 골목에서는 질문을 멈추게 하는 알약이 팔리지만
여기서 외로움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응 나 여기 있어
별에서 막 흘러내린 안개처럼 자글거리는 조기를 뒤집어야 할 때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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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시인은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쓰는 동년배의 시인들과는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리듬 속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시를 써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설명은 불충분해 보인다.
우선 그의 시에는 재래의 서정시와는 달리 타자와의 화합이나 화해가 전제되지 않는다. 초기 작품에서 타자를 발견하고 이를 자신만의 리듬으로 새롭게 기술하는 데 있어 능숙한 기량을 보여주었던 그는 점차 타자와 자신의 접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를 서정성과 사회성의 길항이라는 말로 풀어도 좋을 것이다. 세계가 온전히 관찰과 노래의 대상이 되는 것만도 아니고 시인의 심회가 언제나 자발적으로만 움직여가는 것도 아니다. 언어 자체가 동시대의 환경 속에서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기에 언어를 매개로 하는 서정시가 사회와 완전히 별개의 리듬으로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시의 근본조건이다. 신용목의 중요한 실험은 바로 그 지점에서 행해진다.
신용목은 일체의 과장법이나 엄살 없이 세계와 자아의 연동이라는 문제를 내밀한 언어로 집요하게 탐문하는 흔치 않은 시인이다. ‘흐린 방의 지도’는 세계와 자아의 성급한 화해로 마무리되곤 하는 재래의 서정시와는 달리 일상의 소소한 모습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에 기초해서만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비닐봉지에 담긴 비린내가 꿈과 생활의 선후관계를 묻는 계기가 된다. 미리 주어진 어떤 잠언이나 성찰이 없이 경험의 테두리 내에서 태동하는 이런 사유를 통해 그는 21세기의 서정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조강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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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분석
- 공동체와 연계된 책임성, 죽음과 슬픔을 중심으로 분석
- 세월호, 이태원 등을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
1. 제목의 의미: 흐린 방의 지도
‘방’은 개인의 내면 공간, 고립된 의식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감정이 얽히고 추억과 슬픔이 들끓는 장소입니다. ‘흐린’이라는 형용사는 그 방이 명료하지 않다는 뜻으로, 기억이 희미해졌거나, 감정이 지나쳐 분간되지 않거나, 혹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로 명확한 윤곽을 잃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도’는 그 방의 구조와 길을 파악하려는 시도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흐린 방’의 지도는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즉, 이 시의 제목은 자기 내면 혹은 타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감정의 공간을, 더듬어가며 알아가려는 시도의 은유입니다. 누군가를 상실한 후, 흐릿해진 감각과 기억을 따라 자신이 있는 위치를 찾아보려는 시도인 셈이죠.
2. 주제
이 시는 누군가의 죽음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후 남겨진 자의 고통, 무력감, 슬픔, 응답의 윤리를 담고 있습니다. 시의 화자는 부재하는 존재의 ‘소리’를 듣고,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음을 인식합니다. 그 침묵 속에서 화자는 되려 대답을 합니다. “응 나 여기 있어”라는 마지막 구절은 죽음과 단절된 관계 앞에서도 결국 응답하려는 시인의 존재 방식, 또는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윤리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 시는 애도 속에서 끝내 고개를 들고, 타자의 부재를 나의 책임으로 끌어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슬픔의 통과 의례이자 생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3. 상징 분석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 죽은 자의 침묵, 관계의 단절. 하지만 그 침묵은 여전히 존재를 자극합니다.
흰 날개의 메아리, 죽은 별, 안개: 생명이 떠난 자리를 둘러싼 흔적과 정조. 죽음의 상징이자, 소멸의 잔향.
약봉지, 비린내, 조기, 밥: 일상. 고통을 견디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며, 감정의 잔여물이 묻어 있는 구체물.
비닐봉지: 생활의 고단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타인의 감정을 떠맡은 자의 ‘손목’에 매달린 채 흔들리는 책임의 상징.
귀 없는 꿈: 소통의 불능, 단절된 관계. 아무리 외쳐도 닿지 않는 세계.
질문을 멈추게 하는 알약: 사고를 멈추고 감정을 억제하는 사회의 방식. 그 안에서 화자는 그러나 ‘외로움’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독립적 감정의 주체로 남고자 합니다.
자글거리는 조기: 일상의 아주 구체적인 지점. 삶은 계속되고 있으며, 죽음을 경험한 자는 다시 조기를 뒤집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죽음을 기억하는 한 방식이자, 존재의 지속을 말합니다.
4. 문장 단위 분석
1행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 부재한 타자의 흔적을 감지하는 순간. 누군가 나를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부름을 기다리는 존재의 감정을 드러냄. 슬픔의 시작.
2~3행
“그것은 말이었으나 무리를 잃은 흰 날개의 메아리였다가 / 어느새 죽은 별들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안개처럼”
→ 이 소리는 구체적인 언어가 아닌, 메아리로 남아 퍼지는 잔향이다. ‘흰 날개’는 순수한 존재, 혹은 사라진 존재를 연상케 한다. ‘죽은 별’은 존재의 소멸이며, ‘안개’는 그것이 감각되지만 잡히지 않는 죽음의 기운이다.
4행
“골목은 간밤의 신열로부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식탁에 흩어놓은 약봉지 같다”
→ 공동체 혹은 한 인간의 삶의 자리인 ‘골목’이 앓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약봉지로 표현된 몸의 고통, 혹은 치유되지 않는 상태와 연결된다. ‘골목’은 여기서 외부 세계이자 내부 감정의 반영.
5~6행
“내 안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는 대답을 막기 위해 밥을 먹어야 했다 / 내 귀의 구멍으로 밤을 구겨 넣고 간 네 목소리의 아침”
→ 대답은 곧 울음이거나 감정의 분출이다. 화자는 감정을 억제하고, 그 대신 ‘밥’이라는 현실의 생존을 수행함으로써 감정을 눌러버린다. 밤은 구겨진 감정이며, 그 속에 남은 것은 네(죽은 자)의 목소리로, 그것이 이제 아침의 정적을 대신한다.
7~8행
“누군가 느낌을 담아가기 위해 사람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 마트에서 부엌까지 비닐봉지에 비린내를 담아가듯”
→ 사람의 존재가 감정을 옮기기 위한 매개로 설정된다. 존재는 ‘운반’되며, 삶은 비린내와 같이 불쾌한 감정까지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감정은 덜어낼 수 없고, 관계는 물질처럼 주고받는다.
9행
“꿈과 꿈 사이로 이어진 생활을 지나가려고 / 누군가 내 뺨을 후려치고 그 손을 내 손목에 달아놓았는지도 모른다”
→ 삶은 꿈과 꿈 사이, 현실이 아닌 듯 반복된다. 그리고 타인이 준 고통—‘뺨을 때리는 행위’—가 그대로 내 몸 일부로 부착된다. 즉, 상처는 제거되지 않고 나의 일부가 된다.
10행
“이 기분이 새지 않는다”
→ 감정이 밀폐되어 있는 상태. 슬픔과 무력감이 포화되었으나, 어디로도 흘러나가지 못하는 상태를 직설적으로 표현.
11행
“골목에 별들의 지문이 잠기는 방향으로 휘감겨 있다 손목에서 빙빙 돌아가는 비닐봉지”
→ ‘별의 지문’은 죽은 자의 흔적. 그것이 도시의 골목에서 스러지고 있다. 내 손목에서 돌아가는 비닐봉지는 공동체의 고통을 내가 감당하고 있다는 인식이자, 삶의 궤적이 타인의 죽음을 휘감고 있다는 형상.
12~13행
“이제 너는 안개 속으로 손을 넣지 않는다 / 축축하게 식어가는 밤을 만지려 하지 않는다”
→ 죽은 자는 더 이상 현실의 감각에 개입하지 않는다. 촉각의 단절. 이제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존재.
14~15행
“왜 꿈에는 귀가 없을까? 아무리 소리쳐도 꿈속까지 들리진 않는데 / 왜 꿈에서 속삭이면 꿈밖까지 들릴까?”
→ 꿈은 단절의 세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약한 신호—속삭임—은 현실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는 죽은 자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소통은 불가능하지만 잔향이나 여운은 지금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6행
“골목에서는 질문을 멈추게 하는 알약이 팔리지만 / 여기서 외로움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 고통을 멈추게 하려는 사회적 장치(약, 무관심 등)가 있지만, 화자는 외로움을 감정으로 끝내지 않고 응답과 연대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감정의 상품화에 저항하는 태도.
17~19행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 그래서 대답했다 / 응 나 여기 있어”
→ 이 시의 핵심 전환. 죽은 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응답한다. 타자의 침묵 앞에 서 있는 나의 책임, 나의 존재 선언.
20행
“별에서 막 흘러내린 안개처럼 자글거리는 조기를 뒤집어야 할 때를 보고 있었다”
→ 죽음의 은유인 ‘안개’와, 생존의 구체적 행위인 ‘조기 뒤집기’가 겹친다. 슬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일상은 흐르고 있다. 애도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수행되고 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ca2f6608b400458f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시선 411
신용목
울음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기 위하여 슬픔은 눈물을 흘려보낸다/이렇게 깊다/내가 저지른 바다는//창밖으로 손바닥을 편다//후회한다는 뜻은 아니다/비가 와서//물그림자 위로 희미하게 묻어오는 빛들을 마른 수건으로 가만히 돌려 닦으면//몸의 바닥을 바글바글 기어온 빨간 벌레들이 눈꺼풀 속에서 눈을 파먹고 있다//슬픔은 풍경의 전부를 사용한다(「저지르는 비」 전문) 시인은 삶의 고통 속에서 주로 낮고 그늘진 곳을 응시하는 눈으로 어두운 세상을 바라본다. 시인은 “기쁘다고 말하며 울고 슬프다고 말하며 웃는 사람들”(「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을 착취당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어떤 비도 슬픔을 씻기진 못하”(「후라시」)고 “슬픔과 몸이 하나일 수 있다는 것”(「가을과 슬픔과 새」)을 깨닫는다. 이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고뇌 속에서 시인은 전망이라곤 당최 보이지 않는 ‘아무 날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사랑과 슬픔과 분노”(「노랑에서 빨강」)를 곡진한 언어로 기록하며 삶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사랑이 가능하다면,/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공동체」 부분) 시인은 시대에 내몰린 숱한 죽음들과 “세상의 모든 외로움”(「그리고 날들」)을 외면하며 그저 묵묵히 견디려 하지 않는다. “절반만 거짓을 믿으면/절반은 진실이 된다”(「절반만 말해진 거짓」)는 아이러니한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시인은 “깨진 유리 속이면 사람은 한명으로도 군중을 만든다”(「우리 모두의 마술」)는 믿음으로 다가올 미래에 한줌의 빛을 던지며 투명한 세상을 열기 위해 마음가짐을 달리한다. “나는 네 몸이 아프다/네가 내 몸을 앓듯이”(「절반만 말해진 거짓」)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에 시인은 “일상이라는 죽음” 속에서 바닥까지 절망하면서도, “몸 밖으로 쫓겨난 꿈”(「나는 알고 있거든」)을 되살려 ‘나’와 ‘너’를 아우르는 ‘우리’의 세상을 꿈꾼다. 나는 저 발자국이 몸으로부터 아주 끊어져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몸은 없는데 무게만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발자국마다 당신이 서 있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어떤 비는 지워진 밤을 위해 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둥둥 떠내려가는 어둠이 상갓집 신발처럼 우리를 흩어놓는다고 느끼는 건 아닙니다.//(…)//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잘 지낼 수 있겠지만,/마지막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우리라서,(「우리라서」 부분)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차마 경계 지을 수도 없는 인간이라는 보편의 사정을 한 철저한 개인의 반성을 통해 그려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김나영, 해설)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전히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세상을 향해 시인은 “죽을 때까지 걷도록 선고받”(「우리」)은 절망을 껴안으며 “미늘에 걸려 찢긴 물고기의 입으로”(「게으른 시체」) 말한다. “제발 울지는 말자” 다짐하면서 “목소리가 사라진 노래”(「목소리가 사라진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를 부르는 시인의 간절한 외침을 우리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하여 깊은 절망의 늪 속에서도 ‘시’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 것이라는 소망과 “인간은 끝나지 않는다”(「우리 모두의 마술」)는 믿음에 근거하여 시인이 꿈꾸는 새로운 ‘공동체’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잤던 잠을 또 잤다.//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누구의 이름이든/부르면,/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가까워지면,//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잤던 잠을 또 잤다.//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내가 돌아보았다.//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나는 돌아보았다.(「모래시계」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