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겨울'을 견딘 오키나와의 지부결성은 7월 17일, 권력의 마성과 투쟁하겠다고
맹세한 원점의 날이었다. 오키나와에서 세계로 새로운 봄바람을 일으킨다.
일본의 봄은 오키나와에서 시작된다. '겨울'을 견뎌내고 맞이하는 '봄'은
오키나와부터 찾아온다. 이케다 회장은 제3대 회장에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오키나와에 새 지부를 결성한 까닭은 무엇인가? 회장은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오키나와에 돌아와 이곳에서 광포의 새로운 봄바람을 일으키자고
결심했다." 어떻게 불행이라는 겨울을 극복하고 행복이라는 봄바람을 불게 할까.
인간은 결국 행복하냐 불행하냐이다. 민족도 국가도 역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케다 회장은 고뇌하는 동지에게 성심성의를 다해 역설했다.
"승리하는 곳에 행복이 있다. 지면 불행하다. 승리하면 긍지 드높고 즐겁다.
패배하면 사람들이 눈을 흘기고 고뇌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겨라."
7월 17일은 '오사카사건'으로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쓰고 오사카구치소에 구류되었던
이케다 회장이 '출옥한 날'이다.
장편시 "영원하여라, '평화의 요새'"에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키나와에 첫 지부가 생겼다.
이날은 또한 거슬러 올라가면 3년 전 민중 평화세력의 대두를
멈추게 하려던 권력의 책략으로
사실무근한 죄로 체포된 내가
옥사를 나온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아, 연이 깊은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오키나와의 천지여"
이케다 회장은 '연이 깊은' 오키나와에서, 민중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
'권력의 마성'과 새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이케다 회장이 세계에 혁혁히
정의를 세우는 '입정안국'의 투쟁이었다. 광선유포는 선이 악에게, 정(正)이
사(邪)에게 승리해야 하는 투쟁이다. 학대받은 민중을, 위대한 사명에 눈뜨게
만들고 엄연히 일어서게 만드는 투쟁이다.
이케다 선생님이 오키나와의 지부결성일을 7월 17일로 정해주셨습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사실무근한 죄로 체포된 이케다 선생님이 15일 동안 구류되었다
출소하신 날입니다. 그 일이 있고 불과 3년 후입니다. 아직 옥중의 기억도
생생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을 택해 세계 최초의 해외 지부를 '결성일'로
해주셨습니다. 거기에 담긴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이케다 선생님은 "'7·17'은
민중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생애 권력의 마성과 투쟁하겠다고 맹세한 원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권력의 마성이 일으킨 가장 큰 비극은 전쟁입니다.
그 최대의 희생이 된 오키나와. 최악의 비극을 겪은 땅이 숙명전환을 이룬다면
전환하지 못할 국토는 없습니다. 그것이 불법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권력의 마성과
대투쟁을 다짐한 '원점의 날'에 세계평화의 선구로서 선생님은 오키나와에 지부를
결성하시지 않았을까요. 권력의 마성에게서, 세계의 민중을 지키는 '원점'.
그 땅이 바로 오키나와라고 확신합니다.
7월 17일 당일, 이케다 회장은 이른 아침부터 무척 분주했다. 신임간부의 면접과
조직의 체제나 오키나와지부의 사무실 개설에 대한 검토, 사무직원 선임 등, 회장이
머무는 숙소가 '광포의 본진'이었다. 동행하는 간부는 말한다. "이케다 선생님은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하루 동안에 1년분의 투쟁을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지부나 청년부 모두 정확히 인재를 골라 새로운 지부와 새로운
부대를 직접 만드셨습니다."
결성대회 전날 밤, 동행하던 간부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내일 아침, 이케다 선생님에게 오십시오."라고 말이지요. 7월 17일 아침,
숙소로 갔습니다. 선생님이 머무시던 곳은 간소한 여관이었지요. 에어컨도
없었습니다. 폭염의 날씨에 잠을 얼마나 설치셨을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이야기를 동행하는 간부에게 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가장
더운 때에 오키나와에 가야 오키나와 사람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이 정도로 생각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몇명의 간부와 함께 맞아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부터 정말 수고 많습니다. 오늘은 머리도 단정하군요."
선생님은 상냥하게 웃으셨습니다. 저는 몹시 놀랐습니다. 전날 급해서 옷차림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나하공항에 마중을 나갔기 때문입니다. 공항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런 부분까지 지켜보셨던 겁니다. 선생님은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으신 후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학회 여자부는 미래를 짊어질
여성 리더입니다. 그러므로 옷차림도 단정히 할 수 있는 풍부한 마음을 지니기 바랍니다.
여자부는 전원 행복해지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복운'이 가장 중요합니다.
젊을 때 복운을 쌓아야 합니다. 복운은 이 신심으로만 쌓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투쟁해서 복운을 쌓으세요." 선생님 말씀에 씩씩하게 대답하자,
"그래요. 잘 알아들었군요. 그러면 결성대회에서 만납시다." 그 말을 남기고
선생님은 다음 협의에 임하셨습니다. 그런 직후 여자부장에게서 오키나와 여자부의
부대장으로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과 나눈 간담이 실은
부대장 등용 면접이었던 것입니다.
혼돈에서 희망으로, 오키나와 동지는 혼란을 극복하고 이케다 회장을 맞이한
기쁨에 넘쳐 광포를 전진시키는 투쟁을 추진했다. 1960년도 상반기 지구별
절복성과를 보면, 그 전진이 얼마나 굉장했는 지 한눈에 봐도 명확하다.
전국 제1위가 1915세대를 달성한 오키나와지구(가마타지부), 제2위가 1047세대를
달성한 구조지구(마쓰시마지부)였다. 1위와 2위 모두 새로 발족한 오키나와지부와
연관 있는 지구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당시 전국 평균은 178세대. 오키나와는
압도적인 투쟁으로 전국 1,236개 지구의 정점을 달린다는 대금성(大金星)을 쟁취했다.
이날 오키나와의 가마타지부를 비롯한 43개 지부에 소속된 회원은 7094세대.
해외 최초 지부결성에 걸맞는 일대진용이 구축되었다.
결성대회가 열리는 체육관 단상 위에는 '전진'이라는 두 글자가 걸려 있었다.
이케다 회장을 구도해 환희차게 달려온 오키나와의 동지는 11시에 이미 모두 모였다.
"모인
1만 여명의 지용의 벗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맹세의 검은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만면에 웃음 띤 그대들" (장편시 "영원하여라, '평화의 요새'")
오키나와지부 결성대회는 오후 1시에 열릴 예정이었다. (중략)
회장의 배려로 예정보다 앞당겨 오전11시에 회합을 시작했다.
오키나와의 역사적인 결성대회가 막을 열었다. 개회사, 체험담 발표에 이어
이사가 '오키나와지부' 결성을 발표했다. 전날 밤 간부회에서 발표되었을 때는
지구부장 이상이 참석했기 때문에, 참석자 대부분이 처음 듣는 뉴스였다.
행사장에서 환성이 터졌다.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새 지부의 체제도
소개되었다. 인사담당이 단상에 올라 지부장과 부인부장, 13개 지구의 지구부장과
지구담당원 등 인사를 발표했다.
단상 오른편에는 "자, 나아가자/월지 끝까지 묘법을/드넓은 여행에/마음 씩씩하게"
라고, 왼편에는 "한번은 죽을 목숨/두려워하지 말고/부처의 적을/한 사람도 남기지
마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자애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1년 전 선생님과 만난 일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입회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선배를 따라 학회본부에 가서 이케다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선생님은 협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아기를 안은 부인이 지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 아이는 병에 걸려 손과 발에 힘이 없이 축처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학회에서 떠난 뒤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기백이 담긴 목소리였습니다. 부인은 신심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부처의 단체에서 멀어지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식이
아닙니다. 당신이 열심히 조직 속에서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식은
틀림없이 건강해집니다." 선생님의 자애로운 한마디 한마디가 옆에서 듣고 있던
제 가슴에 와서 박혔습니다. 그때 저는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선생님에게서 멀어지면 행복해 지지 못한다.'라고 말이지요.
이날 열린 지부결성대회에서 지구부장에 임명받은 저는
'선생님을 끝까지 구도하자.'고 더욱 강하게 결심했습니다.
신임간부의 포부발표와 간부지도에 이어 이케다 회장이 등단했다.
회장은 소중한 가족에게 말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키나와 동지 여러분, 나날의 투쟁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애 넘친 목소리가 장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체육관 바깥에 있는 동지들을 위해
급히 설치된 스피커에서도 회장의 따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케다 회장은 계속 지도했다. "일본에는 세계에 공헌할 만한 어떤 것도
없는 듯합니다. 전쟁에 졌다고 해서 이렇게 비굴해지고 유약해지다니,
서글픈 심정입니다." 광선유포의 지도자로서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니치렌대성인은 '어본존을 믿고 넓히면 반드시 일본은 영원히 행복해진다.'고
700년 전에 명확하게 갈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이 '일본은 니치렌불법만이 구할 수 있다.'고 당시 군부정부와
정면으로 투쟁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은 옥사하고 도다 선생님은
2년 동안 투옥되셨습니다. 오키나와 동지 대부분은 초대와 제2대 회장이
평화를 추구하다 엄연하게 옥중투쟁을 겪은 사실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일본은 패전국입니다. 그러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 안 됩니다.
광선유포는 불국토 건설을 목표로, 민족을 생각하고 평화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창가학회의 근본의(根本義)입니다. 창가학회가 커지면 그뿐,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그런 편협한 생각을 지니면 안 됩니다.
일본민족과 선조를 위해 또 아이들을 위해 번영 시키고 싶다,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그리고 전 세계를 위해 공헌하고 싶다. 이것이 창가학회의 사명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이 평화를 염원하며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을 관철하다 투옥당하고, 패전을 맞은 일을 역설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신했습니다. 국가권력에 희생된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원수를 갚고자, 이케다 선생님은, 일본의 방패가 되어
비참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땅이 된 오키나와를, 세계광포를 내딛는
제일보의 땅으로 정해 투쟁을 시작하셨다고 말이지요. 선생님의 오키나와
방문은 그야말로 사제불이의 투쟁이었습니다.
저는 처남을 따라 미야코지마에서 참석했습니다. "창가학회가 커지면 그뿐,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그런 편협한 생각을 지니면 안 된다."고 하신
한 마디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매스컴에서 하는 말과 전혀 달랐지요.
창가학회는 굉장한 단체라고 마음속 깊이 실감했습니다. 선생님이 오키나와를
방문하신 그 다음 달이었습니다. 시즈오카에서 하계 강습회가 한창일 때,
뜻밖에 선생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멀리서 보았던 선생님이
눈앞에 계셨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왔습니다."하고
말하자, "대단히 수고 많습니다. 신심을 열심히 실천 하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퇴전하면 안 됩니다."라고 격려하고 악수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결심했습니다. '좋다, 미야코에 돌아가면 착실하게 신심을
하자. 절복도 하자. 미야코의 청년에게 희망을 주는 내가 되자!'
이케다 회장은 종교를 비판하는 원리인 '삼증(三證)'을 언급한 후 이렇게 말했다.
"어본존을 배례하면 생활상에 증거가 나옵니다. 이 증거가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증거를 확실하게 체득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체험입니다.
체험이 확신이 됩니다. 그 체험으로 열심히 절복했으면 합니다."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기 체험을 끝까지 말하는 행동이 행복으로 가는
바른길이라고 확신했다. 회장은 함께 싸우자고 당부하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불법은 인과이법(因果理法)입니다. 어본존을 배례하면 증거가 나옵니다.
원인과 결과입니다. 신심즉생활입니다. 생활상에 어본존의 공덕을 한없이
받아서 금세(今世)의 인생을 의의 있게 보내지 않겠습니까. 다음 번에 또 지부기와
부대기 수여식에 여러분의 씩씩한 모습을 꼭 뵈러 올 테니 아무쪼록 활기차게
분발해주십시오."
이케다 선생님은 문증(文證), 이증(理證), 현증(現證)이라는 '삼증'을 알기 쉽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오키나와의 종교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선생님 지도를 받고 나서 오키나와는
폭발적인 확대를 전개해 전국을 제패하는 실증을 보였고, 이듬해에는 총지부
그 다음다음 해에는 오키나와본부 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오키나와 지부결성대회는 오후 1시에 끝났다. 동행하던 간부가 결성대회의
감상을 이렇게 썼다. "이제껏 이렇게 힘찬 격려를 받은 적이 없었다.
참석자들의 얼굴은 안심과 환희로 감격을 억누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살그머니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치는 부인부 멤버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당시 일을 술회하며 이케다 SGI 회장은 이렇게 지도했다.
"오키나와는 힘겨운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나는 모든 멤버를 격려했습니다.
'오키나와는 반드시 장래 동양의 하와이가 됩니다. 반드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동경하고 모이는 천지가 됩니다.' 어느 곳보다 전쟁에 희생되어 극심하게
고통받은 오키나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 '평화'와 '행복'을
쟁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키나와의 사명입니다. 오키나와의 투쟁입니다.
또 이것이 나의 기원이자 결의이고 확신이었습니다."
저는 1958년에 입회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조합활동에 몰두해 신심은
소극적이었지요. 당시 이케다 선생님이 행사장 밖에도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내와 어린 두 아이와 함께 행사장 밖에서 듣고 있던 저는 흰 노타이셔츠
차림의 선생님을 발견했습니다. 참석자를 격려하는 선생님 그리고 그에
응하는 참석자. 그 정열에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다.'하고 몸이 떨리는 듯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늠름하게 행동하시는 모습, 스치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오키나와를 생각하는 기백이 넘쳤습니다.
'선생님을 스승으로 삼아 광포에 일어서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를 남긴다.'
내 가슴속에 결의가 솟구쳤습니다. 결성대회에서 선생님과 만난 인연이
제 인생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오키나와에 지부를 결성한 의의를 당시 세이쿄신문의 사설에는 이렇게 썼다.
"해외의 첫 지부결성이다. 그 의의는 매우 크며, 이날은 광선유포 도상에
기념할 만한 날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케다 회장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때 이미 회장의 해외방문 계획이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방문의 승리가 그대로 세계광포의 승리로 이어졌다.
축하연에서 도시락을 나눠주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도시락에는 달고
짭짤하게 조린 돼지 삼겹살과 튀긴 두부, 그리고 하얗게 윤기나는 본토쌀로
지은 밥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는 아직 가난해서 밥이라고
해도 부슬부슬한 캘리포니아 쌀로 지은 밥이 고작이라, 맛있는 본토쌀은 좀처럼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값싼 감자나 국수를 주식으로 먹고 있었습니다.
모두 몹시 기뻐했지요. 선생님의 진심을 정말 기뻐하며 맛있게 곰곰이
음미했습니다.
축하연에서 우리는 진심을 담아 이케다 선생님에게 전통의 류큐무용을
선보였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춤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런 뒤 선생님은
벌떡 일어나서 "이번에는 내가 추겠습니다"라고 '구로다부시'를 추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추는 춤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 용장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오키나와 광포를 지휘하시는 선생님의 기세, 선생님의 진심,
선생님의 기대가 이중삼중으로 겹쳐 감동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축하연에도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케다 선생님의
'구로다부시' 춤을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전통 류큐무용을 배웠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선생님 춤을 보고 몹시 감동했습니다. 1960년 당시 저는
여섯살이었고 여동생은 한살이었습니다. 그 후 성장한 우리에게 어머니는 자주,
선생님 춤이 훌륭했다고 들려주었습니다. (중략)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였지만
그때마다 어머니의 감동이 우리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우리 자매는 여덟살이 되자
어머니의 권유로 류큐무용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너희가 무용으로
광선유포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보은이자
감사란다." 어렸기에 연습이 힘든 적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신심과 무용은
그만두면 안 돼. 선생님과 한 약속이니까."하고 엄하게 충고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조발성 뇌출혈로 쓰러져 어머니가 의류 행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셨
습니다. 무용을 배우려면 의상을 포함해 돈이 듭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비용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우리 무용이 해외공연을 할 정도로
평가받자 어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매가 소카대학교의
클럽 코치를 맡았을 때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조금은 선생님에게 보은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말하면서 어머니는 지지난해 영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축하연에서 오키나와 동지에게 용기를 주신 선생님의 자애와 진심 어린 춤을
우리가 이어받아 평화와 문화의 무용을 계속 출 것입니다.
축하연이 한창이었다. 이케다 회장은 오키나와지부의 중심간부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어쨌든 사이좋게, 명랑하게 전진하기 바랍니다. 단결이 오키나와가
발전하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또 이렇게 지도했다.
"오키나와는 교학을 몸에 익히십시오." 회장은 오키나와의 행복을 위해
착착 손을 썼다. 불법은 가장 괴로워한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있다.
가장 불행을 맛본 지역이 찬연하게 낙토로 빛나기 위해 있다.
이것이 회장의 마음이었다.
축하회를 마치고 이케다 회장 일행은 숙소로 돌아왔다.
회장의 제안으로 오키나와 지부결성을 기념해서 축하엽서를 돌려쓰기로 했다.
동행하는 간부는 무엇을 쓸지 이리저리 고민했다. 회장은 거침없이 이렇게
썼다. "오키나와의 동지여 단결하라."
단결에서 새로운 건설은 시작된다. 이것이 오키나와의 지침이 되었다.
오합지졸을 모아 오키나와의 지부결성은 이루어졌습니다. 모두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색지에 "오키나와 동지여 단결하라."고
써주셨습니다. 오키나와 동지는 그 말을 모토로 삼았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단결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모든 멤버의 힘이 몇십배, 몇백배나 증가합니다.
우리 집에는 선생님에게 받은 휘호를 소중히 걸어두었습니다.
저는 하루의 투쟁을 마치면 선생님이 주신 색지와 사진을 봅니다.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솟아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 집의
보물인 색지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한번은 죽을 목숨 아끼지 말고 /
부처를 위한 영예로운 투쟁에"라고 씌어 있습니다. 우리 집은 혼신의 힘을
다한 선생님 지도에 고무되어 숙명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암흑에서 밝음으로, 어둠에서 새벽으로 역사를 전환한다.
그것이 불법(佛法)이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분쟁에서 조화로 생명을 변혁한다.
그것이 창가(創價)다. 오키나와는 그 상징이었다.
이케다 SGI 회장은 말한다.
"오키나와의 승리 그리고 오키나와의 평화는
먼저 일본의 광선유포가 반드시 된다는 불멸의 모델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세계 광선유포의 사명을 지닌 제3대 회장으로서
오키나와를 방문한 기회를, 최대로 의의 있는 의식으로서 임했다."
7월 16일에 처음 방문해 17일에 지부결성을 마친 오키나와 지도는
마침내 3일째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바다와 합쳐지면 지구를 감싼다.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의 손에서 세계평화의 조류가 만들어졌다.
(1972년, 오키나와 온나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