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이재부
무심하다고 탓하지 마시게. 늙으면 마음을 잠그지 않아도 열려는 사람이 없다네. 흐르는 것들과 무심한 동행을 혼자 즐기는 심정은 마음 쓰지 않아도 알게 되리. 곱게 늙기가 어렵지만 그것 또한 별 것이 아닐세. 반복이 계속되는 석양도 기죽은 침묵은 내부에 감추고 고운 표정만 물들어 보인다네. 노안의 미소도 아름다운 노을이리. 저항하지 않는 마음, 고독을 즐기는 표정의 풍요로움을 삶의 여유로 생각하시게. 마음 돌리며 세상을 보면 만상이 친구인 것을 왜 진작 몰랐던지.
무심한 것들과의 교감하는 경지가 욕망을 버린 변명일까. 그것만은 아니리라. 사색에서 얻어지는 참사랑의 설명이라 생각하자. 나이 들면 덤으로 생기는 이익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지는 꽃잎엔 활기가 없다네. 무심한 경지로 떨어지는 꽃잎처럼 씨앗을 잉태한 추억만 곱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직거래가 사랑의 전부는 아니리라. 무심한 상대에 대한 연모지정의 그리움도 애증이 아니고 사랑임을 알게 되면 벌써 무심의 경지에 이른 것인가. 늙는 탓으로 돌리지는 말게.
혼자 중얼중얼 무심천 길을 산책하다보면 달빛에 젖은 물결, 물결에 젖은 달빛, 여명에 밀리어 빛을 잃어가는 물에 잠긴 하현달과 만날 때가 있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달빛에 젖은 무심천은 처연해 보인다. 장마 끝 수량이 많으면 당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럴 때가 많겠는가. 인생사 태반이 무심한 동행이라고 일러 주지도 않고 마음 사리고 흘러가니 그 이름이 “무심천”인가보다. 무심한 것이 저 물길뿐이겠는가. 만남이 멀어지는 벗님들, 살기에 골몰한 일가친척, 힘을 보태며 살았던 직장동료들, 귀엽게 눈빛 맞추던 제자들도 다 세월에 쓸리어 무심으로 잦아지는 그리움의 흔적이아니던가.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이름을 “무심천”으로 부름은 그 유래를 물어보지 않아도 정경만으로 짐작이 간다. 급박함이 아닌 무심의 경지는 평화의 이면이리. 유속이 급하지 않은 평지를 흐르니 긴장하고 서두를 필요 있는가. 가덕면 내암리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금강 지류의 무심천은 낙차 심한 급류가 없다. 100여리 넘는 물길을 더하고, 빼며 생명을 가꾸는 평지로 흘러간다. 유유자적 무심의 경지다.
날로 번창하는 청주를 동서로 나눔이 무심천의 지리적 위치다. 흥덕, 상당의 지역의 분배가 확실하지 않던가. 돌다리도 없던 시절은 연인의 정분을 가르는 무심한 강이었을까. 무심천 물길이 도시의 애환을 다 품고 우암산을 멀리 보며 흘러간다. 누워있는 소 우암산(牛臥岩山),“쇠귀에 경 읽기”의 양음의 짝이 무심천이니 이름하나는 천생연분이다. 생각에 싹을 틔우는 무심천변 산책로에서 인생살이 무심경(無心經)을 읽으며 삶의 깊이를 재며 산다.
주야장천 흐르는 물도 변색하고 변모하는데, 인생사 바람결에 무심함을 탓하리요. 청풍명월 맑은 고장 한강, 금강이 젖줄이면 무심천은 양수이다. 충정의 중심도시를 잉태하고 미호천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흘러간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청주사람 가꿔가는 무심천은 천복의 자원이며, 시민 휴식의 화원이다. 예술혼을 북돋우는 사색의 서책이며, 수신의 경전이다. 사계절 변색의 정경은 시민 정서의 내면이다. 물길의 여분(餘分)을 같이 쓰며 무심한 듯 흘러간다.
무심 사계를 온전히 밟으면 무학(無學) 촌로(村老)도 시인을 닮는다. 봄빛에 머무는 선녀의 미소, 개나리 벚꽃이 만개하면 관객이 모여 꽃구름 되고, 녹색 벌판 물길 백리 여름경관은 초록의 파도다. 갈대, 억새 어우러져 꽃을 피우는 가을이 오면 심금을 울리며 시드는 떨림이 장관이다. 백설분분 겨울철엔 인적은 드물어지고, 백설 수의 임종의 달빛만 싸늘함이 무심경이다. 우암산과 무심천은 청주 시민의 영원한 둥지다. 고인의 시구(詩句)대로 *우와방초안(牛臥芳草岸)이요 무심장천수(無心長川水)이다.
(2012년 7월 23일 무심천에서)
*우와방초안(牛臥芳草岸) 무심장천수(無心長川水): 소는 꽃다운 풀언덕에 누워있고, 무심한 물은 긴 내로 흐른다.
첫댓글 늙는 게 서러운 것만은 아니네요. 나름대로 꽃과 녹음도 있고 흐르는 물도 있고 황홀한 노을도 있으니
무엇이 보족하리요. 다만 바르게 늙는 일만이 걱정일 따름인 것 같습니다.
무심히 흐르는 무심천을 보고 저는 그렇게 많이도 보았건만 무심햇었는데 선배님은 무심하지 않으셨군요 아니 무심하신게 아니라 마음을 온통 뺏기시며 수준높은 글을 쓰셨군요. 존경합니다선배님
노안의 미소도 아름다운 노을이리. 저항하지 않는 마음, 고독을 즐기는 표정의 풍요로움을 삶의 여유로 생각하시게. 마음 돌리며 세상을 보면 만상이 친구인 것을 왜 진작 몰랐던지.
"달빛에 젖은 물결, 물결에 젖은 달빛, 여명에 밀리어 빛을 잃어가는 물에 잠긴 하현달과 만날 때가 있다."~우와방초안(牛臥芳草岸)이요 무심장천수(無心長川水)이다. 좋은 글에서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저항하지않는 마음,고독을 즐기는 표정의 풍요로움을 삶의 여유로 생각하시게. 구절구절마다 심금을 울리는 무심천 잘감상하고 갑니다.
'무심 사계를 온전히 밟으면 무학(無學) 촌로(村老)도 시인을 닮는다.
봄빛에 머무는 선녀의 미소, 개나리 벚꽃이 만개하면 관객이 모여 꽃구름 되고, 녹색 벌판 물길 백리 여름경관은 초록의 파도다.
갈대, 억새 어우러져 꽃을 피우는 가을이 오면 심금을 울리며 시드는 떨림이 장관이다.
백설분분 겨울철엔 인적은 드물어지고, 백설 수의 임종의 달빛만 싸늘함이 무심경이다...'
무심천 산책로를 걸으시면서 깊이 사색하신글 감사히 감상 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안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