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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라나 낄라 : Purana Qila、Hindi: पुरानाक़िला, قلعہ ; Old Fort 古城堡
▲ 뿌라나 낄라(Purana Qila) 거의 다 와서 가는 길 - 성곽과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필자는「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에서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갈 수 있는 거
의 모든 아래 위를 다 둘러보고는 길거리로 나와 오토릭샤를 타고「인도문(India Gate)」
쪽으로 갔다. 지난밤에 주위를 다 돌아보았지만, 밝은 낮에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맛으로
한 10분 정도 둘러보고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리고는 다시 기다리고 있던 릭샤를 타고
약 1km정도 더 가서「뿌라나 낄라(Purana Qila)」에 도착했다.
▲ 인도문에서 멀리는 대통령궁이 있고, 양쪽에는 정부의 여러 청사들이 몰려있는 서쪽거리를 촬영
그런데 이「뿌라나 낄라(Purana Qila)」는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푸라나 킬라”로 적어
야 하지만, 현지에서의 발음은 ‘뿌라나 낄라’라고 말하여 이것의 표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 인도발음으로는 p, k, t, q 와 같은 소릿값이 우리말의 거센소리 ‘ㅊ’, ‘ㅋ’, ‘ㅌ’, ‘ㅍ’
에 해당하는 소리로 나지 않고, 된소리 ‘ㄲ’, ‘ㄸ’, ‘ㅃ’, ‘ㅆ’ 과 같은 계열의 소리로 발음한
다. 그런데 우리말 외래어 표기법은 자음의 표기에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 다만 ‘삐라’
‘껌’과 같은 관용음은 된소리로 인정한다. 외래어는 로마자 음가에 해당하는 소리로 표기
하도록 되어있다. 즉 프랑스의 수도인 Paris의 발음이 “빠리”일지라도 <파리>로 표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필자는 “푸라나 킬라”로 적으려 했으나, 이미 “빠하르 간지”라든지,
“꾸뜹 미나르” 등과 같이 썼기 때문에「뿌라나 낄라(Purana Qila)」로 적기로 했다.
▲ 바깥에서 보는 뿌라나 낄라의 성곽과 성곽 앞 호수
「뿌라나 낄라(Purana Qila = Old Fort)」는 디나빠나(Dinapanah) 시내에 있는 성인데,
1533년 무굴제국(Mughal Empire) 의 제2대 황제인 후마윤(Humayun、Nāṣin-ud-Dῑn
Muḥammad ; 1508~1556 : 재위 1530.10.26~1540.05.17 & 1555.02.22~1556.01.27)
이 공사를 시작하여 5년 뒤에 완성하였다. "뿌라나 낄라(Purana Qila)"는 ‘오래된 성
(Old Fort)’이란 뜻으로 성과 그 주위는 델리지역의 여섯번째 도시로 번영하였다.
▲ 뿌라나 낄라(Purana Qila)의 안에는 그 시간에 아무도 없었다. - 두류봉이 일착(?) ▲ 뿌라나 낄라(Purana Qila)성은 통치자들이 투쟁으로 자주 바뀌고 세월이 흘러 많이 훼손됐다.
1540년 아프가니스탄 계열의 수르국왕인「셰르 샤(Sher Shah)」는 후마윤(Humayun)을
몰아낸 후 <셰르가르(Shergarh)>라고 성(城)이름을 바꾸고,「셰르(Sher)」왕도 역시 이
성곽도시를 수도로 삼아 1545년까지 5년간 통치하는 동안 성을 증축하고, 몇 몇 구조물
을 추가로 건설했다. 「이슬람 샤(국왕)」는 이 기간 동안, 여기서부터 북인도전역에 이
르기까지 그 세력권을 장악하였으나, 그후 수도를 더 안전한 곳으로 생각되는 그왈리오
르(Gwalior)로 옮겨갔다. 1553년「이슬람 샤」가 죽은 후에 「아딜 샤(Adil Shah)」가 북
인도를 통치하였지만, 이 성에 대하여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
▲ 뿌라나 낄라(Purana Qila)의 안에는 잘 자란 나무와 푸른 잔디가 깔려있다.
「아딜 샤(Adil Shah)」는 수도를 다시 더 멀리 동쪽 오늘날의 우따르 쁘라데쉬(Uttar
Pradesh)인 추나르(Chunar)로 옮겼다. 1555년 카불(Kabul)로 쫓겨나 그곳에 근거를 두
고 있던「 후마윤(Humayun)」은 이 기회를 잡아 요새성을 탈환하고 델리에 안착한다.
그가 이곳을 떠난 지 15년만에 돌아와 다시 통치하게 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불과 1년도 안 된 1556년 1월에 이 요새성 안에 있는 도서관 <셰르 만달(Sher Mandal)>
의 계단에서 떨어지는 비극적인 사고로 죽고 만다.
▲ 후마윤이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셰르만달(Sher Mandal) 도서관
「후마윤」이 델리를 탈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힌두교 최고지도자인「헤무(Hemu)」
는「아딜 샤 수리」의 군대총지휘관과 함께 벵갈에서 델리로 급히 돌아왔다. 벵갈은 그
가 벵갈의 통치자인「무하마드 샤」를 물리치고 죽여 반란을 진압했던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아그라(Agra), 이따와(Itawah), 깐뿌르(Kanpur)를 쉽게 차지하였으며, 델리를 향
한 전투에서 1556년 10월 6일에는 지금의 델리남쪽근교인 뚜글라까바드(Tughlakabad)
지방을 점령했다.「헤무(Hemu)」는「따르디 베그 칸(Tardi Beg Khan)」이 인솔하는 ‘위
대한 무슬림 군대 아크바르(Akbar)’를 격파하고, 22개 전투에서 싸워서 거듭 승리를 거
둬 북인도를 완전 장악했다.
▲ 후마윤(Humayun)이 세운 내부 이슬람사원(Qila-i Kuhna Mosque)과 잔디마당
▲ 뿌라나 낄라(Purana Qila)의 성벽은 비교적 견고하다. - 바깥에서 본 성벽
헤무(Hemu)는 1556년 10월 7일에 뿌라나 낄라에서 “라쟈비샤케(Rajyabhishake)” 라고
하는 대관식을 갖고 즉위하여 북인도의 ‘힌두 라즈(Hindu Raj)’ 를 선포하였으며, 그는
「삼라트 헴 찬드라 비크라마디탸(Samrat Hem Chandra Vikramaditya)」라는 칭호를 받
았다. 1556년11월의 빠니빠트(Panipat)의 두 번째 전투에서 살해되어 죽은 헤무(Hemu)
의 흉상을 이 성의 바깥쪽에 걸어두었는데, 이것은 힌두교들 사이에서 테러를 야기시킬
목적이었다.
▲ 서쪽문인 '바라 다르와자(Bara Darwaza)'와 성루 - 오늘날 관람객이 드나드는 주출입구임.
▲ 성문 옆에 붙여서 쌓아올린 능보탑(稜堡塔)
이 성벽은 18m 높이로 위로 뻗어있는데, 성의 길이는 약 1.5km이고, 3개의 아치형 출입
문이 있다. 서향문인 바라 다르와자(Bara Darwaza)가 제일 큰 문으로 오늘날까지 메인게
이트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남문인 ‘후마윤 문(Humayun Gate)’ 은 아마도 후마윤이 건
설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으며, 계단을 올라가서 성루에 서면 ‘후마윤의 무덤
(Humayun’s Tomb)’이 그곳에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딸라끼문(Talaqi Darwaza)’은
북쪽으로 향한 문으로 ‘금지된 문’ 이란 뜻이다.
▲ 남문인 후마윤문(Humayun Gate)과 성루로 올라가는 계단.
▲ 남문인 후마윤문(Humayun Gate)을 바깥으로 나가서 인접한 델리동물원쪽에서 찍었다.
▲ 딸라끼 다르와자(Talaqi Darwaza) - 북문(North Gate)
▲ 북문인 딸라끼 다르와자(Talaqi Darwaza)를 가까이 가서 내부에서 찍은 사진.
모든 문은 2층 구조로서 사암(砂岩)으로 건축되었고, 문 옆에는 2개의 커다란 반원형의
능보탑(稜堡塔)을 붙여 세워두었다. 그리고 하얗거나 여러 색깔로 채색된 대리석 및 청
기와를 박아 넣은 멋진 장식을 하였다. 또 화려하게 장식하여 돌출된 발코니와 같은 자
로카스(jharokhas)가 있고, 꼭대기에는 기둥꼴로 된 전시관인 양파돔 형식의 카트리스
(chatris)로 옆면이 펼쳐진 우산 모양의 둥근 지붕을 하고 있다. 이렇게 북문과 남문에서
볼 수 있는 라자스타니(Rajasthani)건축술을 상기하면서 무굴의 건축술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뿌라나 낄라(Purana Qila)의 내부에 있는 낄라이꾸나 모스크(Qila-i Kuhna Mosque)의 모습
▲ 내부에 있는 낄라이꾸나 모스크(Qila-i Kuhna Mosque)의 아치출입문.
▲ 낄라이꾸나 모스크(Qila-i Kuhna Mosque) 안의 천장과 벽 모습.
▲ 낄라이꾸나 모스크(Qila-i Kuhna Mosque)의 뒷면 모습
외부건축이 웅장함에도 불구하고, 낄라이꾸나 모스크(Qila-i Kuhna Mosque)와 셰르만달
(Shermandal)을 제외하고는 내부의 시설이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는데, 이것은 둘다 셰
르 샤(Sher Shah)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뿌라나 낄라(Purana Qila)」성
을 다 돌아볼 때까지 관람객이 아무도 없다. 이른 시간인데다가 문을 너무 일찍 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혼자서 조용한 성내를 차분히 잘 돌아보았다.
▲ 낄라이꾸나 모스크(Qila-i Kuhna Mosque)의 내부장식(1)
▲ 낄라이꾸나 모스크(Qila-i Kuhna Mosque)의 내부장식(2)
▲ 낄라이꾸나 모스크(Qila-i Kuhna Mosque)의 테라스장식(3)
▲ 성안에 있는 계단식 우물 바올리(Baoli)
▲ 뿌라나낄라(Purana Qila)성을 바깥에서 바라본 성벽과 성곽의 외형모습.
◆ 후마윤의 무덤 Humayun's Tomb (Hindi: हुमायूँ का मक़बरा) 胡默元大帝陵
▲ 후마윤묘 정원으로 들어가서 정면 문곽에서 바라보면서 문곽에 걸리도록 찍은 사진.
필자는 뿌라나 낄라(Purana Qila)를 나와서 주위를 조금 돌아보며 바깥에서 성의 모습도
살펴보고 몇 군데서 사진도 찍어 보았다. 그리고 서 있는 오토릭샤 운전수에게 후마윤묘
까지 가려면 얼마냐고 물으니 200루피를 달라고 한다. 필자를 인도에 처음 온 봉으로 알
았는지 아니면 완전한 바보로 아는지? 20루피를 주겠다고 하니 50루피를 달라고 한다.
서로 자신의 주장만 하다가 다른 릭샤를 40루피에 계약해서 타고 갔다.
▲ 후마윤묘로 들어가는 도로 표시판 - 여기서 조금 더가면 후마윤묘가 나온다.
▲ 후마윤묘로 들어가는 정문을 안쪽에서 촬영 - 후마윤묘를 둘러싸고 있다.
▲ 후마윤묘 정원에 들어가서 출입구정문을 가까이에서 세밀히 찍은 사진.
▲ 후마윤묘 천정과 벽면의 섬세하고 수준높은 기술과 예술의 감상
후마윤(Humayun ; Nāṣin-ud-Dῑn Muḥammad: 1508~1556)은 무굴제국(Mughal Empire;
1526~1857)의 제2대 황제이다. 그의 아버지 바부르(Babur;Zahir ud-din Muhammad
Babur)는 로디왕조의 제3대 술탄인 이브라힘 로디(Ibrahim Lodhi)를 격파하고 무굴제
국을 창건하였는데, 후마윤은 22세에 아버지 바부르(Babur)로부터 무굴왕조를 물려
받았다. 그가 황제로 등극하였을 때는 아직 제국의 위용을 갖추지도 못하고, 세력을
뻗어 나가면서 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프간족과 라지푸트족은 파니
파트(1526)·하누아(1527)·가가라(1529)전투에서 무굴제국에 패해 그세력이 크게 움
츠려들었어도 단지 힘을 비축하고 있을 뿐이었지 무굴제국의 패권을 인정한 것은 아
니었다.
▲ 기하학적으로 사암(砂岩)을 쌓아서 그위에 반짝반짝 빛나게 대리석을 박는 공법으로 이완 출입구를
높고 둥글게 만들고, 카트리스(chatris)와 작은 뽀족탑으로 하얀 대리석으로 중앙돔을 둘러싸고 있다.
▲ 모서리의 가장자리를 깎아 없애고 대칭적인 도안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무덤.
▲ 물이 흐르는 수로 끝에 분수가 있는 샤르바 가든(Charbagh Garden)이다.
- 설계가 단순하면서도 주목을 받는 그 시절의 획기적인 기술력을 보였다.
♣ 페르시아(Persia)작풍으로 된 정원배치를 샤르바(Charbagh)라고 하는데, 4변형정원을 더 작은
4개의 보도(步道)나 물이 흐르는 수로(水路)로 분할한다. 페르시아어에서 "Char"는 "4개"를 뜻하
고, "bāgh"는 “정원”을 의미한다.
▲ 페르시아식 정원배치 방식인 샤르바(Charbagh)로 모든 정원을 4각형을 기본으로 꾸며두었다.
구자라트(Gujarat)의「바하두르 샤」는 아프간족과 무굴제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의 말에
고무되어 라자스탄(Rajasthan)에서 무굴제국으로 쳐들어왔다. 후마윤이 1535년 구자라트
를 점령했지만 그곳의 위험은 1537년 바하두르가 죽고나서 끝났다. 한편 수르(Sur)의 아
프간족의 모험가인 셰르 샤(Sher Shah :1486~1545)는 비하르와 벵골에서 군사력을 강화
하여 1539년 차우사, 1540년 카나우지에서 후마윤을 쳐부수고 그를 인도에서 추방했다.
후마윤은 나라 없는 방랑자가 되어 처음에는 신드, 다음에는 마르와르, 그 이후에는 다시
신드에서 지원을 호소했다.
▲ 정문인 ‘부 할리마의 문(Bu Halima's Gateway)’도 훌륭한 건축물이다.
▲ 무덤 뒷쪽에 있는 ‘부 할리마의 정원(Bu Halima's Garden)' 모습
▲ ‘부 할리마의 무덤(Bu Halima's Tomb)' 모습
후마윤의 유명한 아들 악바르(Akbar)는 1542년에 태어났다. 1544년 페르시아에 도착한
후 후마윤은 샤 타마스프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아 칸다하르(1545)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
복동생인 캄란으로부터 3번이나 카불(Kabul)을 탈취하기 위해서 공격을 받았다. 마지막
진격은 1550년에 있었다. 셰르 샤의 자식들끼리 벌인 내란에 편승하여 후마윤은 1555년
2월 라호르를 점령했고, 시르힌드에서 펀자브의 반역자 아프간 지배자인 시칸다르 수르
를 굴복시켜, 그해 7월 델리와 아그라를 탈환했다. 후마윤은 자신의 성인「뿌라나 낄라
(Purana Qila)」에 복귀하여 있다가 이듬해인 1556년 1월에 성내도서관인 셰르만달(Sher
Mandal)의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한 달 후에 숨을 거두었다.
▲ 본관묘실에 후마윤의 대리석 묘관이 하나만 있다 : 진짜 무덤은 이 지하실 아래에 놓여있다고 한다.
▲ 바깥에 후마윤묘에 대해서 그 내용을 소개해 두었다.
▲ 후마윤묘는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타지마할도 세계문화유산이다.
후마윤묘(Humayun's Tomb)는 제2대 무굴제국의 황제이던 후마윤의 무덤이다. 이것은
1565년 후마윤의 미망인이던「하미다 바누 베굼(Hamida Banu Begum)」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페르시아의 건축기사 미락 미르자 기야트(Mirak Mirza Ghiyath)가 설계
한 것이다. 인도아대륙에서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정원식무덤인데,「뿌라나 낄라」로 알
려진「디나빠나」성과 멀지 않은 곳인 델리의 니자무딘(Nizamuddin) 동쪽에 있다. 이 후
마윤묘는 이런 규모로는 처음으로 붉은 사암(砂岩)과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훗
날 타지마할의 모형이 되었으며, 1993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옆방 묘실에 있는 하미다 바누 황후 및 다라 시코(Dara Shikoh)왕자 등의 묘지석
▲ 후마윤묘원에 이사 칸 니야지(Isa Khan Niyazi)의 묘가 수르국의 셰르 샤 묘역에 있다.
▲ 후마윤묘원에 이사 칸 묘를 가로질러 가면 1547년에 지은 이사칸 모스크가 있다.
《무굴제국》은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Babur; 1483~1530)가 세
운 나라이다. 티무르(Timur ;1336~1405)는 칭기즈칸의 몽골 차가타이한국에서 태어나 사
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무슬림이다. 바부르는 티무르의 5세손으로 몽골족에서
유래한 바를라스족 출신인데, 투르크지역에서 언어습관이 투르크인화 되었다. 바부르 가
문은 차가타이 씨족에 속했으며, 부계는 티무르의 제5대 직계후손이고 모계는 최초의 몽
골 대정복자 칭기즈칸의 13대손이다. 바부르는 무굴(몽골이란 뜻의 페르시아어이다) 이
었으나, 그의 지지세력은 대부분 무슬림투르크계였다. 무굴제국은 바부르가 여러해 동안
의 시련과 도전을 거친 끝에 1526년 비로소 그 기틀을 마련하게된 왕조로, 16세기초부터
19세기중반까지 오늘날의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왕조이다.
▲ 이사 칸 니야지(Isa Khan Niyazi)의 묘가 수르국의 셰르 샤 묘역에 있다.
▲ 아프사르왈라 묘 (공직자묘) 그 옆은 아프살라 모스크 (1566년완성)
▲ 1625년에 신하 압둘 라힘 칸 이 카나가 그의 하인 파힘 칸을 위하여 지은 닐라 굼바드
무굴제국은 바부르가 나라를 세워 발판을 마련하고, 후마윤을 거쳐 3대 악바르(Akbar;
1542~1605, 재위 1556~1605)대제가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그는 무
엇보다도 뛰어난 군사 책략가로,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상황판단이 뛰어났으며, 나
폴레옹에 버금가는 신속한 기동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지도력에 힘입어 무굴
제국은 그의 통치기간 중 북인도의 전지역을 지배하게 되고, 데칸과 벵골 만 및 아라비
아 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인도백성들을 결혼
정책이나 종족간의 타협을 통해 힌두세력도 무굴제국의 실질적 동반자로 흡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악바르는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황제이자 힌두문화와 이슬람문
화의 실질적 융합에도 공헌한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 나이카굼바드 이발사의 묘지 조금 떨어져있는 파란돔은 닐라굼바드
▲ 페르시아기술자가 와서 만든 묘원정문
▲ 후마윤묘원 가까이 있는 페르시아인의 묘지 - 페르시아기술자를 데려와서 만들었다.
악바르 사후, 무굴제국은 자한기르(Jahangir ; 1605~27)·샤자한(Shah Jahan ;1628~58)·아
우랑제브(Aurangzeb ;1658~1707)등의 치세를 거치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힘의 균형이 깨
졌고, 대내적으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이 재연되면서 분열의 조짐이 나타
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마라타족의 발흥은 무굴에게 큰 위협이 아닐수 없었다. 이들은 마
하라슈트라 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강인한 전사(戰士)집단이었다. 대외적으로 아프가
니스탄의 끊임없는 침입과 마라타세력의 흥기로 쇠퇴일로를 걷던 무굴제국이 무력해지면
서 공백기를 들어가 혼란과 분열을 거듭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인도대륙을 넘보기 시
작한 세력이 유럽 열강이 있었다. 1857년 영령인도가 될 때까지 19대왕이 다스렸다.
▲ 후마윤묘원 본건물 우측에 있는 무덤
▲ 후마윤묘원의 내부 울타리
▲ 이사 칸의 무덤
▲ 무굴제국의 영역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간단하나마 한나라의 흥망성쇄를 보는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쓰신 것 고맙습니다.
어릴적 공부했던 무굴제국 다시한번 읽게 되어 좋았구요 그림또한 잘 감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인도역사에 무굴제국의 존재는 여러가지로 중요한 기간입니다.
외부세력이 들어와 인도를 통치한 문제라든지,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가 마지막에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 같은 것이??
유유자적 두루두루 섭렵하심이 심히 부럽습니다.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글의 내역은 재미있는 것 같아도 배낭여행은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읽어보시고 이렇게 댓글까지 써주신 님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