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는거야"
[제53주년 현충일 특집]16세 나이에 첫 여성 해병대 참전 강춘자씨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꿈인가 싶기도 해" (서귀포 인터넷신문. 2008.6.5)
한애리 기자 arhan@seogwipo.co.kr" target=_blank>arhan@seogwipo.co.kr
▲ 6.26전쟁 당시 제주여성 126명은 학생, 교사의 신분으로 자원입대했었다.
강춘자씨 역시 16세 나이에 구국일념 하나로 참전했다.
“공부를 더해서 뭘해? 나라가 없어질 판국이었는데...”
남편과 반평생 서귀포시에서 밀가루와 설탕, 마가린 등 제과재료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강춘자씨(76)는 제53회 현충일을 이틀 앞 둔 4일, 아스라한 58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강씨는 6.25 전쟁 초기 나라의 운명이 낙동강 방어선에 걸려있을 그 때,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제주도의 최초 여성해병대 출신이다.
지금이야 지난 일이라고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당시 철모른 16살의 여중생이었다.
“뭘 알았겠어.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나라를 잃으면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강씨는 4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자원입대를 했단다. 강씨와 같은 굳은 심지로 자원입대를 한 여학생과 교사는 126명.
1950년 8월 30일 제주북초등학교에 모인 이들은 다음날인 9월 1일 산지항에서 출항해 다음날 진해항에 도착한다.
이들은 진해경화초등학교에서 일주일간 기초훈련을 받고 진해 통제부로 장소를 옮겨 약 40여일 훈련을 받았다.
“얼마나 훈련이 고된지 말도 못했어. 열 여섯, 열 일곱 살난 여학생들이 철조망 밑을 포복하다보면 피 나는 건 예사일이고 사격연습 할 때 울리는 총포는 왜 그리 무섭도록 크던지 집에 가고 싶다고 돌아올 수나 있나...”
▲ 강춘자씨가 58년 전 함께 동거동락했던 급우들과 참전 전 찍은 기념사진. 사진에는 '빛나거라 제여중3년생이여'라고 씌여있다.
전쟁터에서 직접 총을 쏘며 혈전을 벌이지는 않았어도 긴급 투입될 것을 대비해 남성들과 똑같이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강씨는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떨군다.
그는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은 보내준다고 해서 몇몇 귀가를 희망했던 친구들은 심하게 매를 맞고 돌아왔다”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몇 번을 되뇌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고 말했다.
UN군의 지원으로 상황이 호전되자 다행히 강씨 등 50여 명은 1950년 10월 13일 1차 전역을 하게 된다.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냐며 공부하러 다니는 걸 그렇게 싫어하던 어머니가 그렇게 반가워 하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때 공부를 마치고 살다보니 이렇게 살고 있네.”
전역한 강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귀포시 예래초등학교에서 3년 정도 교사생활을 하고 난 후 세관으로 활동하다가 교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 언뜻 보기에도 앳된 학생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 꿈만 같죠.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게... 진짜 그때 나라가 어떻게 되는 줄만 알았지. 나도 죽었구나만 생각했었는데...”
그때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 거라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오히려 그 때가 꿈만 같다는 강씨.
“해병대 전우가 운영하는 택시를 타면 나도 해병대 출신이라고 말도 하고 지금은 그래요. 그때 여성해병대가 있었냐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고, 대단하다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때 그 상황이라면 누구든 그러지 않았을까?”
자원입대가 자랑할 일도 아니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했을 거라는 그는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만 전하고 싶다고 했다.
“나라가 있어야 우리 가족도 있고, 나도 있는 거예요.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좀 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