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황실이(발해가 황제를 칭한 흔적이 분명하니 황실로 하겠습니다.)
고구려하고 당연히 정신적으로 관계가 있던 건 사실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려는건 요사에 거란인이 발해를 본 것과 관련해서 입니다.
요나라 역사서를 제대로 못봐서 오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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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율아보기가 발해를 쳐부신뒤 발해의 옛땅을 다스리기 위해 자기 아들-거란의 태자를
동단국이란 제후국의 왕으로 봉하는데
그의 호칭이 인황왕(人皇王)입니다.
인황왕이란 호칭은 거란의 텡그리카간(천황제天皇帝)보다 분명 낮은 호칭인데 그 호칟이
고구려의 태왕하고 연결되서 말입니다.
일부 사료에서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 泰一)을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사기 진시황본기)에서 바꿔 부르기도 한다는데 착안해 주목했습니다.
인황왕이란 칭호는 김용만선생께서 태왕이 위의 천일, 지일, 태일중에 태일의 호칭에서 따온것이라고 추정하셨던 것과 서로 연결됩니다. 클 태太가 사람 인人의 형상보다도 사람의 형상을 잘 나태낸 것이기도 하니 더욱 그러합니다.
그 탓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뒤 그들을 지배하고자 발해인의 정신세계에 아직도 남아있던 관념-태왕의 흔적을 이용해 발해인들을 달래려 한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황제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에 태왕칭호를 발해에서 버렸는데도 말입니다.
하나 더
거란 태조 아율아보기가 갑자기 죽은 뒤 거란 은 발해인들을 통제 할수 없어 그들을 요동평야로 옮깁니다.
이때 이런 말이 있었다 합니다.
[양수 梁水의 땅은 그들의 고향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나무, 철, 소금, 물고기등이 풍부합니다. 그들의 힘이 미약한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을 이곳을 옮기는 것은 길이 남을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고 또 산림,ㅏ 철, 소금, 물고기의 풍요를 획득할수 있으니 반드시 이곳에서 거주해 생업을 즐길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그들 중 무리를 뽑아서 우리의 좌익으로 삼고, 돌궐, 탕구트, 실위의 무리로 우익을 삼으면 가히 앉아서 남족나라(=중국)을 제압하여 천하를 아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양수는 오늘날 혼하, 태자하 지역으로 인식 되고 있는데
다시 김용만 선생님의 견해를 빌리면 이 지역에 유리왕이 공격한 양맥이 있었다고 합니다.
봉상왕때 안국군 달가가 죽자 백성들이 어떻게 양맥을 막을 수 있느냐며 그의 죽음을 애도 한걸로 볼때 양맥이란 종족은 한과 고구려 사이에 껴서 난리를 겪었음에도 뭔가 전투력이 강한 부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근데 그들이 맥족의 종가-모든 맥족의 시조로 불리고 있었던게 아닐까요? 앞에서 든 요사 기록을 보면 특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인황왕에서 보이는 태일과 태왕의 흔적, 그리고 양맥이 살던 양수가 발해인의 고향이라고 인식한 거란의 생각은
발해인이 맥족, 즉 고구려인으 후예라고 본 증거가 아닐까요?
첫댓글재밌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인황이라는 왕호를 썼다는 건 중원과 동방지역에서의 삼황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고, 그렇게 따지면 거란 천황은 동단국 인황보다 존귀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는 셈입니다만.. 물론 거란에서 '천'숭배 사상 때문에 천황을 더 높게 봤다던지, 아니면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어 인황호를 폐지한 것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관련 자료를 더 찾아봐야할 문제인 듯 싶습니다.
첫댓글 재밌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인황이라는 왕호를 썼다는 건 중원과 동방지역에서의 삼황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고, 그렇게 따지면 거란 천황은 동단국 인황보다 존귀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는 셈입니다만.. 물론 거란에서 '천'숭배 사상 때문에 천황을 더 높게 봤다던지, 아니면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어 인황호를 폐지한 것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관련 자료를 더 찾아봐야할 문제인 듯 싶습니다.
예 답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