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fZCHk-McCws
대운하(大運河, The Grand Canal)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허베이[河北]·산둥[山東]·장쑤[江蘇]·저장[浙江] 등 4개 성(省)을
남북으로 흐르는 운하로 길이 1,789km이다.
대운하의 기원
중국의 대운하는 세계에서 그 길이가 가장 길고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고대 시대부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주로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대운하는 농업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물자의 이동을 촉진하여 중국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운하는 중국의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운하의 역사
대운하는 중국 수나라 시대에 본격적으로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그 후 진행된 일련의 수로 공사를 다 합치면
산업혁명 이전에 실시되었던 세계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
'경항대운하(베이징-항저우 대운하)'라고 불리우는 것은 명나라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북쪽의 베이징에서부터
남쪽의 항저우까지 이어지며 그 길이는 무려 1,700km에 달한다. 이 대운하는 명나라 시대의 식량 운송량을 이전
원라나의 시대에 비해 약 40배나 증가시켰으며, 운송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수로 기술의 발전
대운하는 기술적으로도 도전적인 작업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극복하고 대운하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다양한
수로 기술을 개발하여 대운하를 보다 효과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수로의 경사를 조절하고 수로의 벽을
강화하는 등의 기술적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술적 역량은 중국의 대운하를 수세기에 걸쳐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운하의 사회적 영향
대운하는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며 사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인구 이동이 원활해지고 다양한 지역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여 중국의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유산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현대의 대운하
오늘날 대운하는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대운하는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현대에는 비행기, 기차, 트럭 등의 다양한 운송 수단들이 크게 발달하여 대운하의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주된 교통 수단으로 중국인들에게 이용되고 있다.
양저우 대운하 박물관
물은 남에서 북으로 흘렀다
경항대운하(京杭大运河)
저장성 항저우(浙江省 杭州)에서 시작해서 베이징 통조우(北京 通州)까지 연결한 대운하예요.
저장성(浙江省), 장쑤성(江苏省), 산둥성(山东省), 허베이성(河北省), 4개의 성과 장강(长江), 황하(黄河)를 관통해 흘러요. 전체 길이는 1,800km에 달한다고 하네요. 기원전부터 조금씩 공사를 했대요. 7세기 수나라 때에
정저우(郑州)까지 연결하는 1차 대운하를 만들었고 명나라 때는 거의 직선에 가까운 2차 운하를 만들어요.
만리장성, 피라미드와 더불어 인류 역사 상 3대 토목공사라고 하네요.
새로 물길을 만든 것은 아니라 기존에 흐르는 지천과 강을 연결했어요. 2014년에 방대한 규모, 수리공정, 당시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이끌었다는 여러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어요.
중국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 맛집이에요.
이탈리아 다음으로 문화유산이 많은 나라예요. 50개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어요.
황제가 탄 배가 지나갈 때 배를 운항할 수 있을 정도의 수량과 속도가 안 나올 때면 수로 양 옆에서 백성들이 배에
밧줄을 연결해서 끌었대요. 이 수로를 연결하기 위한 토목공사에는 당연히 백성들을 동원했고 제대로 된 급여와
처우 없는 노동착취가 있었죠.
중국은 서고동저 지형이에요.
서쪽에는 산도 많고 높은 편이지만 동쪽은 비교적 평지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 그렇게 들었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의 태산의 높이가 고작 1,500m이라는 것을 알면 배신감을 느끼죠. 뭐야 해발 1,500m
높이로 태산이라니…
중국은 서에서 동으로 장강과 황하가 흘러서 자연스러운 수로가 있었지만 중국 대륙을 가로가 아닌 세로 방향으로 연결하기 위해 인공 수로가 필요했죠.
바다를 이용하는 해운도 가능했지만 날씨 등의 변수, 해적의 침탈 등을 우려해서 통제 가능한 내륙의 운하를
선호했다고 해요. 편한 길, 대운하를 택했지만 중국이 나중에 바다에 대한 지배권과 해군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어요. 마냥 편하고 좋기만 한 것은 없다는 것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네요.
지류와 강을 연결하면 물이 술술 흘러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네요.
가물면 배를 띄울 수 없었고요. 특히 산둥성 쪽은 지대가 높아서 물이 흐르기 어려웠어요.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 갑문을 만들고 수차를 만들어서 수량과 속도를 만들었어요.
대운하의 가장 큰 용도는 조운을 위한 것이었어요.
황실에 필요한 물자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내기 위해서 운하가 필요했죠. 배 운항의 우선순위도 당연히 황실
물자를 실은 배였고 귀족들의 물자를 실은 배 그다음 상인들의 배였어요. 산동성 쪽에서는 배에서 물건을 내려서
수레에 옮겨 싣고 가기도 했다고 하네요. 남선북차(南船北车)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래요.
대운하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많지 않대요.
당시 그 배를 타고 가거나 관련되었던 사람들이 한자를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대요.
아이러니하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한국인 최부의 『표해록』에 대운하에 대한 기록이 있대요. 한국의
마르코폴로라고 할 수 있는 최부는 대운하 말고도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가는 길에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고
『표해록』이라는 기록 유산으로 남았어요.
예전에는 문자는 가진 자들의 도구였죠. 지금은 누구나 기록할 수 있고 남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요.
만리장성이나 대운하나 모두 통치자를 위한 공사였고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남아 엄청난 입장료를 올리지만
그 수익도 결국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것이네요.
지금은 시멘트, 모래, 자갈 같은 건설 부재자나 곡식종자같이 가격이 낮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화물만 운반하는
느림보 운송 수단이 되었지만 경항대운하가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수도는 여전히 난징이었을 거예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역사를 바꾼 물줄기, 경항대운하,
인류 역사 최고(最古)이자 최대의 수로의 물은 남에서 북으로 흘렀는데요.
대운하 건설과 운영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통과 눈물은 어디로 흘렀을까요?
대운하
하이허강[海河]·황허강[黃河]·화이허강[淮河]·양쯔강[揚子江]·첸탕강[錢唐江] 등 5개의 대하천 사이사이를
개착(開鑿, 산을 뚫거나 땅을 파서 길을 냄)하여 연결한 운하로 전 구간 복원 계획을 세운 지 100년 만인
2022년 4월에 전체 길이 1,789km가 개통되었다. 1958년 대규모의 복구·확장 공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1,515km로 단축되기도 하였다. 이 공사는 운하의 깊이·너비를 확장하고 만곡부(灣曲部)를 직선화했을 뿐만
아니라, 홍수방지·농토관개·공업용수 확보 등 하천망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운하 연안에는 13개의 항구가
건설되었고 많은 유수량을 조절하는 수문(水門) 등이 설치되었다. 베이징의 쭤안먼[左安門] 밖에는 4,000t급
기선의 접안이 가능한 부두가 건설되어, 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2,000∼4,000t급의 선박이 취항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는 전체적으로 동서방향으로 흐르는 하천이 많아 예로부터 동서를 연결하는 수운이 발달한 반면,
남북방향으로는 하이허강 수계의 웨이허강[衛河]이나 화이허강의 지류인 워허강·잉허강 등이 국지적으로
남서∼북동 또는 북서∼남동 방향의 수로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운하는 오랫동안 정치적 중심지였던
화북(華北)과 물자가 풍부했던 강남(江南)을 연결하고, 아울러 화북과 화중(華中)·화남(華南)을 정치적으로
결합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해왔다.
대운하의 역사는 일찍이 진(秦)·한(漢)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황허강에서 남동으로 화이허강에 이어지는
수로와, 다시 후일의 산양독(山陽瀆)으로 이어지는 화이허강·양쯔강을 잇는 수로가 그때에 이미 열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남북조(南北朝)의 대립기에 매몰되었다. 또 4세기 초 진조(晋朝)가 남천(南遷)한 뒤, 강남의 개발이
진척됨에 따라 삼각주지대에 운하가 열렸으나 주로 지방적으로 이용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수(隋)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장안(長安: 西安)에 도읍하자, 산양독·통제거(通濟渠)·영제거(永濟渠)·강남하(江南河) 등을 차례로
개수(改修)하여, 그들 운하 및 황허강·웨이수이강[渭水]을 거쳐 남·북을 장안으로 연결하는 수로를 완성하였다.
산양독과 강남하는 종래의 운하를 개수한 것이고, 통제거, 즉 변하(汴河)는 부분적으로, 영제거는 전부를 새롭게
개착한 것이다. 수나라는 곧 멸망하였으나, 뒤를 이은 당(唐)·송(宋) 시대에는 대운하가 남북 수로교통의 대동맥을
이루어, 강남 개발에 따른 수운(水運) 및 상업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송(宋)나라가 변하 연안의
카이펑[開封]에 도읍하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원(元)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고 대도(大都: 北京)에 도읍하자, 대운하의 중요성이 한층 가중되어 산둥성의 쓰수이강[四水]에서
다칭강[大淸江]으로 통하는 제주하(濟州河) 및 거기서 웨이허강에 연결되는 회통하(會通河)를 개착하였다.
그리하여 양쯔강 유역에서 운하로 톈진[天津]에 이르고, 다시 바이허강[白河]을 이용하여 국도(國都) 가까이까지
이를 수 있는 수로가 형성되었다.
그 뒤 명(明)나라 초기에 난징[南京]에 도읍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명·청대에도 대운하의 역할은 매우 컸으며, 특히 명대에는 쉬저우[徐州]를 경유했던 우회수로의 대체(代替) 수로로 직통수로를 여는 등 운하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淸)나라 말에 해운이 성해지자 상대적으로 운하의 중요성이 줄고, 다시 중화민국이 난징을 국도로 삼은
뒤에는 그 경향이 한층 심해져서 여기저기 매몰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 하천계획을 겸한 확장·복구 공사가 이루어졌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