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친 바람이 다자란 벼 사이로 길을 냈다.
돌아보니 이 논만 그런 것이 아니였다.
농사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걱정이 될 정도다.
'농부님들이 농사 못 짓겠다 하시면 어쩌지'
나는 태풍이 지나면 농사 짓는 시댁에 전화를 한다.
우리 시어머니는 늘같은 말씀을 하셨다.
" 어쩔거시냐, 하늘이 한 것을...... 걱정마라."
쓰러진 벼를 그대로 두신 걸 보니
장남들의 농부님들도 순리에 맡기신걸까?
"일할 사람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을거야"
경호 선생님도 순리에 한표.
순간, 바람이 지나간 길이
애처롭지만 아름답게 느껴진다.
*논안에도 발자국 길이 났다.
유독 많이 찍힌 발자국들을 보고
"미꾸라지를 먹으러 너구리가 왔네"
라고 성희샘이 당연한 일인듯 이야기를 얹는다.
수확을 앞두고 논에 물을 빼면
너구리, 삵 등이 논 귀퉁이,
물이 고인 곳을 찾아 온다고 한다.
논흙을 파서 보양식인 미꾸라지를 먹으러
온다니 참으로 지혜로운 녀석들이다.
무질서한 길인 듯하지만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길을 내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은 웬지, 어지러운 이 발자국들이
고심 많은 철학자의 길처럼 느껴진다.
이 개구멍이 나를 상념에 빠지게 한다.
이 녀석들은 그물을 두려워 하지 않고
길을 내었는데...
이 녀석들은 언제든 새로운 길을 만드는데...
나는 어떠한지. 또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순간, 바람이 만든 아름다운 길과
마른 논에 남겨진 고심 많은 길,
그물 장막을 뜯고 길을 낸
야생의 흔적들이 의미 있는 길로 느껴진다.
이 녀석들처럼
때로는 가는 길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이 녀석들처럼
때로는 잠시 움크리고 멈추기도 하는데...
자연이 던지는 질문에 생각을 해본다.
베어진 풀들 사이에 진분홍 들꽃들이 모여있다.
어우러진 들꽃밭이 아름답다.
풀을 베던 아저씨도 스스로 고운 들풀들을
차마 베어내지 못했나보다.
스스로 고운 들꽃, 벨 수 없는 들꽃,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