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4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마르코 12,13-17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대처하는 법
급격히 변화하는 지금의 시대는 눈 잠깐 감았다 뜨면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이전에 가치가
있었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됩니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라지게 될 직업들의 순위가 마구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전에 인기가 있었던 법관부터 의사들도 상당수는 A.I. 기술을 이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인기가 점차 줄어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입니다.
이제 가지고 있는 사진 다섯 장만 A.I. 프로그램에 넣으면 증명사진을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해답을 전해주십니다. 우리 시각을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법칙에
고정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세상엔 카이사르처럼 변하고 사라질 것들이 있고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도 존재합니다.
건물은 변합니다.
언젠가는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건물이 허물어진다는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법칙을 무시하고 건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집이 허물어지기 직전까지 그 집에 집착하며 안타까운 삶을 삽니다.
그러나 집은 언젠가는 허물어진다는 법칙을 아는 이들은 이 법칙을 이용하여 돈을 법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돈을 많이 버는 이유는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에 시선을 두기 때문입니다.
모건 하우절의 [불변의 법칙]에는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언젠가 워런 버핏과 가깝게 지내는 남자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편의상 그를 짐이라고 부르겠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다.
짐은 2009년 말 워런을 차에 태우고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때였고 오마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상점과 사업체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짐이 워런에게 물었다.
“암울하군요. 과연 경기가 회복될까요?”
그러자 워런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짐, 1962년에 가장 많이 팔린 초코바가 뭔지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스니커즈였어요. 그럼 현재 가장 많이 팔리는 초코바는 뭘까요?”
“모르겠습니다.”
“스니커즈예요.”
그리고 침묵.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있었던 법칙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언젠가 경기가 회복되겠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또 경기가 좋을 때 언제까지 좋겠느냐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다시 불황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돈을 많이 법니다.
그러나 당장의 변화에 정신이 팔린 이들은 그 변화에 휩쓸려 정신없이 고생만 하다 죽게 됩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음을 믿읍시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법칙은 세상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차는 법칙대로 굴러갑니다.
그러나 차 자체가 설계도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법칙이 존재한다면 누군가 그 법칙을 넣어준 것이 확실합니다.
곧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신앙입니다.
반면 신앙이 없는 이들은 법칙을 무시하고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자기 힘만으로 사니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사울 왕이 필리스티아 인들과 전쟁하기 직전 병사들이 빠져나가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제사를 올려 하느님을 분노하게 한 예와 같습니다.
이 불순종 행위는 사울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자유를 찾는 이들은 많은 법칙을 아는 이들입니다.
도시락을 팔아 수천억 원의 자산가가 된 켈리 최도 마흔이 넘어 10억 이상의 빚이 있을 때 부자들의 책 [시크릿]을 60번 읽고 그 법칙대로 했더니 5년 만에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김승호 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일 100번 썼더니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그러니 오늘 독서말씀을 잘 들읍시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중략)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카이사르의 것, 곧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 곧 하느님의 법을 추구하는 사람이 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4일 [연중 제9주 화요일]
마르 12,13-17:
하느님 나라를 관계 안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 독서로 봉독한 베드로 2서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하느님의 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 베드로 3, 12-13)
우리가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은 아무래도 3가지 점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과연 어떤 곳일까?
도대체 언제쯤 그 나라가 우리에 올 것인가?
우리는 정말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체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에 확신은 금물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관계 안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주체이십니다.
우리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땅을 치며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적대적인 관계,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아직도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요원한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매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는 성찬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그분께서 나눠주시는 생명의 빵이신 성체를 지극정성으로 받아 모신다면,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는
건설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 발은 인간 세상에 딛고 서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생활, 티없고 흠없는 생활을 통해, 주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날, 마지막 날, 종말에 대한 베드로 2서의 가르침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과 기쁨을 주는 표현은 ‘새로움’입니다.
주님의 날이 도래하면 그분 가르침에 충실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부여될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도성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언약이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9주간 화요일 강론>
(2024. 6. 4. 화)(마르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3-17).”
1)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합니까,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대답하시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는 민족의 반역자다.” 라고 떠들고 다녔을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시면,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반역자라고 로마 당국에 고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라는 말씀은, 그들이 파 놓은 함정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곧바로 데나리온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로마 황제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고,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 라고, 마치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질문하는 것은, 자신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 아마도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시거나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시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황제의 것’만 생각하느라고 ‘하느님의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황제의 것’이란 원래 없습니다.
따라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세금을 바치고,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세금을 바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이미 로마 황제의 통치 질서 속에서 살고 있고, 로마 황제의 돈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왜 세금 문제로 고민하는 척 하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3)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라는 말씀을, “정치는 정치고, 종교는 종교다.
종교인은 정치에 간섭하지 마라.”로 해석하면서,
우리 교회가 사회 정의와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온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정치도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 정의와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일입니다.
4) 시편 작가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6).”
독재자의 독재 권력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 허무한 것이고, 그들의 집권 기간은 잠깐 동안의 ‘아침잠’과도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4-25).”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나지 않으려면,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 4,14-16).”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주님 뜻을 거스르는 독재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죄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뜻을 거스르는 악법은 법이 아니라 악입니다.
<아주 잠깐 동안은 악인들의 허세가 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다 주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뜻을 거스르는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