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석류에 물이 들은 理氣作用反相空化論 自性 卞함과卞치않는 것이 있는데 卞함을 卞하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은 卞치 않는 것이 있어야 알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自心性相이二個以上의 性相을 취택해갖고 있다는 것이다.즉 누수적인 성격을 띈것이 사람의 마음의 모양이란 뜻이다.또 卞치않는 것은 변하는 것이 있어서 알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所謂相反作用을 일으키는 것이 있어야 서로를 알수(있는것을)있다는 作用相을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子相)(※合의 无形은 현위치나 미래의 위치나 과거의 위치나 어떤 方的인 위치나 관찰처소의 입장은 무극、作反、相은 太極이란 뜻이다。) 은 作反의 모습을 그대로 入力시킨 모양이요. 밀림이나 풀어짐이나 直曲등 어떠한 形象이라도 輪回劫의 성격을 띄어 형성된다는 이론으로서 그것이 相勢、관찰 역할을 하는 位에 있다는 것이며 조성된 것은 여건이니 여건의 모양 相對相二個(物事相과 전달자 역할을 하는 器機管)와 세번째 因知(識)相 三을 合해 함께 이뤄진 모든 起相 現相이 곧 自性이 서려있는 마음이라는 것이다。그냥 그것이 自性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一은 流動하는 것이고(物事相) 二는 그렇게 流動하는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전달기관(感識技管)體요、三 二에 의해 그 流動함을 流動치 않는 位에서 살펴본다(알게된다)는 뜻이다。이 셋이 곧 自性이니(心字形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점이 하나의 그릇(器)을 이뤘다는 뜻
이다) 自性 그것은 어느 軸이 고정되어있다는 것이 아니다((그렇게 되어 (방식을 채택한 것을 말함) 돌아간다는 것 인(因)))상항 전개는 절대성이라도 그렇게되는 處所는 一定한곳이 없다는 것이니 상대적인 성격을 띄며、以上은 석류가 본 一見의 껍질 허울 性相이라하는 것이며 主된 허울 相을 벗고 관객의 입장이 되어 뭇 현상을 관찰하는 位致 이것이 비평할 수 있는 허심탄회한 그릇이라는 것이며 이 그릇은 諸相을 포용해 갖고 있는 그릇 本然에 性品의 스스로 모습 편협되지 않는 가늠의 참마음 그래서 기울겨 이렇게 저렇게도 고찰할 수 있다는 平等尺의 성격도 갖고 있다는 것 이렇게 어지럽게 열거한 모든것이 生覺이 아니고 (생각으로 만들은 것인지 생각이 나온 곳인지는 불분명 한듯 하나) 관찰한 마음이란 것이다. ◎ 諸流線이 一의 나선 곡선으로 會集되어 움직이는 의미와 모양을 띄어 살아 있다는 論 말하자면 三차원이란 살아있는 생명이란 뜻이다.※ 三次元의 성립에 있어서 현재를 단면으로 본다면 그 단면을 꿰뚫은 선을 과거 미래로 (時的인 것에 의함)본다면 立體空化는 절로 일어난다 할것이다。단면으로 본 것 또한 반가름하여 과거 미래로 붙힘과 미복합形成인 것으로 세선을 한 곳으로 몰아 휘둘러쳐 나아가는모습、곧 현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그것인 것이다。(어느 차원이던간 또한 그렇게 살아있는 生命이란 뜻이다) 三선이 斜行하면 선이되고 이러한 비틀어지는 (뒤틀리는) 선 네개가 모이면 四象線이되고 사상선은 十二분할선이 모인것이요、十二분할을 二분할하면二十四선이고 三분할하면 三十六이되는 것이니 그릇(卦器)의 數(小成八卦획수가 된다는 뜻 이것은 天宮을 뜻한다 하기도 한다)가 되는 것이다.또 三선과 사상선을 각각선으로 보아 七선이 ㅡ선化한 것으로 본다면 그 비틀림은 대단하여 얇게 퍼지는 적당한 간격을 띈 원테에 가까운 나선틀림을 이루게 된다할것이니 즉 七의 양단 十四는 원테의 표면둘리는 선形 삼점오각이 넷이모인 모양이란 뜻이다。그러나 이것이 선끝과 선끝이 만난 것으로 보면 착각이니 용수철의 흐름은 만나지 않는 것이며 나선이 나선을 형성하여 곧게 흐른다는 것만이 또한 아니요 나선이 나선을 형성하여 또다른 나선을 형성하면서 나선으로 흐른다는 것이니 곧은 바 없다는 것이다。이것의 무량선 무法方의 누적은 삼차원등 諸次元을 형성한다는 것이다。이렇게해서 空化가 현상된다는 것이니 설령 그 차원이 삼차원의 형상을 띄지 않는것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空化이던 그것은 살아있다는 (표현이며) 것이다。즉 가만히 있을 수 없는 無爲流動이라는 뜻이니 그 徐急의 差異만 있을뿐이요 그 서급의 차등으로 인하여 感別할 수 있는 現相粒子가 現相된다는 것이니 감별할 수 있는 현상입자란 對相과 對相이란 것을 알릴 수 있는 감관기관과 그것을 因知 할 수 있는 因識性向의 것이라는 것이니 이세개가 회합한 상태를 이룬 마음이라 하고 自性이라 하는 것이라 釋類는 하였으니 自性이 두가지 성향을 띄니 변할 수 있는 모습과 변하지 않는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변함과 변하지 않는 것의 어울어진 造化가 우주 삼라만상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변하지 않는모습이 있으니까 변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요 (인식하는 성향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 변화는 모습이 있으니까 변하지 않는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대상과 감관 기관은 변하는 성향의 것이란 뜻) 生消 현상은 空化를 이루는 일종의 작용현상일 뿐이니 나고 죽음과、있다가 사라짐의 그를 이루는 여건조성(부부 부모 자손 형제 자매、또는 불가사리 방식으로 분열 융합 응축 확산、諸原素粒子 저와 이의 제삼의 연결고리(인연)서로 물고 늘어지는 조건 사슬일 수도… 其他 등등)은 그 과정 내용으로써 중요하게 볼수도 있고 작용매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도 여길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생명을 조성시키는 세개의 선이있다。단면적인 가로한 선과 세로 한 선과 부피를 뜻하는 높이의 線들이다。이 선들은 모양없는 점의 연결로부터이고 그 以前 역시 空 이던 또다른 原因이던 그런 것일 뿐이다。단면적인 가로한 선과 세로 한선을 방위를 가리키는 동서로 하는 선과 남북으로 하는 선으로 가정한다면 두선이 마주치는 곳은 十형을 이룬다 할것이다. 이것을 壹선화시킬때면 한곳으로 모아야 할텐데 서로간 치우치지 않는 모임은 선과 선의 중간부분을 택한 斜線뿐이라 할것이니 동남 서북으로한 사선이되던 동북서남으로 한 빗김선이 되던간 해야한다 할 것이다 이것이 부피를 뜻하는 높이의 선까지도 합선 한다면 동남쪽으로 된 빗김선이 사십오도들리던가 서북쪽으로된 빗김선이 사십오도 정도로 내리던가 해야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아직까지 믿음만 표현하고 있는 논리인 것이다。생각해보라 동남이나 서북으로 빗김선을 높낮이로 기울겨 곧은 선일 수 밖에 더 있겠는가? 필자가 이러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 이렇게 말하면 맨처음과 마찬가지로 동서 남북 상하의 본모습을 가르키는 삼선을 말한것에 지나지 않게되는것이니 필자는 그런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선끝들이 삼각형의 중심부분으로 오게되어 본모습의 선으로 부터 이탈 左 右回로 뒤틀려 나간다는 뜻이다。위의 例에서 선을 동남 그리고 上을 채택하였음으로 上向右回선으로 보는게 적당하다 할것이다。 그러므로 인해서 나선을 그어 나간다는 뜻이니 어떻게 관찰각도를 들여밀던간(천상간)에 움직이는 살아있다는 표현일 수밖에 더있겠는가? 이런뜻의 無方으로 퍼지고 응축되는 무량선이 —선이된다면 그가 그리는 것은 원만한 立體 등(또다른 차원의 조명이 될수도있다)의 空化가 된다는 것이니 원의 표면과 같이 매끈한 흐름모양을 갖추는듯이 된다는것이다。(하필 매끈함만을 말하는게 아니고 그러한 의미를 취하였을 따름이다。) 三次元의 기본선이 셋이면 그로인한 공간을 형성하는 四象선이 성립된다는 것이니 그 사상선 과 합하여 七선이되고 七선의 양단은 十四가되고 十四의 양분은二十八이란 것이고 그렇게됨 삼차원 立體 의미부여의 三層이 되었으니 四十九선이 되었다는 의미요 즉 七七升하였다는 뜻이요 七七로 움직여一이란 无現 有現의 空化를 이루는 根本性向이 되었다는 것이다(一 現相은 七升八이 五十六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이것은 필자의 현상성립 이론이다.) 뒷이론 제외한 以上의 이론들은 모두가 선각자가 말한 것을 필자가 가르침을 받는다는 위치에서 여기에 적어보는것이요 필자가 깨달아 논것은 아닌것이다. 이렇게 흐름이 空化를 지어서 우주가 생성되는 것이니 흐름은 살아있는 생명으로써 어디누가있어 만들은 것은 아닌 것이란 것이니 다만 절로 그러할뿐이란 것이니 설령 우리가 느껴알고있는 허공간이나 시간이 없어도 흐름은 있는 것이니 곧 생각속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니 곧 생각은 사람의 생각만아니라 모든 벗기어진 脫破象態(覺象)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마음이 내비친 여러모습인 것으로 두루뭉실 마음이란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니 마음이 사람에 마음만 아니라 諸者를 收容하는 그릇과 같은 것이니 모든 것을 포용한 것이라는 것이다。이것이 마귀 말씀과 같아서 마음이 魔音이라는 것이다。이것은 眞理本相을 고취시키기위한 反相의 논리이니 곧 수컷 돋보이게 할렴 암컷 있어서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니 그래야만 진리라하는 것이 나서려고 악쓰듯 힘써 노력한다는 것이다。이제 진리가 이것(여지껏 논한것)을 항마로 몰고 진리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한다는 것이다. 九八六二五巳正 ◎ 앞론에 있어서 對相과 김관기관과 因識性向의 것 세개가會集된 것을 釋類가 自性이라고 하고 마음을 이룬 것이라 하였다 해온것은 거짓自性 거짓으로(허울로) 이루어진 마음이란 뜻이요 참마음은 아니란뜻이니 以三者具度가 참마음을 맑게하지 못하게 하는 有濁 无明이란 것이요 끼인 먼지나 더러운 물들임이라는
것이니 以无明을 벗어 以无明이 저대로 굴르는 것을 觀하는 立長이 된 상태를 진정코 참마음이라 하는 것이라 하니 그논리 전개가 하루 자고나면 오이넝쿨이 자라 그끝이 방향을 틀어돌리듯이 흐름따라 (집요한 파고들음의 의문제기相 주위 에워싸는 여건조성 對相相 중심에서 일어나는 번뇌망상相에 대하여) 파훼하는 가르침을 주겠다고 일어나는 생각은 새로운 思想의 상황을 전개시켜서、논리적인 思考象도 자란다는 뜻이니 고정된 지킬만한 진리는 없다는 것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釋類의 논리전개방법은 먼저 베풀은 논리相과 그 의미를 魔로 몰아(나중 나오는 이론의 의지처 언덕을 삼아) 그 갉아먹는 방식을 채택하여 그가리킴에 영향을 받아서 뭔가 얻겠다고 노력하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감을 들게 하여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즉 어떠한 物事象이 허공중에 떠서 自力이던 他力이던 굴르는 상태를 관찰하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이 物事의 業障의 굴름이라는 것이다。즉 그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고찰함에 있어서 진리인 것처럼 두뇌에다 새겨지게 한다음 그것을 지워버리는 새로운 새겨짐을 發開하여 정신庫에다 注入시키는 方法을 채택하는 것이다。이것은 석씨가 제자들을 깨트려 벗기울 대상으로 삼아 스스로 大達覺醒한 흐름상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써 단계적으로 고찰해 나가는 방법을 취택해 제자들의 깨트리는 방법에 적용시키는 性向이 있다 할것이다。그래해가지곤 사람의 정신 感刻形象에 깨우침을 새겨넣겠다는 것이다。그래서 망상과 고뇌의 얽힌 고(罟)를 깨트려 벗겨서 맑은 상태를 만들겠다는 것이 主된 사상이요, 목적이라할 것이다. 一切의 일어나는 현상을 自性이란 참마음에 끼인 때나 더러운 물들임으로 여기니 이것을 깨트려 버리겠다는 것이다。일체 일어나는 현상은 三者具圖(六감의 세곱、대상、전달기관、인식성향 또는 생각성향)로 짜여있다하고 이것은 거짓마음을 이룬것이라 함인것이고 이 거짓된 相을 깨트려 벗어치워야지만 맑 은 참마음을 볼수 있다는 것인데 그 벗어치우는 방식은 그 셋을 벗어나선 또한 있을 수없다는 것이니 맺친 얽힘은 맺친 얽힘의 자체속에서 자체적인 힘으로 얽힌 원인을 파헤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자가당착 모순에 빠진 이론이니 일체의 氣作用을 절대 작자의 작품°(생명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 이것이 無感有感 우주를 형성한 것인데)으로 본다면 이것을 거짓된 것으로 몰아붙치고 그 거짓된 것을 파헤시킬려면은 그거짓된 속에서 그 거짓을 이룬 원인을 캐어서 번뇌념이 거짓을 이룬 원소 입자라는 것) 파괴시켜야 한다는 논리이니 마음이라 하는 것은 하는 일 없이 남에 功果나 탈취하는 그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것은 비틀어진 나의 心器에 내 심기가 邪覺에 파뭍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현상 작용은 自性이 아니라 하였으므로 作用은 생겼다。사라졌다 하는 것인데 그에 自性이 의지처로 寄生한다는 것인가? 기생하는 이유나 목적은 自性스스로는 저그렇다는 허울집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허울집 하기 위하여 그에 기생한다는 것이다. 그에 自性이 기생하여 있다가 떨어져 나온다면 저 어느곳에 현상작용이 있는 건 사실 아닌가? 즉 迷妄無明으로 몰린 氣作用은 (氣작용은 모양이 있게되니 앞서의 대상, 감별기관 인식처 性向 이란 것이다) 그 自性이라는 것과 쌍벽을 이뤄 영원하다는 것이니 그 고뇌와 번뇌를 떨어 논 것은 사라지지 않고 우주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여기서 고뇌하는 생각、그것은 업장物事의 元素粒子(새기는 =달라붙는、主體성격의 틀)가 되어 무궁한 작용을 이루는 너울현상이니 그것은 곧、하나의 작자 작품과 같은 것 一眞理 하느님은 영원하다 하는 것과 같음이다(이제 西氏手를 들어주는 것이 된다할 것이다)。 귀신 덮어 씌워(무슨 그럴듯한 대의 명분 내세워) 기적과 같은 이상한 권능을 행하더라도 自(제) 이
속 차리는 데 이용하면 마귀 짓이고 自利 안차리면 마귀짓 아닌데 단지 회롱에 놀아난다는 불쾌함은 벗지 못한다 할것이나 그 귀신 염원 들어주는 입장에선 하나도 탈잡을게 없다 할것이다。(그것이 고(罟)라서 꾸짖어 물리치는 것보단 그것이 고(罟)이라서 허덕이는 것을 풀어주는게 더 낳지 않을까다=허덕이는 것인지 즐기는지 우째 알까만은 즐기는 것도 벼랑에 붙들고 있는 작은 새끼줄 갉아먹는 쥐와 벌이싼 꿀을 맛보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 귀신이 생사의 기로에서 허덕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이다) 이속 챙김도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이 있는데 직접적으론 이속을 챙기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명예등。본의 아니나 결국엔 자아를 돋보이게 하는데 이용된다면 이속을 챙긴것이 된 것이니 이렇게됨 본의 아니나 덫에 걸린 것처럼 마귀 허울이 된다는 뜻이다. 마귀 또한 염원해탈을 바라는 고(罟)에 허덕이는 것으로 본다면 크게 병될 것없다 할것이나 이러한 변재(논리전개)로 그편을 든것이 된다면 옳은 것 없다지만 옳치 못한것이요.또 남의 利속 챙기는 것을 치사하게 물고 늘어져 시비를 논하는 것 또한 겉포장은 그럴듯하게해서 명분을 내걸진 몰라도 야비한 짓이라 할것이다。남에게 떳떳하게 보이는 業에 從事함 또한 하는 일만 다를 뿐 그 귀신 덮어 씌운 능력 행사와 다를게 뭐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인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그 또한 그렇게 여겨지니 貪見利나 布施나 正邪의 준칙을 어디다 두느냐에 달렸다 할것이니 그것은 當爲性을 주장할만한 自의 複案 他의 수긍에 있는 것이니 (설령 자기의 뜻에 남이 호응치 않는다 하더라도 自他의 심상이나 삶에 폐단이 일지 않는 것이라면)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먹지않고 살지못한다 하는 것 등으로 준칙 이유를 삼을 수도 있다할것이다。아뭍튼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고 利가 될건 정당한 댓가이다 하고 합리성을 부여해 고리동전하나 받지 말아야지만 心을 흐리게 하는 낚시에 걸려들지 않는다 할것이다 사흘 굶어보지 않아서 이런말 한다할 것이나 설령 뜻을 못펼지언정 부정에 소지가 있는 것과 결탁치말라는 가르침이 다。자기만 고상한 체하여 남의 허물벗고자 하는(지운 부담 탕감논리 등) 것을 몰란체 한다는 것 또한 꼴같잖은 일이라 自가 어찌 깨끗하다면 그런 허울(무슨 유식이 있는 양)을 뒤집어쓰고 그런 모양을 짓고선 남을 현혹케 할 것인가? 이말이다。뭔가 있는가 하고 파고들어 보면 깊이없는 단편적인 것 뿐이요(그것을 요점이라하기도 한다) 바람이 불면 훅 날라갈 정도의 거짓투성이 껍질상을 이루고 있으면서 말이다ᆢ。선견지명이 있는 것처럼 하는 말이 맞히는 건 우연에 일치나 미리 겪었던 재어논 것이요 모두 노망난 할머니 쓰잘데 없는 말놀림과 같으니 그 귀신들린 총명각들이 사람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상(아들이 있는데 자식 없는 것처럼 내 언제쯤 자식보겠소 등등)을 갖고 시험하려 든다면 확연히 보는 코도 달아놓고 베어가거늘 당하지 않을 자 어디 있겠는가 이 말이다。그래서 물어보거던 아쉬워서인지 호감에서인지 악의 반감에서인지 희롱하고자 함에서인지 확실히 알 수 없거든 숯을 먹은 벙어리처럼 하라는 것이다. 똥물 속에 있으면 겉돌지 말고 같이 휩쓸리어서야만이 위한다는 보살관점이란 뜻이니 그래서 같은 거름되어 일체의 효용의 꽃을 피우게 한다는 뜻이니 혼자만 깨끗한체 하지말고 벌 복을 같이 나누자하면 일면은 보살관점이 되고 일면은 이거 같이 하면 극락맛 본다는 마약주사같이 맞자고 꼬득이는 마귀 말이라、그요량은 벗고자 하는 자의 心眼(심안)에 있는 것이니 알아서 대처하라는 것이다.(필자가 이런 말에 걸려넘어지게 될것이다。왜? 잡고자 하는 덫이 어디있는지 모르니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미래가 무섭다고 장 못담글순 없잖은가?) 크게 여유롭진 않지만 일하면 궁색하지 않을만큼 먹고 쓸게 생긴다면 또한 남이 탈잡지 않는 것이라면 큰 복이라 할 것이다. ○ 내라(내세워) 표현함 없다 하면서도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 허덕이니 自리상의 사리규합한 적합한 因
用(自복안에 맞으면) 이면 諸 ᆢ 명분을 달고 일어나는 현상이나 諸처지는 고려치 않고 同一한것으로 여기고、비위에 거슬려 맞지 않으면 갖은 나쁘다하는 명분을 끌어다 붙치곤 他가 그 어떻다 여기는 관점이나 관념까지도 自관점이나 관념으로 틀어놓고자 하는 것이다.이를 본다면 天과 佛과 魔와 惡 등일체의 指稱은 관찰자의 心尺에 있는가? 한다。즉、관찰자의 생각으로 긁어 모으는 변재의 힘과 그 둘러대는 (조리규합하는) 힘이 또한 없더라도 (理由 꺼러없는) 우격다짐할 힘에의해 일체 결정될 것이 결정되고 판별된다는 것이니 常理 없다는 것이다。떳떳한 脫破와 떳떳한 人無我(생긴 物相이나 時相의 理治=한 가지로만 재어 볼 수 없는 것임) 法無我(관찰相=베풀어논 모양 주어섬겨논 모양。理治라 하는 것。想念積한것 敎材 其他 등등) 없다는 것이다. ◎ 저 것은 삼점(※ 근본 成立원인을 또는 그에의한 삼라 一切것을 말하는 것일게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해탈한 모양을 可視거리內에 두었다는 뜻이니 主役의 입장은 저기서 그르니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잘 관찰하여 본다면 그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것이라 하는 것은 모든 모양과 그外 一切에서 지칭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 五十六은 一回란? 그 諸物事相의 變化作用(亭滯 不變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포함)을 말한 것이다. 온몸을 적신다하더라도
각기 分割이 있으니 그 物事相의 어떠한 생김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物事相의 흐름的(流時)인 변화작용을 말하는 것이니 物事相은 다양성을 띄더라도 흐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같아질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니 흐름의 영향이 같아도 그 物事相의 여러모양으로 인하여 흐름의 영향 미친 결과도(끼침은 같았으나) 달라지게 나타난다 할 것이니 이것이 필자가 주장한論에 회피적인 말을 하는게 아니라 혹시 받아들이는 立長에서 錯解를 일으킬까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것이다。목욕을 함에 있어서 머리도 적시고 손도 적시고 발도 적시고 등 함은 같은 것이다。즉 이런뜻에서 七八五六一回라 하는것이니 삼라만상의 생긴형태와 그 量的인 숫자를 가르키는 것은 아닌것이니 삼라만상의 생긴형태와 그 수량을 어찌 七八五六으로만 가르킬 수 있겠는가? 이런 말뜻이다.그러므로 七八五六은 回의 變化作用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因識(※ 원인에 의한 원인있는 새겨가짐)이라 할 것이다. ○ 大乘(대승)이란 무엇인가? 댓가성(반대급부= 또는 生覺料量尺 잡념 망상번뇌에서오는 기타 行爲짓는 것)을 바라지말고 계속 베풀음行을 짓는것을 갖다。大乘의 一片이라 할 것이다。相對나 對相이 무엇을 願하는가를 알아 맞춰(들어 주는것이 大乘보살이니 그 內用相이 초췌한 허물(모양)을써 對相이 大乘의 마음과 行을 일으키게하는 것도 大乘보살이니 하필이면 무엇이 있어서 베품만이 대승이 아닌것이다.그러므로 어떠한 입장(몰골이 볼품없음에)에 처해있더라도 보살에 心과 行을 갖고 있으면 以ᆢ 대승이라 할 것이다。살신성인이 대승이요 또
하는일이 고통스럽고 힘들고 미천하고 혐오스럽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런것일지라도 以ᆢ 대승이요 훈계질책의 立長(어찌 그럴건가?를 일으켜 다른 觀見도 있다는 것을 천명해보임도)이 또한 大乘이니 壹切의 知見相을 내보여 훈계코자 함도(이러한 주장이나 사상의 가르킴도있다 함도)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어떻게든 宣行을 일으키는 것이 대승이니 일체의 양상이나 견해나 입장을 불문하고 宣行을 일으킬것이다。大乘이 무엇인가? 제반 여러것이 하나같이 원할하게 굴러서 걸림없이 벗어나란뜻 아닌가? 또大乘이 무엇가? 마음에 품은 뜻이 크고 넓어 이를 物相으로 비유할진데 큰 空限相의 龍馬車라면 大行보살이 그것을 올라타고 목적지로 몰아간다는 뜻이니 큰 마음 넓은 마음을 갖고 一切 (罟)를 벗어치울때까지일로 매진하라는 뜻이다。一切 (罟)는 마음에 있는 것이니 이승이 다하지 않는 것과 같고 원수의 아들이 과로로 쓰러지면 치하하는 것 같고 저 농부가 후달 아들을 위하여 밭둔덕을 베고 죽는 거와 같고 밭과 들과 산과 江海에 피고지고 자라고 맺고 등 모든 것들이 자태를 드러내는거와 같다 할 것이다。큰 말림은 작은말림(진취적인 것을 방훼하는 지난 것과 지금과 미래의 여러가지를 생각하여 주저케 하는 性向)이 끌어잡고자함을 풀어 재킨 그것은 마치 동아줄 당기기와 같아 한편 이 사람이 많고 힘이 세면 이기는 것 당연하다 지난 것은 시작없는 곳으로부터 습기에 젖어 왔다하더라도 작은 말림(그 말림은풀수 있는 여건의(인연 조건들의) 끈도 함께 갖고 감긴 것 그것은 밝은 변재、위하겠다는 보살심성의 끈)、이 끈이 연이은 올것은 무한 큰 말림 일로 매진하라는 것이다.모든 옭가 맺던 못된 고(罟) 말림이 힘이 붙여 되풀어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됨 억울하다고 물고늘어지던 것이 (죄의식이나 창피스럽다、 용기없다 했던 것 등등 어떠한 걸림꿈도) 佛보살관점 위한다는 관점 大乘(대승)이 되어 다 풀어진다는 뜻만 아니라 그 꽃처럼 되어 아름
다운 자태를 감상하게 한다는 것이다。말을 전도시킨다면 저 아름답다 감상하는 일체 모든 것은 恨서린 둔갑의 것도 있음이란 것이니 그것은 마치 거름이 쓸수있는 他의 먹이가 되듯 그렇게 변해 있다는 뜻이다. 나를 위했다는 佛과 보살이 되었었다는 것으로 모습을 바꿔놓기 하였으니 나자신 또한 감사하는 마음에서 大乘심을 일으키라는 것이다。말인즉 반드름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소견좁은 이가 지난、 악행을 저질렀던 것을 미화 합리화시킴과 악심을 품고 있는 것을 전도시켜 (상을 뒤집어서) 표현한 것이다 @ 후담 부언한다면 소승이 혼자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래선 자신을 잘딲아 중생 남한테 피해 안주겠다함은 위축된 작은 배, 자기 희생을 감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중생을 반야선에 태워 열반의 경지로 몰아간다 하는것 이런것 다 불가의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제쳐두고선 윗말들을 열외로 변죽 울린편에 속한다 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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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다음나오는 줄거리내용)은 풋사과라 할까? 순수하다할까? 문장의 흐름이 부드럽지 못하고 갈지 않은 玉아닌 차돌만도 못한 문장구사 실력이나 뒷날짜를 보니 이미 햇수론 十年이나 된 글이라 이미 기술한 내용과 번복되는 경향이 있어도 消失됨을 아까워해 정리해보는 것이다. …※ 主題는 아무러크소니에 대한 것이다.ᆢᆢ ᆢ 무엇에 구애될까? 아무러크소니니라 형상이 네모세모 등 어떠한 양상을 띄던 아무런 구애될게 없으니 아무러크소니 나니라。하염없는 流動이라하면 아무것도 아닌 아무러크소니가 되나니라°관념으로 탈을 잡고 관념으로「하자=병됨]을 잡음이니 본래도 없고 본래 아무런「瑕疵」가 없어 아무러크소니나니라 흐름이 役事속에서 고통하고 희열하고 갖은 감정을 다포함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할 뿐이로다。이와같은 흐름이란 못나고(못하고) 모자르다하는 神과 神들의 부류들 뿐이로다。모든(모다 다=로 되있음) 神들을 매도하는 건 아니다 잘한다하고 잘못한다하는 부류(部類) 또한 같다. 아무러크소니는 그 하나(壹)를 제외하곤 모두 다 이니라。그 하나가 마치 외로운 촛불같으니 감사해서만 아니라 서글퍼서 또는 또다른 이유 등등으로써 촛물(눈물=제몸을 烈火로 태우면서 뭔가 극한 성취감을 내보이는 모습인가? 희열의 맛을 느끼는 모습인가? 아님 미련과 아쉬움의 표현인가? 무슨 감정과 相의 표현인가? 그런 비춰짐인가?)을 흘리나니라(촛물을 안흘리고 그대로 탈 수도 있다) 오직 그 하나란 뜻은 勝(승)자가 둘이 없다는 뜻이요 끝 꼬리 등등이 둘 이상없다는 뜻이다(관념이 지금 그렇게 흘러서 그렇지 둘이상 여럿이다로 생각이 짚혀흐르면 또 그것이 제줏대 주장이 되는 것이다) 승패를 굳이 나눔이 오직 하나라 함에서 나니라。편당을 지음이 어리석기 그지없고 가련하다 알아달라는 것이 해맑은 철부지같이 보여서 측은한 마음, 마음=이는 하나의(精神) 뜻에 가깝다 그렇더라도 아무러크소니로 여긴다))에
그 까지도 아무러크소니로 쳐(여김=인정)주고 보아(헤아려) 주나니라。그러므로 아무러크소니는 오직 그 하나까지도 아무러크소니가 되나니라。오직 그 하나는 代身(代理=융통)없어 못쓰게 되면 氣잡쳐(썩죽어 끝발죽어=氣팔팔한 풀죽어 등의 비어이다) 사그러지지만 아무러크소니는 그 하나라하는 거와 다른 또하나둘 셋 넷 등등 (힘모아)代身하는 代理方 있나니라。석류도 융통이 있을런지 모를진데 하물며 하염없는 유동인 아무러크소니야! 이를 말이랴? 檀紀 四三二十一年陰十一月十五日 하염없는 유동이라하는 것이 너! 理想의 고(罟)가 아니냐? 무엇이라하던 상관있으리°아무러크소니니라。아무러크소니는 어디를(가서도 될 수 있으나) 간다고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무러크소니는 어디를 갈 수 없나니라°(가질 않나니라) 이를테면 훌훌털고 벗어버리고 간다하더라도 아무러크소니가 될수 없어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나니라 왜? 그 훌훌털고 가는 곳에 (설령 定處있건 없건) 얽히고 걸려가기 때문이다。((※ 생각이 발자욱 뗌으로 부터 몸도 따라 발자욱을 뗀다는 뜻이다。나도 모르게 예까지 왔다는 것은 어떤 생각에 몰두하였었다거나 感識하는 外部反影에 이끌려 왔다는 것이니 돌뿌리에 체여넘어 지는 것이 또한 (딴전)정신이 다른곳에 팔렸다는 증거이거나 단단치 못한 땅 본의 본의 아니나 속이는 것만 같은 함정만 같은 그런 운수나 팔자소관(사람들은 재수유무를 말한다)에서 였을것이다。))스스로 깐 (생각하기)엔 아무걸림이 없다하고 하지만 이미 훌훌털때부터 그 뜻 관념과 理想 또는 다른 것에 의해 얽혀들었나니라。그러므로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나니라。八九年一月一日°이 모든 말씀이 편지견이니 생각을 기울길 탓이라 또 그 아니라면 아닌 것이니 아무러크소니는 어디 한군데 가만히 있다고 아무러크소니가 되는 건 아니다. 앞 내용과 반대입장을 취해 뒤짚는 말을 하면 그게 또 아무러크소니가 되는 것이니 제 비뚤은 심사의 표현 내기(자랑)가 아무러크소니인 것이다。이것이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합리화의 고(罟)이나니라。
다음은 界成立과 결부시킨 아무러크소니論의 一部인 것같다. 그 어떠한 界도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나니라。面의 世上 한 차원 더들어가서 線의 세상 등이 귀신령 세상이라할 수 있으며(당시 편견을(억측을) 갖고 있었다거나 미달한 생각을 말한것 같다) 점의 界가 하나라하는 하느님의 세상에 가깝고 한차원 더들어가서 點그것마저도 없는 界가 오직 하나란것의 任의 界이니無의 界로써 무엇으로 지칭할 수 없는 界일 것이다。(※ 그것은 곧 面에 박힌 점이 측면으로 서서 사라져서 다른곳을 비추고 있다한다면 以世上의 현실이 無의 界인 것이며 그러므로 無의 界는 現實象態로 엄현히 존재하는 것이다。단지 점모양의 하나라는 界만 心相에서 까닭원인(理由)에 의해서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할 뿐인 것이다.)그것과 그러한 뜻마저도 모르고 헤아리지 못해 아무러크소니이니 관념의 얽힘이 (現想의 얽힘이) 풀어진 곳이 아무러크소니일 것이다°((※ 이것은 어리고 비출수 있다는 面이 어리고 비춤이 없다하더라도 어리고 비출수 있는 근거의 터 面이 存在하면 (이제 [정리때]생각해보니 刻印(因識) 處所를 用語구사실력이 모자라서 그렇게 말한 것같다 어리고 비춤의 뜻을 유추=(類推)해서 그 面에 그 面으로(방법논적인 뜻일것) 무엇이 活動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추측이나 豫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확연히 그 面있음으로 그面 또는 그 面으로 (방법性向일 것이다) 존재한다는 뜻°(인식성향 있음으로 외양주위 또는 諸것이 존재한다는 뜻일 것임) 이것이 理想 想像(想상) 또는 관념속의 鬼神(얽어재키는 作用者)인 것이다。線·點·無·相이 또한 같다。이것으로써 모르는 귀신있음의 一片證明이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面과 線이 時空속에 없는 것이 아니요 또한 없는 것이 아니며 無와 無를 意味하는 것이 時空에 없는 것이니니 無 즉 一例로 無를 풀을진데 나는 연필을 가졌는데 저 사람은 없어 안가졌다로 풀수 있어 단순하게 無를 뜻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존재의 有無를 비기어서 밝힌다는 것이니 어떤 類의 논리와 비슷
하다)以 깨닫는 것이 헤아림이니 이미 헤아린다는 것은 얽힘 즉 고(罟)이니 (罟를 푸는 ※ 탈파 ※ 반대관점逆相을 또다른 罟로 봤음)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 벗어나지 못한 界인 것이다。그 깨닫게 하는거와 깨닫는 者가 있는한 아무러크소니가 아니 나니라 둘중 어느 하나만 있다하더라도 아무러크소니가 아니 나니라°(이것은 도시 편견이니 걸림없다는 표현을 한다는게 아무러크소니라 여기선 하는 것 같은데 제 비뚤은 심사의 기울기에 달린것이다。) 석류의 十八處를 뜻함과 비슷하다 할지모르겠다。) 즉 無는 아무러크소니가 아닌것이다。※ 相對性과 主客의 논리에 의한 것은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다。또한 일예로 앞의 面線點의 說明에서 거울같은 面에 비추이고 어린다。한 차원 더들어가서 가느다란 유리대롱 머리털같은 선에 어린다。빛선에 어린다。그 빛과 맛과 색과 냄새 등 느낄수 있고 알 수 있는 것 마저도 없는 관념의 선과 점에 어린다。그 관념과 그에 의한 점선면 등 마저도 없는 것 마저에도 어린다。이다로 할 수 있다.그러나 이는 어린다는 얽힘을 풀지못하였음으로 아무러크소니는 아닌것이다。또한 그와 같음을 지나서 어림이 없다 까지로 같다하더라도 풀어서 아무러크소니라 할 수 있으나 풀고 걸리고를 말하였으니 또는 풀음에 얽혔으니 아무러크소니는 아닌것이다。이로 미루어 볼진데 아무러크소니는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아무러크소니이다 ※ 이 글의 요지는 어떠한 양상(견해)을 띄는 논리를 전개하는건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란 것이다.또한 그래서 제 양상을 띄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아무러크소니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또한 아무리크소니는 하염없는 유동속에서 엄연히 존재 아무러크소니한다。 外觸한 精한 氣와 外觸한 形을 이루는 理治의 集合이 變形하여 관념에 어른거리는 것이 귀신으로써 나아가선 영상화되어 그들의 活動을 감지할 수 있으니 즉 귀신으로써 귀신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후담 망상이 지나친 것이지 귀신 움직임을 어떻게 알수있어ᆢᆢ) 머리를 고정시켜 가만히 누워있던가 하면 귀신이 활동한다。※ 이 말은 뇌골수의 운동작용 (두뇌골수는 가만히 있질 않는다. 혼자서도 움직이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뜻일게다)이 귀신이 활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이런것은 몽매지간에라도 어떠한 영상을 그려 나타내기도 한다할것이다。다른 이유에서의 꿈을 이루는 논리와의 차원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물질작용의 行爲相보다 귀신은 한도막을 먼저 움직인다는 것이 지금 나의 편협된 생각이다. 즉 나의 편협된 생각은 그럴 것이다로 이미 귀결지어 요지부동이다. 어리고 빛추고 하는 面같은 곳을 面의 界라 한다면 어리고 빛추지 않더라도 面의 界는 있을 것이니 面의 界는 부피가 없음으로 인해 겉과 속의 구분이 없다.단지 사방평방 넓이와 그 面이라는 것을 가르키는 어떠한 양상이던 比相만 있을 것이다。 ○ 어떠한 단면형상이 立體性을 띄는 작용을 일으키기를 염원한다는 뜻에서 어떠한 상징적인 도안을 벽면이나 물체면에다 그린다면 그 物相은 그 영향을 받아 염원의 의도대로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이러한 원리를 응용한 것이 언젠가도 말했듯이 부적과 같은 논리란것이다.그것은 부족치 않은데도 부족한 것으로 몰아 덥부치기로 붙이는 군더더기와 같은 것으로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소위 自하는 일에 (또는 집단이나 어떠한 것을 위하여) 준동과 난동을 막기위해서라는 것이며、또 소위 그것을 제압하기 위하여 올가메는 줄이나 덫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또한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그에 호되게 당한 것은 그 상형을 뜻하는 것만 봐도 그것인줄 알고 일찌감치 꺼리고 멀리하려 들것이니 미연에 훼방자를 막는 방지책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꺼리는 일체 것을 빨아드리는 역할
거미줄에 걸리듯 걸리게 하는 역할 돋우는 역할을 하는 수도 있다할 것이며 이 반면 그것을 좋아하는 일체것을 포로로 하는 작용 성취하게끔 이끄는 작용 즐기게 하는 작용도 할 수 있다할 것이다。특히나 感識相으로 無現하는 여러것에 효험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以上의 여러 글들 중엔 필자가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것인가를 고증받기위하여 文庫에 가서 여러잡다한 서적류를 구해다 보기 以前의 글들도 많음이니 그래서 내게는 값어치있다는 글들이요 이러한 글들을 착상하기 이전에 여러 잡다한 서적류를 구해다 볼 여력이나 심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렇게 됨 머리에 착상되는게 모두가 표절이나 환골탈태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요 요동에 돼지기르는 자보다 못하다는 소릴 듣는다 하더라도 가르침 받는다는 입장에 앞서 그렇게 됨 나에 득달은 없고 모두다 물이 들어 남에 꾀하고자하는 (노복되고 종되고 제자된다.그것은 익을수록 고개숙인다에 앞서 이런말을 이용 아니꼬운 심기를 들게하여 한마디로 그것은 더러운 것이다하는 오기를 갖게하는 내질르는 심성을 기르게 하는 것임.그래서 중상만이 아니라 떳떳한 스승없다는 것이다) 소리만 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래서 여러 글을 답습하여 心目을 넓히라는 생각 내조자의 여러 충정어린 권유를 무릅쓰고서 내 혼자만 떨기밭에서 獨王인채 고집스런 마음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딸기밭에 독왕을 얽히설키 서린 찔레덤불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풍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무엇이던 그렇게 된 (내가 이렇게 된 立長) 處地에 있는 것은 어떤 由來된 因果관계가 형성되어 응보적(보복적) 차원에서 當함 받은 것만 (피해입는것)이 아니요 이룩(성취)함을 爲한다는 行의 관점 채워서
완결지어주는 관점 베풀은 관점 전도의 입장에선 받은 관점 제반것에 얽메이지 않는 관점 등등) 보살관점에 의해서 이미 덜어서 그 불충분한 것을 채워주기 위해 있는 것이란 뜻이요(※ 또 채워줬기 때문에 그러한 처지상으로 있다는 것이요) 그래서 여러 어지럽고 협오스럽고 불충분 부족한 모양과 성질의 허울을 쓰고 있다는 것이요 무슨 죄의식적인 죄과업이 있어서만이 인과관계가 형성되어 처지나 모양의 허울을 쓰고 있는건 아니란 뜻이다.또한 갖은 좋은 의미의 허울 또한 같은 의미에서 쓰고 있는 것 보살관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니 즉 감상하게 하기 위한 보살관점이란 뜻이니 어떠한 평판(시기 질투 등 비평의 소지 견해를 갖게 하는 것)을 하던 감상하게 하기위한 관점이란 뜻이다。一切知見立長이 모다 보살관점이니 先入見의 魔象을 몰아낼 것이니라。죄를 지어서 그러한 相을 (持)지니게 되었다거나 선업을 닦아서 그 좋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편견만의 생각을 일체짓지(내지)말고 떨어낼 것이니 이러한 見觀은 덜된 주장의 방편쓰길 즐기는 저만이 진리를 내는 것처럼 나되는 사악한 마귀희롱 관점이란 뜻이다。엄포·공갈·협박·핍박 등 두렵게 근심되게 겁주어서(克己시켜서) 얽메임에서 벗어나게 할게 아니라 宣心을 갖게해서 편안한 마음을 갖게해서(善心=편벽되지만 善心이란 의미를 취함도 괜찮으니 善心이라 해두자。善心을 내게해서) 얽메임에 벗어나게 할 것이니 지금까지 말한 것이 또한 한쪽으로 생각이 치우친 편견의 주장이니 平等正見없기 때문에 평등하면 생각이 흐르지 않아 일체의 견해나 입장을 짓지 못한다는 치우친 생각) 모든 걸림은 편견 편주장에 의해서 벗겨지는 것이다。내가 지금 이 위치에 이러한 相으로 이러한 처지로 이러한 닥친 事를 감당하는 것 行하는 것은 삼라우주의 一員으로 참여한다는 관점이란 뜻이니 식별 구분에 머물지 않고 조건없는 行의 관점으로 마구 일로 매진하라는 것이다。그렇게 됨 自업적 功이 저만큼 벗어치우고 굴러가 큰과(大果)된 것을 공감(空感)의 立長이 되어 空感(포용한 그릇관점)으로 와 닿게 된다는 뜻이다。앞 처 지상에 있어서 그렇게 보니까 그렇지 실상은 원래 그런 것이려거니 하고 정당시 하여 본다면 어떤 처지이던 하나도 병탈을 잡을 성질 相의 것이 없는 것이다。즉 덜고 더함이 없어 본래한 뜻도 없지만 본래 시작없는 空限相(공한상=그런 생김)이라는 것이다. ○ 爲行 관점이란 뭔가? 그 一片을 例를 든다면 욕됨을 참게 (견뎌내게함)하여 善美한 것 없으나 善美하다하는 관점으로 승화시키는 관점이니 즉 저가 저렇게 自他 및 우리(제양상 중생)를 거룩한 地位에 올려놓으려고 精進(정진)하니 그릇(器)깨끗히 가시듯 가시지 못한 잠재의식속에 있는 갖은 열악한 대우와 가혹한 대접을 받은 우리가 어찌 인욕바라밀(부처보살 신명 천사 등등 좋다하는 명분칭호 위치가 되어 감명받지 아니하리!하게시리 一路精進하여야 한다는 것이 爲行관점이라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과거의 정처(亭處)가 없어져 大破脫果(대파탈과)를 성취케된다는 것이다。바꾸어 말하면 일체 과거사를 떨쳐버리고 앞으로 앞으로 (정진) 맡은바 소임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소임없는 이는 소임없다고만 하지만 말고 찾아서 직장을 구해서 열심히 일하듯 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이 또한 진리 아니니 두들겨 맞으면 무너지는 편견일 뿐이다。 ◎ 영원한 결국도 없지만 결국에 가선 一乘(일승)을 지난 空無乘을 이룩하는 관점(※ 器虛관점을 뜻함.諸法斷滅이 아님、혹은 제법단멸이라 한들、이다.시비해 볼테면 해보라 이거다。내가 석씨 제자 노복이 아닌 이상 생각을 기울길 탓이란 뜻이니 입에 거품물고 우겨대면 그 아닌 것으로 注入되 아닌 거이 들어차서 딱 버티고 한번 해보자는 식이 되는 것이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나 목적이 고(罟)라 하나 이ᆢ ㅡ 이름만이 목적이 있는 것처럼 목적이라 하는 것이요 실은 목적이 없어지는데 도달하는 것이 器虛관점이 되어 大達覺이라 하는게 아닌가? 한다。論理上으로 二元(原) 等 無數原多對比론을 동원하여 엎치락 뒷치락해 봤자 그냥 이대로 이 현상대로의 흐름형태를 말하는 것임이요 다른 것 있다해봤자 顚倒나 矛盾이나 合을 말하는 것일 뿐 어디 특별난 다른 차원없다는 것이다。저 하나의 형태를 보고 前後生의 善惡業의 因果관계를 말하는 것은 (※ 그 자체적으로 因果業의 문제를 일으켜서 있다 할 것이지만 그런 것을 자로 재는) 자(尺)를 재(度)는 자의 心量에 있다는 것이니 그 한 가지를 갖고 악해서 저런 과보를 받았다. 또 반대개념의 善해서 저런 果를 성취했다 하는 것 거듭 또는 그밖에 여러형태로 재는 것은 재는 자의 요량에 달렸다 하는 것이니 어떤 취지나 목적을 갖고 心尺을 들여미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이를테면 장애(障碍)者의 장애는 ☆ 전생에 악업에 의해 보복을 받은 것이라 던지 ☆ 전후생에 善業을 펴 (부족하다 하는 他에게 그 부족한 것을 메꿔주기 위하여 떼어서 도와줘서) 그 善업을 폈다하는(펼 것이라는)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것이라던지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의식이던 죄의식이란 걸 갖을게 없다 하는 것이라던지 이 말에 반박하여 어찌 그럴건가? 그렇게 말함은 금세인의 마음에 통념상 惡을 부추기는 것이다。이를테면 남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곤 가책을 느끼기는 커녕 되려「그대는 지금 先後世에 남의 다리 부적당한 걸 이어줬다는 표현을 지금 그렇게 하게된 것이고 하게 될 것을 내가 그 이룩해 준 것임에 나는 도리혀 벌커녕 果를 성취시켜준 성취의 성취관점이 되어 나 또한 염원하는 바대로 탈파케 될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죄악, 되는 것의 옹호점 자기의 합리화를 목적으로 하는 借用利用 관점 등)하여 앞 논리전개를 무색케 한다던지 하는 것 등이 재는 者의 심척의 요량에 있다는 것이니 다른 모색이 있다면 顚倒요、矛盾이요、合 등이요. 벗어난 특별난 相없이 그것이 빈도가 잦은 것으로 본다면 필름녹화의 동작을 알맞게 재생시켜보
는 것처럼 이대로 흐르는 시공작용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담 적절한 탕감논리를 겸부함 변설해 놓지 않은 第一론을 신빙함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심성을 하여금 근심되게 할 것이니 근심되게 하는 것이 오른 파괴(깨우침) 방법이란 말인가? 心에 꺼림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게 벗어치움에 主된 목적인데 앞논은 生가죽 벗기는 것이지 이 다음이라도 어떻게 잘하면 그 生 양가죽 벗김 당하지 않고 벗어남 있다는 뜻은 아닌 것이니 사람의 심성을 과거 등 시간性向에 얽메이게 하여 병들게 하는 가르킴이라는 것이니 무슨 제대로 된 탈파론이라 할 것인가? 이 말이다°(※ 이렇게 됨 잘할려는 생각에 앞서 과거 등 시간성향의 인과관계를 미루어 생각해서 내 이러하니 以往은 지옥 갈 것인데 악이라 하는 것으로 누리고보자。그래서 惡斗가 가득하면 절로 밀려 善쪽으로 떨어지겠지 하는 생각……) (모든게 그리로 쏠려 기치가 잠기면 이미지 퇴색 표방 주장 줏대는 무색 무의미해지고 승화 顚倒개념 찔러 잡을 고기가 아니라 젖을 짜 받을 젖소 개념, 도적이 아니라 先達스승 인솔자 개념 등으로 변질 들어참을 갖을 수도 있음) 하는 식의 심상을 일으켜 되려 악을 조장케 하는 것이라 무슨 善한 방편이 되겠는가? 이 말이다、이런 말씀、그러므로 석씨가 진위언 없으나 眞僞言을 상황따라 전개했으니 잘 파악 해야지만 그 가르키는 要指를 새겨 들을 수 있는 것이니 삼심을 불가득이라 하고 또는 제양상에 얽메이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니 그렇게 됨 일체의 고(罟)家가 무당이 死者 천도풀이에 길매듭 풀듯 모다 풀리어나와 大果의 감김이 된다는 것이다.이것이 곧 시간성향의 인욕바라밀 등등 거룩한 보시를 하였던 분들을 (※ 승(和尙)이 도로에다 대고 절을 하였다。그랬더니 길둔덕 아래 엎드려있던 오누인지 두 내외인지 하는 두 원귀가 일어나서 대성통곡을 하고 가는 것이었다。부처님이고 보살님이라 하시는데야 어찌뭐 다른 걸 얻어가지고 갈라할 것 있겠는가? 이 말이다。간발 차이로 대충돌을 당하지 않아 큰 어려움을 면케되었다는 옛흐름상이다。소위 은전 가피를 입었다는 뜻이다。앞말은
전일밤 몽사이고 뒷말은그 뒷날의 생시사이다。) 감명받게 하여 불보살 지위에 올려 놓는다는 논리요 탕감받는 논리요 성취논리도 겸해 갖고 있다는 것이니 뒤돌아보지 말고 이 말씀을 운동경기에 응원가처럼 여겨 힘북돋는 응원가에 맞춰 일로 매진하라는 것이다。자기 맡은바 소임을 열심히 하는것이 곧、정진하는 것이요(필요에 의해 때로는 휴식도 정진속의 일과요) 일없다(일자리 없다고만 하지 말고 하다못해 술먹던 않먹던 꽥 꽥 소리질러 미쳐 날뛰어 보기라도 하라는 것이니 찾으면 왜 없겠는가? 이 말이다. ○ 보살이 복덕짓는 것을 탐착히 여기지 않음은、그 복덕이란 것을 지었다는 것에 因하여 얽메임이되 원만한 궁굴름(行) 제것의 벗어나는데 장애적인 요소로 작용할까 봐서이니 그래서 탐착하게 생각지 않는 것이요(제 주제거리에 관여터라도、중심은 평등척이 되어있다는 뜻이요 또 그이름이 평등척이라는 것이요) 일체 뭐라는 것을 탈잡고 늘어지고자 하는 것에 탈잡아 염두 개의(개입) 할 마음을 일으켜 쏠리지 않는다는 것이요 또 복덕이란 것이 복덕아닌거와 구분짓는 개념이 되니 중생을 제도키 위한 二乘성향의 방편은 될지언정 염두에 둔다는 것은 모양에 머물게 된 것이니 설령 바라지않고 했더라도 바라고 한 것 같음이 된 것이라 어찌 보살이 마음을 묶어재키는 모양을 염두에 둬서 놀림의 희롱놀이에 사로 잡힐 것인가? 이 말이다。일체중생을 구제하는데 몰두 집착하였더라도 (온갖 힘을 쏟았더라도) 한 중생도 구제하지 못했다해라 함은 諸번뇌 모양에 걸려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일 것이니 이를테면 일체중생이나 한 중생이란 구분짓는 개념에 붙들리고 한 중생을 구제했다하면 낮은 차원의 말론 공과를 빼기는 것(자랑)이 됨이요 실상은 한 중생도 구제치 못한 것을 구제한 것이라 한 것이기 되기때문이다(구제했다하는 것이 한낱 부질없는 고(罟)果를 얻은 것이기 되기때문이다.) 한 중생도 구제치 못했다하는 것은 곧 열심히 일하는 과
정 속에 있지 어떠한 果를 얻었다고 자처하지 않기때문이다。어떠한 果를 얻었다는 것은 허심탄회한 그릇이 아닌 것이다。즉 그 果라하는 것 또한 파괴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그렇기때문에 보살은 그런 하찮은 果를 끌어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끌고 갈지언정 끌려가고 싶지않겠다는 것이다.또한 이런 가늠가름할려는 생각을 계속 일으키면 이런 구분짓는 망상이 무수일어 괴로움을 받게된다는 것이다。너나를 구분짓지 않는다는 것은 그게 곧 나라는 뜻이 함몰된 나일 수도 있을 것이니 거대한 모양의 한 덩어리가 궁글러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거대한 모양의 한덩어리가 또한 표현을 그렇게 하였을 따름이요 거대한 모양의 한덩어리가 아니라는것이니 책임회피나 자신없는 말로 일관하여 지조잃어 비굴하자는 것이 아니고 한쪽의 어느 한 모양의 치우친 줏대는 무너짐을 일으키는 원천의 고家가 된다는 것이다. 즉 실력없고 실력이란 것을 없애 그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 후담 금강경을 이마 들여다보고 천박한 두뇌를 굴려 이렇쿵 저렇쿵하는것 같다 ◎ 지금의 業輪行이 前世業의 應報의 立長에서만이 아니라 未來後生에서 남을 멸시 爲害하는 立長에 처해 질수 있다는 것을 가르키는 것으로써 그것을 미리 탕감한다는 논리에서 금세에 갖은 방면의 수련을 行한다는 논리에서 今世에 갖은 방면의 수련을 行한다 이런 논리이다. 삼라중생이 윤회겁生 있다면 그 윤회의 겁에서 어떤 생애에선 어떤 입장에 처해질런지 알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유로운 生일때 베품 등 갖은 수련行(※ 향락도 남을 이끈다거나 能 즉 좋은 방면으로 잘벗기기 위하여 한다거나 등 위한다는 보리 관점이면 갖은 수련行속에 일부라 할 것이다)을 行하여 그보다 허울벗음이 어려운 生일때 그 報로써 그 生을 가벼히 넘기게 한다는 논리에서 여러 諸行이 있게 됨인 것이다.
그러므로 前世에 있었다는 것이 前世에 있었던 것만 아니요 後世에 있을 것도 되는 것이며 후세에 있을 것이라는 것도 후세에 있을 것만이 아니요 前이나 今世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이를 미루어보면 과현래란 시간이란 허울로써 그 흐름을 벗고 시간감이 없는걸로 諸象이나 제형태를 살피는 위치에도 설 수도 있는 것이니 (※ 즉 시간은 없는 것의 위치에 도달한다는 뜻) 언제라는 시간감을 일체 떨쳐내버리고 열심히 갖은 行을 수련하여 갖은(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業障果가 報身을 이뤄 모든 얽힘이 파괴된다는 것이요 또 그렇게 되면 기허 관점에 이른다는 것이니 器虛관점에 이르면 萬象의 피고 짐을 끌어안아 누리는 극락관점이라는 것이다. 석씨가 과현래를 말한 것은 시간적 방편이니 과거가 과거가 아니고 미래사 일 수도 있다는 뜻이니 그렇게 됨 비약 전도가 너무 심하여 윷을 모이라 할 수도 있다 할 것이나 실상은 관념이 궁글러 휘어감기듯 하면 윷은 모를 보고 모는 윷을 보는 것이니 모란 허상이 막힘 없이 흐르는 길을 막고 그 윷모란 것을 가르키고 있는 것일 뿐이다.그러므로 저가 진리라는 邪相의 윷모란 것을 걷워치우는 안목이라면 참가르침 고탈파를 본다할 것이다。즉 諸象과 일체지칭의 가르침이 얽힘을풀기 위한 일이승 등 다승적 방편이란 것을 알 것이다 ◎ 過未의 시간감을 걷워 현실 나를 중심한 저와 이의 공간감으로 놓는다면 저 형태나 이 형태가 또다른 나의 형태라던가 내 可視거리내에 있는 나의 일부분이라 할 것이니 또 저와 이의 관점을 바짝 접어 내一身으로 모아논 것이라면 모든 형태는 나의 內部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현상일 것이니 즉 상상적 망상이 그린 현상이 諸現相이란 것에 도달한다 할 것이다。즉 망상에 의해서 諸宇宙가 있다는 것이다。그렇담 뭣을 나열해서 논 할 건가? 이러한 形도 짓고 저러한 事도 겪는게 곧 나일진데… 무엇이 얽힘이 된다 물고 늘어져 마음을 속박시키고자 할 것인가? 이 말이다。즉 위한다는 形과 事가 없다는 것이다。어차피 그렇게 굴러갈 것을 내가 위한다는 관점을 갖고 내게 직접 닥친 일을 일로 매진한다한들 저쪽에서 뱀이 개구리 잡아먹는다고 개구리 깨ᆢ액 깨ᆢ액하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말이다。그 개구리가 나고 그 뱀이 나라면 모순의 상태가 現흐름의 공간相이라 할 것 아닌가? 또 그 둘은 나를二原化한 것으로 用易한 해탈을 위한 모습을 지은 상태로써 서로가 위한다는 보시나 해탈관점이라 할 것인가? 개구리는 뱀이 악마 나찰귀 원수가 아니고 그 허울을 辱되게 쓴 거룩한 인욕바라밀보살로서 해탈이 용이하도록 성취시켜주는 자로 보이고 뱀 또한 개구리가 먹이 염원체로 들어주니 해탈성취관점이 된다는 것인가? 즉 상호보살이란 것 아닌가? 이 말이다 醒者있어 과거세를 말하는 것은 혹 欺讀에 가까운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음이 꼬리를 문다 할 것이니 어떠한 목적을 갖고 환영술을 그렇게 지어서 사실인 것처럼 愚民에게 認知시키었음 일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또한 그렇더라도 남에 마음을 넘겨짚는 것같은 他心通은 가능하였을런지 모를 일이다。왜냐? 그것은 시공간적으로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같은 시간 같은 공간대에 있기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설령 다른 시간대의 타심통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넘겨 짚어서 그 사람의 지난 일이나 어떤 시공간적으로 벌어졌던 일이거나를 들춰내서 자기가 주장하는 말을 맞는말로 여※ 기게끔하는데 이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는 과거세의 중생 미래세의 개개의 중생心도 들여다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즉 과거 전생을 본다 미래생을 안다는 등등으로써 현실과 동떨어진것과 연계시켜 자기의 한결같은 주장의 理想을 注入시키는데 도구로 이용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自心卞轉他心无境界 이러한 비평을 할 수 있는 것은 고(罟)를 파괴시키는 데는 일체의 흑백 眞僞 正邪 선악 등 무수 대비 성향의 그것만이라는 論의 一定한 律이 없기때문이다。그렇기때문에 뭣을 대상으로 삼던 들고칠수 있다는 것이다。즉 일체의 本然에 흑백 진위정사 선악이란 것은 없다。이상의 것이 理相주장을 펴는 도구이니 힘을 얻기 위한 방편이요 수단이요 힘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즉 이렇게 말해도 틀린 관점이라할 수 없는 것이니 왜냐? 자기의 생각만 옳다고 말할 수 없기때문이다.만약상 옳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힘이 있다는 것을 내보일려 하는 것이니 즉 以上의 對比론 등이 힘있는자가 힘없는 자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에 동원된다는 뜻과 말이란 뜻이요 그 반대개념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에게 加重한 억눌림 받지 않으려고 구슬리고 속이기 위한 책략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과 말이라는 것이니 그런 술수 쓰는데 넘어갈 필요가 없다할 것이다。(自 利 속 있다면 넘어가줘도 상관없다 할 것이다.) 도대체 착한게 뭣이고 바른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主體가 對相을 먹고자하는 방편도구일 뿐인 것이지 착하고 바른게 먼저 있어 주체와 대상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한참 있다가 생각하길 이래도 저래도 입장 차이요 편견을 면치 못할 것이거늘 진위정사 선악이 힘보다 먼저라 한들 나와 무슨 상관있겠는가? 이 말이다。괜히 쓸데없이 편견을 갖고 고집부려 보는 것이지 ○ 앞서서도 말했지만 전류의 교류현상은 에너지를 내어 전구란 등불을 밝힌다했다。이 전구의 등불은 전기 교류 현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란 것이다°(※ 여기선 교류전기 현상을 말하는 것이니 직류가 아닌 점을 감안해서 착오없길 바란다。) 그 현상을 우리가 감식할 제엔 불빛이 절로 발해 가만히 있어 절로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속도가 빠른 바꿔 놓기 현상은 어떠한 흐름의 일정한 律을 지킨다면 속도의 빠르기나 바꿔놓는 모습(체인지)을 감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이것을 눈에 얼마동안 남는 잔상의 연이은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그냥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어 보이거나 움직이는 사물이라면 평소처럼의 그 움직이는 사물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뜻이다。만약상 여기 연필과 지우개가 일정한 위치에 놓여있다 가정한다면 그것의 바꿔놓기의 빈도가 빠르면 제위치의 위치를 항상 유지하는 것으로도 보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필요에 의해서 연필과 지우개를 잡고 움직이는 모습까지도 연출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 까지도 도달하며 그 서로간 위치를 바꿔놓은 상태까지도 도달하며 갖은 차원의 표현을 다 할 수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 할 것이다. 이것은 二元的인 바꿔놓기이나 諸樣象이 연이은 三四次 등 무수 바꿔놓기라면 그 상황은 점점 복잡한 면으로 들어가서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무수한 바꿔놓기가 일어난 모습이라할 것이다。즉 움직이지 않은 그냥 현상태와 같은 데에 도달한다는 것이며 곧 현한 이상태가 곧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이러한 현상을 시간감 있는 전후생 현래를 갖고 설명한 것이라면 역시 과현래는 없거나와 다시 과현래는 있거나와 또다시 래현과(顚倒=아무케로던지 선후 內外 수차원 따질 것없이 뒤집힘)는 있거나에 도달한다할 것이다.그래서 내가 가르키는요지는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니 그 죄가 있다면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이요 그 죄가 없다면 없는 것이요 있는 것이요 그 극락지옥이 있다면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이요 그 극락지옥이 없다면 없는 것이요 있는 것이란데 도달한다는 것은 저마다 치우쳐 생각하는 상념속에 일이란 것이다.그러므로 어느 一家見解에 집착하거나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있다에 도달한다는 것이니 즉 일체 것 无일체 것 無有란 것이다. 즉 그냥 이대로 흐르는 현상과 전도와 다양변이 차원이라는 것이다.내 말은 근심되게 하는 사실이 그런 것처럼 여러가지로 방편을 드는 어리석은 마음상념이 일으킨 방편론의 말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니 행위 의 당위성이 있고 없고를 제쳐두라는 것이니 본의 본의아니나 지렁이나 개미를 밟고 못살게 굴 수있는 문제인 것이다.그런걸 갖고 왈가왈부하여 옭아매는 동아줄 논리를 꼬아서 놓지 말라는 것이다。善하다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거짓 가면을 쓴 아주 사악질로 물들이고자 하는 자의 황폐화 시키고자 하는 자의 괴뢰노릇이 된다는 것이다. ○ 諸相을 相이、相이 아닌걸로 봐야 醉醒覺을 본다함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편가름 편견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일 것이니 네생각만 아니니 네생각 같음만 아니니 편가름 편견을 지음 다양한 양상속에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것이다。편당 편견 아니 지음 無斜側 無流 亭醒覺(※ 막힘없는 공허각일 수도 이 또한 흐르는 생각이 그린 편견해일 뿐이다)의 현상을 보게되어 그 속에 들어간다는뜻일 것이다。이를테면 한 편을 든다면 이것은 색상 등 因識處心器에 와닿는 육감相을 갖고 論하는 것이 아니라 外部에서 들여받힌 육감에 의하던 마음이 그린 생각에 의하던 心上에서 抵觸받아 일어나는 想念相의 相을 갖고 말하는 것이니 즉 선입견의 의미와 같은 선입상의 상념상을 떨쳐내버려야지만(벗어나야지만) 취성상을 본다는 것이다. 의례껏 그러하거니 하는 상념은 지레짐작 망상 억측을 낳아 그 아닌 것도 그 인 것처럼 틀리는 관점을 갖게되고 그 선입상 자체에 포로가 되어 (언제도 그러했었는데 지금 또 그럴것이다는 식의) 선입상은 마상각의 허울이 되어 그 이끄는대로 하자는대로 움직이는 괴뢰 노복이 된다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심신황폐化는 물론 수족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일일이 선입상에게 물어보게 된다는 것임) 모든 것이 魔覺相이 되어 나타나 그에 依持 마각상더러 장님붙들고 다니는 것처럼 길잡이 노릇을 시키게 한다는 것이다. 즉 잡힌 먹이신세가 되어 그 하자는 대로 할 것임에 脫果成就커녕 나락지옥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다가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다. 지옥은 답답갑갑하게하는 닫히고 갇힌 마음속에 있다. 즉 해탈하여 나라는 존재를 크게 하는게 아니고 (※ 이는 器虛관점) 敗함、도태당해 自我라는 존재를 무의미하게 망가트린다는 것이다(이 또한 편견이다. 일체 선입견이 마각상이라 매도할 순 없으나 先覺如來인체 깨침을주고자 하는 것들이 마각상을 일으키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분을 左右하게시리 인식받은 것의 나타난 相을 말하는 것이니 氣의 흐름을 順逆左右한다는 것은 생명체 및 森羅象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할 것이다。氣라하는 것은 그 體性象 氣家=氣를 싸고도는 몸틀 氣가 싸고 또는 塊體에 대하여 引導者 引率者 개념의 허울상 노릇도 하게 됨인 것이다.리듬파장과도 많은 연관관계가 있다할 것이다. 氣가 어떠한 몸틀이나 생명체의 신진대사에 대하여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영향을 줘그 指向하는 方向을 틀려 돌게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포로코자하는 벌려놓는 先人相 現相허울에서 벗어날렴 선입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개의치말라、 무시하라고만 하는게 아니고 이렇게 됨 否定선입상이 끈질기게 따라붙게되므로 반대개념으로 後覺을 好感쪽으로 방향을 잡아 그리면 선입상각이란게 되려 갈마들어 포로 용해되어 아름답게 된다는 것이다。이것이 빈도가 잦아 머리에 깊이 박히다 하면 일체의 마각상의 선입상은 용해 소멸되고 취성각만 가득하게 된다는 뜻이다. 선입견상 마각상이란? 일체의 꺼림직하다 인식받은 것 금기사항 등을 말하는 것 중에 많으니 이를 때려부셔라는 것이다。무엇이던 마음에 와닿는 것을 갖고 판별하는 것인데 기분나쁘다 썩죽는다는 생각을 먼저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그 추종하는 것이 되어 마각상의 허울家를 일으켜 짓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이와의 전도개념 그런 것은 되려「어떻게- 어떻게 해서 오히려 좋다는 관념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됨 처음엔 조그만 반발상 사건이 나타날지 몰라도 계속 끌어당기면 그 관념을 갖은 대로 이끌려온다는 것이다. ※ 접촉사고가 있었다면 양보할 만한 사항이던 아니 조그만치 희생이 따르더라도 지면 썩죽는다.서로가 핏대올려 드잡이질 치지말고 나의 큰 그릇에 담았다는 뜻으로 한발 양보하라는 것이다。괜히 시간끌어 여럿에게나 피해주고 법이 개입하게 하여 마각상이 이끄는대로 곤란함 당하지말고 이런 뜻이다。지면 썩죽는다(運勢패퇴한다는 소리겠지…) 기분잡친다는 선입 마각상을 일으키니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영향을 받아 리듬파장 신진대사 등이 마상각을 일으킨대로 (그렇게 될 것을 요구한 것이나 진배없음으로) 댈 수밖에 더 있겠는가? 뱀이 길을 가로질러간다。막는다。여자가 질러간다。 나쁘다。화로에 머리카락 태우지말라。어떻게 될 것이다 등 마각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一言해서 非語표현일런지 모르지만 찜찜한 대접 찜찜하고 더럽다 저질스럽다 불쾌하다는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내- 부처님 가시는 길을 神들이 물뿌리고 쓸어 길을 연다。여겨라! 부처님 또한 육감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고 소쇄 또한 그러하니 心에 와닿는 行如來임일 뿐인 것이다. 밤길에 산쪽에서 무엇이 내민다 여기지 말고 나를 든든하게 붙들어 주는 자애스런 무형에 어머니품이 끌어안듯 한다 여겨라 심기 뒤틀린 시어머니 착한 며느리에게 원인불명한 마음의 병되는 쓰잘데 없는 금기사항 많이 늘어놓는 듯한 형태를 모두 때려부셔라。합리화시키고 궁리변재를 잘하여 용해 美化관점으로 돌려놓길 즐기라。그렇게 됨 극락을 발을 띄지 않아도 보리라. 성자 말하길 年年月月日日時時가 모두가 좋다하였으니 그런 마음가짐이면 業事行인들 공간 터닦는 곳인들 또한 좋다하지 않을 것인가? 이상의 말씀 또한 편견이요 魔脚想이요 그렇게 여기는 빈도가 잦아 습성되면 선입견이 되어 그 인솔자가 이끄는 대로 딸려가게되는 선입관상이 된다는 것이니 일체 것이 사로잡 는 유혹상이 된다는 것이다。마각으로 보느냐 취성각으로 보느냐는 저쪽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이쪽의 심량척(마음먹기=재기)에 있다할 것이다. ○ 原因이 하나가 아닌걸 하나로 貫一코자 하는 건 소견 좁은 자의 관점이란 뜻이요 소견 좁은 자의 얽메인 事란 뜻이다。諸物事의 그냥 이대로 있는 상태를 인정하라는 것이니 밥그릇에 오곡밥이 담겨있어 저곡식마다의 특성을 주입시켜 감칠맛이 돌거늘 왜! 콩만 아니냐? 왜! 팥만 아니냐? 왜! 수수만 아니냐? 애성에 받쳐 할게 아니라는 뜻이다。그 一色一合相을 바라는게 徒是 可笑로운 일이요 될 법한 일이 아니란 것이니 왜냐하면 어느 한 가지만의 원인에 의해 삼라우주가 존재하는 건 아니란 뜻이다.원인이 같지 않으니 그 피어난 모습과 결실이 여러 양상을 띄게 되는 것이다。또 누가 강조하길 미련을 놓지 않듯「그래도…」를 찾는데 그것은 제(自) 내세우는 고집이요 그「그래도 원인 ㅡ이라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지나놓고 보면 부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자기생각을 관철하겠다는게「그래도……」이다. ○ 了達因知(요달인지) 시켜 준것은 무엇이던 先達(先發開覺者=선발개각자) 菩薩(보살) 觀點(관점)이라는 것이니 설령 그것이 斜側(사측)된 것이라던가 不淨視(똥)하는 것이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니 (왜냐? 그렇다함을 인식시켜준 앞장선 선달 性體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거룩하고 훌륭한 것이라는 것이며 一切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顚倒된 因識이라는 것 (잘못알고 있다는 것)이니 말하자면 옳은 것은 그른 것이요 그른 것은 옳은 것이라는(象人平常人의 관점과 相反하는 관점 常人의 관점은 先入邪魔 見으로 몰아 붙치는 관점)것이다. 옳은 것은 요달관점으로만 보지 않고 왜! 그른 것이라 하는가?(물론 그른 것도 마찬가지 유추방식에 해당한다 할 것이니 그럴듯한 빙자의 條理를 규합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저가 옳은 것이라 하여 그렇게 因知시키는 사로잡는 유혹의 성격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요 그러함으로 인해 저만이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實相은 진실성없는 虛僞性質激體라는 것이다. 즉 제반 옳다하는게 실상은 옳은 것 없다에 도달게 된다할 것이다。(※ 이것이 전도되면 옳은 것은 그렇게 느끼는 자를 옳은 면으로 인지시켜주고 引導하니 올른것으로써 훌륭하고 거룩한 것이다가 된다) 以上의 말들이 또한 自 비뚤어진 속심을 보이는 편견이란 것이다. 此世界가 三次元의 世界라 하나 無爲形容(어떻게 그릴 수 없는 어느 한 가지로만 성립원인이라고 지칭할 수 없는 또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에 의한 형성된 空化(時空間) 현상이므로 그 어느 방면으로던간 끝을 볼 수 없어서 확증적인 數나 모양을 (그것이라 하고 들여) 댈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삼차원이라 하나 三이란 數가 아니며 三의 양단을 말하는 六合이 六數가 아닌 것이니 즉 以 아니고 不分明한것이라 억측을 재라는 의미에서 五하고 四分度之一餘三初라 하는 것이요(※ 또 물에 비기는 건 그 이론이 단단치 못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위험한 발상이지만 그렇게 땅덩어리가 운행하는 것이라) 그를 보충하여 완성시키는 數인 四二七이 四二七만이 爲行의 數가 아니요 그보다 못한 수나 그 없는 수나 넘치는 數도 될 수 있으니 덜되어 落果하는 것있고 농익어 낙과하는 것 있는 것이다. 딱ᆢ 들어맞으면 적멸정지니((爲行(보살=다양성으로 표현할 수 있음)이 아니라 되려 사이칠(부족한걸 채워준다는 의미의 뜻을 數로 표현한 數)이 害코자 하는 수가 될 수 있음이라))이니 운행치 않기 때문이다。爲行位가 운행치 않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될 수도 있는지 모르지만 제삼라의 탈파를 指向 염원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그러므로 모든 數가 因果관계와 의미投合할 땐 爲行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爲行成就數가 四二七의 의미를 취한다는 것이지 그 爲行을 實行하는 位致에 있는자가 사이칠의 수로만 이루어진 性 體가 아닌 것이니 그 性分質量 體相은 完不完을 논할 것없는 위치이니 諸(法)相 모두 상호 그 爲行作用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凡夫(보통 여러사람=(※ 번뇌망상에 얽메여 생사를 초월치 못한 사람)보통사람들의 평소견해들은 傳來의 習(濕) 得한 대로 알고 믿게 되어 그것이 관행 경우 준칙이 되어 그 틀속에 있으면서 그 維持를 힘써 한다 설령 파격적인 例外가 있더라도 그것 역시 한쪽으로 달리는 馬에 채찍을 더하는 것일 뿐이다。집단사회나 가정에 여러 틀에 박힌 질서모습 즉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일어나는 생각지음과 그에의한 질서를 잡기위한 고정관념으로 정해진 行爲事들을 正見이란것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도 될까만은 석류에 있길 세속적 균형을 좋아하는 범부가 一合相을 탐하여 집착한다 하였는데 지금 필자가 쓰는글 내용들이 모다 空이라하곤(空은 一合相이 아닌데=지금 생각이 그렇게 기울겨져 있다는 것이다。조금合相에 맞춰보려고 애쓰는 모양이라 空과는 가당찮고合相이라 할진모른다) 어떻게든 있다가 空은合相門에도 들지 못해 허덕거리는 꼴이라 아직 까마득해 멀었다는 것 아닌가? 그 아직 까마득해 하는見의 허울을 일시에 벗을 수는 없을까? 이 허울을 벗어야지만 一合相을 지나 空에 든다는지도 모르겠다.범(凡)의 音域은 우리 나라 말 중엔 호랑이를 뜻함도 있다。이 호랑이 같은 사내가 우직하긴 해도 먹이있음 날쌔게 채듯 사나운 용기있으니 이것 저것 잴 것 없이 결단내어 그 울테를 부숴버리고 튀어나오듯 벗어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공교롭게도 필자는 寅字(支支로 호랑이란 의미가 있음)에 의해 많은 영향을받으니 본의는 아니나 가까히 하게 됨이다。이름도 寅字가 있고 사주 에도 寅字가 있고 석굴에 들어가기도 寅年이요 혼인도 寅넌 寅월 寅 일에 하였고 금년 또한 寅년이다。남들은 이 寅字가 귀신 갓 쓰고(또는 집안에서) 활개치는 相이라해서 拂亂이 끊일새 없다하여 쓰지 않는다하나 조상님께서 명자에 그렇게 붙여주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또한 나의 일이 귀신이 사람이란 허울을 쓰던 입던 해 가지곤 제멋에겨워 활개치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 언제적인가 아주 육십년이 넘은 옛적에 아주 용한 무녀가 굿할적 하는 말이 나에게만 알아듣게 속삭이듯 "이 공자야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성황에ㆍ혼자 가서 기도하여라" 그래서 외진 곳 산위 성황에 가선 시키는대로 해주었다 왜냐 내가 들었기 때문에 어느 신이 원하던간 들어ㆍ줘야 할것 같아서였다 * 책겉장 표지글 ○ 당신은이글을 읽지 말라!머리가 깨트려질 것이다.이글은 철학의 根本由來를밝히고자 한 글이다. 머리속에 폭탄을 터트린 것 같으리니 정신은 파괴되어 혼비백산하고 기존의 일체 논리가 뒤집어진다.그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일체의 여지껏 그렇게 여겼던 사상은 배가 사공을 잃은 것 같이 될 것이다. 여지껏 각인받았던 고정관념은 무너지고 구태의연한 가치관은 전복된다. 기존의 建立된 家를 때려부숴버리지 않으면 옭가드는 종의 굴레를 벗지 못하리라 새로운 理相世界의 桃戰은 發想의 轉換으로부터이다.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理念의 개세적이고 혁명적인 大道는 이책으로부터이리니. 한마디로 말해 그대의 머리를 박살낸다.그대는 이글을 읽지 말라!머리가 둔탁해질 것이다. * 三, 무우 밑둥맛 어느해 가을 또래 아이들과 길을 가다 길가의 밭에 다 성장한 무우를 뽑아 먹길 하였는데 한 아이가 무우를 발로 차서 밖으로 튀어 나온 푸른 부분만 부려트려 먹으려 하면서「땅 밖으로 나온 머리부분만 달지 밑둥은 맛이 없어」한다。또한 아이가 말하길「야」거 아깝게시리 왜 허실해 버리냐? 다 뽑아 먹어야지」한다. 무우를 그렇게 해서 먹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윗부분은 달착지근하고 밑둥은 약간 매운 듯하면서 싱겁다。이처럼 통채로 다 먹어 보지 않으면 밑부분의 맛을 알 수 없으니 맛이 어떤가 하고 대박 궁금할 것 아닌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要指(요지)는 아무리 그 끝을 잘 맞춘다 하더라도 그 근본이 뒤틀어져 있다면 또는 근본을 잘 모른다면 늘상 미심쩍은 마음이 가시지 않고 무슨 찌꺼기 같은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 심이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근본이 확실치 않으면 어떠한 주체이던간 미신적인 것 맹목적인 것에 메어 달리고 추종하는 것이 된다 할 것이다. 소위 쇠뇌당하는 가운데 근본이 생성되고 주체가 형성되면 이것은 정(허) 공중에 뜬 삿된끝(사탄 마군이)을 이뤄 그에 조종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이런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음으로 나날이 헛된 곳에 안일무사 요행을 비는 거와 같고 영속성을 띄어 불멸하는 섭리와는 거리가 멀다할 것이다。내가 말하는 섭리는 어떠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흐름이라던가 머무름이라던가 하는 것 따위에서 그 의미를 잠깐 따온 것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 근본은 理治(리치)가 根木이다. * 아 무 러 크 소 니 1. 思想斗 哲學 2. 錯覺 誤謬 3. 精神의 難脈象 4. 煩惱妄想 5. 葛藤現相 * 머리 말 하인(何人)이 회령(檜嶺) 양지록(陽地麓) 짐박골에 살고 있었는데 그 삶의 소박하기가 이러하였다。먹기는 채근(菜根)과 산전(山田)을 일구어 콩、감자、서석、 수수 등을 갈아 먹고 居處하기는 석칸 흙이겨 돌담쌓고 억새이엉해 덮은 그런 집에서 하고 골짜기샘은 웅덩이 파서 앙금 가라앉혀 맑은 물 되면 쪽박 떠서 마셨다。일 없어 무 소일할 땐 낮에는 목류(木類)하고 벗하고 밤에는 두(杜)류와 이름모를 풀벌레소릴 벗하며 때로는 바람불러 갈대흔들어 그 서걱거리는 소리를 즐겨 들으며 겨울이면 설상에 반야월광(半夜月光)이 파사하게 너울거리면 같이 놀았으며 나무에 설화피어 결정지어 맑개 얼면 바람곁에 그 맑은선율이 흐르는 걸 즐거워하였다。 때는 춘분 청명절이라 골 어귀 여울또락 고인물에 금와란부화(錦蛙卵解化)하니 이른 새벽부터 소쟁기하여 운중경작(雲中耕作)을 하고 있었다. 소모는 경작소리에 이끌려 왔는지 인기척이 있길래 뒤돌아보니 웬행객(行客)이 와 있었다。그 차린 행색을 보니 하도 이상하고 어이가 없어 한참 동안이나 말문이 막히었 으니 행색차림이 다음과 같았다。머리는 천년(千年) 동안이나 물구경을 못했는지 덕지덕지 낀 먼지 짚쑤성이 봉두난발이요、눈은 어떻게나 깊은지 중국서 만리 더 들어가 심해(深海)에서도 찾을 길 없고, 코는 천년(千年) 두고 흐르는 여울물이 내라하고 꿋꿋히 서 있는 절벽 밑을 파먹은 듯 없어져 뻥 뚤린 구멍이요. 입은 황희정승의 딸 시집보내는데 겉 옷감으로 보냈는지 입술은 없고、누렇게 드러난 치아만 천년(千年) 동안 생긴 굴 속 돌고드름 같았다。그 걸친 덥석을 보니 아침 이슬을 맞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낡은 거적때기가 흡사 외양간뒷켠에 비바람막이로 십 년 동안 놓아둔 바래다 못해 너덜거리는 짚멍석조각 같았고 그 발을 보니 살피듬은 말라비틀다 못해 북어포되어 갔는지 없는 것 같고 뼈골이 앙상하게 튀어 나오기가 고주박 솔광솔을 쪼개는 것 같았다。여러사람이 보면 氣唵(=기암=놀래어 얼굴색이 흑빛이 될 정도라는 뜻이다)을 하고 넘어질 것이나 하인(何人)은 원체나 두려움이 없는지라 객(客)을 대하고 말을 붙였다. 「객은 뉘신데 어쩐 일로 여기 오셨소。」하니까 답하는 소리가 귀령곡(鬼靈谷)에서 나는 소리와 같음인지라「여기가 짐박골이요。」되물어옴에 하인(何人)이 되대답하길「그렇소, 여기가 짐박골이요. 뭣하러 짐박골은 찻소。」함에 객왈「저 아랫마을 사람들이 아침이슬 마르기 전에 짐박골에 가면 眞人이 있어 내 찾을 곳을 알려 준다 하기에 허겁지겁 예까지 왔소.산천경계가 기이하게 변하여 예전에 내 있던 백단목곡 (白檀木谷 자장나무골)이 어딘지 몰라서 그 가는 길을 물으려 한다오。도대체 어디로 가야만 거기갑니까?」하인(何人)이 답하여 말하길 산천이 하도나 지어서 범이 새끼칠 판인데 새삼스럽게 거긴 뭣하러 갈려 하오 이리 넝쿨 헤치고 가도 되고 저 듬성거리는 바위들을 타넘어 저리 가도 되니 행자(行者) 요량대로 하시오 함에 행객(行客)이 묻지도 않는 말을 하길 누가 말하길 거기 가면 연영주 월방장 금봉래는 높아도 낮아서 보이질 않고 다만 멀리 길만 거느린 산(山)만 타는 촛대처럼 보인다오。」「丁좌로 집을 짓고 천년만년 살 다보면 삼선이 부럽잖다 하니 그리로 찾아갈라 하는 증이요 하곤 운무가 걷히기 전 홀연히 사라져갔다 하인(何人)이 생각하길 내가 허깨비에게 홀렸었나 별 위인 다보겠네。아침부터 상쾌치 못하게시리… 그렇지만 내뭐이 잘못대하였나 아는 대로(바로 알든 비뚤게 알든 알려주고 서로 담소 나누었을 뿐이지… 꿈에신언(神言)이 있어 말을 하길 전설에 의하면 임해지간에 길이 있다 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인가? 하면서 대로(大路)가 앞으로 내닥쳤다。글을 (되구말구=아무렇게나) 써 놓곤 막상 머리말을 할 게 없어 이글로 머리말을 대신할까 한다. 무인 무시절(戊寅 戊時節)에 이해허무척(以海虛無尺) (망상(妄想)을 내쫓는 데는 아무렇게나 한다는뜻)은 모치(帽址)하고 제(諸)거룩한 모든 이에게 머리숙여 절 올리는 바이다. ***** 이로써 아무러크소니 대단원에 막을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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