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방울 이 잉크가 내 마지막 피라면
피를 찍고 살을 에도 쓰지 못할 편지라면
이 편지 수신인이 없어 저 허공이 답신이라면
라면은 퉁퉁 불어 목젖 컹컹 붓는데
라면은 뚝뚝 져서 눈물 훅훅 지는데
라면은 길 아닌 길을 구불구불 가는데
시외버스정류장
낡은 엔진 소리와 찌든 기름 냄새가
단물 빠진 껌 대신 찌걱찌걱 씹히던 곳
목 졸린 청춘의 도막들 함부로 뱉었던 곳
떠나지 못한 죄는 압수된 채 눌어붙어
컴컴하던 물증도 이젠 환히 늙었으니
후, 불면 날아 가버릴 다 저문 알리바이
좋아서 좋은 것들
써도 좋고 안 써도 좋은 글 몇 줄 끄적이는
들어도 좋고 안 들어도 좋은 음악을 듣는
잊어도 안 잊어도 좋은 먼 이름을 지우는
무심천
그냥 거기 있었네 무심하게 있었네
흐르는 듯 머무는 듯 있는 듯 없는 듯
뜻 없이 우연한 것들 시름없이 속없이
경상도도 아니고 전라도도 아닌 곳
늦가을 빈 소쿠리의 사투리 몇 개 같은
몇 걸음 뒤에 와서도 바쁘지 않을 충청도에
먼 어디 닿아도 좋고 안 닿아도 좋겠네
말라버린 물비린내 같은 몇 잎의 사연
이제는 놓아보내려네 저 느린 무심에
- 시집 『빈』 작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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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숙희 시인 시집 『빈』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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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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