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집은 안테나문제로 인해 SBS가 안나옵니다. 그래서 보고싶은 경기가 있어도 집에서 편하게 보지 못하고 클럽과 교회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여건이 안되는 날은 북한 vs 브라질이나 일본 vs 네덜란드처럼 보는 것을 희생해야하는 경기도 있었습니다.
구글에서 보니 한국과 나이지리아가 SBS Two에서 4시30분에 방송된다는 것을 알고 일단 계산을 해봤습니다. 한국과 호주경기가 있는 날은 항상 고기를 구워먹었기에 제비추리를 사서 구워먹은뒤 일을 갈때는 기차가 아닌 운전해서 갔는데 도착하니 대략 6시30분 정도. 지금 일을 시작해서 집에 돌아가도 영 자기도 그렇고 어중간한 시간이라 미리 차안에서 자두기로 했습니다. 일어나보니 시간은 11시. 네시간 반을 잤으니 이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고 새벽 3시30분에 일을 끝냈습니다. 집에 가니 4시10분 정도였고 사과 두개를 먹은뒤 클럽에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 가는 것이지만 한국경기니까 한국사람도 있을거라 생각하고 갔는데...
그리스사람들이 모여있는 와중에 나오는 화면에서는 그리스와 아르헨티나 경기가 막 시작되려 하고있었습니다. 잠시 벙찐 저는 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SBS Two는 방송안합니까?"
"안그래도 궁금한데 도대체 SBS One하고 Two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네요."
"...;;;"
그때 바에 앉아있던 직원이 말했습니다.
"SBS Two는 연결이 안되서 안나옵니다."
"난 Two에서 하는 한국경기보려고 왔는데;;;"
"걍 두시간 늦어도 One에서 봐요. 뭘 그리 엄격하게 따지시나?"
"..."
안그래도 새벽에 하는 경기라 한국사람들 중에서도 보는 사람이 얼마 없었고 더욱이 SBS Two를 연결한 집들도 얼마 없는데다 두시간 지난 경기는 신선함(?)이 떨어진다며 안보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난 상태였습니다. 이제와서 자고있을 다른 친구들 집에 가는 것도 그렇고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그대로 두시간 지난 경기를 보기로 했지요. 지금와서 집에 가서 자고오기도 어물쩡했기 때문에 그동안 그리스 대 아르헨티나 경기를 보기로 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자 방어일변도로 나가는 그리스의 전술이 보이더군요. 이건 흡사 북한이 브라질에 써먹었다는 그 전술? 사마라스를 제외한 전원이 수비에 나섰더군요.
보는 중에 저를 괴롭힌건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소리였습니다. 제비추리 이후 사과 두개 외에 아무것도 안먹었기에 허기를 참지못한 저는 오렌지주스를 한컵을 시켜서 먹었지만 곧 전반전 끝나고 판매기에서 초콜릿 한봉지를 빼먹었습니다.
후반전 시작된 후에도 지루하게 골이 안나오다가(그리스 골키퍼가 대단해보이는ㅜㅜ) 사마라스가 간간히 찔러주고(그럴때마다 사람들이 벌떡 일어섰다가 곧 실망해서 도로 앉아버리고;;) 드디어 76분만에 골이 나왔는데 여기저기서 욕이 나오더군요. 핸드볼인데 왜 심판이 가만 있냐느니 해리 큐얼은 퇴장당했다느니 하는데 뒤에서 직원이 소리쳤습니다.
"욕하지 마세요! 클럽규정에 뭐라고 나와있습니까?"
직원의 말에 욕은 잦아들었지만 제앞에 있던 그리스 할아버지들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하더군요. 그리스말로 뭐라고 거칠게 뭐라고 말하는데 아마 욕같습니다^^;;;
그때 제귀가 솔깃하게 만드는 말을 누군가 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어떻게 된거야?"
"2대2라는데?"
헉! 한국과 나이지리아가 2대2? 그걸 생방송으로 보지 못하다니OTL
팔레르모에 의해 한골이 더 들어가자 몇명은 일어나서 나가더군요. 화면 가까이 앉아있던 영어를 쓰는 아마 이민 2,3세대쯤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은 낄낄대며 농담하거나 잡담을 했고(다 포기한듯?) 제 앞의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열받아있고... 경기를 보면서 느끼는건데 '나도 골넣고싶어~!'라고 외치는 메시의 절규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싶었습니다-.- 한국과의 경기때도 잘 몰랐는데 그리스와의 경기를 보니 왜 메시가 뛰어난 선수인지 감이 오더군요. 후덜덜한 경기력을 발휘하며 슛을 날렸지만 이번 경기에서도 결국 한골도 못넣습니다-.-
드디어 경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썰물빠지듯 나가버리고 저만 덩그러니 남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화면들을 끄는게 아닙니까?
"다음경기는 방송안하나요?"
"다음경기라니요. 어차피 지난거 다시 방송해주는거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제가 볼건데;;;"
"우리도 좀 편합시다. 한명 보자고 계속 여기있습니까?"
결국 저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클럽을 나왔습니다ㅠㅠ 생방송은 포기해도 지난방송이라도 볼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볼 수 없단 말입니까?ㅠㅠ
힘없이 집으로 걸어가는데 도중에 있는 카페 하나가 열려있고 벽면에 설치되어있는 대형화면에서 SBS가 나오고 있더군요0_0 남자 두명이 기다리는 중에 티비를 보고있었습니다. 티비 맞은 편에는 소파까지!!!
얼른 들어가 감동에 젖어 잠시 화면을 보고있는데 카페주인이 뭐 시킬거냐고 묻더군요. 그냥 들어가 앉아서 티비만 보기도 뭣하고 그래서 핫 초콜릿을 시켜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쓰레기통을 내놓는 날이라 안내놓은게 자꾸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거 집에 가서 내놓고 왔다간 경기하는거 몇분 못볼텐데 하면서 잠시 안절부절 못하다가 차라리 몇분 안보고 일주일을 편하게 지내자라고 생각하며 카페에서 나오면거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이거 혹시 끌겁니까?"
"나도 봅니다. 이 경기 끝나면 끌거에요."
"저 몇분뒤에 돌아올게요."
얼른 집에 가서 쓰레기통을 내놓고 오니 경기가 시작된지 5분정도 지났더군요. 암튼 얼마 안지난 것에 안도하며아직 0대0인 것을 확인하고 소파에 앉아 경기를 시청했습니다.
출근시간이 되서 그런지 사람들이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커피 기다리는 동안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근데 대화의 주제가 월드컵이었고 바로 전에 했던 아르헨티나와 그리스 사이의 경기더군요. 76분만에 골이 나왔다느니 2대0으로 아르헨티나가 이겼다느니 그리스가 너무 방어적으로 나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주인이 손님이 물어볼때마다 한 다섯번은 반복한 것 같습니다-.-
전반전이 끝났는데 주스와 초콜릿으로 만족하지 못한 배가 다시 꼬르륵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계란과 베이컨 롤을 주문한 뒤 클럽에서 들은대로 2대2로 끝나는 것을 다 봤습니다. 김남일의 파울로 인한 페널티 킥 먹은건 정말 아깝더군요;;
경기가 끝나자 접시를 카운터에 돌려주고 돈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저게 있어서 다행이네요. 저거덕분에 내가 이렇게 들어와서 이것들을 산거 아니에요?"
"그걸 노리고 설치한거지, 후후훗-_-+++"
비록 생방송은 아니어도 경기를 본것에 만족했지만 아쉬운 것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같이 보는 사람이 있으면 골이 들어갔을때 와하면서 소리라도 지를텐데 혼자보니 골들어가도 어 골넣었구나 이러면서 그냥 조용히 보게 되더군요;; 일찍 하는 한국전은 그래도 교회에서 큰 화면으로 틀어주고 아는 사람들과 같이 보니 같이 응원도 하고 소리도 지르면서 신나게 봤지만 늦게하는 경기들은 이런식으로 쓸쓸하게 봐야만 하니;;; 아쉽지만 계속 이런식으로 봐야겠지요?ㅠㅠ
첫댓글 정말 열성적이시네요.
눙물이 앞을 가리네요. TV에 나오는 것처럼 해외의 교민들도 다들 한자리에 모여 재밌게 시청하는 줄 알았는데..-_ㅠ
외국에서 월드컵 보는 맛도 또 다르더라구요....남들 다 자는 시간대에 한국사람들끼리 한인식당에 모여 TV로 경기보는데 ㅋㅋㅋㅋ
암튼 재밌어서 다해이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