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다면 지금의 속박도 벗어나고 나라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영(친)왕]
1927년. 영친왕을 상해 임시정부로 모셔 가려했던 그 계획을 아십니까?
우리는 대한제국 황족의 독립운동 관련하여 많이 들어봤던 사실로 의(친)왕의 대동단 사건을 종종 떠올립니다.
1919년 11월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고자 했던 고종황제의 아들 '의(친)왕' 의 대동단 사건을 말이지요. 의왕께서 대동단 단원들과 함께 상복으로 변복하고 탈출하다가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던 사건인데 이는 황실이 일제의 억압에 그대로 눌려 있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제에 저항했던 상징의 표본으로 늘 언급되는 사건입니다.
1910년 강제로 일제에 병탄되어 대한제국이 문을 닫은 후 중국에 망명한 지사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를 세울 궁리를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등은 신한혁명당을 만들고 민족을 구심시키려면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받들어야 한다고 보고 당의 외교부장인 '성낙형'을 국내에 침투시켰으나 활동중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고종황제의 망명계획은 은밀히 추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전 발굴된 제정 러시아의 극비문서에는 이러한 고종황제의 망명 움직임이 그들 정보통에 의해 포착되어 기록된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종황제가 아니더라도 왕의 누군가를 받들어 민족 구심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특색이었습니다. 그 두번째 시도가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요 순종황제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옹립하려던 대동단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의(친)왕의 동생인 황태자 영(친)왕도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할 뻔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은 이 내용을 포함하여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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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습기가 가득찬 이국땅 국제도시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1945)가 세워져 이 사실을 국내외에 선포한 것은 1919년 4월13일의 일입니다.
1919년 3·1운동은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임시정부라는 하나의 운동조직 아래 결속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인데 그 3,1운동은 바로 고종황제의 붕어로 촉발된 사건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당시 독립운동을 꾀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 고종황제의 붕어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우리민족의 모든 구심점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던 분이 고종황제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황태자인 '영친왕'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있었던 상황이었고 의친왕 마저 그해 11월 대동단 사건을 통해 압송되어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상황이었으니 달리 돌파구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3.1 운동이후 국내외적으로 임시정부임을 자처하고 조직되었거나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여러 곳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조직된 것으로는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7년에 조직된 全露韓族會中央總會가 명칭을 바꾸어 1919년 3월 17일 생겨난 노령의 대한국민회의 정부,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 등이 있었습니다. 이 이외에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평안도의 신한민국임시정부 등이 설립을 준비중이었습니다.
이들은 1919년 9월 11일 상해임시정부로 통합이 됩니다.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노령에서 활동하던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역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선출하였던 것이지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대한민국 정부 스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전문에서 천명할 정도로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지니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 시기의 임시정부가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을 망라하고 있었다는 데 기인하고, 국권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 세력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하나의 구심점 아래 집결함으로써 진정한 임시정부로서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던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시정부에 모여 들었던 운동세력들이 흩어지고, 임정의 권위를 부정할 때 그만큼 임시정부의 권위는 손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든 1919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체였습니다.
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내놓은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보면 국호자체가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인 것에서도 드러나지만 제1조에서 민주공화제를 대한민국의 정체로 밝혀 놓고 있습니다. 총 10조로 이루어진 임시헌장의 몇 개조만 살펴보면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舊 皇室)을 우대함 으로 되어 있습니다.
황실은 단지 우대의 대상일 뿐 주권을 소지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대통령제로 개정한 1919년 9월의 임시헌법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임시헌법의 총강 제2조에는 大韓民國의 主權은 大韓人民 전체에 在함라고 밝혀 놓았고 제4조는 大韓民國의 人民은 一切 平等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국권을 회복한 후 건립되는 국가는 민국이며 공화정임을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한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받아 들였다는 것으로, 1910년 합방이 이루어질 당시 한반도의 정치체제는 帝國이었는데 국권을 약탈 당하였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단순히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대한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되어야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합방이 이루어진 후 10년이 안되는 기간동안에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요..
그동안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에 있어 당시에 퍼져있던 민본주의 사상과 서양의 민주주의, 민중의 자각 등을 언급해왔지만 최근에 주장되는 내용을 보면 제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우리나라의 모든 정신 사고의 최절정에 있던 고종황제의 붕어로 인해 그 중심이 사라짐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 많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다만, 황족들이 남아 있기에 그 황족들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과 상실감 또한 그립던 고향을 떠나 중국 상해에 와 있던 동포들의 군왕에 대한 그리움 등을 이러한 조항에 담았지 않았나 하는 것으로 인해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을 넣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영(친)왕 '이은' 은 일본에 7살 때부터 이토오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일본에 건너가 학교를 다녔고 결혼마저도 '민갑완'이라는 규수와 내락이 되어 있던 것을 강제로 파혼하고 일본 황실의 '나시모토왕'의 딸인 이방자(李方子)와 강제로 혼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가 1920년 4월의 일로 임정이 수립된지 1년여가 흐른 시기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정의 '이동녕''이시영''김구''조완구''조소앙' 등이 분을 삼키며 울분을 토했다고 합니다.
그런 후 이들 부부가 강제로 혼인한지 7년만인 1927년 5월23일 구라파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일본측에서 본다면 어짜피 강제병합도 되었고 하니 그리 크게 신경쓸 필요도 없었거니와 위로도 해주고 구라파에는 자기네가 이렇게 병합한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을 잘 돌봐주고 있다는 선전용 의미도 깔려 있었던 셈입니다.
이들 부부는 5월24일 요코하마에서 1만톤급 '하코네마루(箱根丸)'라는 큰 여객선에 몸을 싣게 되었습니다. 여행일정을 보면 인도양을 건너 마르세유에 도착한 후 프랑스, 영국,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 이탈리아, 스위스 등 11개국을 순방하고 귀국하는 1년 예정의 긴 일정이었습니다.
영왕을 따르는 일행은 총7명으로 주치의와 시녀, 시종무관까지 수행원을 딸려 보냈는데 이는 영왕을 위하여 신경을 쓰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실 여기에는 감시자가 붙어있으니 좋은 여행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상해까지는 악명높은 서울 종로경찰서의 '미와' 경부가 따라붙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임시정부의 숨겨진 뒷이야기' [이현희 성신여대 교수 著]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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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공 부부가 승선한 '하코네마루'가 고베항에 도착하였다. 잠시 기착하여 무슨 연락을 하려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창수라는 이왕직 장관이 미리 와서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아첨배이며 철저한 친일파, 부일배였다.
한창수라는 자는 배가 항구에 닿자마자 허겁지겁 숨차게 올라왔다. 이내 이은공 부처를 향해 절을 꾸벅 한 뒤 이방자 보고 피하라는 눈치였다. 그는 일시 자리를 떴다.
" 전하, 급히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하자
"뭔가, 얘기해 보게"
그는 뱀눈같이 가늘게 눈을 뜨고 영친왕 곁으로 바짝 다가와서 귀에다 대고
"전하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김구 조완구 조소앙 등이 전하가 구라파 여행하시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상해에 잠시 기착하면 납치한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자들은 전하를 해칠 무뢰한 폭도들입니다."
이 급작스러운 전갈에 영친왕은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기된 얼굴로 퉁명스럽게
"그거 잘 되었네 그려. 이 기회에 나도 상해 임정에 가담하면 빼앗긴 나라를 속히 찾을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천연덕스럽게 내뱉듯이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 자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벌벌 떨며
"아니될 말씀이옵니다. 전하는 일본당국이 각별히 보고하고 아끼시는 높은 중요한 분이십니다."
"나를 보호하고 아낀다고 흥. 언제부터라더냐"
시쿤둥하면서도 노기에 찬 얼굴로 한창수를 째려 보았다. 한창수는 이왕직 장관에까지 오른 민족 반역자 철저한 친일파였다.
염소같은 수염을 길러 더욱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영친왕은 그를 더욱 멀리한 터였다.
그가 납치당하면 신변히 극히 위험하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하자 영친왕은 들으라는 듯이
"내가 이동녕 김구같은 애국자를 만나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좋겠소" 하고 뇌까렸다.
이 말을 한창수는 즉시 일제 고위 당국자에게 내밀히 보고해 버렸다.
일제 당국은 상해주재 총영사관에 긴급 지령을 내렸다.
"영친왕 일행의 상해 하선을 적극적으로 막아라. 여의치 못해 불상사가 일어나면 총영사관이 전적으로 책임지라"고 불호령을 쳤다.
이 배가 상해 시내를 흐르는 황포강에 도착하면 부부의 하선과 시내 유람을 억제하도록 적극 조치하였던 것이다. 물론 상해 임정 관계자의 접근을 막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엄명인 것이다.
실제로 영친왕 부처가 구라파 여행중 일시 상해에 기착해서 시내도 유람한다는 소식을 접한 임정의 지도자 이동녕 김구 등은 전하 부처를 만날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영친왕을 임정이 모셔다가 대통령으로 삼던가 아니면 고문으로 추대해서 독립운동을 한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임정 확대, 활성화의 계획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동녕 김구 등은 이때 지금의 상해 마당로 306의 4,3층 청사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였다. 주석의 임무를 띠고 있던 이동녕은 "여러 동지들, 얼마있으면 영친왕 부처가 구라파 여행중 잠시 이곳에 들러가신다고 하오. 이 기회에 그 분을 임정청사로 모셔오면 어떻겠소이까. 그래서 오늘 긴급히 모신 것이요."
이때 모두들
"그거야 좋은 일이죠. 그 분을 임정에 가담시키면 그만큼 독립운동에 활기도 띠고 사기도 높아 갈 것입니다. 내외에 청년 동포들도 그 소식을 들으면 앞을 다투어 가면서 이곳으로 몰려오지 않겠소" 라고 이구동성으로 대 환영하였다. 옆에 있던 조완구는
"나는 그 전부터 우리 헌법에 구황실을 우대하자는 조항을 넣자고 했지 않소이까. 그러니까 이번 기회가 아주 절호의 그 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꼭 모시도록 합시다"
이렇게 해서 영친왕 부처의 '임정 유치론'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 석오를 못보고 가오" <- 이동녕의 호가 '석오'임
영친왕 부처가 탄 배가 상해의 상징인 흙탕물의 황포강 부두에 도착한 것은 그 해 5월30일이었다. 일본 요코하마 항구를 떠난 지 1주일만의 일이었다.
이곳에 마침 대기중이던 견외(遣外)함대 사령관 '아라기'소장과 야다 상해 총영사가 황급히 배안으로 들어와 영친왕을 찾았다. 일본 총영사관은 소주하와 황포강이 맞닿는 백도교(가는 브릿지)근처에 자리하였다. 상해의 임정이 활동하는 것을 감시 통제하기 위하여 그에 맞추어 설치한 것이다. 바로 총영사관 앞에 영친왕이 탄 배를 정박시키고 감시하려는 흉계 때문에 그런 발상이 일어난 것이다.
"전하, 여기가 상해 황포강 부둣가입니다. 절대로 내려서는 아니됩니다. 조선의 가 정부(임시정부) 부랑배 폭도가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전하를 납치해서 위해를 가하거나 돈을 뜯으려는 고약한 생각을 굳히고 있는 깡패들입니다." 라고 꼼짝 못하게 하였다.
영친왕은 "차라리 고생하는 우리 임정의 독립투사들이 부럽구나. 그들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새장에 갇힌 새의 신세가 되었으니 이 어인 낭패인고.." "석오를 못보고 가오" 눈물을 글썽이며 장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임시정부이 요인 이동녕 김구 등은 프랑스 조계가 맞닿는 황포강까지 나와 멀리 총영사관 쪽에 떠 있는 하코네마루 선박을 조용히 응시하며 우수에 잠겼다. 어떤 지도자는 땅에 엎드려
"전하, 저희들은 열심히 싸울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마 성원해 주시고 격려하시길 빌겠습니다." 라고 차라리 울부짖음과도 같은 처량한 목소리가 넘실대는 진흙탕의 황포강 깊숙이까지 들리는 듯 싶었다. 때마침 황포강에는 굵은 빗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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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망명실패와 의친왕의 상해 임시정부 합류 실패에 이어 벌어진 영친왕 상해임시정부 모시기 실패등은 정말 땅을 칠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의 황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새장의 새처럼 갇혀서 어떠할 일도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황실의 제대로 된 모습을 이제는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라파에 가서도 그 나라 왕실을 찾아가 국왕과 왕족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자랑스런 대한제국의 황태자 임을 떳떳히 밝혔던 영친왕의 참 모습을 이제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내용은 이현희 성신여대 교수의 '임시정부의 숨겨진 뒷이야기', 김을한의 '인간 이은', '강용자의 '왕조의 후예', 혼다세스코의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 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채용하여 기술하였음을 밝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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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글에 대한 저의 반문]
그래도 순종황제 붕어후 실질적인 조선의 주인인데... 지도자로서의 치밀함과 군주로서의 담대함이나 결단성이 없는것이..
영친왕께서는 그릇이 작은 인물이셨나 보군요.. 복수를 두려워 하기보다 망명하여, 국제여론이나 각처에 뿔뿔이 흩어진 독립운동가들을 한대 모아 조선이 자주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수 있는데.. 스스로 기회를 놓쳤군요.. 소시적부터 일본에서 교육받은것이 황제로서의 자질보다는 소시민적 나약함만 키워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영왕이 망명했다고 국민들을 이유없이 학살했겠읍니까? 좀 세게 조이고 괴롭히겠죠.. 일찌기 망명하여 구라파를 돌며.. 조선의 주인이 존재하고 우리망명정부의 정통성을 크게 부각만 시켜 줬어도.. 아무리 전후 미국에 의해 광복이 된다한들.. 조선을 단지 점령지로서 생각은 안했을겁니다.. 국제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는 망명정부가 있다면, 같은 연합국으로 대우하여 해방지역으로 분류가 돼었을겁니다.. [프랑스 드골의 망명정부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미,소의 지역분할이 없었을테고.. 망명정부는 자연스럽게 입성하여, 이땅을 온존하게 장악했을겁니다.. 물론 결과론이지만 확률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깁니다.
한분의 지도자의 나약한 판단 때문에 그 후대에 민족상잔의 비극과 아직도 분열과 혼란이 계속돼는겁니다..
의왕이던 영왕이던 둘중에 하나는 필히 임정으로 망명에 성공해야 했읍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뤄서라도....
물론 그때의 상황을 아쉬워서 해보는 소리입니다..
### 재건론자들의 비판자 죽이기와 딴지걸기~~###
꼬리말쓰기
전종현 물론 아쉽습니다. 영왕의 경우에는 어릴적부터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았으니 아무래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 더 의왕보다는 행동하는 면에서는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다른 사학자들 주장대로 영왕비가 일본인이라는 현실적인 한계와 어려움도 있었겠죠. [2003/05/27]
전종현 부인까지 일본인인 상황에서 망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실행에 옮기기에는(그것도 혼자 힘으로)어렵지 않았나 싶습니다. 의왕의 경우에는 여러방안을 혼자서도 실행하고 활동했지만 영왕은 이러한 한계를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2003/05/27]
전종현 어쨋건 소시민적인 그런 나약함이라는 것도 결국 일제가 의도적으로 노리고 자행한 만행의 소산아니겠습니까.. [2003/05/27]
Anti-Emperor 모든걸 일제의 치밀한 만행이라는 책임전가는 옳지 않습니다.. 어렵고 곤란한 시기라도.. 굳굳이 현실을 타개하고.. 벼랑끝에서라도 뛰어내릴수 있는 과감한 결단력과 용기가 그당시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이였읍니다. 아쉬운것은 일반계급 출신의 독립투사들 보다 황실사람들은 그러한 모습들이 미약했읍니다.. [2003/05/28]
전종현 책임전가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실제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시대의 자료를 검토하다보면 얼마나 일제가 치열하게 황족과 국민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노력했나 하는 점을 느낄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처음에는 황족들의 독립을 향한 노력이 너무 미약하지 않았나 하는 점으로 인해 많은 생각과 번민을 했던... [2003/05/28]
전종현 시기도 있었습니다. 우리 학계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학계에서도 우리 황실의 독립노력에 대한 부분은 많은 학술대회를 통해서도 치열하게 부딪혔던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특히 바로 그 부분을 놓고 서울대 신용하 교수와 이태진 교수간의 치열한 지상논쟁은 저도 진지하게 읽어봤던 부분이었습니다. [2003/05/28]
전종현 이러한 황실의 독립을 향한 노력부분이 그동안은 거의 전무했다고 하는 것이 대세였지만 1990년대 들어와서는 많은 자료의 발굴과 노력을 통해 상당부분이 새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부족합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심한 표현을 빌면 술 망나니와 여자 후리기로 일생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던 의왕의 삶도 최근 [2003/05/28]
전종현 밝혀지는 각종 자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독립군 양성지원, 상해망명시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으니 결코 우리 황실이 그리 나약한 것만은 아니었고 최대한 당시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는 할 만큼은 했다라고 말이죠. 연금되었던 그분들의 입장에서 이정도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저로선 [2003/05/28]
전종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입증하고 발굴해나가야 하는 부분이 우리의 남겨진 할 일 입니다. [2003/05/28]
Anti-Emperor 현재는 확실히 입증된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만 주장을 하셔야 할겁니다.. 일본놈들의 우리 구한말 역사를 왜곡시킨것도 있지만은, 해방후의 황실사람이나 관련자들의 자기합리화를 위해 사실을 왜곡 또는 주관적 기술한것도 있읍니다.. 확실히 객관적으로 입증돼지 않은 관련자 구술에 의한 자료는 배제해야 합니다.. [15:47]
권영훈 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추측을 해도 그렇게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승만 정권 때 황실 사람들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고 그런 위치에서 제대로 기술을 할 여유도 없었지요. 오히려 현재 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일제가 세뇌시킨 황실관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6:01]
권영훈 그 자료는 신문을 통해 나오죠. 해방 후에 세력을 누렸던 것은 친일파들이지 황실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1985년도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주름잡았던 친일사학계의 거두는 이병도씨인데 그 사람은 이완용의 조카임을 잘 아시겠지요? [15:59]
권영훈 그리고 적어도 의친왕이 상해망명을 준비했다는 사료나, 김구 선생의 영친왕의 납치사건 등은 지금도 사료가 남아 있습니다. 물론 황실의 일부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도요. [16:02]
Anti-Emperor 요 위에 이휘님이 기술한 내용도 오류가 있다고 권영훈님이 오류 수정 하지 않았읍니까? 한가지의 사건가지고서도. 이렇듯 서로의 주장이 틀린데.. 님이 주장하신게 100% 역사적 진실이라고 말할수 있나요? 바로 위에서 님이 오류수정 부문은 위에 대화체형식의 사건내용이 날조라고 말하는것 과 같습니다. [16:12]
Anti-Emperor 그리고 저는 역사 기술방식의 원론을 이야기 했읍니다. 검증된 확실한 사료를 가지고 역사기술 하자는것은 친일사학만의 주장이 아니라. 역사연구의 기본입니다. 그것은 민족사학하는분들도 그렇게 주장하시는겁니다. 저는 원론만 이야기 했을뿐인데. 님은 어째 제 의견을 친일사학의 잔재라 매도합니까? 아집은 버리시죠.. [16:19]
권영훈 그럼 님이야말로 그것이 어째서 해방 후에 황실 인사나 주변인들이 자신들의 합리화를 위해 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게다가 1945년 이후의 황실 역사를 잘 아시면서 그런 답변이 나와서 그랬습니다. 억지로 끼워맞춘 것이 아니냐고. 님이야 말로 아집은 좀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16:30]
Anti-Emperor 님은 진짜 아집과 편견으로 똘똘뭉친 분이군요.. 님의 주장을 역사전문가들 .. 재야 사학을 하시는 분이라도 좋습니다.. 한번 그들과 대화 해보시죠.. 님의 사고는 황실중심의 고정된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군요.. 좀 세상을 거시적으로 보시죠.. 그럼.. 숲이 보일겁니다.. 한번 세상의 민중들도 한번 두루 보시죠.. [16:38]
권영훈 거 진짜.....이해를 못하는 분이시네요. 그러면 님께 질문을 하나 하죠. 왜 아까 1945년 이후 구황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여 기술했다고 하시는거죠? 그그리고 갑자기 논점이 일탈되게 황실중심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님이 설득에 실패하니까 시점을 딴데로 돌리려는건가요? [16:42]
권영훈 참고로 말씀 드리는 건데 민중의 사상도 뭐도 다 좋습니다. 다만 그 당시에 묻혀 지내온 진실이 그런 그 민중의 중심사상 때문에 묻혀 있고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것은 있을 수 없지요. [16:43]
Anti-Emperor 그러면 그 황실사람이나 관련자들이 100% 사실만을 말했다고 자신할수 있읍니까? 그들에겐 착오나 주관도 없는 전지전능한 신입니까? 그들도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여 그들만의 구술만이 아니라 다른 객관적 사료를 가지고 사실과 대조하여 평가 하자는겁니다. 당신은 보편적 사고라는 말도 모릅니까? [17:02]
Anti-Emperor 좀 토론이라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토론 했으면 하는군요.. 이미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고 트집을 잡고.. 매도하려는 사람과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 하겠군요.. 님은 저의 말을 꼬투리 잡고 따지려 하지말고 역사적 사실과 보편적 사고라는 기준을 가지고 사료를 비판해 주길 바랍니다. [17:05]
권영훈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께요. 그 사실이 불거져 나온 것은 1990년대입니다. 제게는 그 사료가 있습니다. 의친왕의 독립선어서 수결과 당시의 망명 보도 사진........... 그리고 몇년 전에는 만주의 독립군에게 고종 황제가 죽기 전 명령서를 보낸 것과 군자금을 조달했다는 것도.......... [17:05]
권영훈 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님이 더 비상식적인 상태로 판정하고 끝내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이 되는군요. 두번재 리플글을 보니 화가 나는군요. 왜 님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건가요? 님은 자기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꼬투리 잡는 것으로 생각되나요? 님 글이 무조건 옳고 상식적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집이라고 생각합니 [17:13]
Anti-Emperor 또 토론 주제를 교묘히 바꾸시네요.. 영친왕의 망명실패에 대해 이야기 하는거고 이휘 위원장이 자료에 대해 당신이 오류수정한것에 대한 논쟁이였는데~ 제가 다른사항 주장 한게 있읍니까? 원론적인 이야기만 했읍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원론적 이야기에도 핏대를 세우시는군요...이건 제3자가 판단하겠죠.. [17:21]
권영훈 전종현님이 제기한 글은 강용자님의 '왕조의 후예'에서 발췌한 듯 싶습니다(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책의 특징은 중요한 구술을 그냥 빼먹고 넘어간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17:23]
권영훈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그냥 빼버렸을 수 있습니다(어찌 되었거나 '영친왕 모시기(납치는 듣기 안 좋으므로)'는 일어났으니). 저는 그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중요한 말 하나를 빼먹어서 님이 그런 오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17:25]
권영훈 말을 바꾸었다고요? 그리고 토론주제를 바꾸신 사람은 님이 아니신가요? 저는 분명이 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일제가 세뇌시킨 생각이라고 했을 뿐인데도 님은 왜 자기 생각을 매도하냐고 발끈하셨죠? 님이 거기서부터 토론주제를 교묘히 바궈놓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이신지..... [17:27]
권영훈 또한 그 때 토론 주제가 바뀌었다고 말하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은 묵시적으로 동조한 격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시는지? [1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