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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만화 `광수생각`조선일보에 연재 시작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 만화 `광수생각`이1997년 4월 4일 처음으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첫 만화는 `바퀴벌레 퇴치법`이었다. `광수생각`은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다.
팬클럽이 생겼는가 하면, 신문만화를 오려 암 투병중인 어머니 병상 곁에 붙여놓은 중학생도 있었다.만화가 박광수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고 강연초청도 쇄도했다.
`광수생각`이 조선일보에 연재된 배경에는 당시 조선일보의 `레인보우`라는 섹션 창간 때문이었다. `가장 조선일보답지 않고 파격적인 지면`시도한 `레인보우`팀이 `페이퍼`라는 무료 월간지에`광수만가`라는 만화를 그리고 있던 박광수를 적임자로 판단, 그에게 만화를 의뢰한것이 `광수생각 탄생의 배경이었다. `광수생각`은 이후 2000년 11월 21일1095회를 끝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3년 8개월 남짓한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감성적이고 가족애를 중요시하는 내용이 많았기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었고, 밀리언셀러를 기록할 정도로 단행본도 잘 팔렸다. 단행본 다 합쳐서 130만부가 팔려나갔다. 게다가 광수생각 단행본에서 자신의 부모님과 아내/아이들의 사진을 올리고 백년만년 사랑한다는 등의 표현으로 자신의 사랑을 피력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였고 인터뷰에서도 본인은 이런 게 당연한 거 아니냐면서 사람들은 소박한 행복을 모른다며 좋은 말 실컷 쓰면서 가족애/아내와 아이들이 전부인 듯 운운하더니…….7년간 함께 살던 아내와 별거 끝에 이혼을 하고 자신의 팬이었던7세 연하의 이현주씨와 2002년에 재혼을 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자신을 합리화 시키기 급급한 행보만 보였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인데 '남자의 외도는 화장실에서 배설 욕구를 해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자의 외도에 갈라선다고 하는 여자는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이다', '남자는 생물학적으로 한 여자만 보고 사는 것이 불가능
하다', '살면서 바람 안 피는 남자는 없다. 없다고 하는 남자들은 거짓말쟁이다',
'자신의 새 아내는 이런 것을 이해하기에 자기가 밖에서 배설욕구 해결을 하고 와도 이해해준다.'는 등의 발언들을 터뜨려 이제까지 쌓아온 이미지를 날려먹었다. 그 동안 박광수는 (전)아내를 본 따 만든 캐릭터를 만들어 만화에 출현시켰다고 밝히기도 했고, 아내의 본명까지 만화에서 거론하면서 부부간의 사랑을 피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는 충격은 더욱 컸다
▶2005년강원도 양양 대형산불
4일 밤부터 6일 새벽까지 30여시간 동안 강원도 양양군이 입은 화상은 컸다.
불은 4일 밤 11시 50분쯤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파일리와 강현면 물감리 구간 도로 옆 야산에서 시작, 강풍을 타고 동쪽으로 계속 번져 150㏊의 임야와 민가 38채를 태웠다. 이 불로 12개 마을 800여명의 주민과 낙산비치호텔에 투숙한 관광객 등 90여명도 대피했다.
소방방재청은 양양군에서만 250ha의 산림과 주택 160채, 상가 27채 등 건물 246개 동이 소실됐고, 이재민은 376명이라고 밝혔다.
가장 큰 피해지역인 강현면 용호리는 주택 60여채 가운데 35채가 불과 20분 만에 쑥대밭이 됐다. 집들은 폭삭 내려앉아 쓰레기 더미로 변했고, 매캐한 연기만이 공중에 흩어졌다. 마을에는 털이 불에 그슬린 개가 돌아다녔다.
산불은 바닷가까지 번져 낙산사의 주요 문화재들이 불탔다. 낙산사 건축물 20여채 중 대웅전인 원통보전(圓通寶殿)과 이를 에워싸고 있는 원장(垣墻·시도유형문화재 34호), 홍예문(虹霓門·시도유형문화재 33호), 요사채 등 목조 건물,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등이 불에 탔다.
낙산사측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불인 ‘건칠관세음보살좌상’(보물 1362호)을 비롯한 신중탱화, 후불탱화 등 3개의 문화재를 지하 창고로 옮겼다. 스님들은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2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산불 진화와 이재민 구호를 위해 팔을 벗고 나섰다. 7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6일 낙산사에서 불탄 기왓장을 치우며 복구를 도왔다. 군인들 수천명도 언제나처럼 이재민의 ‘친구’가 됐다. SK그룹, CJ를 비롯한 기업들은 라면 생수 햇반 담요 등 긴급재난구호품을 지원했다. 교보생명과 LG텔레콤 등은 보험료 납입을 유예해주고 전화요금도 감면해주기로 했다.
▶2003년가짜 CNN 사이트에 속아, “빌 게이츠 총격피살” 오보 소동
▶2003년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와 갈등 빚은 초등학교장 끝내 자살
▶2000년국내 최초로 용광로 설치한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별세
▶1999년80년대 물가안정 이끈 주역 신병현 전 부총리 별세
▶1997년만화 `광수생각` 조선일보에 연재 시작
▶1994년서재필 박사, 전명운 의사의 유해와 영정 환국
▶1987년광릉에 첫 산림박물관 준공
▶1983년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
▶1980년쿠바인 1만여명 아바나 주재 페루대사관에 몰려 들어 망명 요청
▶1979년파키스타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 사망
▶1974년한국-터키 문화협정 체결
▶ 1973년 4월 4일.
세계무역센터가 개장하다.
되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쌍둥이 빌딩 붕괴로 인한 충격으로 7 월드 트레이드 센터 또한 붕괴하였다. 이 복합 단지의 다른 건물 또한 쌍둥이 빌딩의 붕괴로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으며, 이 잔해들은 철거되었다.
이 복합단지가 완공될 시점에서 1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417m, 2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415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그 외에 복합 단지에 속한 건물에는 메리어트 월드 트레이드 센터, 4 월드 트레이드 센터, 5 월드 트레이드 센터, 6 월드 트레이드 센터, 7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있었다. 이 모든 건물은 1975년부터 1985년 사이에 개장했으며, 건설 비용으로 4억 달러(2014년 기준 23억 달러)가 들었다. 이 복합단지는 뉴욕 시 파이넨셜 디스트릭트에 위치해 있으며 총면적 1,240,000m²를 차지했다.
세계 무역 센터는 1975년 2월 13일 대형 화재가 발생했고[5] 1993년 2월 26일 한차례 폭탄 테러를 당했으며, 1998년 1월 14일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고 1998년 항만위원회가 세계 무역 센터의 민영화를 결정하고 민간 기업에 건물을 임대하기로 했다. 결국 2001년 7월 실버슈타인 부동산에 임대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알카에다의 사주를 받은 테러범이 보잉 767 2기를 납치하여 오전 8시 46분에 북쪽 건물, 오전 9시 3분에 남쪽 건물에 충돌하는 테러를 일으킨다. 화재 56분 후인 오전 9시 59분 남쪽 건물이 붕괴했으며 그로부터 29분 후인 10시 28분에는 북쪽 건물도 붕괴했다. 이 세계 무역 센터 테러로 2,763명이 사망했다. 빌딩에서 파편이 떨어지면서 여러 주변 건물에 떨어지며 화재가 발생했고, 복합 단지 내의 나머지 모든 건물이 붕괴하고 세계 금융 센터와 도이체방크 빌딩 등 기타 10여개 건물에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 무역 센터 단지 내 3개 건물이 화재로 인한 구조적 손상으로 붕괴했으며, 북쪽 건물이 붕괴하면서 그 파편이 인근의 7 세계 무역 센터로 떨어져 손상을 입고 화재가 발생했으며, 결국에는 붕괴되었다. 붕괴 이후 세계 무역 센터의 잔해를 청소 및 정리하는데 8개월이 걸렸다.
https://youtu.be/ejjc0KdHFI8
▶1969년도입 일본쌀 6,600톤중 25%이상 불량미로 판정
▶1968년마틴 루터 킹 목사 피살
ㆍ인종 벽 허물기 ‘밀알’
“전쟁이 흡혈귀처럼 기술과 돈을 빨아들이는 한,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금이나 에너지를 결코 투자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전쟁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들, 형제, 남편들을 전쟁터로 보내 싸우다 죽게 하는 행위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잔인하게 조종당하는 현실 앞에서 저는 침묵을 지킬 수 없습니다.”
1967년 4월4일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왜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연설을 한다. ‘베트남을 넘어서-침묵을 깨야 하는 때(Beyond Vietnam-A Time to Break Silence)’라는 제목의 이 연설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와 함께 킹 목사의 가장 유명한 연설 가운데 하나로 기억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쟁이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약속을 무위로 돌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한다”며 시민권 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양심에 따라 반전의 목소리를 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힘없는 이들, 발언권이 없는 이들, 미국에 의해 희생된 이들, 우리나라가 ‘적’으로 규정한 이들, 하지만 어떤 문헌에도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저는 이곳에 왔습니다.”
연설은 킹 목사가 생각했던 ‘인권’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남과 나를 구분하고 적과 우리의 차등을 두는 것은 시민의 자세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평화와 인권은 미국인들, 미국의 흑인들과 빈민들, 가난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 베트남인들을 죽여야 하는 미국의 군인들, 그리고 ‘미국의 적’이 되어 공격받는 베트남인들까지도 끌어안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킹 목사를 지지했던 사람 가운데 많은 이들이 애국주의를 내세워 “전쟁에 반대하자”는 주장에는 등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베트남을 넘어서’ 연설을 한 지 꼭 1년 뒤인 68년 4월4일 킹 목사는 암살당한다. 흑인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를 방문했던 그는 이날 저녁 오후 6시1분 로레인 모텔의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제임스 얼 레이라는 인물에게 저격당했다. 총탄이 오른쪽 뺨을 뚫고 척수를 지나 어깨에 박히는 순간 킹 목사가 곁에 있던 가수 벤 브렌치에게 남긴 말은 “오늘 밤 ‘주여, 이 손을 잡아주소서’를 멋지게 불러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킹 목사는 이 말을 남기고, 한 시간 뒤인 7시5분 숨을 거뒀다.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1961년한국-네덜란드, 국교 수립
▶1960년한국 대일본무역 재개
▶ 1952년 오늘,
영국의 가수 게리 무어(Gary Moore)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출생 (~2011년 2월 6일 스페인 에스테포나 에서 사망)1978년 자신의 첫 솔로앨범 《Back on The Streets》를, 1982년에는 《Corridors Of Power》를 발표하여 흥행에 성공하였다. 1983년에 《Victims Of The Future》를 내놓아 UK 차트 12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https://youtu.be/4O_YMLDvvnw
▶1951년국군 개성 입성
▶1949년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출범
북미와 유럽 서방국간의 집단방위체제, 경제협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대서양조약이 20년을 기한으로 1949년 4월 4일 미국 워싱턴 국무성강당에서 조인됐다.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주도로 개최된 이날 조인식에는 서방 각국의 외교단, 상하원의원, 정부요원과 수백명의 보도관계자가 참석해 이날 조인식을 지켜봤다.
가맹국 각 대표들은 미 해병대 밴드가 연주하는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멜로디에 따라 입장했고, 미국 대표 애치슨 국무장관의 사회에 의해 조인식이 시작됐다. 먼저 가맹국 각 대표들이 짧게 연설을 한 후, 이어서 각국 대표들의 서명이 이루어졌다. 벨기에 대표 스파크외상의 서명을 시작으로 캐나다, 덴마크,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영국 등이 서명한 후 마지막으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서명함으로써 조인식은 끝이 났다.
그러나, 이날의 조약은 서면의 약속에만 지나지 않았다. 조약 가운데 ‘가맹국에 대한 공격은 전가맹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집단자위권을 발동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곧 대서양조약기구(NATO)軍 창설의 빌미가 되었다.
▶1947년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발족
▶ 1945년 오늘,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과 새 군사 협정 체결, 독자적 군사 행동권 획득
광복군 배치현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일 전쟁을 전후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는 일본과 일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피하고, 국제정세도 일본과 전쟁할 시기가 임박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중칭에 도착하기 1년 전쯤 시안에 군사 특파단을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한편, 중국정부에 대하여 군대조직에 대한 양해와 재정지원을 교섭하였다. 그 결과 충칭으로 옮긴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할 수 있었다.
광복군 국내 진격 계획
광복군은 중국정부의 재정지원과 망명정부였기에 중국 정부와 맺은 군사협정에 따라 중국 군복과 표지를 사용하는 등 독자적 행동권을 가지지 못했다. 이에 1945년 4월 4일 임정은 중국과 새 군사협정 체결해 독자적 군사 행동권을 획득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시정부는 즉각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켰다. 영국군과 공동작전으로 미얀마, 인도 전선에까지 공작대를 파견하기고 했다. 또한 미국군과 연합하여 항공기나 잠수함을 이용해서 국내에 투입, 일본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미국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특수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실시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광복군은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군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으며, 1946년 6월 해체되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비록 대한민국 국군에 직접 편입되지는 못했지만, 광복 전까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용감히 싸웠던 정예 군대였으며, 그 역사성과 정통성만큼은 국군에까지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하여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
▶1944년이탈리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1941년이라크에 쿠데타 발생
▶1938년조선도로령 공포1933년미국 에이크런 비행선 뉴저지해안 추락 73명 사망
▶1929년가솔린 자동차 발명가 벤츠 사망
▶1913년다형 김현승 시인 출생 -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
▶1909년태프트 미국 대통령 취임
▶1904년시인.독립운동가 이육사 출생
강철로 된 무지개를 그렸던 민족시인 이육사
▶ 1899년 중학교 관제 제정 공포
▶ 1858년 프랑스의 시인 구르몽 출생
▶ 1756년 암행어사 박문수 사망 - 영원한 암행어사 박문수
▶ 1498년 영안도를 함경도로 개명
▶ 1481년 동국여지승람 편찬
▶ 1392년 정몽주 선죽교서 피살 - 절의의 신화, 동방이학의 조종 정몽주
고려 공양왕 4년 포은 정몽주(鄭夢周) (양력 4월 26일)황해도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 부하에게 피살(1338년 1월 13일 (1337년 음력 12월 22일)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출생 ~ )
▶ 1292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최초의 교황 니콜라우스4세 사망
▶ 670년 신라, 말갈·당 연합군 대파
https://youtu.be/qNe71iLvOOA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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