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월이 가네
뒤 공원 숲이 서늘해졌다. 푸르기만 했던 느티나무 잎사귀의 떨림이 어느새 붉어졌다. 반짝거림이 야위었고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도 메마르다. 어정대다가 또 시월의 끝으로 쫓긴 나는 한 잎 스치는 낙엽에 입 삐쭉이는 아이처럼 서러워진다.
공원길 걸음도 가벼워졌다. 몸을 감는 후더분함에 운동하겠다는 마음 내지 않고는 애써 나서지 않던 둘레 길에 어느새 더 끌린다. 살며시 정 나눌 이와 함께 걷고 싶다는 분에 안 맞는 생각도 뜬금없이 한다. 양지의 벤치엔 두꺼비처럼 모여 앉은 늙은 사람들이 햇살을 받는다. 몇 날 전까지도 그늘 쪽에 몰리더니 어느새 입은 옷도 짙어지고 길어졌다. 몸을 맞추어 나가는 인간이란 존재의 모습이 간사스럽기도 괴이쩍기도 하다. 곧 더 서늘해질 바람에 붉은 잎들은 소멸해가는 것의 만장처럼 흔들리다 침묵하리라.
낙엽 두어 잎 바람을 타며 발 앞에 구른다. 의자 밑엔 마른 잎이 제법 서걱거린다. 조락의 계절이 되면 괜스레 사무치는 것이 많아진다. 풀어 헤쳐지려는 삶이 아프고, 만나자 이내 손 흔드는 사람이 더 그립고 애달프다. 어울리려 풀어놓은 말이 가 닿지 않는 얼굴에 내 매무새를 고치는 일이 허우룩하다. 힘에 부치는 괜한 일로 애만 쓰는 내가 어쭙잖아진다. 무단히 던져오는 까칠한 말을 밀쳐낸 것도 헛일이 되어 떠돈다. 세상은 본디 그렇고 그런 것이라 해도 가을엔 작은 것마저 이리도 에인다. 스쳐 지나간 것을 찾아 시간과 소리를 거슬러 오른다. 어렴풋한 시공간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
가지에 걸린 세찬 바람에도 봄은 어김없이 꽃을 실어 왔다. 산수유, 목련, 개나리, 벚꽃, 진달래, 라일락, 영산홍이 줄줄이 피어오르며 봄밤을 울렁대게 했다. 낯선 여인의 향내를 맞이하듯 숨을 죽였다. 끝물의 벚꽃이 지천으로 하늘을 휘돌던 날 내 가슴엔 눈물이 날렸다. 할 말도 못 했는데 연지 곤지 찍은 그 봄 여인들은 치맛자락 끄는 소리를 내며 날 환장하게 만들고 사라져 갔다.
청초한 연초록 잎들이 풋 처녀 같은 얼굴로 찾아왔다. 내 옆에서 꼬리 치듯 그늘 만들며 두꺼워지더니 억세어진 마누라처럼 바람에 소릴 질러댔다. 비둘기와 까치가 숲을 헤집고 아이들의 놀이 소리가 나무들 사이로 명징했다. 개개비와 찌르레기의 지저귐에 숲이 더 두꺼워져 갔다. 후끈한 바람결에 목청을 올리며 시원하게도 성가시게도 숲을 울리던 매미의 떼창은 몇 번의 빗줄기와 마른 바람에 까르륵거리더니 입을 닫았다. 두어 차례 올라온 태풍에 숲은 흔들리며 유령처럼 울었다. 그런 날은 나도 천지신명을 부르는 무당에 홀린 것처럼 쏘다니며 흔들렸다.
외등이 켜진다. 낮은 밤에 섞이며 빛은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다. 밝음과 어둠 그 뒤바뀜의 시간, 우주의 움직임을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순간이다.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불가해의 일 앞에 묵언할 뿐이다. 물감 스미듯 잦아드는 어둠에 나뭇잎은 희끗희끗 붉은 외등 빛을 튕겨내며 서걱댄다.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다시 나다닌다. 나뭇잎 흔드는 갈바람에 더 끌리었으리라. 나뭇가지 사이로 아롱거리는 별을 마주하며 내 존재의 기원을 묻는다. 의자에 앉은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등허리가 선득해진다. 깊어가는 시월의 한 밤, 나는 왜 이리 두근대는 것인가. 이유 모를 슬픔 같기도 한 것이 안개처럼 잦아든다. 스쳐 지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봄날, 힘없는 늙은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벤치에 겨우 앉았다 누웠다 하던 노인이 안 보인지 두어 달은 된 것 같으니 이미 떠난 것인가도 싶다. 얼굴이 쇠잔해지던 옆집 남자도 갔다. 칠순 여름을 못 넘겼다며 부인은 먼산바리기를 길게 했다. 뒤늦게 들려온 옛 직장 동료의 부음 소식에 가물거리는 얼굴만 허하게 새겨보았다. 산길에서 마주친 옛사람과 손을 잡고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헤어졌다. 뒤돌아보고 뒤돌아보았다. 오늘 해거름에 홀로 지팡이 걸음을 겨우 옮기는 꾸부정한 안노인이 걷다가 숨을 내쉬며 길섶에 서 있었다. 곧 떨어져 내릴 머리 위의 마른 느티나무 잎 그늘이 얼굴에 어른거렸다. 아, 그러네. 웃는 얼굴도 있네. 엘리베이터에서 엄마 손 잡고 인사 잘하던 검은 눈망울의 여자애도 이사를 간 지 한 달 넘었다. 오후만 되면 공놀이로, 수건돌리기로 잔디밭에서 시끌시끌하던 초등생 꼬맹이들의 얼굴이 세상 좋지 않으냐고 한다. 그렇구나.
한차례 바람이 또 잎을 떨쳐내며 쓸어간다. 밤은 이슥해지고 나는 일어나지 못한다. 귀뚜라미 울음도 사위어 갔다.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라진 소리를, 그 발화發話의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귀뚜라미의 울음도, 이사 간 아이의 인사말도, 산에서 만난 여인의 무언의 숨소리도, 옆집 남자의 말도, 누웠던 그 노인의 떨리는 소리도, 더 올라가 저세상 어머니와 할머니의 목소리도 찾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끝내는 며칠 전 바라보며 전율했던 임당동 고분의 인골들, 이천년을 물고 있는 그 퀭한 뼛조각 얼굴들의 말과도 마주하려나.
들려줄 말은 무엇이련가. 너의 곳은 아니니 되돌아 가 낙엽 밟으며 별빛을 바라보라고 할 것만 같다. 억겁의 세월에 묻힌 사랑과 미움, 뭇 희비의 소리들은 다 그렇고 그렇게 가뭇없는 거라고. 나는 내 삶의 어디쯤 와 있는가. 갈바람이 부르니 나는 또 만추의 산을 떠돌며 내 길을 사무쳐 할 밖에.
첫댓글 시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이 밤이 깊어지면 뒤이어 새벽 스산한 바람을 따라 또 날이 밝이오겠지요.
".....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
가수 이용이 목청껏 부르는 노랫가락의 여운이 오늘따라 더 길게 들려오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