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해 전진한 어린 소년“무언가를 변화 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 - 자서전 "La meva gente, el meu futbol" (나의 사람들, 나의 축구) 에서..
71년 1월 18일 바르셀로나의 한마을 산뜨뻬도르(Santpedor)에서 태어난 과르디올라의 축구인생의 시작은 84년 라 마시아(La Masia)에 있는 김나스틱 만레사(Gimnastic de Manresa)라는 유소년팀에 입단 하면서 부터이다. 어려서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이 우수한 '모범생' 이기도 했던 과르디올라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축구와 공부는 병행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나머지 학교를 그만둘 정도로 축구에 매우 열의가 있는 소년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만레사팀의 코치인 마르솔(Marsol)과 카사도(Casado)를 만나게 되는데 후에 과르디올라가 말하길 “내가 함께 한 사람 중에서 최고의 만남이었다.”라고 말할정도로 후에 그가 축구 선수로 대성할 수 있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준 고마운 은사들 이었다.
만레사 팀에서 유소년 선수 생활을 시작한지 어느덧 6년, 보통 유년 선수들 같은 생활을 하던 그의 축구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된 일이 생겼다. 바로, 바르셀로나 유스팀(B팀) 코치의 눈에 들어 그가 꿈에 그리던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게 된 것. 비록 성인팀이 아니라 2군 격인 B팀(바르셀로나등 프리메라 리가 팀이 가지고 있는 유소년 팀 격인 B팀은 규정상 세군다 리가 이하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어있다)이고 경기 중의 볼보이의 역할도 병행 해야 하는 입장 이었지만 그는 벌써부터 세계적인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묵묵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하지만, 유스 팀에 입단한 해인 1990년 12월 16일 마음 속에서나 그렸던 순간이 예상보다도 갑자기 찾아오게 된다. 드디어 꿈에서나 이루어 질것만 같았던 프리메라 리가 경기에 출전하라는 요한 크루이프 감독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 비록 주전인 로널드 쾨만(Koeman)과 기예르모 아모르(Amor)의 부상으로 찾아온 기회였지만 과르디올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해 4경기를 더 치루며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였고 결국 '바르셀로나의 전설' 요한 크라이프의 마음을 사로 잡는데에 성공했다. 19살의 과르디올라가 일찌기 성공의 문을 여는 열쇠를 잡은 셈인 것이었다.
선수 생활을 꽃피운 바르셀로나 시절"나는 단지 축구 선수일 뿐이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La meva gente, el meu futbol"
뒤이어 데뷔한지 다음해인 1992년, 과르디올라는 일찌감치 자신의 선수생활을 빛내며 일약 '유럽의 신성'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기회를 맞는다. 먼저 5월 잉글랜드 웸블리 구장에서 열린 이탈리아 명문 삼프도리아를 상대로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그는 드림팀이라 불리던 팀의 일원으로 로날드 쾨만, 바케로(Bakero), 스토이치코프(Stoichkov), 라우드럽(M. Laudrup)등과 함께 이탈리아의 삼프도리아를 1-0으로 꺾고 바르셀로나 창단 93년 역사상 최초로 유럽 챔피언스리그 제패라는 거대한 업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가 한번도 이뤄내지 못했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해낸 것은 내가 해냈던 일 중에서도 최고의 업적이었다. 그때 우리 팀은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패배를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처음에는 출발이 좋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우승을 거머쥐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이어서, 그는 소속 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23세이하 선수들이 참가하는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어 고향에서 열리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 예선을 무실점 3전전승으로 가볍게 통과한 스페인은 8강에서 또 다른 우승 후보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4강에서도 아프리카의 '검은 돌풍' 가나를 2:0으로 완승을 거두어 결승전까지 순항하게 되는데, 그것은 미드필더를 지휘한 과르디올라가 전 경기를 소화하며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덕분이기도 했다.
결승전에서 '동구권의 강호' 폴란드를 맞아 선제 골을 내주는 어려운 경기를 펼친 스페인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레전드로 남아 있는 키코(Kiko)가 동점 골과 역전 골을 작렬 시킨 끝에 3-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올림픽 출전 사상 첫번째로 축구 종목에서 감격의 금메달을 차지 하였다.
게다가 최종 전 38라운드에서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가 테네리페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바르셀로나는 승점차로 '숙적' 레알 마드리드를 눌러 프리메라 리가 우승컵까지 거머쥐게 되는데, 정말이지 20살의 과르디올라에게 일찍 찾아온 최고의 해인 셈이었다.
그에게 3개의 트로피를 안겨준‘잊지 못할 1992년’이 지나간후 과르디올라는 어느덧 바르셀로나의 없어서는 안될 '상징 이자 중심’으로 떠올랐다. 요한 크라이프 감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그의 칼날 같은 패스와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은 더욱 빛을 발했고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바르셀로나는 91-92, 92-93, 93-94 3시즌 연속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며 창단 이후 가장 빛나는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무적 함대'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92년 북 아일랜드과의 데뷔전 이후로 기복 없이 안정감 있는 경기 실력을 선보이며, 드디어 23살의 나이로 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된다. 그러나 2경기 교체출전과 볼리비아전에서 페널티킥 득점이 전부 였을 뿐, 그 당시 붙박이 수비형 미드필더 였던 레알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이에로와 팀 동료 나달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며 그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고, 스페인은 카미네로의 선제 골에도 불구하고 디노 바죠의 중거리 포와 로베르토 바죠의 결승 골로 이탈리아에 1대2로 패하며 8강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월드컵의 아쉬움을 딛고 이후 원숙한 기량과 카리스마를 갖춘 과르디올라는 '팀의 중심'으로서 더욱 더 능숙하게 바르셀로나의 지휘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요한 크루이프 후임으로 바르셀로나 감독이 된 보비 롭슨(現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뉴캐슬 감독)의 지휘하에 브라질이 낳은 천재 공격수 호나우두, 포르투갈 특급 미드필더 루이스 피구와도 완벽한 호흡을 구사하면서 비록 우승은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게 넘겨주었으나,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대 득점(113점)을 이끌어 내었고 아약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루이 반 할(Van Gaal)감독이 들어온 직후는 클럽 역사상 유례없는“Dutch Connection”이 형성되어 일부 열성 팬들의 반감이 심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과르디올라는 최고의 기량과 네덜란드 선수와 토종선수, 그리고 기타 외국선수를 한데 묶는 카리스마를 선보여 바르셀로나가 다시한번 리그 2연패를 차지하게 되는 중심 축이 되는 역할을 완수 하기도 했다.
"몇몇 사람들이 바르셀로나 클럽에 외국선수, 특히 네덜란드인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언제나 최고의 외국 선수들이 뛰어왔다. 또한, 네덜란드라는 나라 자체는 크지 않으나 수 많은 위대한 선수들과 매우 매력적인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며 축구강국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전 감독인 요한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 감독을 지내면서 바르셀로나의 축구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루이 반 할 감독은 그것을 계승하고 있을 뿐이다. 그 영향으로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클럽역사 100년 이래로 가장 많은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잇따른 부상으로 인한 좌절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의 도전"바르셀로나에 첫발을 디뎠을 때와 같이 조용히 떠나고 싶을 뿐이다. 다가오는 고별전에서 모두에게 작별의 인사를 보내고 싶을 뿐..” - 2001년 5월, 기자회견장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97-98시즌 그는 뜻밖의 다리 부상을 당하고 만다. 예상보다 심각했던 부상에 과르디올라는 매우 고통스러워 했고 바르셀로나 의 축구팬들은 아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결국 벼르고 벼려왔던 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빈자리는 예상외로 스페인 대표팀에도 매우 크게 다가왔고 더군다나 기대를 모았던 '신성' 라울 곤살레스 까지도 부진을 면치 못하며 스페인 대표팀은 1라운드 탈락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르디올라는 1년이라는 선수에겐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공백 기간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기해 보란 듯이 바르셀로나의 97-98, 98-99시즌 리그 2연패를 실현 시켰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99-00시즌에는 전에 다르지 않게 바르셀로나에게는 뜻하지 않은 이상기류가 감돌게 되고 만다. 루이 반 할 감독의 지나친 네덜란드 선수 기용과 독단적인 작전지시등으로 인해 피구, 히바우두 같은 타 외국인 스타들의 반감이 극도에 달하며 리그에서는 데포르티보에게 우승컵을 빼앗기고, 챔피언스리그 4강전 에서는 발렌시아에게 패하면서 바르셀로나의 팬들로부터 비난이 빗발치게 되었고, 결국 반 갈 감독은 사의를 표명하고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되고 만다.
더욱이 바르셀로나의 부동의 미드필더인 루이스 피구(Luis Figo)가 최대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 이적한 사건은 주장인 과르디올라 자신에게도 그의 미래에 대해 많은 고뇌를 안겨주었고 결국 2001년 5월 전격적으로 ‘자신의 고향’ 바르셀로나를 떠난다는 폭탄 선언을 해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다음은 선언 전문.
"6월 30일이 지나면 나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해외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심사숙고 끝에 그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밤에 구단주인 가스파르트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아직 어떠한 이적 제안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디로 갈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은퇴하기전에 또다른 스페인 클럽에서 뛰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스페인이 아닌 잉글랜드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리그의 클럽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가능하면 타이틀에 도전할 수 있는 빅 클럽에서 뛰고 싶은게 솔직한 바람입니다.
어린 시절 바르셀로나에 무일푼으로 입단해 이제는 어엿한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어 팀을 떠나게 됐습니다. 나이가 30이 되면서 나는 두가지 것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 이대로 머물러 있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사회, 문화, 팀메이트, 라이벌 클럽들과 함께 새로운 삶에 도전할 것인지… 결국 장기적인 안목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결정했습니다.
순간적인 것이 아닌, 오랜동안 생각한 끝에 내려진 계획된 결정입니다. 내가 여기서 배웠던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팀을 떠나고 싶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모든 팀 동료들과 뛸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아마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로지 새로운 모험을 위해 바르셀로나를 영원히 마음속으로 남겨둔 그에게는 먼저 팀을 떠난 루이스 피구와는 차이점이 있다고 할수 있겠다. 먼저 피구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라이벌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바람에 아직까지 바르셀로나 팬들로부터 '돈만 밝히는 배신자(JUDAS) '라는 모욕이라는 오해와 미움을 동시에 받고 있다. 반면 과르디올라의 경우엔 '배신'보다는 '아쉬운 작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일단 그가 스페인 클럽에서 다시는 뛰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은 부분에서부터 그러한 차이점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또한 과르디올라가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한 클럽에 모두 바친 뒤, 축구 인생의 황혼기에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팬들의 양해를 구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이런 것들 때문에 그는 적어도 '비난'보다는 카탈루냐 팬들의 '감사의 박수'를 받으며 팀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약물 파동'으로 인한 고난의 나날을 보낸 이탈리아 생활, 과연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그의 마지막 종착역은 어디일까?
|
[사진: '이탈리아의 전설' 로베르토 바죠가 교체멤버로 경기장에 들어서자 주장완장을 건네주며 진한 동료애를 선보인 과르디올라. 과르디올라는 01/02시즌 이적 초년생에도 불구하고 바죠의 공백시에는 그의 역할을 대신 맡으며 경기를 지휘했다.(게티이미지/유로포토)] |
"잠시 충격을 받았을정도로 존경할만한 결정이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팀 동료로써 영원히 남을것이다.” - 前 스페인 국가대표, 現 바르셀로나의 주장 루이스 엔리케
새로운 도전을 위해 부푼 꿈을 안고 정든 바르셀로나를 떠난 그였지만 여러 유수의 명문팀과의 협상이 연봉 문제등 의견차로 결렬되면서 자칫하면 무적 선수에 놓이게 되는 또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리아의 중소클럽 브레시아가 그를 위해 출혈을 감수하면서 까지 영입에 적극적이자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고 결국 브레시아와 연봉 400만 달러 1년 계약을 맺고 이탈리아 세리아 A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첫 데뷔전에서부터 좋은 평점을 (대 키에보 2-2) 받으면서 새로운 무대에 대한 적응우려를 불식시킨 과르디올라는 하지만 낯선땅에서 새로운 고난을 겪게 되면서 선수 생활에서 일대 위기를 맞는다. 2001년 10월 21일에 벌어진 피아첸자와의 경기에서 약물검사를 주관하는 이탈리아 올림픽 위원회가 금지 약물인 난드로론(Nandrolone)이 검출되었음을 밝혔고, 11월 4일에 있었던 라치오와의 경기에서도 또다시 난드로론을 복용한 것으로 밝혀진것이다. 01/02 시즌 초 라치오의 수비수 야프 스탐과 유벤투스의 미드필더 에드가 다비즈의 약물 복용혐의로 구설수에 올랐던 잇단 약물 복용 사태는 이어서 또다른 희생자를 낳고 만것이다.
"나는 약물복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선수 생활을 하고 싶지 않으며 인생의 남은 여생을 그런 평가를 받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나는 과거에 세계 최고의 클럽에서 뛰었고 1992년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도 출전했었다. 또한 나는 월드컵과 올림픽에도 참가했었다.”
“그런 내가 단지 클럽 경기인 피아첸자를 이기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단 말인가?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금지된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유죄라는 증거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한명의 사람으로서 나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 코트에서 아무리 어려운 투쟁을 해야 할 지라도 스포츠 정의가 아무리 땅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나의 변호사와 함께 나의 결백을 밝힐 것이다.”
과르디올라의 징계혐의 증거였던 경기중에 복용했던 비타민제는 이미 그가 선수생활 초기부터 스페인과 유럽 무대 그리고 월드컵에서도 복용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같은 약품을 사용하고도 유독 이탈리아 무대에서의 약물검사에서 성반응이 나왔다는 것을 그 자신은 전혀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 당연했다.
또한, 그의 정직성과 신의를 잘아는 그의 동료들은 물론 타 선수들까지도 그의 징계를 부당하게 여기면서 과르디올라에게 여전한 신임을 보냈다. 다음은 '숙명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이자 국가대표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던 동료인 페르난도 이에로의 발언.
Hierro - “나는 같은 축구선수로써 그의 신의와 정직성을 매우 존경한다. 그는 스페인에서 11시즌을 뛰면서 단 한차례도 약물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월드컵에서도 말이다.(94 미국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축구천재 마라도나는 약물 양성반응으로 그의 축구인생의 막을 내려야했다) 그런 그에게 이탈리아에서의 첫 약물검사에서는 양성반응이 나왔다. 같은 약물이 스페인, 월드컵과 이탈리아에서는 각기 따로 기준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그에게 나의 뜻과 위로를 전달했으며 나뿐만 아니라 레알 마드리드의 모든 선수들도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심증 만으로는 무죄를 밝혀낼수는 없는 법. 비록 예정되었던 7개월보다는 징계수위가 감해져 4개월 출장정지로 결정되었지만 과르디올라, 그 자신에게는 선수 생활 통틀어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약물 복용 사태를 뒤로 하고 2002년 4월에 복귀한 과르디올라는 이내 다시 팀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브레시아의 중심 미드필더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또 다시 그에게 시련을 주며 다시금 절망에 빠뜨리게 했다.
2001/02 세리아 A 유벤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같은 약물 복용 혐의로 징계를 받았던 상대팀 미드필더 에드가 다비즈의 태클에 전치 2개월여의 무릎인대 부상을 당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메이저 무대로 여겨졌던 2002 한/일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었다. 당초, 카마초 감독은 마지막까지 과르디올라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발탁이 거의 확실시 되었던데다가 중원에서의 카리스마를 기대하던 스페인 축구팬들 그리고 8년만의 월드컵 무대를 그렸던 자기 자신으로써는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었다.
8강에서 주최국 한국에 일격을 당하며 50년 브라질 월드컵 이후 52년만의 월드컵 4강 진출에 또 다시 실패를 맛본 것을 그저 텔레비전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과르디올라는 다시금 재도약의 기회를 부여받게 된다. 바로 2000/01 시즌 세리아 A 우승팀 AS로마와 2년간 입단 계약을 맺은 것. 시즌 전, AS 로마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에이스’ 프란체스코 토티와 함께 미드필드의 중심역할을 부여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과르디올라는 그러나 3라운드에서 찾아온 부상의 여파로 전반기 17라운드동안 단 3경기 출전(183분)에 그칠 정도로 부진한 경기 모습으로 구단에서의 신임을 잃어버리면서 같은 포지션인 리즈 유나이티드의 프랑스 출신 수비형 미드필더 올리비에 다쿠르의 이적과 함께 과르디올라의 6개월여의 짧은 로마 생활은 안타깝게 막을 내리고 만다.
끝까지 과르디올라를 잊지 않은 브레시아의 부름을 받아 6개월의 단기 계약을 맺으며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돌아온 과르디올라는 다행히도 옛 팀에 무난히 적응에 성공하게 된다. 후반기 17경기 동안 13경기 출전 1골(대 인터 밀란전). 빛나진 않지만 꾸준한 출전을 기록하며 보여준 무난한 성적표였다.
2002/2003 이탈리아 세리아 A의 시즌이 마감됨에 따라, 71년생 미드필더의 과르디올라의 행보에 새로운 전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6개월 단기 계약이 마감됨에 따라, 최근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구단주 유력 후보였던 유이스 바싸트(Bassat)에게서 고향 팀 바르셀로나의 구단 단장직을 제의받았던 과르디올라는 이제 축구 선수로서가 아닌, 행정가로써 '제 2의 축구 인생'을 선택할 기로에 놓여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구단주 선거에서 바싸트가 아닌 호안 라포르타(Laporta)가 당선됨에 따라 앞으로의 그의 진로도 다시금 미궁속에 빠지게 되었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또 다시 자유 계약 신분이 된 과르디올라에게 잉글랜드의 여러 클럽과 그리스의 명문 파나시나이코스 그리고 에펜베르크, 바티스투타, 르뵈프등 90년대를 빛낸 노장들을 대거 영입하며 '오일 달러'의 위력을 보인 카타르 리그에서도 영입 제의가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다시금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수면 위로 떠오른 상태이다.
아직 '영원한 바르셀로나의 주장' 과르디올라의 행선지는 어디로 향하게 될것인지는 안개속에 가려져 있다. 축구 팬들의 바람대로 그라운드에 다시 서게 될 것인가, 아니면 떠나기에는 이른 나이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선수로서과 아닌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인가는 오로지 그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의 행보가 어디로 결정되든지 필자는 그의 열렬한 팬으로서 이제부터는 전과 같이 좌절이 아닌 바르셀로나에서 맞았던 것과 같이 그에게 영광의 기쁨이 함께 하길 바랄 뿐이다.
P.R.O.F.I.L.E성명: Josep "Pep" Guardiola Sala
국적: Spain
생년월일: 1971년 1월 18일
신장: 183 cm
체중: 73 Kg
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데뷔년월일: 1990/12/16 (대 카디즈전)
클럽: FC 바르셀로나 (1990-2001), 브레시아 (2001-02, 2002-03/이탈리아), AS 로마 (2002/이탈리아)
주요경력 : 94월드컵 8강, 유로 2000 8강,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프리메라 리가 6회 우승, 챔피언스 리그 1회 우승, 컵 위너스컵 2회 우승, 국왕배 2회 우승, 유럽 슈퍼컵 2회 우승, 스페인 슈퍼컵 4회 우승
- 사커라인 이남훈 -
※ 위 사진(들)은 게티이미지/유로포토의 자산이므로 무단 전재, 복제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댓글 로이킨 보다.... 더 사랑했던.... 조용한 카리스마.ㅠ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분??? ㅠㅠ
앵커맨의 교과서.. 카타르리그인가에서 뛰는걸로 알고있는데..
<이탈리아 명문 삼프도리아를 상대로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부분에 주목해야합니다... 삼프도리아 지금은 왜그러니???;;;
펩!!!
아직 현역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축구선수 베스트11에 종종 이름을 올리는 펩..내가 본 선수중 공수조율과 연결부분에선 세계최고..
바르샤의 전설.. 이때 이선수땜에 바르샤 참 좋아했었는데..
멕시코에 계십니다..
말이 필요없는 선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