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소월(素月)이란 필명을 가진 시인이 둘이나 있다. 한 시인은 '진달래꽃'이나 '산유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김소월이고, 다른 한 시인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최소월이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최소월이 김소월보다 나이가 앞서고 작품 활동도 먼저 시작했다. 따라서 소월이라는 필명도 먼저 사용했다. 최소월은 26세에, 김소월은 32세(1902~34)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두 시인 모두 참으로 아깝고 안타깝다. 김소월의 본명은 정식(金廷湜)이고, 최소월의 본명은 승구(崔承九)이다.
김소월이 국민 시인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최소월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소월은 1892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1910년을 전후해 보성전문학교에서 수학했고,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재일본 조선 유학생들의 기관지인 '학지광'에 작품 발표를 했다. 그때 소월이란 필명을 사용했다. 그런데 최소월은 유학 생활을 오래하지 못했다.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폐결핵의 발병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소월은 귀국해 전남 고흥의 군수였던 둘째 형의 집에서 요양했는데, 1917년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최소월이 '학지광'에 남긴 작품은 '벨지엄의 용사'라는 시와 '감상적 생활의 요구', '남조선의 신부', '너를 혁명하라', '불만과 요구' 등 4편의 산문이다. 요절했기 때문에 발표한 작품이 많지 않은데, 1982년 김학동 교수에 의해 25편의 유고시가 공개되었다.
최소월은 '벨지엄의 용사'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 해방을 추구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벨기에는 독일군의 침공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그리하여 최소월은 벨기에 군인들에게 끝까지 항전할 것을 호소했다. 결국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을 빼앗긴 조선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제시한 것이다.
최소월은 또한 '박사 왕인의 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의 우수성을 노래했다. 왕인 박사는 백제시대의 대학자이다. 일본 국왕의 초빙을 받아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가 유학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인 박사는 일본 국왕 태자의 스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일본인들로부터 학문의 시조로 숭앙받고 있다. 그런데 왕인 박사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조선이 일제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기에 최소월은 부끄러움과 함께 분노감을 가졌다. 그리하여 민족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왕인 박사를 노래한 것이다.
최소월은 또한 사랑을 노래했다. 그 대상이 바로 우리나라의 여성 중에서 최초의 유학자, 서양화가, 소설가 등의 수식어를 달 정도로 근대기에 선각자적인 활동을 한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이다. 나혜석 역시 최소월을 지극히 사랑했다. 나혜석이 쓴 수필 '영원히 잊어주시오'를 보면 일본에서 공부를 하다가 급하다는 전보를 받고 최소월이 요양하고 있는 전남 고흥에 찾아가 열흘간 머물며 정성을 다해 병수발을 든다. 최소월은 그와 같은 나혜석을 보며 "오해없이 영원히 잊어주세요"라고 말한다. 자신이 병석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예감하고 진실로 사랑했기에 가장 깊은 고백을 전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연정 차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 이상의 의의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소월과 나혜석은 외모나 재능만을 보고 서로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식을 함께 할 수 있기에, 즉 민족 해방 운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동지였기에 사랑한 것이다.
1910년대의 유학생들은 일제에 직접적으로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편으로는 실력을 쌓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운동을 해나갔다. 그들이 친목회를 결성하고 신입생 환영회나 졸업생 축하회를 연 것은 유희가 아니라 민족 해방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들이 기관지를 발간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에 새로운 문명을 전달하면서 반일사상을 고취시키려는 것이었다. 최소월과 나혜석의 사랑은 그와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진명여학교에 진학해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일본 도쿄사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했다. 최소월과 함께 '학지광'에 산문을 발표한 이후 여러 매체에 소설, 시, 희곡, 비평, 산문 등을 게재했는데, 여성 해방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3·1운동 혐의로 5개월간 옥고도 치렀다. 유화 개인전을 열었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여러 차례 입상할 정도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나혜석은 이혼 후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서 겪은 정신적인 아픔과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다가 53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나혜석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기에 다행이다. 이번 주 토요일 수원시 행궁동 주민자치센터에서 나혜석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