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유모는 30년간 친어머니… 아들이 내 뜻 이해해주길”
유모 지키려… 父子소송 벌인 아버지
“저에겐 친어머니 같았고, 아이들에겐 친할머니나 다름없었습니다. 30여 년 동안 한 가족처럼 지냈는데….”
어릴 적 유모였던 90대 여성 편에서 자신의 친아들과 법정에서 다퉜던 정모 씨(71)는 1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매주 세 번씩 신장 투석을 한다는 정 씨의 목소리는 회한에 잠긴 듯 가라앉아 있었다.
정 씨의 아들은 정 씨가 유모 박모 씨(95)를 위해 9년 전 매입해준 서울 성동구 오피스텔에서 나가 달라며 박 씨를 상대로 건물인도 소송을 냈다. 자신의 명의로 된 오피스텔을 처분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을 맡았던 서울동부지법은 지난달 28일 박 씨의 손을 들어줬다.
● 반세기 넘게 이어진 유모와의 인연
정 씨에 따르면 정 씨 가족은 1960년대에 처음 박 씨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정 씨의 어머니가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만난 박 씨에게 작은 도움을 준 게 계기가 됐다.
그러다 정 씨 어머니가 만성 폐 질환으로 투병 생활을 하게 되자 당시 홀몸이었던 박 씨가 1973년경부터 아예 정 씨 어머니 인근으로 이사 와 간병인 역할을 했다. 정 씨는 “인근 병원이란 병원은 모두 돌았는데 치료가 쉽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박 씨는 정 씨 어머니의 병 수발을 들면서 동시에 당시 20대였던 정 씨와 어린 동생 4명을 친자식처럼 돌봤다고 한다.
정 씨의 어머니는 1981년 숨졌지만 박 씨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박 씨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정 씨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집안일을 하고 정 씨의 큰딸과 두 아들을 챙겼다고 한다. 정 씨는 “아이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며 “요리 솜씨도 일품이었는데 특히 갈치 요리를 다들 좋아했다”고 했다.
정 씨의 사업이 어려워지며 박 씨에게 월급을 제대로 못 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박 씨는 싫은 내색 없이 30년 가까이 정 씨 가족과 한 지붕 아래서 지내며 집안일을 도왔다. 정 씨는 “연탄을 갈아 주고, 밥을 해 주고, 아이들을 매일 씻겨 줬다”며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출가하자 박 씨도 2006년경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수도권 아파트로 독립해 나왔다고 한다.
● “아들이 내 뜻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후 박 씨와 수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정 씨는 형편이 나아지면서 마음속에 남은 빚을 갚기 위해 박 씨를 수소문했다. 그때까지 혼자 살던 박 씨는 기초생활급여 수십만 원에 의존하면서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고 한다. 청각장애 4급 진단을 받고 초기 치매 증상까지 생긴 상태였다. 정 씨의 큰딸은 박 씨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2013년까지 박 씨를 친할머니처럼 돌봤다.
정 씨의 딸이 서울에서 일하게 되면서 정 씨는 2014년 서울 성동구 오피스텔을 구입해 박 씨가 살게 했다. 박 씨가 사망하면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명의는 아들로 해뒀다.
하지만 2021년 정 씨의 아들이 박 씨를 상대로 오피스텔을 비워 달라며 소송을 내면서 부자간 소송전이 시작됐다. 아들은 박 씨에게 밀린 임차료 약 1300만 원을 한꺼번에 지급하라는 요구도 했다.
정 씨의 아들은 재판에서 “전문직으로 일하며 모은 돈과 대출금으로 오피스텔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정 씨는 유모의 성년후견인을 자처하며 아들에게 맞섰고, “애초 아들 명의로 오피스텔이 등기된 것부터 무효”라며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소유권 말소 소송을 대리한 한병곤 변호사는 “정 씨가 지팡이를 짚고 신장 투석 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도 1년 넘게 이어진 재판에서 박 씨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정 씨는 “박 씨가 세상을 떠나면 원래대로 아들에게 오피스텔을 넘기려고 한다”며 “언젠가 아들이 내 뜻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