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83편: 정치인은 미래에 베팅한다
(장자는 신념이었고 택현은 현실이었다)
여름날의 불볕이 세자전을 달구었다. 뜰에 부복한 양녕의 얼굴에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세자를 벗어난 기쁨의 눈물인지 자신을 위하여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고뇌의 땀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임금의 유시가 끝났으나 양녕이 일어나지 않으니 다른 신하들도 일어나지 못했다. 양녕의 뇌리에는 자신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구종수, 관직에 있는 자가 품위없게 건들거리긴 했지만 의리 하나는 일품이었지. 너의 등을 타고 창덕궁 담장을 넘을 때, 숙위군들이 달려오자 종 4품 체신에 영인(伶人-광대) 이오방과 이법화를 넘겨주고 넌 군사들에게 잡혔지. 끌려가 물고를 당했지만 너와 나의 신분을 밝히지 않아 무사했지. 주군을 대신하여 감옥에 간 녀석을 보는 것 같았다. 넌 그거 알았느냐?
숙위군들이 너를 순군옥에 보내지 않은 것은 너의 주먹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지들 근무태만이 탄로날까 봐 안 보낸 거야. 널 순군옥에 넘기면 지들의 목이 달아나거든. 몰랐지? 상처투성이 얼굴로 돌아와 군사들을 패주고 돌아왔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허풍만 없다면 괞찮은 녀석이었는데… 왈패 같은 녀석. 그래도 넌 사나이 중에 사나이였다.
이오방, 사내 손이 여인네 손처럼 그리 생겨도 되는 거냐? 섬섬옥수 같던 너의 손으로 타던 가야금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어 가슴 아프구나. 진표, 넌 어찌 내 취향을 그리도 잘 알았느냐? 역시 넌 채홍이 천성이었나 보다. 여자를 보는 안목이 가히 천재적이었어. 내가 인정한다. 이귀수, 넌 비록 버들가지처럼 흐늘거렸지만 주군을 향한 일편단심. 넌 그래도 주군을 모실 줄 아는 속 깊은 남자였다.' 그래도 괞찮은 사내들이었는데, 안타깝다
양녕의 세자 전성시절.
참외 서리하던 악동들처럼 고락을 같이했던 동무들이다. 지금은 처형되어 다시 볼 수 없지만 양녕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사람들이다. 실록에는 세자를 불의로 이끈 간녕(奸佞)한 무리로 기록돼 있지만 양녕의 가슴에는 잊지 못할 얼굴로 남아 있었다.
이귀수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오며 방유신이 떠올랐다. 더불어 서사민이 생각났다. 방유신은 예쁜 손녀딸을 두었다는 이유 하나로 의금부에 끌려가 곤장 100대를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노인네였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양녕을 도강(渡江)시켜 주고 날벼락을 맞은 양화진 나루터 도승관(渡丞官)이 서사민이다. 양녕에게 바칠 여자를 물색하던 진표가 최학과 옥세침을 놓아 자색이 고운 방유신의 손녀딸을 찾아냈다. 진표와 이귀수의 충동질에 귀가 솔깃해진 양녕이 이귀수에게 이불보(寢袱)를 짊어지게 하여 방유신의 집에 가서 자고 새벽녘 오고(五鼓)에 세자전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진표와 이귀수는 참(斬)에 처해지고 방유신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적몰당했다. 진표는 내섬시 서방색(四房色)으로 세자의 채홍사를 자임했던 인물이다. 평양기생 소앵을 필두로 양녕의 엽색행각의 길라잡이는 진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자전소친시(小親侍) 이귀수는 본래 김한로의 가노로서 숙빈의 유모 소생이다. 판사 이문관은 경기감사 이관의 형으로 세자의 끈을 붙잡고 부자가 함께 떠보려다 추락하면서 서사민에게 날벼락을 안겨주었다. 세자를 몰래 불러내어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철관포(鐵串浦)에서 매사냥을 한 이미는 이문관의 아들이다. 이 사건으로 이문관 부자는 부평에서 압송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양화진 나루터에서 세자를 건너 주고 보고하지 않은 양화도승(楊花渡丞) 서사민도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양녕이 흘린 웃음, 세상을 비웃었을까?
세자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신하들의 눈에 양녕의 웃는 얼굴이 포착되었다. 순간이었다. 지엄한 임금에게서 세자 폐위라는 문책을 당한 양녕이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웃는다는 것은 신하들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양녕이 미소를 흘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세자 지위를 잃는 것이 어이없어서가 아니었다. 불경스럽게 부왕의 조치가 가소로워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귀수가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가던 광경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얼핏 흘린 미소가 신하들 눈에 보인 것이었다. 훗날 이것이 와전되어 양녕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소문이 퍼졌다.
세자를 폐하자고 주청한 백관들의 장소(章疏)가 양녕에게 전해졌다. 소를 받아든 양녕은 세자 폐위를 주청한 신하들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면면들이 알 만한 이름들이다. 한 때는 사람을 놓아 선물을 보내오고 가까이 하고자 했던 인물들도 끼어 있었다.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구나." 생각나는 것은 이것뿐이
었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틀림없는 말인 것 같았다. 등극을 기다리는 세자와 권력의 양지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바람이고 구름인 것만 같았다. 바람이 구름을 모으고, 구름이 모이면 바람이 불고, 속절없는 것이 권력인 것만 같았다.
한편, 개성에서는 세자를 올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빈객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사간원의 상소가 올라왔다.
"저부(儲副)를 세우고 서연을 설치하는 것은 도의를 강명하여 바른 데로 보도하고 사악을 들이지 않으려는 소이입니다. 지금 유도(留都)한 빈객 성균대사성 조용, 이조참판 탁신과 서연관이 보도한 공효가 없어 저부로 하여금 불의한 짓을 자행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저부가 상서할 때 만류하는 말도 없었으니 유사(攸司)에 내려 죄를 묻고 어리라는 계집은 먼 지방에 내쳐서 화(禍)의 싹을 막으소서."
한양에 상주하고 있던 빈객들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이어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다. "전하께서 즉위하던 해에 저부를 세워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문신으로 요좌(僚佐)를 겸하여 좌우에 둔 것은 미리 기르고 평소에 가르쳐 그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날마다 선한 데로 나아가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공효를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빈객(賓客) 조용 변계량 김여지 탁신 보덕(輔德) 조서로 필선(弼善) 유직 박서생, 문학(文學) 우승범, 사경(司經) 유구사·유승유, 정자(正字) 이사맹 등이 바른 심술과 밝은 도학으로 진강하지 아니하고 그저 예예 하고 무조건 따라서 세자로 하여금 불의에 빠지게 하였으니 서연관 등은 그 직첩을 거두고 안율(按律)하여 후래를 경계하소서."
"빈객(賓客)은 논하지 말라. 서연관은 파직하고 보덕(輔德) 이하는 관직을 파면하라." 서연청 상주 빈객 조용과 탁신은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다. 세자가 폐위되는 초유의 상황에서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태종도 일벌백계 차원에서 모두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허나 변계량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변계량을 제외하고 처벌할 수 없었다. 변계량과 김여지를 구명하려는 임금의 뜻에 따라 조용과 탁신은 화를 면했다.
태종이 신봉하는 장자는 과거형이고 택군은 미래형이었다
영의정 유정현이 양녕과 숙빈을 비롯한 가속(家屬)을 춘천에 내치도록 청했다. "성녕대군이 졸(卒)하면서부터 중궁이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날이 없다. 제(禔)를 가까운 고을에 두기를 청하여 소식이라도 자주 듣기를 바라고 있다."
"경도(京都)에 머물러 둘 수는 없습니다." 유정현이 반대했다.
"폐 세자 이제를 광주에 안치하라." 태종은 영의정의 청을 따랐다.
폐 세자 양녕에게 유배령이 떨어졌다. 양녕을 경기도 광주에 안치하라 명한 태종은 문귀와 최한을 한양에 파견하면서 배치관(陪置官)으로 첨총제(僉摠制) 원윤을 임명했다. 유배지까지 차질 없이 호송하라는 것이다.
태종은 문귀를 별도로 불렀다. "경은 종실에 인척 관계가 있으니 세자가 경을 본다면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경이 가서 나의 말을 세자에게 전하라." 말을 마친 태종은 목이 메었다. 가느다란 통곡 소리도 들렸다. 아들을 내치는 부왕. 인간적으로 괴로웠을 것이다. 세자를 쫓아내는 임금. 군주로서 통석의 감이 있었을 것이다. 장자승계를 신봉했던 태종이 현군을 택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허나, 태종 이방원에게 장자는 신념이었고 택현은 현실이었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84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