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에 스며 있는 고통
손바닥에 놓인 이 머리카락
한올 눈 속에 들어가면
불편과 고통을 일으키네.
라자푸트라 야쇼미트라
<바수반두의
아비달마구사론에 대한 주석>
●●●
지금까지 설명한 두 가지 고통,
그리고 '자연스런 고통'과
'스스로 창조한 고통' 으로
불리는 것의 밑바닥에는
'모든 곳에 스며 있는 고통'
으로 알려진 것이 있다.
이 형태의 고통은 그 자체로는 눈에
띄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며, 또한
'변화의 고통' 과 관련된 일종의
중독성 있는 기쁨 추구도 아니다.
이것은 의식이 자각하는 차원
바로 아래에 계속해서 존재하는.
일종의 가려움 같은
근본적인 불편함이라고 하면
가장 잘 설명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당신은 회의나 강의 시간에 혹은
그냥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
매우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다.
하지만 의자가 얼마나 편안하든
상관없이 어떤 시점이 되면
당신은 움직이고 싶은 충동에
엉덩이를 들썩이거나 다리를 뻗는다.
이것이 '모든
곳에 스며있는 고통' 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에
있지만 결국에는 쑤시는 불편함이
당신을 잡아당기며 속삭인다.
"음, 그다지 완벽하지는 않아. 만일
이렇게 하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그 가려움, 미묘하게 쑤셔 대는
불만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주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경험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한다.
주위 세상, 우리의 육체,.
우리의 생각과 감정, 심지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조차 끊임없이 유동적이며
원인과 조건들의 멈추지 않는 상호
작용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 자체가 또 다른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이 된다.
이 끊임없는 변화를 불교 용어로
'무상'이라고 부른다.
항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붓다는 여러 가르침에서
이 움직임을 강의 흐름에서 일어
나는 작은 변화들에 비유한다.
거리를 두고 보면 매 순간의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다.
오직 강둑에 앉아서
자세히 물속을 들여다볼 때만
물결무늬의 작은 변화들, 모래알의
이동, 물밑에 사는 물고기와 다른
생물체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으며
시시각각 진행되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변화들을 알아차리게 된다.
무상은 많은 차원에서 일어나며
그중 일부는 눈에 띌 정도로 분명하다.
예를 들어.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도로변 아래 공터가 공사 현장이 되어
기초 세울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붓고
철근 구조물을 세우느라 소음
가득한 분주한 장소로 변해 있다.
건물 뼈대를 세우기에 앞서
다른 인부들은 수도관과
가스관을 묻고 구조물 구석구석에
전기선을 잇느라 바쁘다.
나중에는 또 다른 팀이 건물안에
벽을 세우고 창문을 설치하고
그 다음 나무와 잔디를 심고 정원을
꾸미고 간단한 조경도 할 것이다.
마침내는 공터 대신 완성된
건물 하나가 들어서며
드나드는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이 명백한 변화의 차원을
불교 가르침에서는
거친 무상' 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공터의
변화를 똑똑히 볼 수 있으며,
설령 그 새 건물이 시야를 가리거나
혹은 대형 상업건물이라서 오고 가는
교통량의 증가로 불편을 겪게 되면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변화가 우리를
몹시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거친 무상은 계절의
변화에서도 느껴진다.
몇 달 동안 날씨가
몹시 춥고 땅에 눈이 쌓인다.
몇 달 후 나무에 싹이 나고 이른
꽃들이 얼굴을 내민다. 얼마쯤 지나
싹이 잎사귀로 변하고 들판과 정원이
많은 꽃들로 풍성해진다. 그러다가
가을이 온다. 꽃은 시들고 나뭇잎
색이 울긋불긋 변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 겨울이 다시 찾아온다.
나뭇잎과 꽃들은 사라지고
대기가 차갑게 바뀐다.
때로는 눈이 내리고 때로는
투명한 유리로 코팅한 것처럼
얼음이 대지를 뒤덮는다.
이렇듯 거친 무상의 결과는 쉽게
드러난다. 하지만 무상은
그것뿐 아니라 또 다른 쉼 없는
변화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붓다는 그것을
'미세한 무상' 이라고 불렀다.
즉 마치 '풍경 뒤편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거의 알아차리기 힘든
매우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조건들의 변화이다.
미세한 무상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살펴보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범주에서
시간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일 년의 관점에서 이 세 가지 구분을
보면 작년. 올해. 내년이 있다.
하지만 작년은 사라졌고
내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작년과 내년은
시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이나 생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오로지 올해만이 남는다.
하지만 일 년은 열두 달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내게 조금 헷갈린다.
왜냐하면 서양 달력은 12개월로
되어 있는 반면 티베트 달력에는
13번째 달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 달력에 따라
지금이 6월이라고 해 보자.
한 해의 6개월은 이미 지나간 반면
우리 앞의 6개월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은 이번 해에서
이번 달로 영역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한 달은 서양 달력에서
30일 혹은 31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이 6월 15일이라고 해 보자
6월의 반은 이미 지났고
남은 반은 아직 오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는 오로지 오늘이다.
하지만 하루는 또다시
24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일 지금이 정오라면 하루의
반은 지나갔으며 하루의
남은 반은 아직 도착하기 전이다.
우리는 다시 한 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1초를 백만 분의 1초로,
백만 분의 1초를 십억 분의 1초로
과학자들이 측정할 수 있는 만큼
미세하게 쪼개어 나갈 수 있다.
시간의 이 작은 조각들은 늘 움직
이면서 우리에게서 날아가 버린다.
그 변화를 우리의 의식이
자각하기도 전에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된다.
신경과학자들은 감각기관이 시각적
자극을 접수해 신호를 뇌로 전달하고
우리의 의식이 그 신호를 인지해서
단기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해당
하는 0.5초라는 것을 측정했다.
'지금'이라는 생각을
뇌가 접수시킨 그 순간조차 이미
'과거' 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바람이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시간을 멈출 수 없고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를 중단시킬 수 없다.
삶을 현재시점으로 '되감기'
할 수 없고미래의 어떤 장소로도
'빨리감기' 할 수 없다.
하지만 무상을 받아들여 그것과
친구가 되는 법은 배울 수 있으며,
나아가 변화를 마음과 감정의
호위대로 여기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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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기초교리
모든 곳에 스며 있는 고통
고구마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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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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