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삶
사도 18,1-8; 요한 16,16-20 / 부활 제6주간 목요일; 2024.5.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수난을 앞두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예고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선교활동의 성과를 시기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저지른 박해 때문에 의기소침해 졌으나 선교활동의 동지들 덕분에 다시 의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더 이상의 선교활동이 어려워진 코린토를 떠나면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배에 탔는데, 그들은 천막 만드는 동업자로 만나서 선교활동의 동지로까지 발전한 사이였습니다. 필리피에서 만난 리디아가 그러했듯이, 이 부부도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유다인들이었지만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에 있어서 꼭 필요한 협조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신원을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찾는 유다인들 특유의 정체성을 간직하면서도, 편협한 선민의식 대신에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을 전하라는 개방적이고 보편적 선교의식을 지니게 된 귀한 동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적 동지애 덕분에 선교활동에서 생겨난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열두 제자 출신의 사도들과 달리 ‘노동하는 선교’를 실천한 사도 바오로의 선교 활동이 지닌 뜻을 좀더 자세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뼛속까지 율법에 충실했던 유다인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로 매우 개방적이고 대단히 유연하게 사고방식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기성 사도들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선교하려는 것을 알고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낯선 땅으로 찾아다녔습니다. 소아시아와 유럽을 향한 선교 활동이었습니다. 또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코린토에서 만났을 때 천막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을 알고는 함께 동업을 했습니다. 이미 사도 바오로도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와 함께 일하면서 이 부부는 동업자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천막을 만드는 일은 대단히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도 바오로는 이 일로 생계비를 벌면서 선교활동비까지도 마련했습니다. 그가 각지에 세운 공동체에 편지를 써 보낼 때 소요되는 양피지를 구입하는 돈도 천막을 만들어서 충당했을 것입니다. 양가죽을 무두질해서 만든 것이라서 양피지는 대단히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투자로 마련한 양피지에 쓴 편지는 여러 공동체에서 돌려가며 읽었고, 이것이 오늘날 미사의 말씀전례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 양피지 편지는 그 속에 담긴 메시지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긴요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들의 관계망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천막을 만들어 생활비와 활동비를 충당하는 고된 노동을 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오로는 도덕적으로 감화를 줄 수 있는 생활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공동체로 이끌었습니다. 물로 세례를 주어 신자를 만드는 일보다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생활을 하도록 감화를 주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선교 활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가고, 노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수많은 선교사들과 체계적인 관계망을 활용하는 동시에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선교활동은 오늘날 새로운 선교과업을 앞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끈 유학자들의 지도부가 신유박해(1801년)로 거의 대부분 치명이나 유배형을 다하여 와해된 상황에서, 교회를 지킨 이들은 중인 이하 신분의 평범한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치명 당한 교우들에 대한 슬픔과 자신들도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근심을 지닐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은 서로가 서로를 믿음의 벗이라는 뜻으로 ‘교우(敎友)’라고 부르며 지내던 형제애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신앙 선조들은 백 년 동안 가해진 끔찍한 박해 속에서도 전국의 교우촌에서 서로 사랑하는 형제애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전통적으로 물려받았으나 일부 왜곡되어 있었던 인본적 신 관념까지도 정화시켰습니다.
본시 우리 민족은 5천 년 전부터 삼신(三神) 신앙, 즉 하늘도 땅도 그리고 하늘이 땅에 내신 단군도 신이라고 여기는, 이른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을 대대로 간직해 왔습니다. 여기서 인신(人神), 즉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에게서 나온 단군도 신이라고 여기던 이러한 사상은 단군만이 아니라 한민족 모두가 하늘과 땅의 자손인 천손임을 자각케 하여 신적인 품위로 살아감으로써 홍익인간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인간 본위의 신관에서 나온 산물이었습니다. 평등의 가치를 고귀하게 내세운, 이 인본적인 신적 품위가 천손사상(天孫思想)의 진면목이요 고대 한국인들의 정체성이 정신적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세계관입니다. 이는 중국인이나 일본인 등 주변 민족들의 건국사화에서는 물론 서양의 어느 민족의 건국사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신관인 동시에 우리 민족 역사의 초창기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뚜렷한 흔적입니다.
하느님께 근원을 둔 민족이라고 자신들의 신원을 의식하던 정체성과, 천손의식을 통해 평등을 지향하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던 개방적 보편성이 담긴 이 신관은, 민족 공동체가 함께 공감하며 전승한 집단무의식 차원에서 형성된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유전자로서 역사적 전승 능력을 지닌 까닭에 그 원형이 쉽게 해체되지 않고 지속되기 마련입니다. 특히 인본적인 신적 품위가 새겨진 천손의식이야말로 한민족 고유의 정신사상의 핵심으로서,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 교리에서 진리를 알아보게 한 원동력이 되어 주었고 교우촌의 형제애로써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일러준 계시 진리에 따라 인본적 신 관념은 삼위일체 신관으로 정화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불교와 유학 등 외래 종교와 사조들이 지배계급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유입되어 군림해 온 동안에, 민간에 숨어 들어가 무속화되어 버린 전통 사상에서 많은 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귀신이나 도깨비라고 부르는 신들은 사람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좋거나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여기는 영적 존재들로서 무속행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범신론적인 신 관념에 바탕한 점술이나 역술의 무속행사로는 개인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는 부락제나 해원(解冤) 굿 같은 데에서 보듯이 선한 지향을 지닌 무속행사들에 대해서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인한 영의 작용이라고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길흉화복을 신적 개입으로 조정해 보려는 점술 및 역술 등의 미신행사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무속행사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신 관념의 정화와 식별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 바탕은 천손의식에 담긴 신적 정체성과 홍익인간 사상에 담긴 개방적 보편성이요, 그 기준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듯 정화되고 식별된 신 관념에서라야 신앙인들이 일상적으로 복음의 기쁨,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보편 초대교회에서 나타난 선교적 동지애나 한국 초대교회에서 나타난 교우촌의 형제애에서 보듯이, 일상생활에서든 사도직 활동에서든 사랑이 발휘되어야 비로소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인간 역사와 현실에 개입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관념이나 사상 같은 인간 이성의 작용뿐 아니라 정서나 문화 같은 인간 감성의 작용도 다스리실 수 있는 영적인 기운을 본질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일상적으로 누리는 방법은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맛을 음미하며 그에 따라 삶의 방향을 찾아나갈 때 그분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복음의 기쁨’이라는 사도적 권고를 보내어 자신의 사목 방향을 알려주었습니다(2013년). 교황은 겸손하게 ‘사도적 권고’ 형식으로 반포했지만, 내용상으로는 역대 교황들이 반포한 어떤 회칙보다도 내용이 풍부하고 깊이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복음과 관련된 한 항목을 인용해 드립니다.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영광으로 빛납니다. 복음서는 기뻐하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사실은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입니다.(루카 1,28 참조)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요한은 태중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1 참조)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실 때, 요한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그래서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성령 안에서 즐거워” 하셨습니다.(루카 10,21) 그분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분의 차고 넘치는 흘러나오는 기쁨을 마십니다. 그분께서는 다음처럼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기뻐하였습니다.”(요한 20,20)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첫 그리스도인들이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다.”(사도 2,46)는 구절을 읽습니다.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사도 8,8) 그래서 제자들은 박해를 당할 때조차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사도 13,52) 세례를 받은 내시는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사도 8,39) 바오로를 지킨 간수와 “온 집안이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더불어 기뻐하였습니다.”(사도 16,34) 우리가 기쁨의 이 큰 대열에 합류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 5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