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쿵.
아니 쿵보다 조금 더 둔탁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 든 첫번째 생각은 '제기랄'이었다. 내가 이렇게 사고를 칠 줄 알
았더라면 그냥 조용히 이놈의 면허증을 영원히 장롱 면허로만 간직했을 터였다. 괜히 차를 끌고 나와서 이런 사고를 치다니.
나는 속으로 '오마이갓'을 외치며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늦은 시각도 시각이지만 장소 자체가 한적한 곳이라서 그런지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빨간불을 보고 급정거를 하다가 실수로 후진을 해버린 내 차 뒤에서 어떤 남자의 신음소리만
이 들려올 뿐이었다.
" 저... 괜찮으세요? "
차 트렁크에 쿵하고 받쳐 쓰러진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차 뒤로 돌아가는 그 짧은 순간 내내 나는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차 뒤에는 말쑥하니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한 젊은 남자가 오른쪽
팔을 감싸쥔 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 저기요... "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내 두번째 목소리에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제기랄. 이거 아무래도 해결이 쉽게 날 것 같지 않은
상대군. 남자는 검은 눈썹을 있는대로 찌푸린 채 상당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엔 말하지 않아도
성질 더러운 놈이라고 써붙여 있었다. 가만... 이거 왠지 낯익은 얼굴인데.
" 이봐. "
혼자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고 있는데 남자의 왠지 모를 거만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한 번 더 끙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차 트렁크를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전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한 채, 자신의 수트에 묻은 하얀 먼지들을
다소 무신경한 동작으로 툭툭 털어냈다. 내 앞에 우뚝 선 그는 나보다 한뼘은 더 컸다.
" 이게 괜찮아보여? "
" 네? "
" 니 눈엔 이게 괜찮아보이냐고. "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오른쪽 팔목의 옷깃을 걷어부치더니 내 눈앞에 자신의 손목을 들이밀었다. 차에 받친 거 치고는 그닥
멀쩡하구만. 남자가 내 앞으로 들이민 손목은 다행히 그렇다할 외상은 없이 조금 빨갛게 부어있을 뿐이었다.
" 다행히 많이 다치신 것 같지는 않으시네요. 합의는 얼마 정도 원하시죠? "
남자의 거만한 태도에 질려버린 나는 핸드백에서 주춤주춤 지갑을 꺼내들었다. 남자의 외관과 여태까지의 말투, 행동으로 보건
대 어마어마한 액수를 부를지도 모르는 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놈과 경찰서까지 간다면 골치가 더 아플것은 분명하거니와
이 간단한 사고 소식을 굳이 아빠에게까지 알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내 선에서 돈으로 놈을 입막음하고자했다.
" 백만원이면 될까요? "
나는 지갑에서 수표 10장을 팔랑팔랑 꺼내들었다. 아예 초반부터 놈의 기를 꺾어서 입막음을 해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다.
실수로 후진하는 차에 팔 하나 부딪힌거 갖고 백만원이나 되는 거액을 물어주는 사람은 흔치 않을 테지. 나는 가만히 놈의
표정을 주시하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놈의 깜짝 놀라는, 그리고 기죽는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이
빗나가는데는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쥔 채 뚜벅뚜벅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차 뒷문을 열고 자리에 올라탔다.
" 뭐... 뭐하시는 거에요? "
어이가 없어진 나는 내 손에 쥐어져있던 수표 열 장을 핸드백에 아무렇게나 쑤셔박은 채 쿵쿵쿵쿵 차로 다가가 뒷문을 거칠게
열어제꼈다. 그러자 놈은 자신의 오른 손가락을 하나씩 까딱까딱거려보이며 무신경하게 낮은 목소리를 내뱉어냈다.
" 삼성의료원으로 가지. "
" 네? "
" 삼성의료원으로 가자고. "
" 저기요. "
"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서운거야. 가서 검사부터 받아봐야겠어. "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주시하며 가만히 오른쪽 입꼬리를 희미하게 말아보였다.
30분 후.
나는 놈의 엑스레이 검사가 끝날 때까지 병원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 안테나를 질겅질겅 씹어댔다. 겨우 팔 한짝
차에 부딪힌 거 가지고 놈은 고집을 피워 결국 병원까지 와서 온갖 정밀 검사를 다 받는 중이었다. 잠시 후 검사실 문이 열리고
피곤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놈은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 여기. "
짜증이 가득찬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던 내 무릎 위로 놈이 툭하고 던진 것은 병원 검사비와 진료비 청구서였다. 놈이 건넨
청구서 목록을 가만히 살펴보던 중 나는 놈을 향해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 잠깐... 입원비는 왜 있는 거에요? "
" 전치 2주. "
" 네? "
"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지만 근육에 손상이 갔다더군. "
" 말도 안되. 겨우 그거 부딪힌거가지고 전치 2주요? 입원이라고요? "
격분한 나는 한 손에 놈이 던져준 청구서를 움켜쥔 채 벌떡 일어나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나에게 대꾸했다.
" 이봐, 피해자는 나야. 너는 가해자고. "
" ... "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씩씩거리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어깨가 오르락내리락거렸다.
" 이 명함 뒤에 계좌 번호 적어뒀으니 곧장 내일 내로 입금하도록 해. "
" ... "
나는 놈이 건네는 명함을 뺏다시피 받아서는 코트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박은 뒤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놈에게서 한 5미터
쯤 멀어졌을까. 구두 소리를 내며 병원 복도를 헤집고 나가는 내 뒷통수에 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 입원기간 동안 간병인 붙이는 거 잊지마. 명함 뒤 내 연락처로 미리 연락하도록. "
병원을 나서는 내 주먹이 나도 모르게 꽉 쥐어졌다. 정말 재수 똥 밟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나를 물먹이다니.
내가 아빠 몰래 차 끌고 나와서 멍청하게 사고를 친 상황만 아니였더라면, 넌 아주 큰 코 다쳤을거야. 감히 내가 누구 딸인데.
듣도 보도 못한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난 탓이었을까. 아니면 예상치 않은 굴욕에 내 자존심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직감했기 때문이었을까. 그 날 밤은 유난히도 잠을 이룰 수 없는 심난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 아가씨, 하마터면 그냥 세탁 맡길 뻔 했네요. 여기 주머니에 들어있던 거에요. "
집안일을 총괄하는 오씨 아줌마로부터 건네받은 명함 한 장. 내가 어제 무심코 코트 주머니에 쑤셔박아놓고 하룻밤 사이 잊고
있었떤 놈의 명함이었다. 그리고 그 명함을 뒤집어 본 순간. 나는 무너지듯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놈의 정체가 드러난 순간이자 폭풍우를 동반한 거대한 어둠의 그림자가 내 눈앞에 드리워진 순간이었다.
- 남자의 재발견 01.
첫댓글 기대기대~~~~~ㅋㅋㅋㅋㅋ
뭐야 놈의 정체가.............ㅎㅎ 작가님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와우~정체가무엇일가여!재밌게잘봤엉요!다음편기대할께요!
머지 ? ㅋㅋ재미있습니다 ㅋㅋㅋㅋ
ㅋㅋ 남자의 정체가 도데체 뭐길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