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84편: 도성을 떠나는 양녕
( 28의 숫자에 숨어있는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
세자 폐위 후속 조치를 착착 진행하던 태종은 폐 세자 이제를 양녕대군으로 봉하고 세자 충녕에게 관교(官敎)를 내려주었다. 또한, 충녕의 부인 심씨를 경빈으로 봉(封)했다. 심온의 딸이 세자빈이 된 것이다.
청성백 심덕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조판서 직에 있던 심온.
딸이 세자빈이 된 가문의 영광이 죽음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신은 물론 아무도 몰랐다.이어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유정현을 영돈녕부사로 보내고 한상경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세자 축출 작업에 총대를 멘 유정현을 쉬게 한 것이다. 예문관 대제학이
던 변계량을 예조판서로, 김여지를 판한성부사로 내렸다. 문책성 인사다. 서연청도 확대 보강했다. 좌의정 박은을 세자사(世子師)로 삼고, 옥천부원군 유창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하는 한편 유관을 예문관대제학 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맹사성을 공조판서 겸 세자우빈객으로 삼았다. 좌빈객은 변계량이 있던 자리다. 맹사성의 세자우빈객 임명으로 세종시대를 열어갈 떠오르는 샛별이 등장한 것이다.
태종으로부터 폐세자 양녕을 광주에 안치하라는 특명을 받은 일단의 무리들이 한양에 입성했다. 세자전을 접수하기 위해서다. 총책 문귀를 앞세우고 서전문을 통과한 일행은 창을 꼬나쥔 군사들을 앞세우고 운종가를 행진했다. 때아닌 군사들의 출현에 도성의 백성들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수군거렸다.
"아들 쫓아내면서 웬 군사들이야?" "그러게 말이야, 폐 세자가 무슨 힘이 있다고, 꼭 점령군 같아…." 첨총제(僉摠制) 원윤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세자전으로 들이닥쳤다. 놀란 부녀자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우왕좌왕했다. 군사들은 창을 앞세우고 눈알을 부라렸다. 살벌했다. 겁에 질린 이들을 세자빈 거처로 몰아넣어라고 원윤이 소리를 질렀다. 군사들이 닭 몰이하듯 가속들을 숙빈 거처로 몰아넣었다. 세자전 뜰에 양녕 혼자 부복했다. 문귀가 목에 힘을 주며 전교(傳敎)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말, “네가 사랑하던 여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너로 하여금 새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백관들이 너를 폐(廢)하자고 청했기 때문에 부득이 이에 따랐으니 너는 그리 알라. 네가 옛날에 나에게 고(告)하기를 '나는 자리를 사양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는데 내가 불가(不可)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제 너의 자리를 사양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바라던 바이다. 효령대군은 바탕이 나약하나
충녕대군은 고명(高明)하기 때문에 내가 백관의 청으로 세자를 삼았다. 군신(群臣)이 모두 너를 먼 지방에 안치하도록 청하였으나 중궁이 가까운데 두기를 원하여 너를 광주에 안치하는 것이다. 비자(婢子)는 13구를 거느리되 네가 사랑하던 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노자(奴子)는 장차 적당히 헤아려서 다시 보내겠다. 전(殿) 안의 비품은 모조리 다 가지고 가도 무방하나 네가 가졌던 탄궁(彈弓)은 전(殿)에 두라."
- <태종실록>
전교가 끝났다. '탄궁을 두고 가라'는 말은 까칠하게 들렸고 '네가 사랑하던 자들은 모두 거느리고 살라'는 말은 귀에 쏙 들어왔다.
'그렇다면 부왕께서 어리를 허락하셨단 말인가?' 뛸 듯이 기뻤다. 하마터면 기쁨의 미소를 흘릴 뻔했다. '부왕에게 죄를 짓고 귀양 가는 몸. 아무리 좋아도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 스스로 다짐한 양녕은 매무새를 고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엎드려 있던 양녕이 머리를 들었다. "옛날에 사양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다가 금일에 죄를 얻었다."
말을 마친 양녕은 북쪽을 향하여 삼배(三拜)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우를 휘둘러 본 양녕은 미련 없이 세자전을 떠났다. 숙빈과 가속들이 뒤를 따랐다. 문 밖에서는 인의가 말을 대기하고 있었다. 말에 오른 양녕은 앞으로 나아갔다. 창을 든 군사들이 앞뒤를 에워쌌다. 호위가 아니라 호송이다. 양녕의 유배행렬이 정선방 다리에서 동쪽으로 꺾었다. 흥인지문 가는 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 종묘에 이르렀다. 창덕궁 담장을 뛰어넘어 여자를 만나러 가는 비밀 통로였으나 태조를 비롯한 조상들을 모신 곳이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기약이 없다.
"말을 잠시 멈추어라." 하마비(下馬碑)에서 내린 양녕은 외대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전에 들어가 조상을 배알하고 싶었지만 귀양가는 죄인의 몸으로 출입할 수 없다. 삼배를 마친 양녕이 머리를 들었다. 창엽문(蒼葉門) 편액이 시야에 들어왔다. 뭔가 강렬한 끌림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이 경복궁 명칭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지으면서 창엽문도 작명했다고 들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편에서 경복(景福)이란 명칭을 따왔다고 말하면서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근면하게 정사를 살피라는 뜻으로 근정전(勤政殿) 이름을 지었다는 정도전이 창엽문 이름을 작명하면서 아무런 뜻도 없이 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엽문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다시 한 번 창엽문 편액을 바라
보았다. 근정과 같이 직설적인 뜻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한자(漢字)는 표의문자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글자를 풀어 보았다. 창(蒼) 자를 해자(解字)하니 艸, 八, 君이 나왔다. 숫자는 스물여덟이었다. 엽(葉) 자도 풀어 보았다. 艸, 世, 十, 八이므로 똑같이 28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숨은 그림을 찾은 기분이었다.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28이다.'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한 양녕은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28에 숨겨진 비밀을 알 수 없었다. 창엽(蒼葉)이라는 글자 속에 숨어 있는 해자와 합자(合字)의 비밀.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이었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저하, 갈 길이 머옵니다." 문귀가 재촉했다. 비록 유배가는 폐 세자이지만 저하로 깍듯이 예우했다. 양녕이 말에 올랐다.
양녕이 풀지 못한 창엽문(蒼葉門)의 비밀. 28이라는 숫자를 숨겨놓은 정도전의 의도를 놓고 훗날 설(說)이 분분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세자빈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위패가 종묘에 봉안된 것을 마지막으로 종묘 봉안이 끝났으므로 조선왕조가 28위(位)라는 설이 그 하나다. 마지막 왕손 이구가 최근에 영면하였으니 조선 왕조는 28세(世)라는 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왕조를 폄하하기 위하여 일제가 왜곡했다는 설.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모르지만 그 이름을 지은 정도전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600년 전 인물 정도전이 진정 조선왕조를 28세로 예측했다면 그의 예지력에 탄복할 뿐이다.
"경은 무슨 일로 따라오는가?" 양녕이 문귀에게 물었다.
"호송(護送)입니다." "호송이라고?" 양녕은 코웃음을 쳤다.
"이 땅을 다시 밟을 일이 없을 것이다. 경은 돌아가라."
"나루터까지 모시라는 어명입니다." 문귀가 물러서지 않고 따라 붙었다.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한강 나루터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과 화물이 통행하는 교통의 요충이었을 뿐만 아니라 죄인을 내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강과 임진강을 아우르는 왕도권은 유배처로 이용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 기준이 한강이었다. 임금이 살고 있는 강북이 신성한 땅이었다면 강남은 보통의 땅이었다.
양녕 일행이 동대문을 통과했다. 도성을 벗어난 것이다. 세자전을 벗어나고 도성을 벗어나니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돌을 하나씩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성문 밖에는 나뭇짐이 줄지어 있었다. 장작과 가랑잎, 그리고 관솔과 숯이 잔뜩 지워진 지게들이 작대기에 받쳐있고 나무꾼은 없었다. 안암골과 배봉산에서 새벽에 출발한 나무꾼들이 짐이 빨리 팔리면 곧바로 돌아가지만 팔지 못한 나무꾼들은 허기를 채우느라 주막에서 탁배기에 목을 축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짐을 뒤로하고 숭인방을 지날 때였다. 유배행렬을 향하여 버선발로 뛰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85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