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림을 보기 보다는 한 여류 화가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림은 몇 점 없고 이야기만 잔뜩
있습니다. 지루하시면 언제든지 바람 쐬러 나가셔도 좋습니다. 살아서는 불꽃이었고 죽어서는 신화가 되었던 여인,
마리 바슈키르체프 (Marie Bashkirtseff / 1858~1884)입니다.
자화상 Self-Portrait / 1880
22살의 마리의 자화상입니다. 창백한 얼굴과 얇은 입술에서 지적이고 자신만만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녀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은 깊은 눈입니다. 쉽게 물러서지 않는 눈빛이죠.
마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출생했습니다. 지방이기는 했지만 귀족 집안이었고 금전적으로는 부유했습니다.
살던 집은 거대했고 집 주변의 풍경은 수려했습니다. 그러나 마리 부모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마리가 태어난 다음 해 1859년, 마리의 어머니는 마리와 막 낳은 동생 폴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일종의 별거인 셈이죠. 마리가 12살이 되던 1870년 5월, 그녀의 어머니는 친정어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친척 몇몇과
가족 주치의를 대동하고 러시아를 떠나 서부 유럽으로 나섭니다.
마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4년이 남은 시점이었습니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 머물면서 마리는 최고의 선생님들로부터 교육을 받습니다.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를 이미 알고
있었던 마리는 영어, 이태리어,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 문법과 수사학, 역사와 신화학, 문학과
음악 그리고 미술도 배웠습니다. 특히 음악을 좋아했던 그녀는 피아노와 기타, 하프 연주에 뛰어났고 성악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가끔 하느님은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재능을 몰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아차! 싶어서
얼른 데려 가시지만요.
푸른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젊은 여인 Young Lady Wearing a Hat with a Blue Feather / 1878 / 55cm x 46cm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었던 마리는 오디션을 몇 번 보았습니다. 그러나 급성 후두염을 앓고 난 뒤 목소리가 성악에
어울리지 않게 되자 꿈을 음악에서 미술로 바꿨습니다. 그녀는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니스에 있는
별장을 팔고 파리로 이사를 가자고 엄마를 조르기 시작합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가 유일하게 인정한 미술학교는
에콜 드 보자르였습니다. 그러나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19살의 마리는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
합니다. 마리가 차 끓이는 주전자를 든 하인을 대동하고 털이 장식된 코르셋 드레스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자 학교가
뒤집혔습니다. 참 매력적인 여인입니다 --- .
화실에서 In the Studio / 1881 / 154cm x 186cm
마리의 아카데미 줄리앙 교실입니다. 그림을 따라 가 보겠습니다. 그림 속에는 모두 16명의 학생이 있습니다. 우선
가운데 옅은 하늘색 옷을 입은, 그림 그리는 학생이 보입니다. 빛도 가장 많이 받고 있고 그림에 가장 몰두하고
있는 ‘모범생’입니다. 예전에 궁금했던 긴 막대의 사용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손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장치였군요.
다음에 반 나체로 긴 창을 들고 있는 잘생긴, 어린 모델이 눈에 들어 옵니다. 벽에 걸린 액자 속의 그림은 아마도
살롱전에 당선된 학생의 작품이겠지요. 학생들은 그림에 몰두해 있거나 쉬고 있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의
두 소녀는 뭔가에 대해 토의 중입니다. 마루 결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를 보고 웃고 있는 소녀가 있습니다. 환영의
웃음인가요? 모델 옆에 있는 해골은 아마 해부학을 공부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그럼 마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모델을 관찰하기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른쪽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등을
보이고 있는 학생 입니다. 이 작품은 마리가 색깔을 사용하는 능력과 사실주의적인 표현 방법 그리고 큰 크기의
작품에 얼마나 재능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우시카의 고통 Nausicaa’s Pain / Bronze / 1883 / 높이 83cm
나우시카는 오디세우스가 기억을 잃고 물에 떠밀려 도착한 스케리아 섬의 왕, 알키노우스의 딸입니다. 오디세우스를
구했을 뿐 아니라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많은 역할 해 준 현명하고 적극적인 여인이었습니다. 조각가이기도
했던 마리의 작품인데, 얼굴을 묻고 괴로워하는 나우시카의 모습에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마리의 모습을 읽어
봅니다.
마리는 14살 때부터 감추는 것 없는 일기를 씁니다. 내용은 진솔하다 못해 조심성이 없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 일기 속에는 예술가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당시 부르주아 계급의
생활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남긴 일기는 20,000 페이지가 넘고 일기장의 권수로는 106권입니다. 그녀의
일기는 오늘날에도 번역이 되어 출간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기 작가로도 분류됩니다. 그녀가 23살이
되던 1881년에는 ‘여성시민’이라는 페미니즘 신문에 Pauline Orrel 이라는 가명으로 몇 개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당시 글에서 인용한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번역이 걱정이기는 하지만 대충 이런 뜻입니다.
-- 개를 사랑하게 해달라, 오직 개만을 사랑하게 해달라. 남자와 고양이는 가치 없는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
남자의 가치가 개 값보다도 못하다니, 좀 심한 것 아닌가요? 참 나 -----.
집합 The Meeting / 1884
여섯 명의 아이가 보이는군요. 키가 가장 큰 아이가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어린 친구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신발 끈이 없는가 하면 묶지 않은 아이도 있습니다. 지저분한 손을 허리에 척 걸쳤거나 엉덩이
부분에 뒷짐을 지었군요. 옷도 낡아 보입니다. 그러나 표정들은 모두 예술입니다. 뭔가 한 건을 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 혹시 오른쪽으로 사라지고 있는 여자 아이의 광주리에서 뭔가를 슬쩍 한 것은 아닐까요? 이 녀석들!
하늘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높고 색 바랜 나무 울타리가 아이들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그 것은 외부 세계와의
격리일 수 도 있습니다. 걸어가는 여자 아이의 머리 위쪽에 유일하게 푸른 풀 포기가 보이는데 ---- 탈출구일까요?
이 작품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던 해 살롱에 출품되었습니다. 화가들은 수상작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심사위원들은
작품의 수정을 요구했고 그녀는 거절했습니다.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은 프랑스 정부가 구입합니다.
19살의 늦은 나이에 회화를 시작했지만 그녀의 재능은 많은 선생님들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1881년 살롱전에
작품이 출품됩니다. 다음해 러시아 여행을 끝내고 파리에 돌아 온 그녀는 급속하게 자신의 몸이 망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해 마리는 그녀의 마지막 연인이자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줄 바스티엥 르파주를 만납니다. 그의
작품에서 고요한 자연을 보았던 마리는 르파주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파리의 외진 곳을 걷다가 그녀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남루한 노동자, 가난하지만 유쾌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녀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춥고 젖은 파리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발자크나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가을 Autumn / 1883
길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고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른쪽 두 줄로 늘어선 가로수 중에는 지나간
여름의 흔적을 아직 붙들고 있는 것이 있지만, 대부분은 가을을 색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한 때 사람들의
다리를 잠시 잡아 두었을 벤치는 바람에 넘어져있습니다. 오른쪽 다리를 건너면 또 다른 길이 이어지겠지요.
가을이 쓸쓸한 이유는 겨울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대에 감염되었던 결핵은 점차 그녀의 몸을 갉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미술 공부를 계속 해야 했지만 치료를 받기
위해 이 곳 저 곳을 다니는 바람에 그 것도 툭하면 중단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는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었습니다. 위대함에 대한 그녀의 꿈은 사랑도 그 안에 포함되어야 했습니다.
폴 드 카샤낙 (Paul de Cassagnac)은 언론인이자 나폴레옹주의자였는데 마리가 푹 빠졌던 남자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리는 무시를 당했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에 대한 분풀이로 유명한
공화주의자 레옹 강베타 (Leon Gambetta)와 결혼을 계획할 만큼 자의식이 강했습니다.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
봄 Spring / 1884 / 199.5cm x 215.5cm
꽃 나무로 이어진 작은 길 옆, 꽃 그늘에 앉아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요? 혹시 마리의 어머니이신가요?
봄은 왔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으신가요?
죽음이 그녀 곁에 가까이 왔습니다. 강철 같은 의지와 집중력을 가진 마리는 집 안에서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픈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딱 한 번 너무 고통이 심해서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자신의 나약함을 보였다고 부끄러워 했습니다.
마리의 선생이자 친구였고 연인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르파주가 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암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마리 자신도 죽어 가는 중이었지만 자기가 르파주 옆에 있으면 르파주의 고통이
줄어 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엉망인 자신의 몸을 추슬러 그의 집으로 갑니다. 마리는 안정을 취해야 했지만 그녀의
생애 중 마지막 며칠을 르파주 옆에서 보냈습니다. 26살 생일을 며칠 앞 둔 1884년 10월 31일, 마리는 세상을
떠납니다. 르파주는 마리가 세상을 떠난 후 5주 뒤인 12월 10일, 그녀 뒤를 따릅니다.
우산 The Umbrella / 1883 / 74cm x 93cm
마리 바슈키르체프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료는 그녀가 프랑스에 있는 러시아인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러시아 이민자의 딸이었고 별거한 부부의 딸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 불 빛은 너무
멀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미 10대에 자신의 결핵에 걸렸다는 것을 마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녀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생애 마지막 날에도 침대에 있는 자신을 허락 하지 않을
만큼 죽음에 직면해서도 그녀의 영혼은 약해지지 않았다고 하니까, 자유 의지 대로의 삶이 그녀의 꿈 아니었을까요?
정말 지독히도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수 많은 신문 기고문과 106권의 일기장 그리고 200점의 미술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회화는 2차 대전 중 나찌에 의해 많이 파괴 되었지만 아직도 60점이 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르파주는 36세, 고흐와 로트렉은 37세, 르노와르는 78세, 드가는 83세, 모네는 8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약 그녀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떤 성공을 거두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