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제도는 우리나라 전라남도 크기정도의 섬으로 1800년대 초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아르헨티나, 스페인, 영국등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들 나라의 국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1833년 막강한 대영제국이 다른 나라의 국민을 추방하고 자국의 국민들만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후 이섬은 대영제국의 일부로서 통치되었다. 그후 내전등으로 힘이 약해진 스페인은 이 영토분쟁에서 빠지게 되었으나, 아르헨티나는 자국의 영토가 억울하게 빼앗긴 것으로 생각했고, 계속 영유권을 그후로도 계속 주장했다. 결국 2차대전이 끝난후 1945년 UN이 중재에 나서 양국이 대화로 해결하도록 하였으나, 서로 자국의 의견만을 을 내세웠다. 영국은 '최초 발견이래 합법적 지배'를 주장했으며, 아르헨티나는 고유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 영국의 불법적 점령'을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전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 불안한 상황은 결국,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 해병대가 포클랜드를 침공하는 것으로 깨져 버렸다.
1982년 아르헨티나의 군부로 집권한 갈티에리 대통령은 국내에서 반군부 민주화 운동등이 거세게 일어나자, 고유영토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포클랜드를 점령하면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불안한 국내정세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러한 큰 모험을 한데에는 2차대전후 힘이 약해진 영국에 대한 과소평가와 영국의 여수상 대처에 대한 남성우월적인 오판이 있었다. 그는 영국이 골치아픈 영유권 문제로 포클랜드를 쉽게 포기할것 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포클랜드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생각도 억울하게 빼앗긴 우리 땅이라는 국민정서가 강했으므로 포클랜드에 대한 아르헨티나 해병대의 침공을 지지했다.
그러나 영국의 의지는 전혀 달랐다. 영국 의회가 포클랜드를 빼았긴데 대해 책임을 물어 대처의 사임을 요구하자, 대처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지금은 이럴때가 아닙니다. 즉시 힘을 모아 결정을 해야할 때 입니다!'라는 의회 연설로 그녀는 영국민을 한마음으로 단합시킬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예상과 달리 영국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포클랜드를 탈환하기로 결정한 영국해군은 전투배치가 가능한 함대를 끌어모았다. 항모 2척을 포함한 총 43척의 기동함대가 편성되었고 속속 포클랜드를 향해 전속으로 발진했다. 이로서 1982년 4월 2일부터 6월 14일까지의 격렬했던 포클랜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양측힘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오히려 양측의 미묘한 관계를 이용한.. 외교를 통해 우리의 이익과 입지를 굳이고 국제적 지휘와 영향력을 얻어내는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겁니다. 이상이라지만 그리 불가능한것도 아니고요. 광해군이 그러했던것 처럼... 실제로 우리나라가 친미로 기울어 질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의 전반에 걸쳐진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그들의 힘을 이용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미적인 성향은 거의 필수에 가깝습니다. 돌아오는게 많거든요.. 젤 심한게 정치권 아닙니까.. 국익을 위하기 보다는 자신을 위한 이익을 추구하기 떄문에 그런겁니다.
미국과 중국의 양측힘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오히려 양측의 미묘한 관계를 이용한.. 외교를 통해 우리의 이익과 입지를 굳이고 국제적 지휘와 영향력을 얻어내는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겁니다. 이상이라지만 그리 불가능한것도 아니고요. 광해군이 그러했던것 처럼... 실제로 우리나라가 친미로 기울어 질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의 전반에 걸쳐진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그들의 힘을 이용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미적인 성향은 거의 필수에 가깝습니다. 돌아오는게 많거든요.. 젤 심한게 정치권 아닙니까.. 국익을 위하기 보다는 자신을 위한 이익을 추구하기 떄문에 그런겁니다.
지나친 국수주의긴 하나 강대국에 정체성 없이 내둘리는것 보다는 다른 국가와 국가적 비난을 적게받는 차원의 국수주의를 지향하는것도 괜찮을것 같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우리도 잘살고.. 우리의 정체성과 민족성에 맞게... 거의 이상에 가깝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