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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l3w4I-KElxQ
통행료만 10억원인 수에즈 운하 통과 영상
크루즈로 수에즈 운하 통과
수에즈 운하
안녕하세요.
피스보트세계일주크루즈 114항차 승객분들께서 실시간으로 보내주셨어요!
지금 피스보트크루즈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요?
피스보트의 일거수 일투족이 궁금하실 여러분들을 위해 지금 바로 보여드릴게요!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인 수에즈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집트의 운하입니다. 이집트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나절을 걸려 통과하는 수에즈 운하는 세계일주 크루즈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합니다.
출처 PEACEBOAT
114항차 정ㅇㅇ, 권ㅇㅇ님
114항차의 마지막 아시아 기항지였던 스리랑카 이후, 인도양과 홍해를 지나 무려 열흘 만에 모습을 드러낸
수에즈운하라 더 반갑게 느껴지네요!
크루즈가 아니라면 보기 힘든 아주 귀한 이 광경을 두 분께서 공유해주셨는데요,
두 분의 미소가 저 뒤의 바다를 더욱 푸르고 환하게 빛내주네요.
오랜 시간에 걸쳐 운하를 통과한 피스보트는 5월 12일 지중해의 첫 정박지인 포트사이드에 들어섰다고 해요!
포트사이드에서도 멋진 사진들이 날라왔답니다.
포트사이드에 닻을 내리는 중인 피스보트 세계일주 크루즈
출처 @ahmed__gado 인스타그램
포트사이드 입항 직전의 피스보트 세계일주 크루즈
수에즈 운하 개통식 그리고 예루살렘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탑승했던 엘리자베스 호, 황제는 1869년 11월 14일 이집트 이스마일리아 항에 도착하여
11월 26일까지 이집트에 머물렀다. 이 여행 동안, 그는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도 방문했다.
좌측부터 이집트 이스마일 파샤,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황제, 프랑스 외제니 황후
1869년 콘스탄티노플,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측근 및 오스만 제국 고위 관료
1869년 11월, 카이로 게지레 궁전
피라미드에 오른 황제
황제의 순회로
수에즈 운하 개통식 프란츠 요제프 기념장(청동)
페르디낭 드 레셉스
포트 사이드(Port Said)
2019년 11월 17일은 수에즈 운하 개통 150주년이 되는 해였다. 1869년의 그 날, 전 세계의 각지에서 몰려온 고위 인사들이 포트 사이드의 운하 북쪽 입구에 운집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새로 건설된 해로를 통과하는 최초의 소함대에 합류했다. 그 영예로운 손님들로 운하를 설계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 이집트의 이브라힘 파샤, 프랑스
제국의 황후 외제니 등을 꼽을 수 있었다. 또한 터키 제국의 술탄 압뒬라지즈 1세, 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국왕 프란츠 요제프 1세 및 프로이센, 하노버, 네덜란드의 왕족들도 참석했다. 이름난 왕족들 외에도, 프랑스 화가
장레옹 제롬,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 독일의 고고학자 카를 리차드 렙시우스 등등, 그 광경을 취재하도록
초대받은 언론인 무리와 함께 같은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들도 그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그런데 특별히 그 손님들
중에서 오스트리아 황제의 여정은 더 알아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19세기 중반, 동방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주요 유럽 열강-러시아, 프로이센,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의 관심이
증대했다. 열강들은 카이로와 이스탄불의 대립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1840년대 중반에 최초의 영사관 및 국립
교회 기관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1849년 5월 1일 부영사관을 개설했다. 1852년 오스트리아의 부영사 요제프 그라프 피자에마노는 중동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보호 세력으로서,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관련
교회와 함께 순례자 병원을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빈 대주교였던 요제프 오트마르 폰 라우셔는 피자에마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이 지역의 순례자들을 위한 작은 의무실이 딸린 순례자 호스피스 건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와중에, 수많은 계획과 갖은 노력 끝에 수에즈 운하는 완공되었다. 마침내 더 짧은 경로가 유럽과 극동을
연결했다.
황제가 예루살렘과 현지 유대인 지도자들을 방문하기로 결정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두 제국 사이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강화하려는 터키 제국의 희망으로, 도로가 포장되고 깃발이 내걸렸다. 황제는 이집트에 다다르기 전에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현지 유대인들의 큰 찬사를 받았다. 그는 십자군의 제국이 소멸된 이후 최초로 성지를
방문한 유럽 군주로 기록되었고, 다음 세대의 순례자들 사이에서도 화자되었다. 황제는 거룩한 도시의 오래된
거리를 걸으며 모든 주요 명소-유적지를 참배하고 유대인 지구를 거닐었다. 예루살렘에는 지난 1854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오는 오스트리아 순례자 호스피스(Hospice)가 있었다. 황제는 오스트리아 호스피스의 창지자 중 한명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1869년 당시 황제는 그곳에서 묵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당시, 널리 알려졌으나 후대에 허구로 밝혀진 설화가 있는데,
'황제의 모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가 웅장한 규모의 티페렛 이스라엘 유대교 회당이 지붕없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황제가 대담자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건설 계획을 총괄하고 있던 이스라엘 랍비가 "폐하, 회당이 모자를 벗어 황제께 예를 표하고 있습니다"라고 씁슬한 소리를 하였다. 황제는 기부에 대한 탄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회당이 모자를 교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겠습니까?"라고 기꺼이 대답했다. 구조물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기부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황제는 유대인 기관의 설립을 위한 기금을 설립하고, 랍비들을 위해 부다페스트에 탈음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제국에 널리 퍼진 반유대주의를 비난했다. 1882년, 황제는 각료들에게 "짐은 나의
제국에서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박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서인지
부족하지만은, 1890년대에 몇몇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의회에 선출되었다. 유대교 회당은 그의 탄신일에 매년 예배를 드렸다고 하며, 한 전설은 예언자 엘리야가 그에게 장수를 누리게 축복했다고까지 한다. 1908년, 요제프
황제가 즉위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에, 두해 동안의 예배당의 보수-확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루진 회당 안뜰에 서있는 황제와 측근들
오스트리아 순례자 호스피스 예배당의 벽화
엽서, 1863년 개장한 순례자 호스피스
예배당 내부
오스트리아 호스피스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전경
1909년, 황제를 기리는 기도서
1948년 이전, 티페렛 이스라엘 유대교 회당
운하계의 제왕 수에즈 운하(Suez Canal)
수에즈 운하: 아프로-유라시아운하, 1869년 건설
운하 지도와 NASA의 Landsat8 위성이 촬영한 사진
1. 개요
수에즈 운하, قناة السويس)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집트의 운하로 1869년에 완공되었다.
파나마 운하와 더불어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한다.
클리퍼 항로에서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단축되는 거리
클리퍼 선
※ 클리퍼 항로(the Clipper Route)는 범주(帆走) 용어로, 유럽과 극동,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를
오가던 클리퍼 선들이 사용하던 오래된 항로
수에즈 운하 필요성
세계 지도를 보면 유럽에서 인도와 아시아로 나아가 무역을 하기 위해선 배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 →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항해 →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끄트머리 희망봉에 도착 → 인도양 도착 → 목적지 도착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아프리카 대륙을 돌려면 요즘 컨테이너선으로도 한 달은 걸리며 옛날 배로는 몇 개월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자리의 폭은 굉장히 협소할 뿐더러 북으로는 지중해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이어진다. 즉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 가지 않고 유럽에서 바로 인도양으로 갈 수 있는 운하만 있다면 엄청난 교통의 요지가 됨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2. 역사
2.1. 고대 수에즈 운하
고대 파라오의 운하.
기원전 6세기 ~ 서기 8세기 간헐적으로 운용되었다.
다리우스 1세가 세운 운하 개통 기념비
고대 이집트 때도 필요성은 있다보니 운하를 파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에는 전 세계에서 최고의 건축 및 토목기술이 있었는데도 지금처럼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부분을 파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위 사진처럼 나일강의
대고호(大苦湖, Great Bitter Lakes)
하류의 최동단 지류에서 투밀라트 계곡, 대고호(大苦湖, Great Bitter Lakes, 거대한 쓴 호수) 등을 통해 동쪽으로
수에즈까지 연결하여 지중해와 간접적으로 잇는 방식으로 시도했다고 한다. 다만 바다와 강을 완전히 연결하지는
않았고 중간에 육지에서 배를 끌어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
가장 처음 도전한 사람은 이집트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기원전 19세기)였지만 실패했고, 하트셉수트(기원전 15세기)와 람세스 2세(기원전 13세기) 역시 건설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듯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코 2세(Necho II)가 기원전 609년에 배 두 척이 동시에
지날 수 있는 너비로 나일강과 대고호와 홍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도했다. 그리하여 인명피해 12만 명을 내면서
완공을 눈 앞에 두었으나, 이 운하가 적에게 유리하게 이용되리란 신탁을 받고 포기하였다고 한다. 네코 2세는 또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걸 시도하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얼마 후에 이집트를 정복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 시대에는 완공해서 페르시아로부터 원활
Fleet of Triremes
대형 갤리선
하게 운용됐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3단 갤리선(Trireme)들이 노를 펴고 서로 교차통행이 가능한 너비로 횡단하는 데 나흘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비석 5기를 남겼는데 지금도 4기가 남아 있다.
이후 홍해와 만나는 운하 종점에 남겨진 비석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270~269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때 정비하고 재개통하였다. 이후로도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2세기 초)
시기를 거쳐, 정통 칼리파 우마르 시기까지 홍수와 침니 현상으로 운하가 막히거나 파괴되어 재개통하기를
반복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약 1000년간 운하는 이집트 농산물 등이 아랍 등지로 수송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파 알 만수르 치세이던 767년, 그의 삼촌 압달라의 반란 방어과정에서 이 고대 운하는 완전히 막혀버렸으며, 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팔 때 작업자들의 식수 공급과 물자 수송을 위한 운하(Sweet Water Canal: 가장 위의 지도의 서쪽에서 팀사호수로 연결된 수로)를 뚫을 당시에 이 고대 운하의 잔해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이후 15~16세기에 운하를 다시 개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까지 다다르자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까 우려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섰지만, 맘루크 왕조와 협상이 벌어지는
단계에서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무위로 그쳤다. 그리고 1565~1579년 오스만의 재상을
지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다시 개통하려 했지만 계획 단계에서 불발됐다. 루이 14세나 나폴레옹도 운하 개설
조사를 했지만 포기했다.
2.2. 건설
오늘날 존재하는 현대적인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관계를 맺은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을 공매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인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된 차에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이므로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주식 총 40만 주를 발행하여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000 주에 달하는 프랑스 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그나마도 대규모로 사겠다는 고객이 없어서, 주주가 21,000명에 달해서 평균 구입 주식 수가 10주도 안 되었다. 100주 이상 구입한 사람이 199명밖에 없을 정도였다.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을 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당시 제안 받은 나라들은 영국, 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등이었는데, 영국을 제외하면 수에즈 운하가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나라들이었다. 프랑스가 이들 정부에 주식 매입을 타진한 이유는 당연히 영국의 방해에 맞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자유무역이란 개념이 없어서 해군력으로 해로를 유지해야 하는 당대 기준으로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일이 없는 위치에 있는 국가들에 접근한 건 꽤나 어이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인 이유는 크게 둘이었다. 영국은 이미 전 세계 해양 패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운하가 그다지 급하게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운하를 빌미로 프랑스가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인도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하 건설에 도움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프랑스 측이 책정한 이용료 문제가 기름을 끼얹었다. 지분의 과반수를 차지한 프랑스의 운하 운영 정책이
차별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규칙으로 최대 주주인 프랑스는 매우 저렴하게, 주식을 사면 조금 저렴하게, 안 사면 매우 비싸게 통행료를 매겼다. 이런 차별적인 요금정책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은 이렇다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비싸게 물어야 한다는 사실에 8만 주를 인수해 달라는 레셉스의 요청을 아예 보이콧해버렸다.
영국 상인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후술된 HMS 뉴포트의 불법 통행 행위가 옹호받은 것도 이 불만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이집트 정부는 운하를 통해 돈방석에 앉는 장미빛 꿈을 꾸었으나, 최종적으로는 16만 7천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사실 망상에 가까운 자금 조달 계획에 가까웠던 것이, 그나마 팔아치운 프랑스 주식 조차도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의 도움으로 간신히 팔아치운 것이다. 그나마 로스차일드한테도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는데, 주식 취급 수수료로 5%를 내라는 로스차일드 측의 요구를 레셉스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 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등 지속적으로 건설을 방해했다. 이 때문에 레셉스가 영국도 인도에서 똑같이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기도 하였다.
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소유의 이집트 회사이며,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비용은 처음 주식을 공모할 때의 예상치의 2배 이상으로 들었다.
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선박은 영국 해군 연안포함 HMS 뉴포트(Newport)였다. HMS 뉴포트는 운하 공식개통 전날인 11월 16일 밤에, 모든 조명을 끄고 몰래 운하를 통과하는 무모한 행동을 감행했다. 운하 회사 관계자들은
감히 영국의 비위를 거스를까 염려하여 항의도 하지 못했다. 이후 뉴포트의 함장은 공식적으로는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내부적으로는 프랑스 놈들에게 대영제국 해군의 기상을 보여줬다며
칭송받았다고 한다.
이 공사를 지휘한 페르디낭 드 마리 레셉스는 운하 개통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또 다른 대규모 운하
프로젝트인 파나마 운하 공사(문서 참고)에도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몰락했다.
2.3. 영국의 운하 매입
그러나 운하 개통 불과 2년 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전쟁 결과, 프랑스가 참패하고 말았다. 단일개체로서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최대보유자는 17만 주를 가진 이집트 정부였고, 이집트 정부의 가장 지지
세력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지만, 이집트의 자체적인 경제력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집트의 스폰서를 자처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했다. 뒤를 이은 프랑스 공화정부도
이집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패전상황을 추스르며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국방력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의 부족한 물동량도 문제였다. 전술한 요금 정책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이용량은 기대를 밑돌았다. 거기에 더해 건설 비용도 2배로 들었기 때문에, 비용 부족에 시달린 끝에 실제 운하의 완성은 2년 후인
1871년이었다. 결국 요금을 올리려 하였고, 1873년에 운하의 이용 비용을 배의 배수량만이 아니라 화물의
톤수까지 따져서 요금을 매기게 된다.
위의 이유로, 결국 수에즈 운하는 충분한 수입이나 추가 비용 지원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에즈 운하 주식은 실질적으로는 공사비용을 조달하는 채권에 가까웠다. 즉, 이집트 정부는 17만주만큼의 부채를 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주요 은행에 대한 채권 만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1875년 11월, 사이드 파샤의 후계자인 이스마일 파샤는 눈앞에 닥친 빚폭탄을 피하고, 프랑스가 주도한 수에즈 운하에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는 제스처로서 전체 주식 물량의 44%인 보유 지분 17만 6,602주를 매물로 내놓았다.
이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17만여 주를 통째로 매입한 곳은 바로 영국 정부였다. 그 이유는 영국 입장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장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희망봉에 있는 케이프 식민지를 경유하지 않고 인도,
중국의 수입품을 유럽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어, 영국도 1875년에 경제 공황이 닥치는 매운 맛을 본 터였다. 또한
극동으로 확장중인 식민지를 관리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당시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수에즈 운하의 주식 구입을 주도했는데 이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영국 정부가 격앙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디즈레일리 총리는 저녁 식사 도중에 이스마일 파샤의 지분이 1억 프랑(=400만 파운드)에 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바로 운하를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한다. 그리고는 주식을 매입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연락해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엄청나게 부유하긴 했으나 신분제 국가인 영국에서 평민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의 문장
유대인 가문에 불과했던 로스차일드 가의 수장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대영제국 총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당일 약속 자리에 나와야 했다. 그 자리에서 총리로부터 400만 파운드의 자금 융통을 요청받았다. 로스차일드 측에서는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는지 묻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보는 대영제국입니다." 총리는 남들보다 빠르게 주식을 사기 원했고, 세계최강국 영국을 담보로 내세운 것이다. 갑작스럽게 거액의 대출을 요청받아 다급해진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급하게 자택으로 돌아가면서 저녁 식사는 일찍 끝났다.
디즈레일리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로 마차를 타고 버킹엄 궁으로 직행해서,
켄트의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Alexandrina Victoria of Kent)
한밤 중에 빅토리아 여왕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리고 자다 일어난 여왕에게 총리는 대영제국을 담보로
4백만 파운드를 로스차일드에게 빌렸으며, 이 돈으로 방금 시장에 나온 수에즈 운하의 이스마일 파샤 지분 전체를 매입하려 한다고 보고를 올린다. 즉 여왕에게 "폐하의 제국을 방금 유대인에게 담보로 잡았습니다."라고 말한 격이었다. 다행히 여왕은 수에즈 운하를 구입하려는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총리의 월권 행위를 책망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자국 공관을 통해서 주식을 전부 사겠다고 전달하고, 이스마일 파샤는 팔겠다고 말한 다음날 아침에
주식이 팔린 상황에 만족한다. 이후 로스차일드 측은 가문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이스마일 파샤에게 자금을 보냈고,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받아온 주식증서를 영국 정부에 넘겼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디즈레일리는 영국 하원으로 와서 의원들에게 "방금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영국 정부가
매입했다."고 보고한다. 디즈레일리는 이미 선구매 후결재를 한 상황이었고, 누군가가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면
총리 목도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원 의원들은 모두 기립해서 열렬한 박수갈채와 함께 주식 매입안을
통과시켰다. 의회 보고는 내각이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영란은행으로부터 400만 파운드를 대출받기 위한 선결 조건이기도 했다. 의회 의결이 끝나자,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합의가 됐습니다!
이제 폐하의 것입니다!(It is settled; you have it, madam!)"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지분은 전술했듯이 개개인들에게 흩어져 있었는데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주식들도
아니었다. 그렇게 수에즈 운하는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은 글래드스턴 내각
시기인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이집트에서 운하가 외국 정부에 의해 운영되는 것에 반대하는 우라비 반란이
벌어지자 군대를 보내 진압한다. 그리고는 1888년에 콘스탄티노플 협약으로 이집트와 수단을 중립국으로 만든 다음 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후 반란과 부패를 모조리 진압하고 운하를 운영한다.
통념과는 달리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공정하게 운영했는데, 프랑스의 요금 차별정책에 반발한 점도 컸다. 덕분에
영국 못지않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도 운하의 혜택을 크게 누렸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트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영국이 거부함에 따라 희망봉을 돌아서 극동으로 향하는
수개월 대여정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는 설이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실제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제한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를 하지 못한 것이다.(출처) 실제로 나중에 추가 파견된 러시아
군함들은 규모가 작아서 수에즈 운하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 무렵 영일동맹의 일환으로 영국에 주문한 일본 해군의 전함 공고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향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랍 방면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는 공세를 1915년에 단행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후 1918년부터 1924년에 걸쳐서 이집트가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936년에, 영국은 이집트와 협약(Anglo-Egyptian Treaty of 1936)을 맺고 운하의 운영권을 다시 획득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 해군은 추축국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제한했다.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과 함께 이집트 점령 및 수에즈 운하 차단을 시도했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격이 막히고 말았다.
2.4. 제2차 중동전쟁과 이집트로의 귀속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집트 정부는 주식을 일부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하면서 운하 운영에
개입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영국이 운하를 통제하였다. 하지만 1952년 반영 노선을 표방하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국에 유화적이던 파루크 1세 왕정을 무너뜨렸고, 내부 권력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한 가말 압델 나세르는 1956년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중동전쟁
(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영국, 프랑스는 자국이 막대한 돈을 들인 주식이 휴지조각이 된 셈이니 반발하는 건 당연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반이스라엘 성향인 나세르가 힘을 얻는 것이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의미가 많이 희석된 편이지만, 국유화는 냉전 시기에는 공산주의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수에즈
국유화를 선언했던 나세르는 쿠데타 이후 1세계와 2세계 양측에 양다리를 걸치며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는데,
혁명 정부의 경제적 지원에 미온적인 1세계보다는 적극적으로 구애해온 소련에게 꽤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나세르는 중동에서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반이스라엘 선봉장의 이미지를 만들려했고, 이를 위해
우주왕복선 STS-40에서 촬영한 시나이반도,
수에즈만(서쪽), 아카바만(동쪽)의 위성 사진
홍해 아카바 만의 입구에 요새를 건설하고 해안포를 배치해 이스라엘의 아카바 항을 봉쇄하는 일을 저질렀는데,
나세르가 소련의 편을 들어서 수에즈 운하에 똑같은 일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냉전 시기 이 사태를 계기로 아랍이 소련 편에 들 것을 우려한 미국도 압박을 놓아, 안보리를 소집해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의 반대로 거부되었다. 미국이 안보리 철수 결의를 낸 다음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공습은
계속되었고, 미국이 제안한 철수를 요구하는 긴급특별총회는 찬성 64표, 반대 5표(영국, 이스라엘, 프랑스,
뉴질랜드,호주)로 통과 되었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였다.
같은 시기에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던 소련의 흐루쇼프 역시 으름장을 놓았는데, 영국과 프랑스에 핵을 쓸 수도 있다고 대놓고 위협했다. 소련은 이미 핵개발에 성공했고, 1953년에는 전술핵(RDS-4)의 개발에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은 딱 반년쯤 전인 1956년 5월 21일에 탄도 미사일인 R-5 Pobeda(NATO 코드네임 SS-3 Shyster)의
핵미사일 버전인 R-5M을 실전 배치했다.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200km였는데,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위성국이었던 동독에 배치하면 런던까지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57년도에 세계 최초의 ICBM인 R-7이
개발되었다. 사정거리는 8,000km. 수에즈 사태 당시에는 흐루쇼프가 핵전력 공갈을 많이 치긴 하였는데,
미국측에서도 내막을 완벽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폭격기의 경우, 장거리 항공 사령부에서 B-29를 카피한 Tu-4를 실전 배치했는데, 파생형 중 하나인 Tu-4A는 소련 최초로 '양산된' 핵폭탄인 RDS-3의 투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Tu-4A는 양산기가 아니었고, 폭격기용 핵무기를 테스트하기 위한 실험용 개조 기체에 불과했다. 이후 소련은 Tu-16A를 양산하면서 1955년 즈음에 전략핵무기
투발 능력을 얻는다. 그런데 1956년의 소련 장거리 항공 사령부는 스몰렌스크(러시아 서부, 벨라루스와의 국경
근처)와 비니차(우크라이나),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토크 북동쪽)의 세 도시에 주둔하면서 Tu-4와 Tu-16 폭격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최단거리인 스몰렌스크부터 런던까지는 2천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고, 1955년 기준 NATO의
가입국인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서독의 영공을 통과해야 했다. RDS-3와 RDS-37은 폭탄창에서 중력낙하로 떨어뜨려야 하는 핵폭탄이었으므로, 투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영공에 진입해야 하는 폭격기 투발 핵무기
한계상, 미국이 영공 통과를 허락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이상 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젠하워도 소련의 위협을 진심으로 믿어 위축됐다는 점을 보좌관이 회고하고, 그와 국무부 차관인 허버트 후버와 비공개 대화에서 이 사태가 3차 세계대전의 발발 계기가 될 것을 진심으로 우려하였다. '소련은 어떤 무모한 모험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말년에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하고 분노했습니다. 독재체제에서 그런 마음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핵전력 정찰을 시작하였고, 59년도에
이르러서야 소련의 핵전력이 과장이었음을 확정하게 되었다. 즉 당시로서는 핵공갈에 대해 미국 측도 정확한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 영프는 나토니까 방위조약에 의거하여 미국도 참전하여야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방위가 보장되지 않아서 소련이 전쟁에 참전했다면 이스라엘과 했을 것이다. 3차대전의 위협은 미국이 동맹국이었던 영프에 압력을 넣는 데 강한 영향을 끼쳤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서구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으로 급부상해서 아랍권 민중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였고, 이집트는 사실상 중동의 맹주가 되었다. 거꾸로 영국에게는 '이제 대영제국은 없다'는 걸 실감하게 한 굴욕이었다. 그래서
당시 살아있던 윈스턴 처칠은 이 결과에 격분하고 원통해했다고 한다.
1960년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한때 수에즈 운하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되어 운하가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겪었고, 결국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교 정상화로 시나이 반도 전체가 다시 이집트에 귀속되면서, 수에즈
운하는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차례 확장하였는데, 2015년에 마지막으로 확장공사를 하였다. 현재까지도 수에즈 운하의 통행은 이집트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2.5. 현재
2008년 이후, 수에즈 운하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아덴 만 일대에 지나가는 상선을 노리는 소말리아 해적들이
들끓고 있지만 운하를 통과하는 배들이 줄어들 기미는 없다. 운하를 이용하지 않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루트는 워낙 거리와 시간 면에서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다만, 해적들이 더욱 기승을 부려 보험료 할증이나
보안업체 고용비용 같은 부가비용이 급증한다면 수에즈 운하 통행을 포기하는 선주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러나 정작 최근에는 소말리아 해적의 활동이 위축된 반면에 서사하라 일대의 해적질이 급증하여 희망봉 우회가
반드시 안전한 루트가 아니게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수에즈 운하가 폐쇄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세계의 해운업계와
무역업계가 부담한 추가비용은 당시 미국 달러 기준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 현재의 달러 가치로 하면
매년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2009년 한 해 동안 여기를 통과한 배만 해도 22,183척에 달했고 통과료로 받은 돈만 해도 54억 1,000만 달러에 이른다. 척당 평균 통과비는 대략 25만
달러이다. 이는 이집트의 2009년 GDP 4,531억 달러에서 1.3%에 이른다. 과거에나 현재나 여전히 이집트의
돈줄인 셈이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어 북극해의 얼음이 계속 줄어들자, 수에즈 운하나 말라카 해협을 거치지 않고 부산항에서
베링 해협과 북극해를 통과해 유럽까지 가는 북극항로를 타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만약 얼음이 충분히 녹아
바닷길이 열린다면 적어도 중국, 대만 이북에서는 남쪽을 통과하는 것보다 북극항로가 거리상 더 유리하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배들이 늘고 있다. 유가하락과 운하 이용료 상승으로 아프리카
희망봉 쪽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수에즈 운하 직원들의 횡포가 심각한데, 기념품을 강매하거나 세금을
부과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던 배들이 이를 견딜 수가 없어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머스크 그룹에 의하면 13.5노트 속도로 운항하면 열하루가 더 걸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껏 뚫은
운하 대신에 바스쿠 다 가마 시대의 항로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우주에서 확대해 촬영한 위성사진
사진에 보이는 EVERGREEN은 선박이 소속된 회사의 이름
(한국으로 치면 HMM 같은 회사)이고
배의 이름은 에버 기븐(EVER GIVEN)이다
2021년 3월 23일 오전 7시(현지시각) 파나마 선적 에버그린 그룹 소속 2만 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EVER GIVEN)호가 운하 내에서 좌초되어 수에즈 운하가 차단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2023년 1월 9일 화물선이 좌초 됐다고 9일(현지시간) 운하 서비스 업체가 밝혔다. 운하 교통이 영향을 받았는지
[이스마일리아=AP/뉴시스]이집트 수에즈 운하 자료사진. 2023.01.09.
여부는 즉각 밝혀 지지 않았다. 'MV글로리(MV Glory)호'가 이스마일리아주(州) 수에즈 운하 지역의 콴타라시
근처에서 좌초되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MV글로리호'는 그리스 선박업체인 프리메라가 소유한 길이 225m, 폭 32m 규모 화물선이다.
이 선박은 6만6,000톤의 옥수수를 우크라이나에서 중국으로 나르기 위해 시속 8.5노트(약 16km)의 속도로 수에즈 운하를 이동하던 중 이날 오전 5시께 좌초됐다. 좌초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집트 북부 지역은 악천후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2.6. 확장
2015년 8월 6일(현지시각) 제2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이 열렸다. 이를 통해 수에즈 운하의 하루 통행량이 2배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집트 정부는 물동량 증가와 그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로 제2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다만 실제 사용은 2016년부터 했다. 2015년에는 준공식을 했지만 시범운행을 하고 2016년 9월 1일부터 제2 수에즈 운하에 외국 선박의 통항이 허가되었다.
3. 영향
수에즈 운하 경로
거리 단축: 종전에 유럽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려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까지 돌아가야 했으나, 이 운하가
개통되면서 유럽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거리가 최대 9,000km까지 단축되었다. 이 거리는 지구상에서 단일
운하가 단축시켜줄 수 있는 최대 운항 거리다. 수에즈 운하가 운하 중의 운하로 꼽히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범선 시대의 종식: 비록 기선이 등장하긴 했으나, 과거 희망봉을 돌아가야 했던 시절에는 범선은 최종테크에
클리퍼
이르러 클리퍼 같은 경우 엄청난 속력을 낼 수 있었지만 기선은 아직 증기 터빈도 스크류 프로펠러도 없어 충분한
속도를 내지 못했고 석탄 등 연료를 보충할 인프라도 부족했다. 따라서 범선이 기선에 비해 결코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후 풍량과 상관없이 일정한 속도를 낼 수 있는 기선은 운하 통과가
자유로웠던 반면, 풍량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던 범선은 운하 통과가 곤란하여 종전과 마찬가지로 희망봉을
돌아야 했다. 그러나 범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수에즈 루트와 희망봉 루트의 엄청난 거리차와 그에 따른 시간차를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대양 항해에서 범선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수 밖에 없었다.
지중해의 부흥: 대항해시대가 열린 이후, 유럽의 해양 활동 중심이 대서양으로 옮겨가면서 종전의 중심인 지중해는 상대적으로 침체되어 갔다. 그러다가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지중해의 경제적, 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기에 이른다.
4. 수에즈맥스 규격
2018년에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모두 확장공사를 통해 니미츠급 항공모함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폭을 갖추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는 2016년 확장공사 완료 전까지 운하 폭이 33m밖에 안 되어 통행 가능한 선박의
규격 제한이 있었던 반면 수에즈 운하는 그 전부터 갑문이 없고 폭이 상당히 넓어 규격이 다소 느슨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규격은 수에즈맥스(Suezmax)라고 하는데 길이는 400m, 수면 위 높이 68m,
단면적 1,006m2(흘수선 20.1 m-선체폭 50m 또는 흘수선 12.1m-선체폭 77.5m)로 넉넉한 수준이다.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박은 물론 항공모함도 통행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배가 수에즈맥스 이하인 것은 아니라 화물 적재량이 30만 톤을 넘어가는 초대형 유조선이나 흘수선이 깊은 대형 광석운반선은 통행이 불가능하다.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중량톤수는 약 16만 DWT 정도에 해당한다.
이일(이집트와 일본) 우호교(Egyptian-Japanese Friendship Bridge) 또는
수에즈운하교(Suez Canal Bridge)는 엘 콴타라(El Qantara)에 있는 고가 고정교량이다
또 수에즈 운하 양안을 잇는 수에즈 운하교가 일본의 카지마건설이 건설, 2001년에 개통되어 운하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통과 높이 제한이 새로 설정되었다. 이 다리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로, 나머지 도로는 수에즈
운하 양안에서 끊겨 있고 끊긴 구간은 차를 실을 수 있는 페리선이 운하를 횡단한다. 수에즈 근처에는 하저 터널로 건너는 구간도 있다.
5. 레셉스 이주
레셉스의 이주(Lessepsian Migration)는 수에즈 운하를 가로질러 일어나는 생물종의 이주이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이름을 따왔다.
이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지중해와 홍해의 바다 생태계가 만날 가능성이 적었지만, 개통 후에는 홍해의 생태계가 운하를 따라 조금씩 북쪽으로 이동하고, 결국은 지중해까지 이르러서 운하 근처의 지중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한다. 수에즈 운하는 파나마 운하와는 다르게 수문이 없는데다, 경유하는 그레이트비터 호가 염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생물종이 이주할 수 있었다. 홍해 쪽이 수위와 염도가 높고, 생물종이 다양한 인도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홍해에서 지중해로 이주가 일어나고 있다.
6. 사건·사고
6.1. 개통 축하 공연
https://www.youtube.com/watch?v=TuEUXt7AFBQ
원래는 운하 개통 축하 공연으로 아이다의 초연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작가 주세페 베르디는 작품을 제때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리골레토가 상연되었다. 이후 아이다는 카이로에서 초연을 열었다.
6.2. 수에즈 운하 에버 기븐호 좌초 사고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수에즈 운하 에버 기븐호 좌초 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 최초로 배가 좌초되어 운하를 틀어 막아버린 사건이다.
이집트(Egypt) 수에즈운하(Suez Canal, 음역: Qanāt al-Suways)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 시나이(Sinai)반도 서쪽의 거대한 인공운하이다. 길이는 163km, 가장 좁은 곳의 폭이 300m이며, 지중해의 포트사이드(Port Said: Būr Sa'īd)항과 홍해의 수에즈(Suez: al-Suways)항 사이를 흐른다.
수에즈 운하는 아프리카를 주항하지 않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양방향으로 항해할 수 있는 해로이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1869년 이전에는 상품을 하역해 지중해와 홍해 사이의 육로를 통해 운반하곤 했다. 이 운하는 대고호(大苦湖, Great Bitter Lake)의 남쪽과 북쪽이 지중해와 홍해의 수에즈만에 연결되는 7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BC 2천년
아마도 12대 왕조 파라오 세누스렛3세(Pharaoh Senusret III, BC1878~BC1839)시대에 이미 나일강과 홍해를[고대 고호(苦湖, Bitter)들의 북쪽까지 이르는] 연결하는 와디 튜미랏(Wadi Tumilat)을 관통하는 서쪽-동쪽의
강을 파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펀트(Punt)와 직접적인 해상무역이 가능해졌고, 간접적으로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해 주었다.
하트셉수트(Hatshepsut)의 펀트(Punt) 원정대의 부조에는 펀트에서 돌아오는 원정대를 싣고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당시 홍해와 나일(Nile) 사이가 항해할 수 있는 수로가 있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해준다. BC 13세기 람세스(Ramesses)시대에 실존했다는 증거도 있다.
수에즈항
네코(Necho), 다리우스1세(Darius Ⅰ), 그리고 프톨레마이우스(Ptolemy)에 의한 복구
수로는 황폐해졌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역사(Histories)』에 따르면 BC 600 경에
네코2세(NechoⅡ)가 준설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 헤로도투스는 이 작업 중에 12만 명이 죽었다고
전한다. 네코2세가 죽자 공사는 중단되었다.
마침내 이 운하는 이집트를 정복한 페르시아 다리우스1세(Darius I: BC 549~485)때 완성되었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완성된 운하는 3단 갤리선(trireme)들이 노를 펴고 서로 교차통행하기에 충분할 만큼 넓었고 횡단하는데
4일이 소요되었다. 다리우스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파이(Pie)로부터 209km 떨어진 카브렛(Kabret) 근처를
포함한 나일강변에 수 많은 화강암 석비를 세웠다.
포트사이드(Port Said)
다리우스비명(碑銘)을 해석하면,
“다리우스왕이 말하길, 나는 페르시아 사람이다. 페르시아를 출발해서 이집트를 정복했다. 나는 이집트를 흐르는
나일강에서부터 페르시아가 시작되는 바다까지 운하를 파내라고 명령했다. 나의 명령대로 운하가 건설되었을 때
배들이 의도한 바대로 이 운하를 통해 이집트에서 페르시아로 왔다.”
이 운하는 부바스티스(Bubastis)의 나일강을 지나간다. 피돔(Pithom)의 홍해와 만나는 운하의 끝에 남아 있는
기둥 비명에는 프톨레마이우스2세 필라델푸스(Ptolemy II Philadelphus: BC 309~246)에 의해 270/69 시기에 재 개통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진 천년 동안 계속적으로 수정되고, 파괴되고 그리고 재건되었다. 8세기
아바스왕조의 칼리프 알 만수르(Abbasid Caliph al-Mansur)에 의해 마침내 쓸모 없게 되었다.
Port Said
나폴레옹 복구를 생각하다.
18세기 말 이집트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는 지중해와 홍해를 있는 운하 건설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잘못된 사전측량으로 중단되었는데, 측량결과는 홍해가 지중해보다 10m가 높아서 거대한
갑문에 기초한 운하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건설에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측량위원회의 오류는 거의 전시에 측량한 단편적인 결과를 기초로 한 애매한 계산의 결과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사에 의한 재건
1854~1856년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는 오스트리아 엔지니어 알로시 네그렐리
(Alosi Negrelli)가 입안한 계획에 따라 이집트 총독 사이드 파샤(Said Pasha)로부터 모든 국가 선박들이
통행할 수 있는 해양운하를 건설할 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면허를 획득했다. 이 회사는 개통 후 99년 동안 항해를
위해 관련된 토지를 임대하여 운하를 운영하기로 했다. 레셉스(De Lesseps)는 1830년대 프랑스 외교관 시절에
사이드(Said)와의 교분을 발전시켰다. 만국수에즈선박운하회사(Compagnie Universelle du Canal Maritime de Suez)는 1858년 12월 5일에 운영에 들어갔다.
굴착은 이집트의 강제노동자들을 동원하여 11년 가까이 이루어졌다. 일부 기록에는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하에서 강제노역을 했다고 한다. 영국은 이 운하가 중요한 무역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프랑스의 계획이 영국의 국제정치와 재정적 이익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영국제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세력은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 기간에는 더욱
증가했다. 그래서 영국정부는 공식적으로 강제노동을 비난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무장한 베두인(Bedouin: 사막의 유목민)들을 보냈다. 공사에서의 비자발적인 노동은 중지되었다. 총독은 곧 노예들을
비난했지만 계획은 중단되었다.
영국의 기회주의에 분노한 레셉스(de Lesseps)는 몇 년 전만해도 영국이 이집트 철도를 건설하는 동안 비슷한
조건의 강제노동자들이 죽은 사실을 예로 들며 영국의 아전인수에 항의하는 편지를 영국정부에 보냈다.
처음에는 국제여론이 회의적이어서 수에즈운하회사의 주식은 해외에 잘 판매되지 않았다.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는 단 한 주도 사지 않았다. 프랑스주식은 프랑스에서 순식간에 팔렸다. 당시 영국인들의 회의적인
주장은:
한 가지는 확실한데... 우리 지역의 상인 사회는 이 대 사업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운하의 수취가 합법적인지 의심하였고… 도대체 관리비를 회수할 수 있을는지. 어떤 경우든지 큰 선박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reported by German historian Uwe A. Oster)
운하는 마침내 1869년 11월 17일 항해를 위해 개통되었다. 비록 수많은 기술적, 정치적 그리고 재정적인 문제들을 극복하였지만, 최종비용은 원래의 예산의 두 배가 지출 되었다.
이 운하는 세계무역에 직접적이고 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6개월 전에 완성된 미국의 대륙횡단철도와 더불어
수에즈 운하는 전 세계의 무역로를 원형으로 묶는 시대가 열렸음을 말해준다. 수에즈운하는 유럽의 아프리카 진출과 식민지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이드 파샤(Said Pasha)의 후임자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는 대외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1875년 운하의 이집트 지분을 4백만 파운드에 영국에 넘겼지만 프랑스는 아직 주요 주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Rothschild)의 자금으로 주식을 사들일 때 의회의 문의나 동의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의 헌법체계를 손상했다는 이유로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윌리암 그래드스톤(William Gladstone)에 의해 고발 당했다.
1888년 콘스탄티노플 협정은 운하를 영국의 비호 아래의 중립지역으로 선포했다; 영국군은 1882년 이집트의
내전기간에 운하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1936의 영국과 이집트의 조약을 명분으로, 영국은 운하의 통제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1951년 이집트가 조약을 파기했고, 1954년 영국은 군대철수에 동의했다. 영국군의 철수는
1956년 7월에 완료되었다.
수에즈 위기
이집트가 소련과 교섭했다는 이유로 영국과 미국이 아스완 댐의 건설을 지원하기 위한 보증을 철회하자, 이집트의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는 운하의 수입을 이용해 댐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1956년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당시 타이란(Tiran)해협의 폐쇄로 모든 이스라엘 선박들은 아카바(Aqaba)만에 묶여 있었다.
이것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침략을 공모하는 수에즈위기를 불러 왔다. 그 계획은 지상에서
이스라엘이 침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영공과 다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후에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중재가 있었고 이렇게 운하의 통제를 획득했다.
확전을 막고 비참한 전투에서 영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캐나다 외무부 장관 레스터 볼스 피어슨(Lester Bowles Pearson)은 운하에 접근하는 모두의 안전확보를 위한 유엔 평화유지군의 창설과 시나이반도에서의 이스라엘의
철수를 제안했다. 1956년 11월 4일 유엔의 주요회원국들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모두가 철수에 동의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유지군이 시나이반도를 통치하는 피어슨(Pearson)의 평화유지안을 표결에 부쳤다.
미국은 영국정부에 막대한 재정압박을 가하여 군대철수를 동의하도록 이 제안을 지원했다. 피어슨은 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손상과 나세르(Nasser)의 명령아래 계획적으로 선박을 침몰시킨 결과 운하는 유엔의 지원이 명확해진 1957년
4월까지 폐쇄되어 있었다. 유엔군(UNEF)은 운하와 시나이반도의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67년과 1973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
1967년 3월 나세르(Nasser)대통령은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수에즈 운하지역을 포함한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유엔에서 이스라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유지군은 철수했고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과의 국경지역을 접수했고, 이스라엘 항해로 타이란(Tiran)해협은 다시 폐쇄되었다. 이 운하는
1951~1952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1949년 이후로 이스라엘 선박을 출입이 폐쇄되었다.
이런 조치는 1967년 이집트에 선제적인 전면공격을 가하여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려 했던 이스라엘의 결정의 핵심요소이다. “6일 전쟁”이라 부르는 1967년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 이후 이 운하는 1975년 6월 5일까지 이집트의 봉쇄로 폐쇄되어 있었다. 결국, 황색선단(Yellow Fleet)으로 알려진 14척의 화물선은 8년 이상 운하에
고립되었다.
1973년 욤키푸르(Yom Kippur)전쟁 기간에, 이 운하는 휴전을 끝낸 이스라엘의 반격에 따라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로 진입하는 이집트군의 주요횡단(major crossing) 장소가 되었다. 이 전투의 빛 바랜 수많은 잔해들은
운하의 주변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
1979년 유엔비상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 UNEF)의 위임통치가 끝났다. 미국, 이스라엘, 이집트 그리고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평화협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평화를 관찰하는 유엔의 역할 확대를 추구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위임통치는 시리아의 요청에 의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거부로
연장되지 못했다. 따라서 시나이반도의 새로운 감시군에 대한 협상은 다국적군과 감시단(Multinational Force and Observers (MFO)을 창설했고, 이스라엘군의 단계적인 철수와 일치하지 않는 1981년 시나이반도에
주둔했다. 이는 미국, 이스라엘, 이집트, 그리고 다른 국가들(Multinational Force and Observers)사이의
동의 아래 이루어졌다.
글로벌 패트리어트(Global Patriot)에 관련된 사격
2008년 3월 25일 미국 해군 보안팀은 미 해군에서 단기 전세를 낸 Global Patriot라는 민간화물선을 타고,
참사의 원인이 된 작은 이집트 선박에 사격을 가했다.
운영
수에즈운하는 통과지역이 평탄하고 끝부분에서 해수면과의 작은 차이는 운하의 길이를 통해서 쉽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갑문이 없다. 수에즈운하는 배수량 15만 톤이 넘는 배들도 화물과 함께 통과할 수 있다. 흘수가 16m가 넘는 배는 통행이 제한되고 있는데, 원유를 가득 싫은 원유운반선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2010년까치 흘수를 22m로
개선할 계획이다.
현재, 원유운반선은 운하 진입 전에 운하소유선박에 짐을 일부 하역하고 운하의 끝에서 다시 적재한다.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인 수에즈맥스(Suezmax)를 초과하는 원유운반선은, 희망봉을 돌아서 항해를 해야 한다.
수에즈 운하는 몇몇 통과지역을 가진 하나의 항해로가 있다. 통상적인 날에는, 남행 2척 그리고 북행 1척 등의
3척의 호송선이 운하를 통행한다. 첫 번째 남행 호송선은 이른 아침 시간에 운하에 진입하여 항로 밖에서 정박하고 북행 호송선의 통과를 기다리는 대고호(Great Bitter)로 향한다.
북행 호송선은 엘 관타라(El Qantara) 근처의 우회로의 운하기슭에 정박한 두 번째 남행호송선을 지나간다. 운하를 통과하는 시간은 8노트의 속도로 11시간에서 16시간이 소요된다. 낮은 속도는 배의 항해로 인한 운하 둑의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집트의 수에즈운하국(Suez Canal Authority: SCA)은 2003년 17,224척의 선박이 운하를 통과했다고
발표했다. 이 운하은 세계 해운수송량의 8%를 점유하고 있다.
1955년에 유럽의 석유 2/3가 수에즈운하를 통과했다. 세계해상무역의 7.5%가 오늘날 이 운하를 경유해서 이루어진다. 2005년 7월에서 2006년 3월까지 운하의 통행료 수입인 32억$이다. 2007년 18,193척의 선박이 이 운하를 통과했다. 2007년 12월 30일 이집트는 2008년 수에즈운하의 통행료를 평균 7.1%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해안 사이의 연결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다음의 연결로들이 있다.
l. 이일우호교(Egyptian-Japanese Friendship Bridge) 또는 수에즈운하교(Suez Canal Bridge)는
엘 콴타라(El Qantara)에 있는 고가 고정교량이다. 아랍어에서 Al Qantara는 “다리”라는 말이다. 이 교각은
운하에서 70m 높이 이고 일본정부의 원조에 의해 일본의 PentaOcean사가 건축했다.
2. 이스마일리아(Ismailia) 북쪽 20km에 있는 엘 페르단(El Ferdan) 철도교는 2001년 완성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긴 경간회전(swing span, 선회교) 교각으로 경간은 340m이다. 이전의 교각은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1967년에 파괴되었다.
3. 수에즈 북쪽의 57km 시나이에 상수 공급을 위한 배관이 운하 아래에 있다.
4. 대고호(Great Bitter)의 남쪽 아하메드 함디(Ahmed Hamdi) 터널은 1983년 건설되었다. 누수문제로 새로운 방수터널이 1992년에서 1995년 사이 원래의 터널 내부에 건설되었다.
5. 수에즈 운하 횡단 가공선(Suez Canal overhead line crossing) 전력선은 1999년 건설되었다.
서쪽 둑의 철로는 운하전체에 평행하게 연결되어있다.
환경적인 영향
1869년 수에즈운하의 개통은 지중해와 홍해 사이의 최초의 해수 통과를 가져왔다. 홍해는 동지중해 보다 1.2m가 높아서 운하가 홍해의 조수가 지중해로 이동하는 해협이 되었다. 고호(Bitter)는 운하 부분에 형성된 고염도의
자연호수인데, 수십 년 동안 홍해의 종이 지중해로 이동하는 것을 막아 왔다. 하지만 고호의 염도가 홍해의 염도와 점차 비슷해지자 이주의 장애는 제거되었고, 홍해의 동식물들은 동지중해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홍해는 대서양보다 점차 염도가 높아 졌고 영양분이 빈약해졌고, 조수 방향은 점차 홍해에서 지중해로 흘렀다.
그래서 홍해의 종은 짜고 영양분이 빈양한 동지중해에서 대서양 종보다 유리하다. 따라서 지중해 생물군을 침입한 대부분의 홍해종들, 그리고 일부 반대의 경우와 같은 이주현상을 레셉스(Lessepsian)이주(프랑스 운하 엔지니어 Ferdinand de Lesseps를 따라) 또는 에리트리언(Erythrean)침입이라고 한다.
수에즈 사원
1960년대 나일강을 가로지르는 아스완하이댐(Aswan High Dam)의 건설은 나일강에서 지중해로 이르는 담수와 풍부한 영양분을 가진 침적토의 유입을 줄여서, 지중해를 홍해와 좀 더 비슷한 조건을 만들었고 침략적인 종들의
충격을 악화시키고 있다.
운하의 건설로 인해 침략적인 종들이 홍해로부터 유입되고 지중해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중해 생태계의 주요
구성요소가 되었고, 지중해 생태에 연속된 충격을 주며 수많은 지중해 지역의 토종 생물들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까지, 약 300여 홍해 지역의 종들이 지중해에 이미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종들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이집트 정부의 운하의 깊이와 폭을 늘린다는 발표는 홍해에서 지중해로 유입되는 종들을
늘리고 더 많은 종들이 운하를 통과하기가 용이해 진다는 면에서 해양생태학자들의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수에즈운하의 건설은 와디 튜미랏(Wadi Tumilat)을 낀 나일 델타에서 수에즈 남쪽 해로와 포트사이드의 북쪽
해로와 같은 미래의 운하에 이르는 작은 담수운하를 가로 질러 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1863년 완성된 당초의 운하는 과거 건조한 지역에 담수를 유입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운하를 낀 농업과 이주의 증가를 가져오고 있다.
Port Said 사원
대중문화
1938년 제작된 영화 “수에즈(Suez)” 타이론 파워(Tyrone Power)가 레셉스(de Lesseps) 역으로 로레타 영(Loretta Young)이 연인역으로 등장했다. 어떤 서사 영화는 부정확한 역사에 기초했다.
수에즈운하는 1962년 Lawrence of Arabia 영화에 등장하게 되는데, 끝 장면에 카이로의 상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를 배경으로 T. E. Lawrence가 국경을 통과한다.
수에즈운하는 Battlefield 2142 게임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홍해의 수에즈 운하
이집트 여행 홍해의 수에즈 운하
아인 수크나(따뜻한 샘물이란 뜻)
이집트 여행 시리즈 오늘은 홍해의
수에즈만에 있는 수에즈 운하지역에
대하여 소개 드려보겠습니다.
수에즈는 수에즈운하의 홍해 방향
깃점입니다. 수에즈에서 홍해 입구
아덴만을 지나 아라비아해를 거처
인도양으로 나가는 길목입니다.
수에즈 운하는 폭이 좁아서 배들이
교행을 하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
만 운행이 됩니다. 시간을 정해서
한쪽 방향으로 배들이 빠져나가면
다음 순서로는 역방향의 배들이
지나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운하 깃점인 수에즈와
포트사이드에는 늘 큰 배들이 줄을
지어서 대기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수에즈는 항구도시의 장점을 살려서
대규모 정유공장과 화학비료 공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