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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여행 [밀양/초동] 인륜의 근본 효(孝), 모선정신이 흐르다. 모선정(募先亭)
길손旅客 추천 0 조회 101 11.11.16 08:10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벼슬보다 효행을, 관직보다 청렴을, 

모선정(募先亭)

경남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220

 

효행을 으뜸으로 삼은 양반가,

초야에 묻혀 나아가지 않으며

효를 가정의 규범으로 삼고

지켜온 집안이다.

현세에도 귀감이 될 효행가,

모선정의 역사다.

 

모선정

조선시대 모선재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자로 밀양박씨 송은공파중종에서 관리한다.

 

 

모선재 박수견 선생의 효성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다.

원래의 자리는 사당 덕남사가 있는 자리로 사당의 앞으로 세워진 모선재와 숭절재가 같이 자리하고 있다. 덕남사에는 고려말의 충절신  송은 박익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순조33년(1833년)에 덕남서원을 창건하여 송은 선생과 두 아들, 우당공과 인당공을 배향하였다. 고종5년(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된 후, 서원강당의 영정각에 봉안하여 오다가 1933년에 모선정 후원에 영정각을 세워 옛 사우명을 따라 덕남사(德南祠)라 하였다.

 

모성정은 삼현의 역사가 숨쉬는 곳으로,

고려말의 충절신 송은 박익(松隱 朴翊)선생과 선생의 둘째 아들 인당 박소(忍堂 朴昭), 증손 모선재 박수견(募先齋 朴守堅)선생의 약사가 전해진다. 삼현 모두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효행과 덕행을 평생삼은 현인들이다.

송은박익(松隱 朴翊,1332~1398)은 고려말의 충절신으로 두문동은사(杜門洞隱士)이자, 팔은(八隱)의 한분이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비롯한 명현들과 가깝게 지내며, 공민왕때 등과하여 세 임금을 섬기면서 왜구와 북방의 오랑캐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려말의 조정은 날로 퇴락하자 관직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와 스스로의 호를 송은(松隱:스스로 소나무숲으로 숨다.)이라 지었다. 이 후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자탄시를 지어 한탄하였다. 이후 태조는 선생에게 관직을 내어주며 조정을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태조는 좌의정을 보내 불렀으나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7년(1398년), 선생이 아들들을 불러 유언하기를 '선천후천 부자이시(先千後千 父子異時)'라 하며 "나는 고려의 신하로 죽지만, 너희들은 새로운 왕에 충성하라"하였다. 선생의 부음을 들은 태조는 선생을 좌의정에 책하였고, 정종1년(1399년)에 끝까지 고려에 충절한 선생의 뜻을 기려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내렸다. 

 

송은 선생의 둘째 아들 인당 박소(忍堂 朴昭, 1347~4126)선생은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이학을 전수하였으며, 안음 현감 재임시 아버지 송은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자신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효와 우를 가정의 규범으로 두고 춘당 변중량, 춘징 변계량과 같은 마을에서 이학을 공부하며, 춘추로 강회를 열었다. 이는 향풍진흥에 초석인바, 훗날 밀양향약의 기초가 된다.

 

모선재 박수견(募先齋 朴守堅)선생은 송은선생의 현손이자, 인당선생의 증손으로 모선동에서 태어났다. 덤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학행이 높았으며, 어릴때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중종3년(1508년) 부모상을 당하자 모선산에 안장하고 묘 옆에 초막으로 시묘실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끼니때마다 곡을 하였으며 3년상을 마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선정이라 편액하며 묘역을 청소하고, 성묘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평생 부모님의 묘를 지키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이를 본 부관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올려 참봉직을 수차례 내렸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선생의 효성에 감복하여 일대를 모선이라 불렀다 전한다.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면서 선생의 저서와 문헌들이 같이 불에 타버렸다. 이 후 9세손 덕계공 박증엽(德溪公 朴增曄)이 영조 때 다시 중건한 건물로 수차례 중수하며 보존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 가문의 뿌리깊은 효성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진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청렴하게 살다 간 청백리, 밀양 양반가의 한집안의 모습이다. 효성과 우애, 충성을 마음에 두고 욕심을 머려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면서도 세인의 존경을 맏으며 살았던 역사속의 산 인물이다. 한 가정사일수도 있는 단편이지만, 지금도 모선정에는 잔잔한 효행이 흐른다. 인적 없는 뜨락이지만 정갈하게 정리된 마당과 먼지 없는 마루등 눈에 보이는 모습이 그러하고, 모선정의 앞 짙푸른 나무들은 세월을 따라 왔으니 지칠법도 하건만 건대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연이어 지는 관리와 보존속에만 가능한 것으로 모선정의 품은 그리도 잔잔하고 따스하다.  

대대로 전해내려 온 지극한 효성은 만인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역사가 된다.

 

 

 

 

 

숭절재

 

모선정

정면6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다. 연산군6년(1500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9세손이 다시 지었다.

조선 후기 재사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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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1.16 10:45

    첫댓글 모선정 새로운곳을 답사하고 갑니다 좋은곳 알려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곳이군요

  • 작성자 11.11.18 07:09

    아주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문이 닫혀 있어 뒤로 들었습니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겠지요.

  • 11.11.16 13:23

    글과 사진 잘 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1.11.18 07:09

    감사합니다.
    본 받을 만한 곳은 오히려 개방을 했으면 했는데, 막아 놓아 아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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