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7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요한 19,31-37
우리는 언제 마음의 안식을 얻는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기도 하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으로 살도록 기도하는 날이고 사제들은 그렇게 결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일은 바로 ‘행복’에 의해서입니다.
누구나 행복한 것을 선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고통당하러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흘리실 때의 기분은
이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무언가 이루시려고 그토록 애쓰신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양심이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때부터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셨기에 빚진 존재로서 아버지께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은 그냥 눈 한 번 감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 뒤에 올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양심이 그렇게 만듭니다.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이 지상에서 생명을 받고 수십 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드시기 위해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브라질에서 한 유기견이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아직 탯줄도 잘리지 않은 신생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개는 신생아를 물고 가장 가까운 집으로 달려가 문을 긁으며 짖고 사람을 불러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기를 보고 병원에 데려가자 개는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신생아는 살아났고 몸에는 이빨 자국 하나 없었습니다.
이 개는 왜 아기를 인간에게 돌려주었을까요? 분명 유기견이 되기 전에 사람에게 길러졌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았기 때문에 양심상 신생아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듯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정의 시스템입니다.
받았는데도 주지 못할 때 양심이 만들어내는 불안함은 죽음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인도에서 다쉬라트 만지히는 22년간 혼자 산 하나를 깎아서 길을 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산을 넘어가면 2km밖에 안 되는 거리를 아픈 아내를 데리고 60km나 돌아가야 해서 결국 아내가 병원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지히는 이웃 사랑으로 그런 일을 한 게 아닙니다.
아내에 대해 미안함을 없애려고 평생을 그렇게 바친 것입니다.
양심의 평화가 죽음과 같은 고통보다 평화롭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을 바라보며 고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성심을 내어주는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안식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설암에 걸려 돌아가신 얼굴이 환한 미소를 띤 아르헨티나의 마리아 세실리아 가르멜 수녀님의
환한 미소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분은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마지막으로 글로 썼습니다.
예수 성심의 고통과 안식에 참여하는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난 매우 만족스럽다.
고통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와 나를 위해 기도하는 많은 이들로 인해 놀랍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7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복음: 요한 19,31-37
예수 성심의 뜨거운 사랑은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거듭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당신의 우리를 향한 절절한 사랑, 활활 불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표현하고 계십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친히 보잘것없는 내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나를 당신 품에 꼭 끌어안고 나와 눈을 마주칩니다.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내 볼에 당신 얼굴을 비비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십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나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시며, 뒤뚱뒤뚱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박수를 쳐주십니다.
결국 우리의 주님은 세상 자상한 아버지 같으신 분,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따뜻한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 생각만 하면 주님 마음은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배신과 반역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옆길로 자꾸 새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든 되돌이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인내와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요한 복음사가 역시 우리 인간을 향한 정말이지 기가 막힌 사랑, 바보같은 사랑의 마음, 곧 예수님의 마음을 잘 소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악행과 반역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분을 한갓 인간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악행에 그 어떤 보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마음만 한번 바꿔먹으시면,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의 그 참혹한 현장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시며 묵묵히 인간의 사악함과 무지막지함을 견뎌내십니다.
십자가에 매단 것도 모자라 인간들은 운명하신 그분의 옆구리에 창을 찔렀습니다.
심장까지 관통한 창으로 인해 그분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돌아가시면서까지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흘리신 피와 물을 통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 제정을 통해 우리를 단 한 번, 혹은 일정 기간만이 아니라
세세대대로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겠다는 뚜렷한 징표를 하나 남겨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애끓는 사랑, 예수 성심의 뜨거운 사랑은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거듭 표현되고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강론>
(2024. 6. 7. 금)(요한 19,31-37)
<‘회개’만이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요한 19,31-37).”
1)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은, 죽음을 앞당기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 교회는 그 일을, 아담에게서 하와가 생겨난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교회가 생겨났음을 상징하는 일로 해석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피’는 예수님의 희생과 성체성사를 상징하고, ‘물’은 세례성사를 상징합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탈출기 12장 46절, 민수기 9장 12절에 있는, 파스카 희생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말라는 명령을 인용한 것인데, 예수님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일을 예언한 말씀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라는 말씀은, 즈카르야서 12장 10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이상한 일인데,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통도 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 때에 겪으신 ‘큰 고통’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큰 사랑’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고,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생명과 구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이고, 아직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이 ‘예수님의 고통’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통도 커지는 것은, 사랑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일이고, 사랑하는 쪽과 사랑받는 쪽의 일치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일입니다.
따라서 고통은 사랑의 완성과 일치를 향해서 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들 쪽의 사랑과 일치가 아직 부족하고 미완성 상태이기 때문에 겪으신 고통입니다.
물론 항상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충실한 신앙인들, 즉 성인 성녀들은 주님의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그리고 그 반대쪽에 있는 기쁨을 나타내신 비유가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2-13).”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마음도 ‘예수 성심’이고,
그 양을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하는 마음도 ‘예수 성심’입니다.
3) 주님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신앙인들이 겪는 고통도 커지는데, 그것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라는 형태로 다가옵니다.
주님을 덜 사랑하는 사람은 박해도 덜 받을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박해를 안 받을 것입니다.
만일에 박해받는 것이 두려워서, 또는 박해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신앙을 버린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잘 인내함으로써 완전히 단련되고 정화되어서 마지막 단계까지 가면, 즉 사랑이 완성되고,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단계에 도달하면, 고통은 사라지고 ‘영원하고 참된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4) ‘예수 성심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만일에 회개는 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주님께 더 큰 고통과 슬픔을 드리는 일입니다.
루카복음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이 말씀에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이 여자는 자신이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면서 크게 감사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라는 말씀은,
“크게 감사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회개하면서 큰 사랑으로 응답한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말씀은, “자신이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감사하고 적게 사랑하고 적게 회개한다.” 라는 뜻입니다.
<감사, 회개, 사랑은 하나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