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萬象 化現은 悠悠하여 순간 斷絕相이 없는 것인데 사람의 정신은 순간 단절상으로 만상의 형태를 구분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석류에 있길 분별생각을 지으면 그분별생각力(念力)에 이끌려 (引力이 自然발생과 같이 있게 된다것임)가지고 그 그런가를 보기 보이기 위해 自他의 相別이 휩쓸리게 되는 것이니 흡사 소용돌이치는 , 휩쓸려들듯 남도 빠지게하여 고통케한다는 것이다.이것은 自분별짓는 생각의 모양이니 남이란 것도 남이란 모양을 일으켜 세워서 즉 남이란 모양을 생각으로 지어서=생각으로 짓게 되면 衆生象이 되므로 남이란게 外物相見으로(즉 껍질 있게 되는 것이다. 고통케하고 스스로 그 고통스런 본다는 것이니 역시 스스로의 성품이 거울象으로 나타나 그 허깨비 같은 거울象을 보고 고뇌한다는 것이다. 즉 남이란 것도 스스로 성품모양(自性相)에서 일어나 거울되어 있다는 것이다. ○ 석류에 있길 석씨가 作者의 論理와 自性의 論理 差異點을 辨設하여 놨는데 그 要旨를 옮겨보면 이렇다。作者는 모든것이 作者와 作者의 作品에 의한 것이라한다 하고 自性에 의함을 主張하는자는 모든 것이 自性이 내비친 自性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以上이 그 主된 內容要旨이다。다음은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는 말이다. 필자는 이를보고 생각하길 왜 석씨가 절대작자와 절대작자의 작품이라하지 않고 自性이 내비친 현상이라하였는가? 이것이 의문점인 것이다.그래서 편협小見에 이렇게 생각해봤다。이는 그어지러운 정신 파먹는 이론說은 제쳐두고라도 西食(사로잡아 孚 먹고자한다는 뜻)으로 시험코자 하는자 있어 그西食은 공손하기가 스승과 제자에 있어 弟子의 허울둔갑을 쓰고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처럼 해가지고 곤란한 물음몰이로 개굴창에 덫을 놔 잡고자하는 그런 태도를 취한다.또는 그렇게 스승이란 자가 그러한 弟子를 設定하여 自身의 有識을 그럴듯한 명분하에 드날릴려 하였을지도 모른다)(필자의 치우한 생각같지만) 단번에 自我意志함을 만들어보라고 하기때문에 절대작자나 그작품이라고 하지 않았으리라°물론 그러한 능력있을지라도 저 서식의 희롱에 놀아나는 결과를 맞는(迎)것이요 맞(中)고자하나 맛(中)지 않기 때문이니 몰려들어 조성시키는 諸與件이 分別을 일으키어 온것이기에 어거지로 줏어맞추지 못하는 것이다.만약 그 意圖하는대로 짜맞춘다한다면 一相이되어야 할텐데 이리저리 모양을 달리하여 왔으니 짜맞춰야 量만 불어날뿐 一相이 될리없기 때문이다。一相이란 그 意志相을 말하는 것이니 一相이 된다면 西食者가 시험코자 물을필요도 없고 석씨 또한 거기 나타나 있을필요가 없는 것이다。自性이 내비친것이라 하여 도 문제는 마찬가지다。自性이 내비친것이라한다면 短見(이는 남을 머리가 우둔하다하는 비방에 뜻담고 있는 말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얼른 생각해보임을 말한다)가진 이는 만들을 필요를 받았다 하겠지만 西食長見은 그럼 내가 의도하는대로를 自性으로 단번에 내비춰보이라 할 것이니 이의 대처를 어떻게할 것인가? 이말이다。이또한 그러한 능력있더라도 앞론과 마찬가지로 分別影象이니 차등적 아닌 時를要求하므로 (내비춰 그려나타내는 현상 무슨 相事이던 過程이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 意志하는 자의 감관기능의 처한 입장도 고려해야한다 할 것임 分別되어 틀려도는것을 그감관에 맞게 맞춘다는 것은 幻影術짓는거와 같다할 것임 지금 필자의 머리가 저쪽 글에 물이 들어있어 끌어다 쓰는 用語文字와 뜻이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異相을 窮變해내지 못하고 있다) 당장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을것이기 때문이다。설령 단번에 이루어진다하더라도 허깨비 환영같을뿐이라는 것이다。맞출수 없는 문제를 내어 맞추라는것、곧 그것이 답이니 흡사 관혁을 치우고 나르는 화살이 관혁을 조성하여 거기 맞추라는거와 같은 것이니 억지인 것이다。조성되는 與件이 差等的歐辨이 있기 때문임으로 저 허공에 구름모양이 나타나는 것이지 구별이 없다면 구름모양을 感識하는 識別의 區分相 또한 있겠는가? 설령 作이나 影이나 할수 있다하더라도식별자의 限界를 지어놓곤 되질 않는 것이니 또 식별者의 限界를 무너트리면 굳이 식별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식별이 없는 것으로 된 것인데 말이다。식별자의 한계性은 트집잡는 구실역할을 하게됨인 것이니 너와 나의 한계를 확 터놓자하나 너와 나란 양끝의 막대와 같으니 어떻게 확 터놓을수 있겠는가말이다。양끝이 없어야 할텐데 兩端 나아가선 多此一切指稱은 확 터놓을수없게 돼 있는 것이다。空無라도 空無아닌거와 쌍벽 또는 막대를 이루니 한계를 확 터놓을수 없는 것이다.그 막대를 짧게하다못해 켸(여러겹 두께에서 한껍데기씩 벗겨내는 것을 켸라한다 양파껍질식)를 일으키고 서로가 뒤집히는 형국이 된다하더라도 막대라는 것이 있는 이상 한계의 도막에 걸려 확 터진게 아닌 것이다. ○ 自 念願이一合相이지 一合相이 따로 있겠는가? 自意志에 맞으면 좋다하고 듣기좋은 꽃노래도 한두번이라고 좋다가도 싫증나면 버리게 되니 이렇게되면 一合相이란 것은 변화를 타(乘)는 것이며 한결 같은 모양이 없는 것이 되려 一合相인 것이니 그 者의 念願이나 心家身의 신진대사 생리현상의 조절에 의해合相은 모습을 달리해 나타나는 것이니 맞춰주는 意志따라 氣分따라 動作의 모습이 一合相인 것이다。석씨는 말하길 一合相은 凡夫가 탐착한다고 말하였는데 一合相은 양고기국 같아서 맛있기는한데 여러 입의 비위 맞추기는 어렵다하는 것과 같다할 것이고 自我의지를 위주로한(설령 他의 처지를 고려한다하더라도 그 고려한다는게 제의지 제생각으로 부터이니 自我 의지를 위주한다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남에 입장도 들어준다 한다면 크게 수용하는것 같지만 그남이란자의 입장도 그남이란자의 自我一合相이니 역시 一合相이란 것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一合相이지 모두를 배려한 一合相이란 없는 것이다。왜냐? ㅡ合이란 흐르는 淸流같아서 모두를 배려한 相이 아니고 없기 때문이다。또 왜냐? 一塵이라도 거부한다면一合相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혹시나 물에 젖듯 잠깐의 同情은 이끌어 낼수 있다 할 것이다。淸流에 가랑잎이 가는 것은 自我一合相이 아니요 自性이 구분을 내어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는 겉껍데기 外見物合相이기 때문이다。여기서 自性이란 것도 역시 식별을 내는 外器의 性向일뿐 가늠은 아닌 것이니 가늠은 해탈옷을 짓지않기 때문이다。그릇이 기울어야 담긴물이 흘러 모양을 짓는 것이니 염원치 않고 가만히 있는데야 무슨 옷을 짓겠는가 이다。즉 行이란 것이다. 釋類에 말하길 (필자가 잘못이해하였는진 몰라도=曲解錯(乘)悟) 모든 모양이 환영(幻影)같아서 自 性의 念願行에 의해 환영이나 허깨비같이 나타나기도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니 願行을 지으면 나타나고 염원행이 다른 方向으로 돌아갈제(틀려돌때)는 이쪽의 相은 소멸된것(관심밖이니까)으로 여겨진다는것이다。自性이 行을 어떻게 무엇을 갖고 일으키는가? 自性이 自性있다는(存在를)因識시키는 인식시키기위한)本質을 도구로 삼아 行을 일으키는 것이다。본질이란 또 뭣인가? 本質이란 自性의 집과 같은 것이니 自性의 本質이란 모양(相)을 조성시키는 原因與件이니 事物이나 事物아닌 根本인 空이나 空아닌 相으로부터이니 만약에 삼차원이라할것 같으면 가로 세로 높이의 基本가르킴을 根幹으로 삼을 것이고 面相이라면 以中 두가지일 것이고 線이라면 以中 한가지일 것이고 點相이라면 모양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거나 그에서 오는 것이거나 하는 일 것이며 四次元等이라면 立體照明의 界로부터일 것이니 如何한 感識의 基本이 되는것을 本質이라 할 것이다。맛이라면 맛을 내는것 香이라면 香을 짓는 것 음향이라면 음향을 그리는 것 色이라면 色을 비추는것 부딪기는 감촉이라면 감촉이 와 닿게 하는것 등이 本質이 되는 것이다(또는 그 顚倒가 本質이니 식별을 일으키는 감관기능 具造가 본질일 것이다) 이처럼 諸相이 自性이 내비친 幻影의 거울이요 허깨비같은 것이니 있기도 한 것이고 없기도 한 것이라 하니 그것은 감식을 일으키는 감관능력이 다르므로 분변이 있는 것처럼 눈으로 보나 만질수 없는 것이고 냄새 맡으나 눈에는 나타나지 않는것 있고 맛은 있으나 냄새가 나타나지 않는것 등이 있는 것처럼 인식시키는 감능력에 따라 다르기때문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이니 흡사 도깨비장난같은게 세상 모든 모양이라는 것이니 이현령비현령이라는 것이다。석류 억지쓰는 모습이 눈에「선하게」보이는 것같을 뿐이로다 할 것이다。모든일(事相) 모양도 이와 같으니 으르렁거리고、찢기고、볶고、쌈박질하고、치하하고、웃고、울고、시기하고、좋아하고、노래하고、춤추고、꽃이 피고、새가 울고, 열매맺고, 낙엽지고 등 모든 모양이 이와 같이 立場따라 상황따라 生전개되었다。消하는 허깨비장난이라고 몰아붙히니 이것이 自性이란게 미쳤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狂症나지않은 바에야 어찌 그럴 것인가? 어지러운 작난 옷은 떨쳐내버리고 참모습을 보라는 것이다。自性의 참모습이 어떻게 생겼나? 부처같이 생겼나 귀신같이 생겼나 나는 알지 못할 따름이로다. 이것은 말이 自性이지 外觀性의 서로 緣起(고리지어 일어난 형태)되어 있는 모양인것이니 겉껍데기 끼리끼리 물고 늘어지는 모습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 꿈속에 事이다。흐리고 덜흐리고 맑은 세칸의 칸막이 浴造같은 물이 있는데 내가 裸身으로 흐린 곳부터 차례로 들어가 목욕을 해나가는데 맑은 물에 들어서니까 보고 있던 어린애들 끼워달린 여인네도 있기도 한 여인네 서넛 중에서 젊은 여인네가 한다는 말이「어머ㅣ 여럿이 먹는 (사용하는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물인데 하니까 나이 느긋한 아주멋네 한분은 내 편역을 들듯「괜찮아 다른 사람 안먹는다 했어 한다。그래서 내가 수그리고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얼른나와 좁은 골목같은데 수돗물 틀어논데 가서 씻었다。 내가 생각하길 젊은 여인네의 성숙치 못한 意中은 通하는 건 좋은데(그것은 自作이 아니라 受敎 뺏겨쓰다싶히 하는 것이니) 부끄러움을 알라는 뜻이고 느긋한 아주머니 말씀은 여러사람 관심밖이니 내가 틀어논 수돗가에 가서 씻어 그 물 흐르게 할 줄 알으신 분이었을 것이다. 以上 잠깐 꿈속에 일을 적어봤다. ○ 석류가 말하는 自性이 내비친 것이란? 絶對軸이 아니라 各個軸이라는 것이니 모두 제 위주 自인식하는 껍질개체가 爲主가 되어 自性이라는 것이다。이러므로 껍질이 껍질이 아니요、알맹이가 알맹이가 아 니다. 그 상황을 따르는 것이니 연극의 주최를 누가 하느냐에 달린 것이니 이러므로 주역과 조역의 역할분담이 따로 있게 되는 것이다.또 그 연극의 주최나 주 조역이 뒤바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또 생각하길 연극의 주최를 각기 自己가 한다고하는 것이 自我中心의 森羅相影(내빛친)觀인 것이다。(他위주 他가 한다는 것도 自生覺으로부터이니 自我中心에 포함되어 있다할 것임) 이것을 我者를 버리면 自性이라 함인 것이니 自性에 自字 또한 있겠는가? 그냥 性이며 性字 또한 있겠는가? 궁극엔 단멸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모두 묻어간 저ᆢ돌음인 것이니 제삼자적 관객의 立場으로도 관찰해 본다는 것이다。절대축이 아니라 상대축이라는 것이니 奇學에 있는 太乙經 呪文을 볼 것같으면 주술로써 自己本位의(=이게 뭔자인지모르겠다。원체 휘갈겼으니 내가 써놓고도 모르겠다)(軸字를 그렇게 써논 것 같다) 축을 형성시켜 옥황상제 地位처럼되어 如意成事해보겠다는 것이니 이런걸 봐서라도 옛 철인들의 생각 중에는 諸象事相이 절대축에 기인하지 않고 대상체 적응에 있는 상대축에 기인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분들도 계셔 이러한 주술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自性軸이란 집중할 만한 對相이 있으면 諸與件元素들이 거기에 이끌려 모여 축을 조성시켜 주위를 둘러리 세우는 것이니 주위의 둘러리 세우는 모양이 自性이 내비친影象化로 여긴다는 것이다。말하자면 自我中心의 연극 무대는 자기가 필요에 의해 형성시킨 모습의 거울상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거울이 거울이 아니요 환영같은 자기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연극무대와 주위의 조성 또한 自我外見象 역할을 한다는 것이니 달리 他物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모두가 自我、중심역할을 하여 갖은 界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으로 우주의 절대축은 없다는 것이니 절대축이 없다는 것은 無爲有動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내 생각하길※ 그러한 대상체 適應相對軸들은 니콜(=)이 되어 저흐르듯 通한다 電氣흐르듯 통한다는 것은 通管이 상징적으로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전류통관 폭의 확대는 하나의 커다란 空鳴(메아리 울림波) 현상같은 空化현상을 일으켜 한통(桶) 속이 된다는 뜻이니 남이 없으니 내 또한 있을쏜가 한통속이란 것 또한 말이 그렇지 나눔없는 混査와 같을 뿐인 것이다。즉 삼라相事界는 분변해서 구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混査로 여겨본다면 혼사로도 보인다는 것이다. 行이 있음 生命體 動物이 없더라도 大氣가 형성된다.왜냐하면 그行이 生命이요 體現相을 머금고 있는 胎動位置이기 때문이다.그러해서 生命體가 設立된다는 것이다。行이란 따로 노는 것을 말한다。行이있음 작용이 있다는 것인데 작용은 物質 凝縮前後한 곳에 다 있게된다。물질은 여러 여건 원소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生命體의 여러 모습은 그 근본 質素들이 같지 않을 수 있으니 地球의 이런 모습의 生命體만 아닌 것이다.이런 모습 뿐이라한다면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인식받은 것에의 범주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저 月 自體가 생명체요 저 공간이나 저 진공자체、우주자체가 생명이요、토성이나 목성 등 어떠한 은하성운을 띄는 모습이나 그 行事생긴 모습(되어 돌아감)이 모두 생명으로 본다면 생명아닌 것 없으니, 사람이 고루거각에 연꽃의 생각을 그렸더라도 나타나기론 구름 · 공간 • 별 등 諸樣相을띌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그러므로 누구와 言說對話를 나누었더라도 그 對相體가 사람이 사람으로 여길줄 모르지만 귀신 등 一切指稱하는 모양 등등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니 저 태양이나 허공중에 뜬 백운이나 물속의 잉어나 여러 次元의 대상과 對話일 수도 있는 것이다。환태되어 나타나는 것이 마치 애벌레가 나비되듯 말이다。그 애벌레의 모습을 보고 그 나비形일 줄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지금 애벌레와 대화하고 있는 것은 나비의 本모습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라하면 나비의 前모습이 애벌레인데 前모습을 겉모습이라 한다면 겉모습만 보고 속모습이 나비와 같음임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말이다.생명은 이런 것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사람이 예측치 못하는 것이 生命일 수도 있는 것이니 如何한 생각치 못한 모든게 생명일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대의 얼굴이 陽刻凸(철)에 해당하니까 空에 얼굴은 마치 하회탈 속 모습과 같아 陰刻凹(요)에 해당한다 할 것이니 다른 부수적인 物相은 모두 空身의 一部分이 된다 할 것이다。그대 행동 작용이 이와 같고 그대 동작으로 인한 成果과 이와 같다할 것이니 空은 가만히 있어도 그 反對立場을 취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할 것이다.주위 여러 이 空相이라 하지만 이 아닌게 多數이니 區別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짝의 개념인 요철을 생각하여 空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할 것이다. - 想念에 의한 衆生을 이룬 것이 無間에 갇히어 있게 하는 것이 諸圖形과 무늬文字 立體모양 동작 모양인 것이니,쇠뿔을 그리면 소 모습이 갇히어 그 몸體가 소 몸 노릇을 하는데 단지 그 뿔이 비집고나와 돋보인다는 것이요(비집고 들어 갔다한다면 그 外 모두 것이 소 몸을 이룬 것이나 시각감을 어떻게 놓느냐에 달린 것이니 이쪽에서 그 뿔모습을 보는 立場이니까 비집고 헤집고 나왔다 봐야 할 것이다。一例로 8字 文形을 사시적으로 놓으면 생각하기에 따라 입체모양이 前後로 顚倒된다 할 것이니 내려다보는 시각 개념이라면 저쪽으로 엎어진것으로 보이고 쳐다보는 개념이라면 이쪽으로 엎어진 생각이 들 것이다.) 파리날개를 그으면 그 몸체가 파리몸이 되는 것이다. 만약 파리나 소 몸 전체를 그린다면 그것은 주위 환경相일 뿐이다. 一例로 아파트벽에 어떤 상징적인 도형문안을 그리면 그 아파트는 그 뜻을 상징하는 몸 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모두가 그렇다는게 아니고 형세이나 處地따라이다。 그래서 立春帖과 같은게 있게된 것이니 笑門萬福來란 글을 써서 붙히는거와 같다할 것이니 반드시 그렇치만도 않으나 단지 인간의 염원을 담은 모습이니 그릇 형세따라 염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그 그릇과 형세에 맞지 않는데 염원한다고 여건조성이 이끌려 올 것인가? 이 또한 생각해볼 문제이라할 것이다. 다음 말은 이게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이니 반드시 그렇다는 것만은 아니다。그 그릇이나 그 形局을 봐서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니 뭔가하면 뱉는 말이 씨가 되어 즉 말이 諸事相의 씨(種)가 되어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이니 미리 예견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뱉은 말이 씨가 되는 것은 생각을 되씹는 데서부터 발단이되니 여럿이나 혼자이거나 계속 되뇌이게 된다면 그 力量따라 여건조성이 그렇게 말려들어 온다는 것이다.항상 머리속에 떠나질 않아 잠재의식속에라도 그 말뜻이 새겨져 있다면 여건이 조성되는 것이 마치 임금 아기 탄생하려고 부모가 생기는 것 같고 혼인 대례청에 많은 하객이 몰려드는 것과 같다할 것이다. 何人의 벗이 幼年期에 하고 노는말이「나는 커서 장차 운전기사가 될 것이다. 하곤 부르릉 부르릉 하곤 자동차 모는 모습을 흉내 내기를 즐기더니 훗날 장성해서 그리됐다한다면 이것이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예견해서가 아니라 항시 염원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何人이 또한 유년기에 何事를 (神崇上 事 그 業에 從事하는 자들의 주문·독송과 같은 것) 흉내 내기를 즐겼었는데 그런 事는 장차에 何人의 器와 맞지 않는 것이라 하여 그런 뜻의 地名이 있는 곳에 가서 居住케 한다면 이것이 또한 어찌 우연에 일치라고만 하랴! 생각과 말로 되뇌이는 속에 제여건이 조성된다 할 것이니 그러므로 高僧이 예언하듯 하는 말이 무얼 내다봐서라기보단(물론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하신 말이 씨가 되어(이는 그 弟子들이 듣거나 여러 사람이 들었다라도 계속 생각을 되뇌이거나 잠재의식속에 살아있다면) 그 말과 같이 시간을 두고 果 를 成事시켜내는지도 모를 일이라 할 것이다。이것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으니 그 역량 그릇따라、그 형국따라라 하였으니 모든 말씀이 다 그렇다면 내가 오르지 못할 보탑에 되지 못할 돌부처를 되뇌인다고 해서 그리되겠는가 이말이다。혹 윤회生說을 따르면 그리되는게 여럿 있을런지 모르지만 금번 엔 그럴만한 그릇이 아니므로 그렇게 되질 않는다 할 것이다. 즉 될 것은 되고 안될 것은 안된다는 것이다。이상의 뜻을 봐서라도 하고노는 말이라도 거저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宇宙에 박혀있게 되니 좋은 생각에 좋은 말을 가려서 하라는 것이나 生을 살다보면 여러 일을 겪는데 어찌 꽃、꾀꼬리소리만 하겠는가? 이말이다. 그렇더라도 될 수 있음 말을 가려서 하라는 것이니 필자는 언설이 지저분하여 이 형편으로 지나는지도 모른다. ○ 옛 글에 하였으대 城火殃魚란 말이 있다。귀신의 무리들이 사람을 다뤄 희롱하며 不勞所得 取하고 그 터를 다스리는 나라집에 세금 한푼 안내고 그 나라집에 사는 여러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게 마치 이와 같으니 안식을 얻게하고 生活의 活力을 준다는 名分下에 자행되는 일인 것이다。또 城에 불은 끄면 그만 타겠지만 아궁이 계속 나무짚히는 단 솥은 부어도 부어도 단 솥에 물붓기라 그 땔나무와 그 물이 다 한 다음에 끝날 것이니 그 피폐야 말 할 나위 있을 것이며 도박 붙혀놓고 고리봐준다는 명분하에 노날적마다 방세、불세、이핑계 저핑계 되어서 돈을 뜯으면 결국엔 고리본 자에게 돈이 다 들어가고 도박꾼들은 모두가 돈잃은 피해자라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줌이라 돈따려거던 내돈 꾸어가서 하라하니 이제는 빚쟁이를 만드는 것이라 새집 主人이 前主人에게 집을 샀는데 그것은 제집이 아니요 남에 집이라 왜냐? 집값이 하락하니 전월세 보증금 제하고 나니 한푼도 안남게 되는지라 그 집값 붙들라고 울며겨자먹기로 할 수 없이 價 値붙드는 方式으로 二重으로 사게 되니 이는 도시 새 집主人의 잘못이 아니라 불로소득하고 세금 한푼안낸 집단 귀신의 무리들 때문이라 할 것이다. 보통사람들 보기에 손가락질 받는 호화사치스런 자는 본보기로 이목을 쏠리게하려고 그렇게 하여났으나 단 몇 프로로 별 것 아니요 겉으로 안 그런체 좋은 허울쓴 귀신집단의 피폐가 성에 불이 못에 잘 사는 고기를 못살게 하듯 온세상 못의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하고 있는 것이니、 눈 등 五感 中에 나타난 것은 별것 아니요 이슬비에 옷 젖는 것처럼 낌새도 모르는 새에 피해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귀신의 무리집단을 모두 때려 부셔야 할 것이니 조선말엽에 대원군이 피폐 심한 서원을 철폐하듯 철퇴를 가하여 때려부셔야 할 것이다。필자가 귀신무리가 먹고사는 것을 치졸하게 헐뜯고 비방코자 해서가 아니라 世上事가 그렇게 돌아감이었기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별다른 뜻은 없으니 어느 시대이고 귀신의 무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라 하겠다。달리 눈을 뜨면 서씨와 그 졸개와 그 졸개아닌 졸개의 작난이요 더 거시적으로 뜨면 그 하고노는 꼬락서니가 가소로운 일이요 더 크게 뜨면 내하는 행위 일부분이요 눈을 감으면 너 나란 관점을 떠난게 하고 노는 꼬락서니가 그렇다는 것이다. ◎ 符籍의 圖案이 또한 앞의 쇠뿔논리와 같은 것일 수 있으니 孚(포로=사로잡힘)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할 것이니 그것을 허황된 것으로 돌린다면 별 것 아니라 할런지 모르지만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본다며 포로있게 된다는 것이다。이것은 二次元의 界이지만 앞에서도 많이 설명했지만 (TV영상 등) 三次元한 단계 당긴 것이고 四次元을 두 단계 당긴 것이고 一次元이나 공차원을 내끌은 것이니 그 상징하고 있는 것이 걸려든다 할 것이다. @ 힘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 갖은 책략을 다 쓴다. 만약 何人이 내게 논리적으로 시비하러 온다면 당신이 나보다 여러모로 힘이 세면 당신의 주장이 옳을 것이고 당신이 나보다 힘이 약하다한다면 시비할 필요가 당연히 없다 할 것이다。왜냐? 맞아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우격다짐 주먹이 세고 봐야한다。육신이 단련되어 건강치 않고선 싸워볼래야 싸워볼 기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제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다。두둘겨 패주면 살려면 꼼짝없이 제 주장이 먹혀들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힘 가짐도 영원할 수 없는 法 당신이 고뿔감기 앓던가 衰疾해져 맥을 못출 때 원척진 자가 가만히 있겠는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할 것이다.힘이 있더라도 형세를 봐서 써야지 아무때나 힘자랑하면 독불장군없는지라 뭇매에 맞아죽기 십상일 것이다。그렇더라도 무언가를 해넘길려하는 힘을 기르고 봐야 할 것이다。힘을 얻으려다 그 방식이 잘못되어 질서유지의 法網力에 걸렸다한다면 나는 그 힘을 얻고자 하는 노력을 높이 살 것이나 法망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책택했더라면、 할 것이다. 힘을 얻기위해 토룡탕도 먹고 사철탕도 먹고 수겹의 성벽과 방어막을 헤집고 들어가는 노력을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난 네게 진다) 하면 종될진 몰라도 시비거리 더 없다 할 것이다. ○ 스스로의 성품(自性)이 내비친 것이 제(自)모습이라 하는 것은 신체적인 생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因識하는 感管具造를 갖고 있다는 것과 삶에 있어서의 活動相과 마음씀씀이를 말함인 것이다。因識하는 감관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은 外部의 接觸物이 自性이 내비친 相이 아니고 感別하는 因識構造 感管이 自性이 내비친 形態라는 것이다。저ᆢ 나무의 自性이 내비친 모습은 나무의 겉생김과 성장발육하는 모습이고 사람의 自性이 내비친 모습은 사람의 겉모습이라는 것이니 나무는 나무대로의 活動相이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의 활동상이 있는 것이다. 나무는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는 원인에 의해 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고 사람 또한 감식(感識)하는여러가지 영향을 끼치는 원인에 의해 제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이를 갖다 自性이 내비친 것이라 하는 것이지 어디 특별나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 이상하게 생긴 모습)을 自性이 내비친 모습이라고 하는건 아니다。이를테면 사람의 自性이 저 꽃을 꽃이라 인식할지언정 꽃이 사람 自스스로의 自性이 내비친것이라곤 할 수 없는 것이니 꽃은 꽃대로의 自性이 있어서 그 내비친 것이 꽃의 겉모양이라 할 것이니 사람은 다만 감식기관으로 그것을 꽃이라 감별할 뿐인 것이다.그런데도 사람 自我주위 모든 것을 自我를중심 축으로 삼아 自我自性이 내비친 것이라 한다면 사람 自性에 꽃의 性分이나 주위환경、배경、流行、조성 성분이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니 이렇게 되면 이것은 얽어(엮는)제끼는 理致가 아닌 것이다。((世上에 感識되는 事理를 떠난 것이 自性의 (보통 世人의 삶의 꿈에 얽매인 속의 능력을 초월한) 측량치 못할 내비친 形象이라 할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惑世하고 迷宮으로 빠져들게 하는 가르침이지 神仙의 造化를 부르는것은 아닌 것이다。만일에 念力呪術로써 物相(※ 相은 幻影같은 생긴모양 靈覺이 그려만든 모양을 말하는것이고 象있는 여러 형상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선 신기루 같은 物모양을 말하는 것임으로 필히 相字를써야 하는 것이다)을 일으키고 變作(이를테면 풍운조화 등)하는게 世上 理致로 해설할 수 있는 것인가?한다면 그것은 과학적 事物理的으로 해석치 못한다하더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나 그것이 自性이 내비친一部의 모습이라곤 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 필자의 한쪽으로 치우쳐 몰아가고 있는 생각인 것이다.그것 은 世物理事로 해석치 못하는 神術이라하는 相인 것이니 측량치 못하는 것에서만 自性이 특별난 모습을 내비치는 것이라곤 할 수 없는 것이다.))그 人 花가 혼잡상을 일으켜서 꽃의 自性이 내비친 것이 사람의 모습이라곤 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바른 (힘이 실림) 인식법이라 할 것이다. 저마다의 이 내비친 것이 모여서 萬象을 이뤘다 할 것이다. ◎ 힘이 세면 용서할 위치에 서고 힘이 없음 용서받을 위치에 서게된다. 귀신이 싸잡아서 엮어서 法網에 넣는다면 그 法網의 힘보다 세면(즉 그를 逆利用할 줄 알면) 되려 法網이 굽실거려 벗어나오게 되지만 그 法網의 힘이 셀때는 잡힌 고기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니 용서해 줍샤하고 용서받을 위치에 선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어떻게든 힘을 강하게 갖고 볼 것이다。힘이 세면 하찮게 엮어 넣고자하는 귀신을 겁낼게 없다할 것이다。귀신은 무얼갖고 엮어서 먹이삼듯 희롱코자 하는가? 利속 챙길 것을 갖고 유혹해서 엮어넣고자 하는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면 누가 엮어들겠는가? 갈 수 있는 大路처럼 하여놓고 엮어넣게 되는 것이니 어느때 어느 곳에 귀신의 法網이 펼쳐질지 알수 없음으로 항상 귀신을 조심해야한다 할 것이다.그냥 먹고 입는 것도 귀신이 탈잡으면 걸리게 되있는 것이니一切 모든 行속에 귀신의 법망도 같이 있다 할 것이니 몸이 쇠약하면 고뿔들듯 방심하고 있을때 귀신의 法網도 펼쳐진다 할 것이다。귀신은 꽃과 꽃향기 같은 것、향기를 쫓아 숲에 드는 꽃사슴이 되지 말 것이다。(항상 전전긍긍하게 귀신이 몰아친다면 해 볼 도리없는 것이다。어느 겨를에 여유를 가지고 배포 내밀어 볼 것인가? 풍마가 바람을 몰메 그 바람 속에 싸잡아 들었다면 같이 쫓길 수 밖에 더 있겠는 가? 괜히 보는 사람만 안타깝게 할 뿐인 것이다.) 귀신은 삶의 行 활동相이다。귀신은 시간적 운명 숙명이라했다。그 시간 운명을 때려잡을 묘책이 있다면 힘이 센 것이고、숙명이 이끄는 고삐에 코(곤드레)가 꿰듯이 한다면 어찌해 볼 도리 없는 것이다.힘이 있음 사람이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힘이 없음 시대가 사람을 소명하여씀) 料理하는 것이니 나라에 巨富됨도 힘의 偏이하 할 것이니 묘책이 있다면 財利를 긁어모으는데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 생각의 흐름탐 文脈의 흐름인 것이다. 일편에선 금전노라 손가락질 하는게 닥아서려한다. 釋氏가 무슨 석씨말씀이 아니라하는 것을 스스로의 말씀처럼 말씀하셨으리요。이는 되려 석씨相 아닌 쪽에서 自主張의 意識을 逆으로 高趣시키기 위하여 석씨가 한 말인냥 僞作해서 퍼뜨린 것인지도 모를일인 것이다。동반공존理相이 있음으로 인해서 自추종하는 理相도 영원성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이것이 흑색선전과 같아서 제 理相의 허물을 무고하게 他에게 전가시킨다 할런지 모르지만 그 여러수다한 말을 근거를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인 것이다。大乘이 석씨말이 아니면 大乘의 말씀을 석씨말씀이라 僞托한 절대작자類의 말씀일 것이니 그들의 목적은 反相을 거짓으로 세워서 자기네 사상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있음이라 하는 것이 나의 억측인 것이다. 어떠한 책략과 권모를 동원하던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얻는 것이 유방의 목적이니 眞假正邪가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니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 이기면 천하는 제것이 되고 싸움에 敗한 자는 포로가 되어 노복이 되는 것이 당연지사인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에게 부림받는 노복이 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힘있는 자의 힘의 우산을 이용하여 저마다들 안전을 도모코자 하는 것이 그 시키는대로 종사하는 使者들인 것이다. 힘도 없는 傲氣부림은 노복이 될 것이고 제 힘 약함을 수긍해 굽혀들어 안전을 획책하는 자들 또한 그 그릇된 생김대로 이용가치가 있다면 그대로 써먹을 것이니 역시 부림받는 입장에선 벗어나지 못한다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떠한 어려운 여건의 틈바구니에서라도 힘을 기른다면 언젠가는 휘어잡을 기회가 올 것이니 이것이 막연한 바램 같으나 용기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이니 와신상담하고 있으면 월왕 구천처럼 원을 풀어볼지 누가 알겠는가? 이 말씀이다. ※ 反相은 박포장기와 같은 것。무수한 함정을 만들어 놓고 겉보기엔 금새 이길것 같으나 막판 한 수에 제가 이기겠다는 것 아닌가? 反相似而非는 제 주장 의식을 고취 시키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 反相은 박포장기를 바꿔두는 것으로 유혹한다.막판 한승부에 제 實力을 자랑해 보이겠다는 것이다。승리의 답을 갖고 있는 자가 反相을 세운 것이라고 할 것이다. ○ 時相이란 무엇이냐? 生命이라는 것이다. 이 時相을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諸相이 있는 것이니 空相이 또한 그러하며 사람의 관점이 무얼로 보느냐에 따라 諸形容相이 있다는 것이다. 관점이 流觀念을 낳고 관념이 흘러 모든 모양을 그리는 것이니 흐르는 관념은 見解가 되고 立場이 되는것이니 저촉받는 感別에서 관찰이 나오고 관찰은 관점을 세우는 初入門인 것이니 관찰을 잘해야지만 여러 모양의 관념이 흐르게 되고 다양한 관념은 각양의 상(見解立場 등)을 짓게 되어 일편으로 치우친 主張으로 몰아가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균형을 가진 가늠자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가늠자가 재는 균형(눈금매김)을 잃게 되면 그 尺노릇을 못하게 되는 것이니 料量을 無方으로 새겨갖고 있어야 한다 할 것이다。그래야지만 낚시대줄 끝에 걸린 大魚가 요동치더라도 그 몸이 달려가지 않고 그 고기를 힘이 소모케 한 다음 나꿔챈다 할 것이다。大魚란 생각으로 크게 다스려야 할 거리(事件相)라는 것이다. ◎ 空間이 없이도 흐름(時)은 있다. 저기 봄철에 없던 포도가 가을께 탐스럽게 달려있는 것은 흐름에 의하여 생긴 하나의 物空成身相인 것이다。이것이 또한 흐름이 흐름을 공간에다 표시한 것인데도 공간이 없이도 흐름은 존재한다 할 것인가? 공간이 없이도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을 낳는 정신이란 것이다。정신의 흐름이 무애하나 곧은 바 없기때문에 여러 모양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여러 모양을 그린다는 것은 그 흐름이 말리는 現相을 일으킨다는 것이니 말리는 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은 곧게 뻗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말림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즉 斜視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斜視行의 누적은 모양(相)을 짓게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空化(成身)가 된다는 것이다。成身의 表出이 空間을 짓게 되는 것이니 그 空間을 짓는다는게 源泉의 他空間이것을 밀어 제키는 듯한 物相으로 나타나 보이게되는 것이니 저 포도알처럼 점점 자라서 성숙된 모습을 보이게 됨인 것이다. 어떠한 공간이 새로 설정된다해서 먼저 있던 공간과 심해서 전체의 공간이 커진것은 아니다.먼저 공간이 줄어들었는가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먼저있던 공간은 새 공간과 겹치는 현상을 일으켜 있기 때문 에 변함없는 空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 不變하는 空은 大小의 量이 없는 그릇인 것이다。그 그릇속에 여러 피고지는 모양들이 크거나 작거나를 환영처럼 지어 보이는 것이다。정신이 이미 짓는 모습은 공간의 모양을 본뜨고 있는 것이다。즉 짓는(作)다는 것은 모양을 말하는 것인데 모양이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고 어찌 알 수 있는가 이 말이다。그 짓는 모습이 점선면 또는 그 以前이나 그 아니라도 어떠한 空의 틈새없인 보여질수 없는 것인 것이다。微塵이나 電文을 가둬넣는 틀이 없인 象을 刻印시킬 수 없는 것이니 이런 것을 총칭하여 空間이라 하는 것이다。以上의 말 또한 생각이 한 쪽으로 치우쳐서 지은 모양이니 이렇게 지면이란 공간을 할애받아 보여주는 것이다。정신이 있어서 本能을 짓는 것이다。森羅가 정신이 있는 것이다。정신이 절대작자에 의한 것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一相으로 관통하겠다는 건 궁박한 所見·執着·一相이란 것에 얽매여 종(노복)되겠다는 것、그래서 의지처를 삼아 어긋나지 않을까하는 또 모든 공박거리의 엄습해옴의 불안한 심리를 위안받겠다는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마음 여린자의 생각일 뿐인 것이다。그러면 정신의 本體는 뭣인가? 귀신인가? 一相은 아니라했으니 多相인가? 그것은 數相으로 계산할 성질이 아닌것이니 數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며 相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며 絶相으로 論할 것도 아니며 一切의 見解나 指稱으로 感別할게 아닌 것이니 自主張에 유리할대로 세운 기둥역할을 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또 그 아니라도 줏대(有無)를 세우(有無)는게 目的(有無)이 아닌(有無)바(有無)에야(有無) 무슨(有無)상관(有無)있으랴?(有無) ○ 그것이 진리인가하고 캐고보면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저것이 진리인가 하고 캐고보면 저것이 또한 아니니 徒是 流念의 희롱 작난일 뿐이로다. |